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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창업 아이디어링 : 먹는장사로 성공하는 열두가지 전략 1

by 리치캣 2021.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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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장사로 성공하는 열두가지 전략


        1. '달호'라고 불리운 남자
    뿌린 만큼 거두는 먹는 장사
  '먹는 장사.' 여러분들은 이 단어만 들어도 왠지 천박하거나 쉬워 보이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식당집 아저씨'란 단어 역시 그리 고상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 '밥장사.' 이건 더더욱 안 
좋은 냄새가 난다. 이러한 느낌이 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의 의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졸업을 
하자마자 식당을 한다고 나서면 그 집 식구들은 물론 주위의 친지까지 다들 한마디 하고 나설 
것이다. "그래 기껏 대학공부 시켜놨더니 겨우 식당이냐?" 혹은 "세월이 아깝지도 않냐?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냐고?" 무리하게 추측하지 않아도, 아마 이 정도의 반발은 능히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나 대학 나온 사람들이 다 넥타이 메고 다 컴퓨터 앞에 앉으려 들면, 그 인텔리 직장인 
점심은 누가 만들며, 오랜만에 애인과 데이트 길에 나설 때, 멋진 레스토랑의 근사한 식사는 누가 
다 준비하랴? 요즘 세상에 대학 나온 사람 다 빼고, 집안 좋은 사람 다 빼고, 잘난 사람 다 빼면 
남는 게 사람이랴?
  정말 우스운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대학을 예비직장으로 알고 달려가는 젊은이들도 문제지만 대학을 못 가면 인간대접 받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걷잡을 수 없는 피해의식이 더 큰 병이다.
  지난 시절 우리 사회는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사무실 책상 하나 내주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며 앞으로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나온 사람은 
고상한(그리 고상할 것도 없지만) 직장엘 가야 한다는 이 논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좋은 사업
  먹는 장사는 참으로 고귀하고 순수하며 사명감 있는 사업임에 틀림없다. 맹물로 가는 차 
없듯이, 기름 없이 가는 차는 상상할 수 없듯이, 밥 못 먹는 사람이 숨쉴 수 있는가?
  먹는 장사는 곧 생명을 보장해주는 고귀하고도 사명감 있는 사업임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순순하고 정의감 있는 사업이 도 어디 있단 말인가? 본인이 이 장사를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정말 좋은 사업이다.
    먹는 장사를 하자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고 내 집으로 손님을 모셔 그 음식을 대접하고, 또 그 손님들은 나의 
노고를 약정된 돈으로 지불하고, 난 그 돈으로 그 다음날을 준ㅂ하고... 얼마나 정겨운 내용인가? 
나는 감히 외치고 싶다.
  젊은이들이여! 먹는 장사를 하자. 그 젊음, 그 기지, 그 참신한 지혜를 가지고 내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즐거움을 나눠주고, 내 노동의 대가가 늘어남을 기뻐하는 도시의 농부가 되자, 
농부들은 말한다. 땅은 정직하다고, 심은 만큼 돌려준다고. 도시의 농부들도 말한다. 음식은 
정직하다고, 땀흘리고 신경쓴 만큼 되돌려준다고....
  먹는 장사는 자기가 가진 지혜를 쏟아 부음으로 해서 그 결과가 놀라우리 만큼 정확하게 
표현되고 그 대가는 엄청난 보답을 한다. 물론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찾는 보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업처럼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능력을 과시하기 좋은 직업은 그리 흔치 않다. 
음식업은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고 아우성칠 필요도 없으며 음모와 계략으로 빠른 성장을 도모할 
이유도 없다. 물론 모든 직장인이나 다른 사업을 진행하는 이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원한다. 도시의 잘생기고 예의바르고 총명한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참신한 아이템을 
가지고 우리의 거리를 화려하게 꾸며줄 날을... 기묘하고 멋진 가게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 있어 
어느 식당을 가도 색다른 분위기와 음식이 기다려준다고 상상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마음의 축복을 보낸다.
    꿈 이야기
  나에겐 꿈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크기에 차이는 없겠지만 꿈은 있게 마련이다. 그 꿈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주 
모양을 바꾸지만, 간혹 처음의 꿈이 그대로 간직되는 경우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나의 어릴 적 꿈은 가수
  나의 경우 역시 어릴 적 꿈과 지금의 꿈은 변해 있지만, 그것은 나의 마음이 변질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한 모양 바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나의 어릴 적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공부를 딱 싫어하던 나는 유독 노래부르기를 좋아했고 춤추기를 즐겼다. 내 초등학교 시절엔 
남진, 나훈아, 하춘화, 문주란 등의 가수들이 유명했으며, 특히 남진과 나훈아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 나훈아가 쇼를 하면 며칠 후엔 건너편 극장에서 남진 리사이틀이 열리곤 했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는 쇼를 구경할 돈이 모자라면 어떻게 돈을 모을까 하는 궁리에 젖어 며칠을 
고민하곤 했다. 궁리 끝에 방법이 나오지 않을 땐 극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빠방'이라는 방법이었다.
    똥통을 통해 몰래 보는 쇼
  '빠방'이라는 말은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들어가는 행위를 일컫는 일종의 은어였다. 그 '빠방'의 
방법은 목표로한 극장의 건물구조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특히 그때의 극장 화장실은 
지금처럼 수세식이 아니고 긴 막대기 끝에 군대에서 쓰던 철모나 깡통 등을 매달아서 그걸로 
똥을 푸는 재래식이었기에 똥을 저장하는 탱크로 들어가 똥누는 변기 위로 빠져나오는(물론 
겨울이 아니면 이 방법은 불가능했다. 똥 속에 잠수는 못하니까) 방법에서부터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사정해서 그 어른의 손을 잡고 마치 아들인 양 시침떼고 들어가는 방법(이 
방법은 얼마 후엔 얼굴이 알려져서 거의 불가능했음), 또는 1미터 조금 넘는 기도석(표 받는 곳) 
밑으로 바짝 붙어 기어가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극장에 들어갔다가  들키는 날은 이마에 빨간 페인트로 '빠방'이라고  쓰고 온종
일 
극장 청소를 했으며 동네어른들이 그걸 보고 부모님께 이르는 날은 그야말로 '눈물로 이 
밤을'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마에 찍힌 주홍글씨를 지우던 노력은 지금도 새삼 지겨움으로 남는다.
  여하튼 그러한 쇼를 보고 오는 날이면 끼니도 미룬 채 거울 앞에 서서 그날 눈여겨봐 두었던 
가수의 제스처를 흉내내며 열심히 그 가수의 노래를 불러보곤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 소풍 때면 으레 단골가수가 되곤 했다.
    대성황을 이룬 보컬그룹 worlds
  그러다가 그러한 열망은 드디어 말썽 많이 부리던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음악에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worlds라는 보컬그룹을 만들게 했다. 그 첫 번째 공연은 그 당시 청소년회관 2층에서 
'불우이웃돕기'라는 제명 아래 음악 발표회를 했고., 2회는 대전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3회는 
지금은 없어진 대전 대흥동 자유극장에서 열렸었는데 그때(76∼77년)만 해도 학생들의 
휴식문화가 전무한 상태에다 보컬그룹이라는 생소함까지 겹쳐 매회 마다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일례로 그때 마침 대전역 앞 아카데미극장에선 하춘화 쇼가 있었고, 자유극장에서는 worlds의 
세 번째 공연이 있었는데 하춘화쇼를 하는 아카데미극장은 반쯤 객석이 차있었고 자유극장 앞은 
채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도로에 밀려 급기야는 몇 명의 교통순경까지 동원되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3회 공연 때는 무대에 올라보니 준비해놓은 마이크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들이 아침조회 때 
쓰는 'ㄱ자형' 약장수 마이크였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시간은 이미 약속한 시간에서 무려 30분 
이상이 지나 더 어찌해 볼 겨를이 없었다. 한두 곡이 끝날 즘 안 들린다고 아우성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대여섯 곡이 나갈 무렵엔 뒷부분의 관객들이 앞으로 나오려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깔리고 밀리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는 불상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음만 나오는 추억으로 남는다. 여하튼 그러한 성원에도 불구하고 
worlds는 그 3회 공연을 끝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는데, 그때는 젊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했던 대인지라 공연장소를 빌리는 것을 시작으로 연습장비, 연습장소, 연습기간 동안 의 
경비, 부모님들의 무차별한 만류 등등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다. 
    닭서리
  언제인지는 뚜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연습도중 하도 허기가 져서 동네에 밤잠 안 나고 노니는 
닭을 느닷없이 발로 걷어차 실신시킨 다음 끓는 물에 펄펄 끓여 소금도 없이 여러놈이 달라붙어 
뼈만 남겼다. 먹고 난 뼈는 증거인멸을 해서 진놈이 모래를 묻혀 싹싹 닦아 기름기를 없앴다. 
오랜만의 포만감을 즐기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던 우리는 벼락치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었다. 
  그리고는 모두 끌려갔다. 파출소로...
  아니라고, 모른다고 도리질하던 우리들은 수채망에 걸려 잇던 닭털이라며 득의 만만해 하는 
뒷집 여자에게 결국 거금 2만원을 바치고, 각서 쓰고 풀려났다. 그때 돈 2만원이면, 닭 20마리는 
살 수 잇는 값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비싼 닭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79년 가을, 대전 최초로 고고 클럽이 탄생했다. '사모니'라는 이름의 그 
클럽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그 당시 중앙관광호텔 6층 미드나이트, 9층 킹돔나이트클럽, 
유성관광호텔 속리산관광호텔, 청주,부산의 몇몇 클럽 등등에서 2년여 동안 음악활동을 하다가 
입영통지를 받고 군에 입대하게 됐다.
  그때는 별로 이름이 없었지만 지금은 독자들도 알만한 연예인들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밤무대의 크고 작은 이야기 등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그 이야기를 다 하기엔 이 
책의 정해진 지면이 허락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필자가 글을 쓰게 된 취지에 혼선이 올 것 같아 
그냥 지나침이 못내 아쉽다.
    군발이 달호
  군에 입대하던 날은 날씨마저 썰렁하여  무척이나 울적했다. 집결지인 충무체육관이 꼭 도살장 
같았다. 박박 밀은 머리가 늦가을 바람에 시려웠는지 아님 어색했는지 모두들 방울 달린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유독 나만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그들 속에 서성거렸다. 아는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애꿎은 담배들만 죽이고 있었다.
  지금은 유명한 개그맨이 된 최병서가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따라 권했다. 그는 나의 학교 
후배이자 절친한 후배였다. 그런 관계로 그와는 많은 기억들이 있는데, 그 중 몇가지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이 나곤 한다.
  워낙 붙임성이 좋고 쾌활했던 그는 어쩌면 유명 개그맨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확실치는 
않지만 학창시절 응원단장이던 내 뒤를 그가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내가 외제옷 장사를 하던 백화점 가게에서 개그맨 콘테스트를 대비해 
연습을 했고., 나는 대화장인 서울로 쫓아가 응원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절친했던 그와 지금은 연락도 없이 지낼뿐더러 수년 전 우연히 서울 풍전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달갑지 않은 얼굴로 서로 어색한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우리가 그렇게 
된 이유에서 나는 최병서의 괜찮은 인간미를 보았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가게를 찾아온 병서는 심각한 얼굴로 "태호형이 죽었대." 했다.
  그러자 나는 "태호가 죽다니? 아니 무슨 일로?" 하니 "아니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태호형 
나이가 몇인데." 하며 벌컥 화를 내자 나도 화가 나서 "야 임마, 나도 친구니까 그렇지. 그럼 
뭐라고 하는 건데 00야!" 하자 어이없다는 듯 입벌리고 쳐다보다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 후론 
그가 날 찾지 않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동명이인이었다. 지금까지도 병서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이 글보고 풀었음 싶다. 여하튼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들은 아버지 회사의 부도소식
나는 광주에 있는 상무대 욱군포병학교의 조교로 근무하게 됐는데 그럭저럭 사연 많은 군생활에 
익숙해지던 일병시절부터 들랴오는 집안소식이 심상치가 않았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있음이 
느껴졌다. 군 입대 전까진 그래도 대전에선 내노라 하던 부잣집이었기에 구태여 세상물정에 대해 
그리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나는 점점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군에 입대할 
당시만 해도 군 입대를 모면할 방편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 멋대로 누구의 제약 없이 
살아온 나날에 변화를 원했으며 내 인내의 한계를 느껴보고 싶었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게 멋있는 제목으로 사서 고생하러 왔는데 이거 
잘못되면 제대 후엔 평생 고생하게 될 판이니 어찌 고민되지 않겠는가!
  드디어 상병 달고 군생활이 저물어갈 즈음에는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오류동 공장부지에 
방을 여러 칸 들어 월세를 받아 생활하게 됐고, 여유롭지 않을 생활을 돕고자 어머님이 방앗간을 
하시게 됐다는 동생의 얘기를 듣고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날 밤 유난히 달이 밝던 부대의 정문초소에서 보초를 서며 지난날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지지리도 공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그래도 자식이라고 아버지께선 우리 학교에 유일하게 
가죽부추를 ㅁ추어주셨고 학교에 피아노까지 들여놓으시며 육성회장을 맡아주셨지. 선생님들도 
지지리도 공부 못하고 말썽만 피우는 놈을 아버지 얼굴 하나 보고 억지 칭찬을 해주셨다.
 '아!, 난 왜 이리도 못난 놈인가!'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 꼬시는 데는 천재
  어릴 적부터 난 유난히 욕심이 많았다. 나에겐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사촌형제들이 몇 명 있었
다. 집안 경사 때 가끔 그들과 만나면  슬슬 날 피했다. 워낙 욕심이 많고 사나운지라  같이 무슨 
일을 도모해서 득될 게 없으리란 판단들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나의 유혹에 
빠졌고, 또 그 결과는 그들이 염려하던 대로 돼버리곤 했다.
  나의 그 많은 만행들을 다 열거하려면 이 책은 5편가지 이어져야 한다. 어머님이 그러셨다. "조
선천지에 너 같은 놈 또 어디 있으랴." 대여설 살 때엔  하도 자주 없어져 내 옷마다  주소와 전
화번호를 적어서 꿰매놓으셨단다. 길에서 놀다가 조금만 이상한 차가  나타나면 죽어라 달려갔다. 
한참을 뛰다보면 어디로 왔는지도 모르겠고 결국은 파출소에서 순경님들 자장면이나 축내고 곤봉 
휘두르며 놀다가 유리창이나 깨고, 아니면 낯모르는 집  안방에서 8자로 잠들었다는 연락을 받고 
온 어머님이 집으로 나르곤 했다. 별일 없는 날은 자기 키보다 더 큰 개를 끌고 와서는 누가 
줬다
고 박박 우기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개를 좋아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한 만행은 중고등학교시절에도 이어져 숱한 싸움과  사건 속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내
가 없는 늦은 시각에 전화가 울리면 어머니는 말부터 더듬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맞은 놈 돈 물
어줘 파출소로, 경찰서로 치고 달리고...
    회고의 눈물을 흘리며
  언젠가는 간첨으로까지 몰려 우리 집보다 더  큰 방첩부대차가 오질 않나(나중에  알고 보니 
모 여학생의 부탁으로 써준 웅변원고가 잘못 이해되어 생긴 소동이었음), 내 시계 내놓으라고 
여학생이 집에 찾아오질 않나, 학교에서는 퇴학시킨다고 연락 오고, 학교 가서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돌아오면, 내일 놓을 어머니 겟돈을 들고 도망갔다.
  돌이켜보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남으셨나 싶다.  음악생활 할 때도 노래가 잘 안
되면 다음 스테이지고 뭐고 간에 그냥 내려와 돌아다니다가 무대로 돌아가면 경음 악연주로 시간
을 때우던 동료들이 펄펄 뛴다.
  다시 무대에 올라 한두 곡 불러봐도 시원치 않으면 막공갈팝송 부르고 욕도 했다.(물론 음악이 
시끄러운 때에만), 그런 줄도 모르고 손님들은 즐겁게 춤추고  오예오예 어쩌구 난리통이다. 그래 
그래, 다 좋은데 이젠 워쩐다냐. 뭐해서 먹고 살지?
  보초근무를 끝내고 막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걸으며, 지난날 기억들을 더듬던  나는 땀내 절은 
작업복에서 M-16소총을 맹 스물두 살, 살아갈 날이 한참 남은 젊은 머슴아로 되돌아왔다.
    이젠 워쩐다냐?
  그날 밤 종일 근무 속에 여느날 같으면 머리를 바닥에 대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졌을 시간인데도 
눈이 말똥말똥, 머릿속엔 별의별 것들이 다 날아다니고  귀에서는 천둥, 벼락, 세상을 프라이팬에 
지지고 볶는 소리로 인해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았다.
  징그럽게도 일어나기 싫은 아침, 그래도 제목은 희망찬 새아침, 찌그러진 세숫대야를 들고 우물
장에 내려가다 보니 아직도 아침의 서운한 눈곱들의 방해로 사람이 이중삼중 제멋 대로다.
  그대로 나의 모든 만행들을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묵묵히 감수했던 그들, 내가 생각해도 징그
러운 나를 아들이라고, 형이라고, 마냥 용서로 일관한 나의 식구들... 그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그
들이 어려움 속에 빠진 거다. 이젠 내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래 나도 뭔가 보여줘야 된다. 나
라고 하구한 날 나쁜 짓만  일삼는, 자기인생 들기기에 급급한 그런  놈팡이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지금의 어려움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건가. 불행히도 그때까지 내가 지니고 있던 나의 희망사항들은 돈과는 거
리가 멀었다.
  나의 꿈은 전세계를 떠돌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막연하나마 팜송도 열심
히 연습했고(생활비가 어려울 땐 거리에서 동냥하려고), 어떠한 고생도 감수하리라는 각오도 대져
보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외국을 나간다는 것은 거의 꿈에 불과 했으며 지금처럼  서울과 부산을 오가듯 
아주 손쉽게 외국 구경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예상을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기억이 없을 
때였는데 무슨 배짱으로 내가 외국을 떠돌다가 죽도록 이 땅이 그리울 때  다시 돌아온다며 마치 
내일 떠날 인간처럼 설쳐댔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어렵다. 
  여하튼 이제는 그런 희망들은 상하지 않게만 잘 보관해 두었다가 좋은 시절  만나면 그때나 풀
어볼 일이다.
    밤새 생각해둔 세 가지 장사
  지하 2백 미터에서 올라온다는 차디찬 얼음장 물로 세수를 마치자 그제야 겨우 세상이 눈에 들
어왔다.  
  아침식사는 고춧가루 한점 없는 허연 무국에 수저를 다그며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제
대 후 시도해볼 만한 돈벌이... 지난밤 내내 생각해 둔 세 가지 장사가 떠올랐다.
  첫째, 외재옷 장사다. 그 당시 외제옷은 거의가 '물자'라는 이름의 중고품이었다. 아마도 6 25전
쟁 이후부터 들어오던 미국의 구호물자를 일컫는 말인  듯싶었다. 그 시절 멋쟁이들 사이에는 대
단히 인기가 있었다.
  둘째, 일반 사람들의 심리가 자기는  안 먹고 안 입어도 자기새끼(?)한테는  아끼지 ㅇ낳는다는 
점에 착안, 그 당시의 일반적인  수준보다 제품의 질을 높이고,  이쁜 제픔만을 골라서 판매하고, 
대신 가격은 조금 더 비싸게 받는다. 타이틀은 '아가방'이라고 해서 시작해보기로 하였다(물론 가
게의 인테리어도 제품에 걸맞는 고급스런 치장을 한다는 설정하에).
  셋째, 분식집이다. 지금이야 이쁘고 깔끔한 분식집이 많이 생겨났지만 그 당시만 해도 포장마차
나 기껏해야 서너 평짜리 크기에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고, 막책상  몇 개 좋은 집뿐이었기에 
싸고 맛있는 군것질 종류를 레스토랑 같이 깔끔하고 그럴듯한 가게에서 판매한다면 분식 
이용고객
의 80∼90퍼센트가 젊은 층이므로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 중에 일단 위의 세 가지 방향을 잡고나니 조금은 머리가 가라앉았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일기장에 꼼꼼히 적어놓았는데, 내가  선택한 세 가지 장사에 대한 공통점
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는 지극히 대중적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자본금이 많이  필요치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내 처지를 감안했던 것 같다.
  나는 실패해서 안되는 상황이었기에 지극히 대중적인 바탕 위에 신선한 아이템을 접목시킴으
로해서 대중의 반복횟수가 잦은 장사를 해야 한다는 기본틀을 바탕으로 나온 생각들이었다.
  불과 하룻밤의 설계로 진로결정을 한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지만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거대한 역사도 그 결정은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자 낙천적인 내 마음은 벌써 
동료들과의 쑥덕공론에 가 있었다.
    선수용 빼앗긴 아가방

  며칠 후 대대에서는 안전웅변대회가 있었고 나는  일 등을 해 일주일 포상휴가를  얻어 대전에 
갔다. 전에 한없이 쏘다니던 시내거리, 뚜렷한 할 일 없이 같은 거리를 몇 번 걸어도 지겹지 않은 
이 거리,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구경거리,  어쩌면 저리 한결같이 생긴 게  제각각일까? 전에는 
저쪽 모퉁이에 저런 옷가게가 없었는데,  맞아 그전에는 그곳에 레코드점과 안경점이  있었고, 그 
앞 버스정류장엔 시내 분위기에 취한, 아니 젊음의 마술에 걸린 가시나랑 머슴애들이 레코드점에
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발바닥 장단을 맞추다가 누가 쳐다보는 듯한 기미가 보이면 누굴 기다리기
라도 하는 것처럼 괜한 시계만 쳐다보곤 했지.
  실은 나도 그 버스정류장에 서 있길 즐겼는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사랑과 평화의 '장미
'
라도 나오면 괜히 행복해지곤 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여유롭게 시내를 거닐던 나는 갑자기 넋
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동양백화점 뒤편에서 글씨 하나 안  틀린 '아가방' 이라는 간판과  함께 핑크빛으로 꾸민 이쁜 

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세상은 나만 

똑한 게 아니야. 아니 세상은 조금 주춤거리면 모든 걸 다 뺏기게 되어 있어.
  집에 돌아와 나는 노트에서 '아가방'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이렇게 썼다. '꽥'.
    새로운 시작

  군에 오기 전 새로운 세상을 느껴보자며 씩씩하게 밀고 들어왔던 국방색 철문...
  참으로 기고만장한 군대생활을 어찌 글로 다하랴.  이쁜이 소리를 들었던 쫄병시절,  이래도 웃
고 저래도 웃던 이쁜이 일병시절, 웅변대회로, 군가경연대회로,  나 자신의 대견함에 흐뭇했던 나
날들, 터무니없는 군의 생리에 몸으로 부딪혀 몸부림쳤던 고통의 나날들...
  갈 수 없어 안타까웠던 저 바깥 세상의 요란한 굉음들,  힘든 작업 끝에 벌컥벌컥 들이켰던 꿀
맛 같은 막걸리와 두부김치, 세상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던 반합 속의  군대라면, 죽어라고 꼴찌만 
걸리던 휴식시간의 사다리... 자 이제 모두 안녕이다. 수염 깎는 동물들의 아름다운 시간들...
  나는 두 ㅍ이 겨우 됨 직한 코딱지 만한 방에 두발을  곧추어 괴고 구석에 몸을 처박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비치는 희망과 욕망의 햇살이 자꾸만 낯설어 그 빛을 피해 온방을 한바퀴 돌고 나면 
하루가 지나곤 했다. 그런 나날이 제법 지난 후에야 나는 어쨌든 움직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의 첫 번째 사업은 전자에 언급한 생각 중에서 가장 투자금액이 적은 외제옷 장사였다. 지금
은 대전백화점이 있는 대전천변에 그 당시 신도백화점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그 백화점의 운영
상태가 좋지 않던 관계로 아주 적은 돈으로 이층에 가설점로 두 평 정도를 빌려 장사를 시작하게 
됐는데 장사가 신통치는 않았지만 워낙 알뜰히 생활한 덕에 조금씩  조금씩 창업자금 50만원을 
갚아나가고 있었다.
    낮에는 행상으로, 밤에는 밤무대 가수로
  한두 달은 그럭저럭 되던 장사가 같이 시작한 옆  점포(8개의 외제옷 점포가 동시에 시작했음)
의 젊은 친구들이 물건을 팔면 그 돈을 모아 다시 물건을 채워놓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노름당
구와 술로 탕진하고 장사가 안된다며 한두 명씩 빠져나가  구경오던 손남들도 점점 줄어들어 드
디어는 팔다 남은 옷들을 챙겨들고 길거리로 나가 행상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훗날 나의 사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그 
경험이란 어떠한 일을 시작할 땐 그 당시의 정황도 중요하지만 일이 진행되면서 예견되는 주위의 
변화까지도 보아야 하며, 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그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 등을 
면밀히 검토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한적한 땅에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멋진 레스토
랑을 지었다 하자.
  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손님이 올 때쯤에 그 레스토랑 옆의 공터에 누런  양철로 조립식 단층건
물이 들어서더니, 커다란 간판에 빨간 글씨로 '한국정육백화점',  또는 '탕전문' 이렇게  씌어졌다
면 
그건 보통일이 아니다).
  추운 겨울날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행상을 하고 있자니 날 아는 옛  친구나 선후배들은 옛날엔 
잘 나가더니 폭삭했구나 하는 축도 있었지만 남부럽지 않던 애가 저렇게 열심히 노력한다고 대견
해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평가는 남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이므로,  난 아무 신경도 
가지 않았다. 오로지 돈, 돈을 벌어야 했다. 물론 집이 망했다고 끼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집안을 키우고 자신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막연히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불쌍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은가? 하는 압박감뿐이었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지당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널린 그 많은 돈들은  이제 막 사회의 문턱을 들어서는 
스물네 살 풋내기 장사꾼을 거들떠보질 않았다.
  생활은 그렇듯 고생스러웠지만, 어렵고 힘들수록 마음을 오기로 다독였고,  입고 다니는 옷이나 
언행은 전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반듯하게 하고자  노력했으며 조금도 현실의 고충을 남에게 피
력하지 않았다. 난 밤마다 뻣뻣하고 후끈히 얼굴과 튼 입술로 고통받곤 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난 
그나마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첫 번째 장사의 실패

  언젠가는 하루는 "한 장에 오백 원" 하고 한참 흔드는데 무엇인가 잡아끄는 느낌이 왔다. 길건
너 우체통 옆에 검정투피스를 입고  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웬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입대 
전 몇 번 만난 적이 있던 그 여자는 불에 덴  듯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
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모모씨, 옷 하나 팔아줘"라고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물론 그 여자는 황황히 그 자리를 피해버렸지만...  결국 나의 첫 
번째 장사는 실패작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낮에는 행상으로, 밤에는 밤무대 가수로, 열심히 노력해봤지만 이 일들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속에서 다시 시도한 보컬음악 일 년, 단종주택사업 일년, 그리고  일 년간의 허송세
월...
  나는 서서히 지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이래선  안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었다. 지난날을 더듬으며 나의 문제점을 찾으려 여러 날을 고민했다. 내가  찾은 자신의 문제점 
중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나는 사회경험도 부족하고, 장사자본도 여유롭지 않은 상태여서 나무 
조급하게 일을 추진했고, 나무 성급하게 실패를 자인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자꾸만 나약해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새로운 투지와 차분하고도 침착한 안정
감을 불어넣을 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새로운 투지로, 새로운  희망으로 새출발을 
하고 
싶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결혼'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놀라운 발
견이었다. 이 어려운 때 결혼이라니...
  그러나 나는 그 글자가 지닌 매력에 며칠을 빠져 있었다. 무언가 구심점을 찾지 않고서는 나를 
어떠한 열정에 몰아넣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여자, 나를 격려하고 위로할 줄 아는 여자, 내 지친 영혼을 흔들
오 일깨워줄 여자, 내가 그 가슴에 안주해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가슴이 무지 큰 여자, 여자, 여
자...                                                                                       
    달호의 공수표                                                                          
  지하도를 걷고 있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김종무라는 절친한 친구와 함께 젊음이  넘치는 거리로 나
가 하릴없이 걷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수많은 눈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쇼윈도로, 이쁜 여자 궁둥이로, 쭈그리고 엎드린 나이 먹은 거지 
들으로, 그때 한 여자를 보았다.
  무엇이 그리 그녀를 즐겁게 했는지 옆에 같이 걷는 친구 귀에 비밀스레  소곤거리며 깔깔 웃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 무엇인지 움찔했다. "아가씨 잠깐만요, 바쁘십니까?" 여자를 어찌해 보는데는 
일가견이 있다는 주위의 평도 있고 해서 서슴없이 말을 건넸다. 
  그러자 별로 바빠 보이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특유의 끈질김으로 
밀어붙인 결과, 이윽고 약속시간과 장소를 받아내었다.
  드디어 약속한 날,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근사한 옷을 입고 약속장소인 '로즈가든'으로 나
갔다. 기다리길 한 시간, 기도하며 한 시간, 오기로 버틴 한 시간,  도합 3시간을 기다리다 밀걸레
로 발까지 툭툭 밀며 노골적으로 눈치주는 웨이터와 급기야는 한바탕하고 그 장소를 떴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요                             
  그 후로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대전의 유명한  목척교 위에 있던 '한미외국어학원'이었다(나는 

때 외국에 나가 음악생활을 해보리라는 막연한 꿈을 갖고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일
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일어를 가르치는 선생 눈에 영락없는 악마가 되어버렸다. 그러
나 줄기찬 시도에도 반응이 없었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얼굴에 하필이면 그때 파마를 한 것은 그
야말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영락없는 건달같이 보이더란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없는 돈에 옷도(특히 점잖아  보이는 양복) 많이 사 입었다.  어떻게 해서든 
뜻을 이루어야겠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비도 조금 오고 기분도 별로 좋지 않던 어느날, 나
는 벼락을 맞고 말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음악을 하러 떠났다.
  그녀가 두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한 말은 "나  정말 그대가 딱 싫어요." (그 소리 듣고도  또 옷 
사면 정신병자지) 나는 그날 부로 그녀의  상대역을 포기해야 했다. 막상 포기를 마음먹으니 
마음이 허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온갖 것이 다  거슬리고 짜증만났다. 나는 그런 나날이 너
무 싫어 마음을 다잡을 심산으로 팀을 만들어 경북 점촌이라는 시골도시로 음악을 하러 갔다.
  그곳에서 제일 크다는 나이트클럽에서 음악을 하게 됐는데 우리가 일하기 한 달  전에 그 당시
는 유명세가 대단했던 '신중현과 뮤직파워'가 두 달 동안 일하다 갔단다.
  점촌에서 제일 큰 업소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유명한 양반들이 이런 시골을 어찌 왔는가 
싶었다. 두 달 동안 시골에  묻혀 낮에는 산과 들로 유랑을 하고  밤이면 음악 속에 
빠져들다보니 
차츰차츰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와의 기억이 지나간 시간이라고 생각할 
즈음
에 예비군훈련이 있어 집엘 가게 됐다. 대전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에 쫓겨 서둘러 

복을 걸치고 군화를 신는데 안방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군화를 풀기 귀찮아 무릎발로 안방
엘 들어갔다.
  "여보세요?" 여자였다. 나는 버릇대로 "누구냐?" 하고  응답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짜증스
레 다시 물었다. "누구냐구?" 그때 들려오는 저편의 목소리는 바로 그녀였다. "저예요, 기억하시겠
어요?"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네? 시간요? 아, 있구 말수요.  시간이 남아돕니다." 이말이 
내 발에 족쇄 채우는 소리란 걸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안방을  같이 쓰는 
여자를 나는 이렇게 만났다. 객지로 떠돌던 내기 그 시간에 전화를 받게 된  것도, 죽어라고 빠지
던 예비군훈련을 받으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녀와 평생 붙어 살라는 운명의 통지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몇 번 해본적이 있다.
    결혼, 그리고 끔찍한 가난
  결혼식을 하고 나는 집에서 TV만 보았다. 신혼생활이 시작됐지만 나의 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겨우겨우 끼니만 이으며 둘이 껴안고만 살았다. 친정집과  처갓집 두 군데 모두 여유롭지 않았
고 주위에는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이 없었기에 우리는 가난함을 젊다는 이유  하나로 견딜 만하
게 생각하고 지냈다.
  급기야는 총각시절에 유일한 취미로  모아두었던 카메라를 하나씩  하나씩 팔아먹고, 전당포에 
잡혀도 먹었다. 카메라 하나 팔아 외식하고, 카메라 하나  팔아 싸도 사고 영화도 보고... 여러 날
을 김치 하나에 물말은 밥을  먹기도 하고, 입덧하는 아내는 돼지저금통을  깨도 칼국수 값이  
안 
나온다고 절망도 하고... 우리는 결국 우리 먹는 건 고사하고 미키와 석키의 식량까지도 걱정해야 
할 상황까지 도달했다(미키와 석키는 장모님에게 타낸 결혼예물값으로 산 도벨만 강아지 한 쌍으
로, 우리 이름이 석우, 미문이었기에 암놈은 미키, 수놈은 석키라 이름지었다. 그때 장모님과 부모
님을 속이기 위해 시장에 나가 산  5백 원짜리 반지는 지금도 예물로  잘 지니고 있다. 부모님과 
장모님께 이 책을 빌어 잘못을 고백하오니 용서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대전 가장동에 4백만 원짜리 전세를 들었는데,  벽에다 못 하나 박아도 주인이 
쫓아오고, 강아지 정원에 똥싼다고 혼나고,  집 앞 청소 안한다고  혼났다. 정말 지금이니까 
겁없이 
얘기하지만 더럽고 치사하다 야.
    걱정 마라, 걱정마
  여하튼 그렇게 일 년 또 허송세월을 보내다 대책 없이 첫애를 덜컥 낳고 말았다.
  상황이야 어쨌든 애기는 엄청 이뻤다(자기새끼 안 이쁜놈 없다). 애기를 낳고 나니 이젠  좀 겁
이 났다. 물론 낳기 전에도 마누라에게 "걱정 마라 걱정 마. 이 강석우 어떠하든 너 하나 호강 못 
시키냐? 지금 이 고생 지나면, 다 애틋한 추억이 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지내
야 해" 하고 말로는 강철수 만화의 김달호처럼  공수표 팡팡 썼지만, 내심 화장실에 앉아 꽁초를 
태우며 '이러다가 정말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가끔 들르셔서 맘에 차지  않는 일자리도 던져 놓으시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작은 
구멍가게라도 하나 하든지 아니면 막일자리 취직이라도  하라고 닦달하셨지만, 나는 인생을 함부
로 시작해서는 안되며 처음 시작은 나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궤변만  늘어놓고는 또 
하루를 물말아 먹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김달호 같은 인물과 무에 틀리랴 자책도 들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어차피 세상, 똑같은 생김새로 울며 태어나, 같은 시간, 같
은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남보다 다 많이 유쾌하고, 보람 있고, 신나는 세상을 살다 가야 되지 않
은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결론에 도달하는 미로를 찾기 위해 많은 밤을 지새곤 했다.
    드디어
  미로에 접근하는 작은 동아줄 하나를 발견했다.  근년 동안 우리 가족의 가장 믿음직한 재산이
었던 서대전 땅(지금은 센트리아 오피스텔이 웅장하게 서 있음)을 팔게 되었다. 아버님과 상의 끝
에 땅을 팔아 우리를 목조르던 부채를  정리(월마다 나가는 이자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
음)하고 부모님은 위헙부담이 작은 여관을 전세로  얻어 운영하기로 했고, 나에게도 작은  가게를 
얻을 수 있는 자금을 융통해주기로 했다.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자, 이제 시작이야... 비록  적은 자금이었지만 나는 이유 없이 자신감이 
가져다주는 흥분을 즐겼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흥분감에  잠을 설치고 날이 밝자마자 몸을 단정
하고 여느 날처럼 양말에 세 개비의 담배를  꽂은 채 시내로 향했다(그 무렵  담배에 세 개비의 
담배를 꽂은 채 시내로 향했다 (그 무렵 담배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나갈 땐 세 개비씩을 양말
에 꽂고 다녔다. 물론 그 세 개비의 담배는 담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만 불가불 사용했다. 그
러나 대부분 그 담배들은 그냥 남긴 채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담배만
큼은 인심이 후한 덕분이었다).
  그러고는 마냥 걸었다. 걸으며 생각했다. 무얼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무조건 이
유 없이 성공해야 ㅎ나다. 오늘날 이 성공이 내가 긴 날을 꿈꿔왔던 멋진 내 인생의 교두보가 될 
것이기에 어떻게 하든 성공해야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성공을 공언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네들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느끼려 했고, 극성은 이내 나에게 최면
을 걸어 성공을 각오하게 만들었다. 남들을 위해 성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네들에게 실
없는 사람이나 허황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 되겠기에 더욱 나를 추스리고 몰두하
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다 좋은 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또 그 개인마다 
환경이나 경험이 판이한 까닭에 오해도 많이 받고 의심의 눈길도 느꼈으며 가벼운 사람처럼 보여
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좋은 프로젝트나 음흉한 사기는 종이 한 장 차이기 때문이다. 본래 사기라는 것은 유
혹적이어야 성립되고 그럴듯하고 당연해보여야 손님이 생기는  법, 나는 그네들에게 턱없는 의심
을 받아도 단 한 번 서운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의욕이 넘치는 뜨거운 가슴을 허욕이 
가득 찬 새빨간 속셈으로 비치게 한 우리 사회의 수많았던 범죄인의 미울 뿐이다.
    위험한 장사가 돈 많이 남는 장사
  여하튼 꼭 성공해야 했다. 절대로 실수할 수 없다는 테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내 사고는 안정
성이 있으며 수익성도 큰 쪽으로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안정성이 
있으면 수익성이 작고, 수익성이 크면 안정성이 없게 마련이어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래서 "위험한 장사가 돈 많이 남는다"는 유행어가 생긴 모양이다. 생각에 몰입하던 나는 그래
도 그러한 속성에서 가장 벗어난 것이 먹는 장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장에 
서술토록 하고 그러한 결론 속에 나는 시내를 몇 바퀴 돌며 내가 가진 자본으로 할 수 있는 작은 
음식점들을 둘러보다가 군시절 생각해둔 분식점을 겨냥, 기존의 분식잠들을 관찰하였다.
  기껏해야 대여섯 평에 막 책상을 몇  개 들여놓고, 낡은 그릇에 마구담아 나오는  음식, 손님이 
들어오거나 나오거나 흘끗흘끗 쳐다보기만 하는 주인님들,  길거리 여기저기 리어카 하나에 오뎅
솥과 떡볶이 철판 하나 걸어놓으면 그게 분식집이었다.
  그래, 역시 내 생각이 맞아!  만약에 저런 떡볶이, 김밥 나부랭이를  괜찮은 분위기의 가게에서 
운치 있는 음악을 틀어주고, 깔끔한 음식에 친절한 서비스로 대해준다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고 누가 알고도 다른 곳을 선택할까?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복덕방을 돌며 가게상황을 알아보았
다.
  시내중심지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내 사정을 얘기하고 조금은 자리가  떠도 가격이 저렴한 
가게를 알아보느라 며칠을 소비한 끝에 천우신종인지 노력의 대가인지 권리금도 없고 이제 막 건
물을 지어 세를 놓기 시작한 이는 선배의 친구분 가게를 부족한 돈은 시설이 끝나갈 즈음에 내기
로 하고 임대했다. 이제는 저금  모자란 임대보증금과 시설비만 있으면  모든  게 순조롭게 끝날 
일이었다.
  임대계약서를 손에 들고 난생 처음 돈을 빌리러  뛰어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이들이 조
금씩 돈을 빌려주었다. 일이 풀리려니 돈이 없어 시설을 멈출 상황인데도 시설을 맡아 해준 선배
님이 자신이 조달하여 위기를 넘겨주었다.
    TV드라마 제목을 따와서 '보통사람들'이라고
  시설을 시작한 날부터 나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틈만 나면 담배를 물고  사업계획에 몰두했
다.
  상호는 '먹구삽시다'라고 생각해두었다.  그러다가 ㄴ너무 시대를  앞지른 상호같아(지금쯤이면 

사한 상호겠지만) 다시 바꾸었다. 내 이름이 강석구고 한창 '보통사람들'이라는 TV드라마가 인기
가 있었으며,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탤런트 강석우였다.
  어차피 싼 음식이고, 부담 없는 가격에 일반 보통사람들을 위한 외식장소니 '보통사람들'로 
상호
를 결정, 드디어 '보통사람들'이 탄생되었다(몇 년 후에 노태우 대통령의 단골 테마가 되었지만).
  그 후 십여 년 동안 대전 보통사람들은 10∼30대까지의 대전사람 70∼80퍼센트가 알고 있는 유
명한 식당이 되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을 쓰고자 함은 식당업을 성공하기까지의 과정과  내가 창조해서 실현
한 방법 또 그 효과, 그리고 미리 알고 했더라면 손해보지 않아도 되었을 경험들을 이제 막 사
회의 저 끝에서 성공을 꿈꾸며 온밤을 고심하는 젊은이들과 긴 날을 몸담아왔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솔직담백하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행로가 순조로울 수 있도
록 일조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몸소 겪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경험은 곧 자기 앞에 펼쳐질  현실의 다양한 요구
와 닮은꼴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귀를 열고 진지하게 경청해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아
이템이란 기존의 인식에서 180도 회전이 아니라 15도 정도의 약간의 변화가 바람직하다).
    작은 바람 속에서...
  웬만큼 생활의 여유가 생긴 어느 날부터는 몇  가지 작은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주위에서 장사를 시작하고 싶지만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특히 군생활이나 교육자생활을 오래 하고 사회에 나온 분들의 장사에 대한 무
지는 정말이지 지팡이 잃은 장님을 연상케 할 정도다.
  그래도 남들 다 하는데 내가 못할 게 무어냐 하는 뱃심으로 시작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 결
과는 대부분 참혹한 패배가 대부분인 것이다.
  여유 있는 사람이 여유자금으로 부업 삼아 장사를 하다가 실패를 한다면 별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장사를, 특히 먹는  장사를 시작하려 마음먹었다면 십중팔구  장사가 잘 안되면 
바로 곤란을 겪을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나의 주위에 이런 분들이 적지 않음을  감지했고 그분들의 쓰라린 실패를 보면서도, 누구 
하나 감히 나서서 도울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과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변변한 책 한 권이 없
다는 사실에 이르자, 비록 크게 성공하지도 여러 사람이 알고 있지도 않은 미미한 존재이지만 요
식업에 많은 시간을 종사했고 그  일의 성공을 위해 깊은 고뇌와  연구가 있었고, 그러한 것들을 
장사에 접목시키면서 느끼게 된 여러 가지 효과와  결과들,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시행착오
들, 또한 잎으로 진행될 미래의 음식업 흐름 등을 음식업을 준비하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있
는 그대로 보여줘서 그들이 염원하는 성공에 다가갈 수 있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
로 이 책을 감히 쓴다.
  될 수 있으면 실현가능한(시중에 책들도 많이 나와 있지만 거의, 아니 전부가 어떠한 이론적인 
제시, 혹은 추상적인 제시만을 하고  있고 요즈음엔 신종사업정보나 체인업체  소개로 국한된 거 
같다). 현실적으로 바로 접목할 수 있는 장사의 지침서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러한 책은 장사를 막 시작하는 이들에겐 더없는 구세주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대
부분 그들은 모두 내가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 가졌던 막연한 불안감과  막막함을 지니고 있으
므로).
  또 하나의 꿈으로 나의 옛 꿈은 포기했지만 그에 대한 미련 또한 적지 않아  지금도 노래 잘하
는 가수가 TV에 나오거나 길에서 그  음악을 들으면 갈 길을 잊고  푹 빠져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젠 다 잃어버린 꿈이다.
  노래란 적어도 기능이다. 선천적인 끼도 있어야 하지만 닦고 또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창
때는 팝송만큼은 대한민국 어떤 가수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다. 언제부터
인가 난 옛 음악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곤 한다.
  그래서 나는 레코드를 딱 한 장 내고  싶다. 우리 나이 또래들이 사춘기시절(그때가 가장 음악
이 아름답게 들릴 나이이므로)에 좋아했던 곡들을 묶어 아침부터 비가 오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
을 때, 심하게 주위가 조용해서 괜스레 센티해질 때, 흑백사진의 앨범을 뒤적일 때  듣고 싶은 그
런 레코드 한 장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언제라도 그 음악을 들으며  그 옛날 교복 입던 시절 그  애를 기다리던 
낡은 빵집 창문 밖으로 펑펑 내리던 하얀 눈, 김이 모락모락 나던 노란 양은 주전자, 두손으로 꼭 
감싸쥐고 호호 불며 마시던 소독약 냄새나는 엽찻잔,  고교시절 열기로 가득 찬 여름바다까지 기
억에서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먹는 장사를 시작하는 이에게
  나는 이 책에서 사업(먹는 장사)에 필요한 모든 상식과 주의사항, 그리고 주력상황 등을 
제시하기 위해 잡스러운 지난날의 이야기 등은 제거하려 했으나 필자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가 밟아온 시간들을 대강 생각나는 데로 옮겨보았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혹 크게 성공한 사람의 자서전으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는데 거듭 밝히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도한 현재 큰 
부자도 아니다. 다만 나의 처지를 비추어볼 때 다소 만족할 만한 현실임은 굳이 숨길 마음이 
없다.
  난 소설가도 아니고 유명인사는 더더욱 아니기에 내 책이 어떤 문학적 차원에서 평가되고, 
이론상 이치가 맞지 않는다고 얘기되는걸 원치 않는다.
  난 단지 한 명의 장사꾼이요, 장사꾼이 되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 한 
사람의 경험일지라도 여러 사람에게 참고가 되고 지침이 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더할나위없는 
행복이요, 우리 가문으로서도 커다란 영광이기에 아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써 봤을 뿐이다.
  이 책은 교과서도 아니요, 자서전도 아닌 한 장사꾼의 내 이웃에 대한 조언이요, 경험담이요, 
충고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보통사람들'
  '보통사람들'이라는 글자는 나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글자이며, 고마운 글자이다. 나는 이 
식당으로 인해 많은 여유로움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보다 성장한 인격을 갖출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온갖 회한이 서린 나의 역사다.
    뭐 맛이 없다구?-조바심에 잠을 설치며
  1985년 5월 '보통사람들'이  처음으로 문을 여느 날,  난 마치 미친 말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전날 왁스를 발라놓은 바닥의 윤기가 마음에 안 들어 봉걸레를 들고 닦고 또 닦았다.
  화장실 타일에 묻은 검은 페인트 두세 방울을 지우느라 진땀을 흘렸고, 양념통 하나하나를 
윤이 나도록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음악의 크기를 조절하고 가게 앞을 말끔히 쓸어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댄 마치 시험결과를 발표할 때처럼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마르고 긴장되었다.
  주방으로, 홀로, 계산대로 왔다 갔다 하며 도와주는 안 식구와 두 명의 주방직원들,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개업을 맞이했다. 첫날이라 당황도 했지만, 음식맛이 없다는 말이 나오자 나는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날 저녁 쫄면장을 다시 만들어봤다. 이것도 넣어보고 저것도 섞어보고, 한두 시간 가량 
시간이 지나자 제법 그럴듯한 맛이 났다. 그 다음날 첫날보다 많이 보완된 주방음식들은 곧 
손님들의 맛있다라는 반응을 끄집어냈다. 
  나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계산대에서 음식값을 지불하고 밝은 얼굴로 문을 나서는 
손님들이 늘어갔다. 오는 손님마다 가게 분위기가 좋다,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젠 된거야.' 개업 전날의 조바심에 잠을 설쳤던 
수많은 밤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친다.
    실내장식 본인의 소신도 다소 필요하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매상은 자꾸 올라가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낀 어느 가을날 
아침에 나는 가게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두세 달 전의 나를 생각해보았다.
  실내장식업자는 나의 끝없는 간섭에 굉장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나는 
많은 부분을 내 생각대로 요구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인테리어업자의 고정관념과 자기 과신을 우려한다. 실내장식이란 정해진 
방법이 없다. 그 업소가 요구하는 고개그이 수준 및 연령 등을 고려해야 하며 그 점포의 생김새, 
주변과의 조화 등을 참작해야 하는 참으로 어렵고도 예민한 작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소재가 없기 때문인지 대충 눈짐작과 어렴풋한 지식으로 작업을 맡고 있는 
실내장식업자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업자들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문제점을 우리는 수시로 목격할 수 있다. 뒤에 또다시 
언급되겠지만 이 실내장식은 정해진 가격도 없지만 그때 그때의 상황에 다라 가격이 움직이는 
성격을 갖고 있기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의 정당성도, 재료의 단가도, 작업의 소요기일도 
파악하기 어렵고, 사전에 업자와의 약속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실현되기란 열에 한둘인 것이다.
  그것은 실내장식업자가 꼭 부도덕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실내장식이라는 작업 자체가 그만큼 
가변적이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자주 발생할 소지가 크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실내장식업자의 선정이란 대단히 어려우며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러 명의 업자 중에는 자신의 작업에 혼신의 정열로 마치 예술품을 대하듯 
자신의 감각을 쏟아 붓는 장인정신을 가진 업자도 간혹 있었다. 이들은 최소한의 대가만을 
요구하며 자신의 간간이 살아 표현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는데 그 모습은 보는 이의 
입장에서 참으로 감격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어쨌든 시설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거론토록 하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유치원 아이들 그림으로 벽을 장식
  시설업자의 편치 않은 눈길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설을 내 생각대로 진행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실내가 훤히 보이는 유리로 전면을 붙인 식당이 한 군데도 없었기에 통유리를 끼우고 
사무실에서만 쓰던 블라인드를 달았다. 등받이가 없는 2인용 의자를 만들어 홈을 파고 다이미를 
끼웠다.
  가게 폭이 좁아서 붙박이 의자로 한쪽 벽면을 채웠다. 그것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받으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4인용 의자로 빽빽이 채워진 기존 식당들의 흐름이 싫었기 때문이다.
  천장에는 형광등을 달고 양옆의 형광등 위는 노란 아크릴박스를 입혀서 저녁이면 가운데 
노출형광 등을 끄고 아크릴 안의 형광등만 켜니 홀 안이 노란 색으로 보여 아주  분위기가 
있었다(그것은 다른 조명을 쓰는 것보다 효과가 컸으며 전기세 절감에도 한몫했다). 스피커를 
화장실(대변기 위쪽 천장 속)에도 설치, 화장실 벽면의 그림액자와 함께 짧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유도했으며(분식집으로 아마 한국 최초?). 아이들 그림은 왠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치원생들의 그림을 벽면에 걸어두니 손님들이 굉장히 재미있어했다.
    손님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양심적인 상술
  크리스마스 때는 그때만 해도 흔치 않던 컴퓨터로 손님의 이름을 입력해 프린터로 뽑아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었으며 여자 단골손님에게는 스타킹을 한 족씩 선물했다. 다른 식당들은 
식사 후에 껌을 주었으므로, 식상한 손님들을 위해 박하사탕을 주었고, 여름에는 각종 화채(수박, 
복숭아, 포도)를 만들어 원가에 판매함으로써 조그마한 불평도 안 한 번 소홀히 대한 적 없이 
즉시 시정해서 그 손님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손님이 놓고 간 물건을 기재해 가게 전면에 부착해서 찾아가도록 했으며 전화요금(우리 가게는 
공중정화가 없었다)도 다른 가게에선 모두 50원 받을 때 20원을 받았다. 그것은 50원을 받게 되면 
전화요금을 지불하고도 돈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천장에 붙은 아크릴박스 위에 삼국지에 나오는 떡장수 '무대' 얼굴을(고우영 삽화) 
그려 놓았는데 그것은 무대처럼 양심적이고, 타산적이지 않은 장사를 하겠다는 일종의 
자기암시였다.
  그렇게 무던히 노력한 끝에 저금통장의 액수는 자구 불어났고 단골손님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식사시간에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손님들이 문 앞에 몇 팀씩 버티고 있어 
미안한 마음에 문 밖 나서기가 어려웠다.
    어디 그래, 한 번 해보자
  개업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라고 기억된다. 배달한 콩국수 재료가 마음에 안 차 전날부터 콩을 
불려 아침 일찍 오토바이를 타고 방앗간으로 향했다.
  콩국을 만들어 돌아오는 길에 급하게 다가오는 트럭에 신경이 쓰여 도로에 난 흠을 못 보는 
바람에 콩국을 반통이나 온몸에 뒤집어썼다.
  그때 옆을 지나치던 중년신사의 양복에도 몇 방울이 튀었는데 그 양반이 옷을 털며 나를 
쳐다보는 얼굴이 꼭 부잣집 마나님이 동냥하는 거지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허연 회칠을 한 듯한 
얼굴이 보기 좋지는 않았겠지만, 그때 난 참으로 참담했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갑자기 오토바이고 콩국이고 다 집어던지고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통을 
추스르고 오토바이의 안장을 닦아낼 때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처럼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어디 그래, 한 번 해보다."
    그 이후
  '보통 사람들'이 문을 연지도 일 년 반이 넘어서고 있었다. 가게를 시작할 때 여기저기서 
융통했던 돈들을 다 갚고도 6천여만 원의 돈이 통장에 들어 있었고 가게의 수익도 매일매일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수익금을 들고 아내와 가게 근처의 은행에 들러 입금을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 하며 시작하는 일과는 지금 생각해도 무척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사업에 도전!
  절박했던 시점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자 나는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마침 제대하고 복학 전인 
동생이 있었고 아내가 있었기에 '보통사람들'은 그들의 손에 맡기고, 나는 새로운 수익을 얻기 
위해 선화동에 있는 기독교 봉사회관의 지하(약 120평)를 임대해 커피숍을 차렸고, 그 얼마 
후에는 청주 시내에 '엄주사 city'라는 양분식점을 차렸다.
  그 뒤로는 크레송, 노스트라, 워모 대리점을 거치며 롯데관광 대전지점, 훼밀리카드 주식회사 
등등 쉬지 않고 사업을 벌려나갔다.
  뒤돌아보면 다행히 큰 실패를 한 사업은 없었다. 그렇다고 큰돈을 벌지도 못했다. 다만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다양한 사업에서 얻은 경험적 시각과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그 중에 꾸준한 
고수익을 얻은 사업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생각에 접하자 나는 93년도 하반기부터 '먹는 장사'에 대한 확장에 돌입했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다행스런 결정이었다.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뛰어든 '먹는 장사'가 내 
인생의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열심히도 했지만 생각했던 대로 결과가 나타나 
93년도와 94년도를 기쁨의 해로 만들어주었다.
    8년만 일하면 점원이 주인이 된다
  가게가 하나 둘 늘어나자 커지는 수익만큼 피곤함도 늘어갔는데 그것이 어느 상황에 도달하자 
나는 나 혼자 몸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고, 그 돌파구를 찾는 데 고심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지금의 수익을 유지하면서 나의 고생을 덜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호이익'이었다. 내 개인의 점포라 
해서 나 혼자만 이 이익을 챙기려 든다면 여러 개 점포의 효과적인 운영은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점포의 운영방법을 소개하면, 우선 해당 점포에 점장을 선임하고(종사하는 
직원 가운데 선임을 하든 외부에서 영입을 하든), 그 점장의 근무조건을 5년 동안 일정급료를 
지불하고 점포의 관리를 책임지며, 다시 3년 동안의 근무기간 동안은 그 점포의 권리와 이익을 
2분의 1 양도한다. 그리고 3년의 근무기간이 끝나면 그 나머지 2분의 1 소유권마저 건네준다.
  즉 5년 동안 일정급의 조건으로 근무하고 3년 동안 수익의 반을 나누고, 그 이후에는 소유권을 
넘겨줌으로써 결국 근무 8년 망에 해담점포의 점장이 주인이 된다는 얘기다.
  그러한 조건으로 진행되었을 때 결국 구 점포는 관리하는 점장이 언제까지고 급료만 바라 보는 
상태에서 벗어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본인의 점포가 될 것이기에 관리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걸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진행하기가 다소 망설여질 수 있으나 이미 이러한  방법으로 3년 이상을 
진행해온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럽고, 향후 또 다른 점포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사람의 능력과 의욕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오로지 욕심에 치우쳐 몇 개의 점포를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 해도 결국은 길게 가지 못한다. 나에게도 이익이 되고 상대방에게도 이익이 되는 
상호이익만이 최상의 방법이다. 더구나 요즈음같이 인력이 귀한 시점에는 더더욱 그렇고 일일이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식당업에서는 특히 그렇다. 물론 이러한 방법도 매출이 높은 
점포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여러 개의 점포를 진행하는 사람만이 필요한 것이다.
  점장의 근무태만이나 부조리를 걱정하지 마라. 정상적이지 않은 근무태도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되며,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점포가 될 영업장을 망쳐 놓을 사람도 없다. 
무엇보다 점장으로서의 자질과 사람됨을 잘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서로에게 믿음과 신의만 
있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본다.
  식당을 장사터가 아닌 사업장으로 보고 식당업을 근사한 사업영역으로 보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다. 
  내일 아침이라도 멋있고, 맛있고, 친절한 식당이 생긴다면 그 자리를 채워줄 사람들은 
넘쳐흐른다.
  먹는 장사를 꿈꾸는 사람들, 그들은 항상 기회의 문고리를 만지작거린다. 이제는 기회의 문을 
활짝 열 때이다. 그 문고리를 잡아당겨라.
    보통사람들 2
  1993년 초겨울. 나는 정해논 방향도 없이 커피숍이다, 패션점이다, 관광회사다 그저 적당히 
가능성만 보이면 치고 달리던 지난 몇 년간을 더듬어보았다.
  물론 일의 성공에 따라 어려웠던 때나 힘들었던 기억, 그리고 괜한 만족감에 취해 시간 무서운 
줄 모르고 세월을 까먹었던 시간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 당시로는 그런저런 이유로 뛰어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더듬다가 문득 그러한 여정이 나에게 금전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런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해오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의 활동은 돈과 무관할 수 없었다. 돈! 애써 외면하려 해도 그리 오래 버티질 
못하고 직업의 긍지나, 자부심, 또는 보람이라는 명분으로 마음을 다잡아도 눈만 뜨면 맞부딪히는 
돈의 기세는, 우릴 아주 맥도 못추게 한다.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얻은 아이디어
  그즈음 들어 부쩍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 나오는 구멍이란 오로지 '보통사람들'뿐이었고 
나머지 사업에선 현상우지에 급급했으며 간혹 수익이 생겨도 그건 곧바로 또다른 지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머니에 몇십만 원을 쑤셔넣고 무작정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부산행 기차를 탄 것은 굳이 부산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탄 것은 아니었고 역전에 도착하니 
부산으로 가는 기차가 바로 있었기에 그냥 행선지를 부산으로 정했을 뿐이다. 그저 며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업구상을 해볼 심산이었다.
  남포동, 광복동을 느릿느릿 걸어다니다가 점심을 먹고, 서면, 광안리, 해운대를 온종일 
쏘다녔다. 이윽고 어둠이 스며들고 나는 낯선 여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애꿎은 담배만 
죽였다.
  다음날, 아침. 7시도 안된 이른 시각인데도 큰 가방을 무겁게 메고 힘들게 옮기는 학생들이 
많았다. 어린애들에게 못된 짓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그런 마음이 읽은 듯 
어느 남학생 하나가 고개를 푹숙이고 걸어와서 내 어깨를 '특' 치더니 흘끔 쳐다보고는 그만이다.
  배가 고팠지만 혼자 먹는 아침이 싫어서 역전으로 나갔다. 서울행 표를 끊고는 '보름달빵' 
하나와 우유 하나로 허기를 채웠다. 예나 지금이나 한겨울의 역전광장에는 비둘기와 초라함이 
같이 한다. 역전에는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 항상 몇 명씩 모여 있다. 그들은 갈 곳이 없지만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역전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 통일호의 느긋함을 즐기던 나는 기차가 동대구역에 다다르자 갑자기 
내리고 싶어졌다(이건 처음하는 고백인데 사실 내가 동대구역에 내리고 싶어진 건 정말 남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역에서 사먹은 우유가 마실 때부터 석연치 않더니 기어코 
사고를 친 것이다. 그런데 난 기차 안의 화장실을 쓰지 못한다. 앞에 설치해놓은 금속봉을 붙잡고 
쭈그려 앉으면 자꾸 웃음부터 나오고, 힘 좀 쓰려하면 기차가 똥 덜컥대 애써 밀어내던 작업이 
무위로 가는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정말 못 간다. 내가 동대구역에서 하차한 이유도 바로 이런 
냄새나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전부터 몇 번 와 본 대구였지만 확실히 대구는, 특히 동성로는 꽤 괜찮은 동네이다. 물결 
흐르듯 밀려 걸어가는 그 맛도 맛이지만 봉산동과 동성로로 이어지는 부근의 카페, 커피숍 등은 
참으로 멋진 곳이 많다. 이쁜 커피숍마다 들러서 커피를 몇 잔씩 먹고 나니 입이 쓰다.
  대충 눈에 띄는 분식집이 있어 발길을 들여놓았는데 손님이 정말 많았다. 김밥과 우동을 
시켜놓고 실내를 둘러보니 손님에 비해 시설은 너무 엉망이었고, 잠시 후 음식을 먹을 때는 정말 
의아한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음식맛에 이런 분위기로도 장사가 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나는 다른 몇 개의 분식점을 찾아보았는데 특별히 맛있다거나 분위기가 좋거나, 
친절한 가게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엔 '이런 상태로 장사가 유지된다면 대전 '보통사람들' 같이 깔끔한 분위기에 
이미 인정받은 음식맛이라면 더욱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의 
음식점을 더 돌아본 나는 저녁 노을이 시작될 즈음에 한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가 점포를 
알아보았다. 마침 부동산 사무실에 접수된 2∼3개의 점포 정보를 듣고 서울로 향했고, 그 다음날 
대전집에 밤늦게 도착한 나는 곰곰이 대구 진출을 생각해보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구로 진출
  대전에 거주하면서, 아는 이 하나 없는 대구에 점포를 낸다는 것에 다소 막연한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구의 식당들을 보고 난 후의 자신감과 아는 이가 없다고 점포를 구하는 게 
급했다.
  나는 그 다음날 다시 대구를 향했다. 전날의 그 부동산에 다시 들러 점포상황을 체크해보았다. 
유선 목이 아주 좋은 비싼 가게가 필요한지, 조금 자리가 떠도 괜찮은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니 
우선 그 당시 대구 시내에 내가 구상하는 실내장식보다 장식이 잘된 가게가 없었고 음식 맛 또한 
우리 가게가 월등하다는 생각이 들자 부동산 사무실에 나온 점포 중에 가장 싸고 중심지에 조금 
벗어나 났지만 소문을 듣고 걸어서 찾아오기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점포를 계약했다.
  막상 계약을 하고 나니 이런저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점들이 전부 
예상을 벗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대구하고 대전하고 거리가 어딘데... 등등 대전으로 
돌아오는 동안 줄곧 기대와 우려를 넘나들며 고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날아간 화살은 거꾸로 오는 법이 없다. 이제 남은건 최선을 다하는 길뿐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앉아 개업 전략, 영업, 홍보, 인원구성 등을 고심하느라 하루하루가 너무 아쉬웠다.
  마침내 점포를 인수하고 실내장식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의 일을 도와주시는 장식업자 이 
감독님이 아직은 이른 나의 일을 도와주시는 장식업자 이 감독님이 아직은 이른 나이에 중풍이 
들어 몸의 운신이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맡아주셨다. 충분치도 않은 금액으로 
일을 맡겼으나, 불편한 몸으로 작업지시를 하는 걸 볼 때마다 이렇게 날 도와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꼭 잘돼야 한다는 각오가 샘솟았다. 이제 그 분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 분이 
쏟아주셨던 애정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위트 있고 유머스러운 홍보전략-첫날은 무료
  가게가 모양새를 갖추고 홍보를 위한 전단제작, 그리고 재료를 공급해줄 도매상 등을 선정하고 
나니 개업일자만 남아 있었다. 대구에서는 아주 색다른 분위기와 음식을 갖추었기에 다소 
자신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처지는 점포의 위치, 그리고 겪어보지 않은 지방 
음식문화의 차이 등 걱정거리는 여전했다.
  개업전략으로는 위트 있고 유머스러운 전단내용을 노란 바탕에 검정 글씨로 작성해 항공우편 
봉투에 넣어 고객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직접 길에서 배포했고, 개업 첫날에는 무료로 
음식을 제공해서 일단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계산대 위에 계측기를 매달아 계산을 마친 손님이 
한 번씩 누르게 해서 계측기에 나타나는 숫자와 우리 가게에서 정해 놓은 숫자와 동일한 (예: 
10번, 100번, 200번 등) 손님에게는 음식값을 무료로 하고 마련해놓은 사은품 등을 제공함으로써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 외에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고,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경품의 
질도 높아져, 개업 6개월 후에는 제주도 두 손님에게 제공해 주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 가게의 영업전략은 단순하다.
  첫째, 점포에 나와 있는 주인을 포함한 전직원은 무조건 큰소리로 인사하고 손님이 갈 때는 더 
큰소리로 인사해라.
  둘째, 어떠한 이유라도 손님과의 마찰은 피해라.
  셋째, 음식의 청결에 항상 주의하고 화장실 청소는 본인의 방처럼 하라. 그리고 요일별 
청소목록은 가게의 청결유지에 효과가 있다(월: 유리창, 화: 물컵...식으로).
  그 해의 마지막날인 12시에는 양초와 풍선 커피 등을 손님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12시 정각에 
자신의 소원을 쓴 풍선을 일제히 터뜨리는 미니 이벤트, 생일을 맞은 손님의 서비스와 이미 
터득한 음식 맛에 힘입어 '보통사람들'의 대구 진출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개업 10개월 만에 1,850만원 순이익을 얻음
  개업 첫달에는 230만 원의 이익을 시작으로 개업 4개월째 되는 달에는 무려 1,200만 원이라는 
수익을 올렸고, 개업 10개월째 되던 여름방학에는 25평짜리 분식점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 
1,850만 원의 순이익을 올리는 개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쾌거에 힘입어 개업 7개월 째는 동성로에 '보통사람들;'대루 2호점(43평)을 개점했고, 그 
가게 역시 개업 5개월 만에 한달 수익 3천만 원을 넘어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동성로의 2호점은 모퉁이 건물 2층에 자리했고 여럿이 함께 쓰는 입구라 청결관리가 쉽지 
않았으며, 입구 위치 또한 통행인구가 비교적 많지 않은 옆골목인지라 초반에 걱정을 많이 
했으나 1호점의 좋은 인상과 지속적인 영업 관리로 좋은 결과를 만난 것 같다,
  장사에는 아이템이 중요하다.
  더욱이 요즈음 같은 불경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아이템보다 도 중요한 것은 
연출과 관리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고 표현함에 있어 연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아이템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또한 초반의 아이템이 훌륭한 연출을 바탕으로 좋은 시작을 
이루었다 해도 지속적인 영업장의 관리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중도에 멈춰선다.
  즉 아무리 기발한 아이템이라도 식당으로서의 기본적인 음식의 맛이나 서비스, 분위기 등에서 
관리가 안되면 손님이 찾지 않는 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먹는 장사 열두 가지 전략

    정신차려 이 친구야!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일생에 있어 한두 번은 자리 이탈이 있는 모양이다. 대부분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작 되돌아갈 자기자리를 발견하고는 하지만, 영원히 자기자리를 찾지 
못하고 끝내 떠돌다가 이 세상을 마감하고 마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문제는 자기자라는 것에 
대한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 모두에게 의아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경우에도 
명쾌한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또한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의 자리는 어떠한 자리라고 감히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굳이 나의 생각을 얘기하자면 왠지 그 일에 자신이 서고 마음이 동하며, 짧지 않은 시간을 그 
일로 보내도 크게 반감이 생기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그에게 어울리는 자리일 거라는 
예감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조차도 때와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본인의 경우도 음식업이 나의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그 일이 나를 몰입시키는 
데 크게 반감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까지 나의 자리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처음 시작한 가게가 탄탄하게 기반이 잡히자 변화 없는(더이상 어떠한 노력으로 더 나은 성장을 
꾀할 수 없는) 그 가게에 매여 지내기엔 아직 더 움직일 나이라는 생각이 나를 몰아대기 
시작했다. 그 후로 패션 가게를, 커피숍을, 관광회사를 두서없이 운영하던 나는 어느날 불현 듯 
그러한 여정이 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발견했고 무엇인가 불안정해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됐다. 아, 그 동안의 시간들이 내게 있어 자리 이탈이었음을 어느 이른 아침 끝에 
보고 있었다.
    때라는 것, '운'이라는 것, '기회'라는 것
  우리는 흔히 "사람은 일생에 세 번의 기회를 맞이한다" 라든가 "부자는 운이 따라야 한다"든가, 
혹은 무엇이든지 때가 있는 법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 역시도 그러한 말들을 흔히 들어왔다. 
그러나 세 번 있다는 기회가 삼십 번은 아닌지, 혹은 운은 따르는 게 아니라 찾아야 하는건 
아닌지, 때라는 건 있는게 아니라 사왕판단을 정확히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닌지 의심을 해본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신성일과 엄앵란이 판치건 한창 때는 이 영화도 그 사람들이고 저 영화도 
그 사람들만 나왔는데 과연 그때 신성일과 엄앵란만한 인물들이 없어서 허구한날 그들만이 
판쳤겠는가? 그 당시의 영화가 고도의 연기력이 요구되지는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숱한 
인기가수들보다도 훨씬 더 가창력이 좋고 인물도 잘난 밤무대 가수들이 10년이 넘게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때론 노래방 구석에 박혀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열창을 불러대고 있는 
까치머리 재수생의 노래가 인기가수 뺨칠 만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만큼 인생의 줄은 묘하게 엉켜 있으며 우매한 우리들은 알고 있는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자기의 이해범주에서 벗어난 상황을 맞이하면 운을 만났다고, 때를 잘 탔다고 이름을 붙여버리곤 
하는 것 같다. 그러한 의미선상에서 볼 때 분명히 운은, 때는, 기회는 있다. 그래서 당신도 어느 
날 갑자기 스타나 영웅, 재벌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또는 언제, 혹은 어떻게 
오고 가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단 하나 뜨거운 가슴으로, 맹렬한 집념으로 불타는 
승부욕과 끈기를 지닌 자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만은 경험으로, 느낌으로 알 것도 같다. 
진짜다.
    돈을 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물음은 너무도 당연하여 대답조차 귀찮아지리라. 그러나 왜 벌려고 하냐고 재차 묻는다면 
약간씩 대답이 분주해질 것이다. 돈은 이래서 벌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을 
따라간다. 목표가 설정되지 않은 사람이 어설프게 돈을 좀 벌었다 해도 그 사람은 두 번째 
게임에서 질 확률이 십중팔구다.
  그것은 막연히 돈 욕심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길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말과 같아진다. 그런 사람이 어찌 장도에 나설 수 있겠는가? 목표가 없는 
사람에겐 집념이 없고, 집념이 없는 사람의 성공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집념은 모든 사업의 성공여부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단어이다. 고로 돈을 벌고 
싶다면 집념을 가져라.
    (전략1) 부족한 돈에 장사계획을 끼워 맞추지 마라
  장사를 해보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내가 가진 돈에 알맞은 장사가 
무엇인가' 이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듯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아니 대단히 
잘못된 출발이다. 
  이제부터 장사를 계획하는 순서를 나열해보자.
  첫째, 무슨 장사를 
  둘째, 어떤 방법으로
  셋째, 어떠한 위치에서
  넷째, 얼마의 자본이 소요될 것인가?
  이것이 정상적인 접근방법이다.
  어느 사람은 이러한 접근방식에 불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해진 자본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장사에 앞서 자본의 증액대책부터 다시 더듬어나가야 한다. 그래도 불가능하다면 
계획을 늦추는 도리밖에는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부족한 돈에 장사계획을 끼워 맞추지 마라. 그건 자칫 엄청난 실패를 몰고 온다. 일생에 몇 번 
없는 소중한 기회를 주먹구구식으로 얼렁뚱땅 시작하는 자, 그의 이름은 낙오자이다.
  자본이 갖추어진 사람은 바로 시행에 옮기면 되는데 그때에도 다시 한 번 나의 생각이 
현실성이 있고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차분한 재검토를 권하고 싶다.
  모든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충분히 검토하고 발로 뛰어서 확인해야 하며, 조그만 부분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러나 결정이 되고 확신이 온다면 그 다음은 무서운 
기세로 일을 추진해야 한다. 글로는 쉽지만 막상 자신이 진행코자 할 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략2) 업종에 따라 입지선정이 달라야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가게는 어느 것에 위치해야 장사가 잘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상당히 
곤혹스럽고도 난감한.  필자도 이 부분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도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그것도 
10여 년 동안 스무 번도 넘게 가게를 차리다보니 어떠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본인 
나름대로의 입지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지역의 끊임없는 변화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소비자들의 감각이 나를 혼돈에 빠뜨리곤 한다.
  입지선정에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본인이 원하는 장소가 생겨도 
원하는 시점에 구할 수 있느냐도 문제거니와 본인의 영업에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장소라는 
판단을 내리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가 그동안 경험으로 얻은 좋은 점포의 입지를 
나름대로 열심히 피력한다 해도 막상 여러분이 직접적인 상황에 도달하면 백 퍼센트 확신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입지선정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난해한 것이다. 일반 상업론이나 부동산학 개론에도 
입지선정에 대한 항복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당신이 진행코자 하는 시점에서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여지껏 생각하고 느껴왔던 본인의 입지선정에 대한 제시가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음식업에 있어서의 입지는 각 도시의 발달, 즉 도로의 발달, 건물의 시대적 변화, 주거형태의 
변화 등과 소비자들의 외식구조, 새로운 형태의 음식산업의 등장, 현대인의 행동반경 및 이동의 
방법 등에 따라 적절하게 선정되어야 하지만 그에 따르는 제반 학문적인 고찰은 항상 뒤쳐지고 
있으며, 특히 음식업에 관한 학문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결국 그러한 이유로 음식업은 학문적 
이론제시보다 실전과 경험을 통한 감각과 분석이 훨씬 더 유리하고 가깝다는 얘기이다.
  우선 음식업을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분식, 특수음식으로 분류하고 업종별, 규모별로 나누어서 
설명해보자.
    1. 한식과 중식
  먼저 한식과 중식은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음식이다. 한식과 중식의 입지는 여타 음식에 
비해 그리 큰 장애를 받지 않는다(물론 규모에 따라서 설명이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러한 까닭에 
큰 대로변에서 한식, 중식집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높은 임대료를 지불해가며 굳이 변화한 것에 위치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데, 그것은 옛날 
명동에 그 많았던 음식점들이 지금은 뒷골목이나 대로변의 자하나 2, 3층에 위치해 있고, 
대로변엔 고가의 물건들만 판매하는 패션가게, 귀금속점, 대형 아케이드나 금융업 등이 자리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식, 중식은 유동인구에 따른 일반입지론의 영향을 
받는다.
  중식의 경우에는 아파트 밀집지역에 잇는 것이 우리하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중식이 갖고 있는 배달문화가 이미 정착한 지 오래이고 그런 까닭에 중식하면 배달이 
연상되어 아파트촌의 생리와 현대 생활의 습관과 맞물리면서 수요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회, 족발, 김밥 순대 등을 배달하는 업소들이 생기면서 그 동안 중국음식이 
독차지하던 배달의 수요를 점점 잠식해가고 이것은 어떠한 음식이든 배달에 용이한 형태를 
갖춘다면 오랫동안 중식에 식상한 소비자의 선택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 일식-전문사무실이나 오피스빌딩이 운집해 잇는 곳
  요즈음의 일식업은 대형화,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대중적이기보다는 아직은 고가음식이고 
수요가 대부분 일부 연령층(40∼60대)에 머물고 있다.
  그 연령층의  손님들은 수입이 안정되어 있고, 더욱이 요즘 같은 자가운전시대에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차를 가지고 온다는 판단이 따르게 되므로 넓은 주차장이 상식화되어 있고(최소한의 
주차장은 다른 업종도 마찬가지지만), 입지도 차량통행이 용이한 곳으로 선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일식은 전문사무실이나 오피스빌딩이 운집해 있는 곳, 혹은 주변환경이 한적하고 깨끗한 곳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단 요즘 간혹 볼 수 있는 세미일식(단가를 낮추고 메뉴를 대중화시킨)은 오가는 인구가 많고 
번화한 시내 권이 유리하다. 비싼 임대료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3. 양식- 시내중심가가 유리
  양식은 아직 시내중심가가 유리하다. 시내중심지는 젊은이들이 요람이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공간이다.  따라서 그들의 출입이 용이한 시내번화가가 유리한 입지이다. 그러나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경우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일반 소도시와는 달리 대도시의 가족 및 
중년세대는 양식집의 출입이 적지 않으므로 서서히 분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게가 어느 손님 층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입지의 선정이 가변적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4. 분식- 오로지 시내번화가에 위치
  분식은 오로지 시내번화가에 입지 해야 유리하다. 양식과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의 이동이 
빈번한 중심가에 위치해야만 큰 수익을 올릴 수가 있다. 가끔 사람들이 학교 앞이나 아파트촌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국내 몇 개의 대학교 앞(이미 오래 전부터 상권이 형성되어 
그 대학의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을 제외하고는 방학중에 
어려움을 겪게 되며 학교 앞에서 소일하는 젊은이들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권할 
만한 위치는 아니다. 학교 앞이나 아파트 밀집지역에서는 그 수요에 맞는 평수, 즉 시내의 
분식점이 40평을 필요로 한다면 아파트 지역은 10∼15평이 유리하다. 가게평수는 종업원 수와 
비례하고, 또한 임대가격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5. 특수음식- 임대료가 저렴하고, 한적한 곳
  남들이 잘 취급하지 않는 음식이나 한 가지 음식만을 내는 식당은 될 수 있는 한 임대료도 
저렴하고, 구하기도 용이한 한적하고 여유 잇는 장소가 바람직하다. 그 곳을 오고자 하는 손님은 
이미 그 가게를 지향하고 오기 때문에 굳이 복잡하고 임대료도 비싼 중심가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가게들은 서로 모여 있는 것이 유리하다. 어떠한 음식은 어딜 가야 많다라는 
연상을 주기 때문이다(각 도시마다 가구점골목, 골동품절골목이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도로계획이나 도시계획을 미리 파악해둔다
  이상이 본인이 생각하고 느껴온 점포입지론이다. 물론 식당점포의 입지론은 식당운영자의 
영업아이템이나 그에 따른 시설, 규모에 따라서 상당부분 틀려질 수 있으나 경험이 전무한 
예비사업자들에게는 점포입지에 대한 세부적이고 민감한 부분의 나열이 그 이해를 돕는 데 
오히려 장애로 등장할 소지도 적지 않다고 판단하여 나름대로 이해의 범위를 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끝으로, 입지선정은 비단 해당점포만을 생각해서는 안되며 그 점포가 속해 있는 건물의 
신축계획이나 도로계획, 또는 주위환경의 변화 등을 구청이나 동사무소, 혹은 부동산 중개업자나 
그 건물에 미리 입점한 세입자 등을 통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만사가 불여튼튼이라는 
옛말이 그냥 잇는 게 아니었다는 확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략3) 인테리어는 깐깐하게 할수록 성공한다
  사실 가게의 실내장식에 대한 부분은 전자에도 잠깐 기술했듯이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부분이다. 본래 실내장식이란 그 가게의 생김새와 건물이 축조된 상태, 그리고 그 건물의 
구성재료에 따라 너무도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상식적이거나 중요한 부분만을 나열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만큼 예외성이 많고 상황에 따른 방법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려는 
사람이 원치도 없고, 정해진 모델도 없는 실내장식에 대한 모든 것을 굳이 파악할 이유도 
없고(실내장식업자가 될거라면 모르지만), 또 모두 파악할 길도 없다. 그러한 이유로 장사를 
시작하려는 사람의 경우로 범위를 정하고 급히 알아야 할 부분만을 기술토록 한다.
    본인이 직접 할 경우
  먼저 가게를 정하고 나면 본인이 생각하고 잇는 업종에 맞게 실내장식을 해야 하는데 그때에 
닥치게 되는 것은 애가 직접하느냐 아니면 실내장식업자에 맡겨야 하느냐이다. 장사에 경험이 
없다 해도 그동안 본인이 생각하고 잇던 시설이 있을 수도 있고 어느 다른 가게의 시설로 내심 
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들어진 상태를 보는 것과 실제로 직접 만들 때에는 어떠한 과정으로 그러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상당히 당황할 수도 있고 그 가게의 판매가, 혹은 그 
사업장의 규모, 모양 등에 따라 엄청난 시행 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주변의 
경험자나 전문가 등에게 시간을 두고 많이 배우도, 재료의 성격이나 진행방법 등을 미리 
익혀둔다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점포는 본인이 그 동안 꿈꿔왔던 장식내용을 직접 구사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주방     .배수: 쓰레기가 잘 걸러지게 망을 설치하되 물의 사용량
                        을 고려하여 될 수 있는 한 큰 관을 연결하고 주방바닥에 물이 고이는  
                       일이 없도록 바닥 경사에도 유의해야 한다.
                    .환풍: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주방 환풍기는 대부분 몇 달도   
                          안가 때가 낀다. 때를 제거하기 용이한 형태가 유리하며,             
                          상식크기보다 더 큰 규격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바닥재: 미끄럽지 않게 외부타일이나 고무판 등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공간 수납장: 해당 주방공간을 고려,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다(식당운영    
                                1년  후면 많은 물건이 생긴다).
          조명      .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해야 하며, 그 건물의 외부광선의 정도를          
                       고려한다.
                     . 가시광선이 손님 눈에 들어가거나 반사로 인한 피해도 생각한다.
          화장실     . 그 업소만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될 수 있다면 음악도 흐르게 하는 것이 좋다.

실내장식업자에게 맡기는 경우
  그러나 위의 경우처럼 많은 시간을 할애할 시간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면 실내장식업자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는데 그때 주의해야 될 사항 몇 가지를 나열해보는 걸로 불만족스럽지만 시설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먼저 실내장식업자와 계약을 하는 경우에는 실내장식업자가 공사를 한 다른 사업장을 
둘러보고, 그 업자의 고유분위기가 내가 생각하는 업종에 잘 맞을 것인가를 생각한다(가수의 
노래나 화가들의 그림이 제각각 그 고유의 개성이 있듯이 어떠한 업자든 자기고유의 분위기는 
있게 마련, 따라서 같은 업자가 한 공사들은 대부분 그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한 업자들 에게는 자기 분위기고 뭐고 간에 남의 것 흉내내기에 급급한 엉터리 업자도 간혹 
있으니 자세히 알아보고 결정해야 한다).
  계약을 하게 될 때에는 각 시설부위마다 어떠한 재질을 사용할 것인가를 기록하고 그 재질로 
시공할 때에 소요되는 금액을 기재토록 해 견적서를 받아놓는다. 그 견적서를 가지고 재료상을 
돌며 적당한 가격인지 확인해본 다음, 별 이상이 없다고 판단될 때 계약을 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여러 업자에게 견적을 받아 가격이나 재질의 선택이 적당하고 주위사람들에게 그 신용을 
인정받는 업자를 선택한다면 그리 큰 문제는 없으리라 본다. 또 한 가지 공사대금 중 
10∼20퍼센트는 공사완결 후 한 달이 지나서 지불토록 계약서에 문자화해 하자보수에 대비토록 
하는 일도 잊어서는 안된다.
  점포의 인테리어는 그 업종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미적인 
조화만을 생각해 불과 몇 달 후에 퇴색해 보이는 그런 시설은 좋은 인테리어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인테리어란 미적 조화와 실용성, 손님의 편리한 사용을 배려한 기능적인 시설이다. 내부도 
중요하지만 외부는 더욱 중요하고, 특히 주방은 주방경력이 풍부한 사람의 조언을 경청해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며, 특히 이미 주방인원이 정해졌다면 그 사람의 
신체구조나 신체특성 등에 주의를 기울여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 또한 주방의 환풍 및 배수, 
그리고 바닥처리와 공간수납구성 등은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다.
    (전략4) 최소의 돈으로 최대의 광고효과를 창출하라
  광고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광고란 학문적 고찰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식당홍보에 대해 몇 가지 기술해보도록 한다.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광고의 형태는 TV광고나 신문광고, 또는 포스터나 전단 
등을 연상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효과적인 광고는 매우 광역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잇는 
TV광고, 혹은 신문광고 등이다.
  그러나 TV광고의 경우는 광고에 지출되는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가게의 
경우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그동안 느껴온 광고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 형태든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광고기술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문안,  내용 등). 일례로 큰 갈비집 광고를 할 경우 '장안의 명물 모모 
갈비집 드디어 탄생'이라든지 '10년 전통의 한우 갈비..' 등 이러한 문구는 상당히 식상함을 
느낀다는 얘기다. 그러한 문구는 우리가 너무도 줄기차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미스터 맘마>라는 최민수, 최진실 주연의 영화포스터를 보았다. 종전의 
영화포스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기존의 영화포스터가 일률적이었던 것에 비해 
포스터의 크기도 다양했으며, 포스터 사진 옆에 마치 만화처럼 대화내용을 기입, 종전의 느낌과는 
전혀 색다른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결과는 이 영화는 국산영화로서는 근래에 보기드문 
흥행을 기록한 걸로 알고 있다. 훌륭한 광고가 가져온 좋은 결과인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광고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는 광고라면 그건 
쓸데없는 자원낭비가 되고 만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펼치자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전단들, 나는 그 전단들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모모닭도리탕,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금번 소생이 모모동 4거리에 멍멍건강원을 개업하였사오니 근간 찾아주시면 
어쩌구 저쩌구...' (끝까지 보고 있자  보고 있자면 졸음이 온다). 마치 이집과 저집이 똑같은 
느낌의 문장과 한 가지 규격으로 질서정연하게 제작된 전단들, 차라리 그 돈으로 인군 아파트를 
지목하여 이쑤시개나 메모지, 혹은 화장지 등의 일상용품에 상호와 간단명료한 문구를 삽입해서 
나누어준다면 적어도 한 번의 관심은 유발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 밖에도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일정한 규칙을 통한 경품서비스라든지 가게 전면을 
이용한 자체광고 등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연극, 연주회 등의 예매처도 활용할 만하며(한식집일 
경우엔 어느 큰 직장의 상사, 혹은 인근주민의 계모임 등의 적극적인 후원, 혹은 지원 등을 통한 
적극적인 홍보), 분식이나 레스토랑의 경우, 대학축제 때의 행사지원이나 자체가게의 작은 
문화행사(가게상호로 진행하는 오행시 대회, 일년에 한두 번씩 진행할 수 있는 연례행사: 자전거 
안주, 혹은 맥주 마시기 대회, 우유 마시기 대회) 등으로 젊은 층과의 유대와 관심을 나눌 수 
있는 그러한 홍보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위의 광고, 홍보내용을 보노라면 소요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거란 걱정도 들것이다. 하지만 분명한건 먼저 쓴다는 것뿐, 광고에 소요된 비용은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
 결론적으로 광고란 이례적이고 신선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며 종전방식을 탈피한 창조적인 
방법을 선택해야만이 효과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다. 또한 지면을 통한 광고일 경우 글씨체나 
글씨의 색채, 삽화 등은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사항임을 관과해서는 안된다.
    (전략3) 각종 비품과 소모품은 눈에 띄고 특이하게
  만두, 김밥, 통닭, 족발, 튀김, 제빵처럼 이동이 용이한 품목들은 보통가게에서 구매해 손님이 
들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그 음식들을 담아갈 봉투가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업소의 봉투나 소모품은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업소의 봉투는 손님이 음식을 
운반하는 데만 소용되는 것이므로, 색체나 글씨제, 혹은 봉투의 전체적인 모양 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나가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눈에 잘 띄고 특이한 모양으로 그 사람의 기억에 각인 돼야 
차후 연이은 매출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엔 전에 비해 좋은 디자인과 색채도 많이 눈에 띄지만 다른 업소보다 훨씬 처지는 
봉투도 적지 않다.
  장사는 소홀하기 쉬운 아주 적은 부분에 민감해야 이긴다. 봉투뿐만 아니라 성냥이라든지 간편 
광고지 등 일반 소모품은 손님이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갖추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전략6) 안될 싹은 과감히 없애라
  장사는 계획할 때 메뉴가 미리 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보면 모든 메뉴가 
공평하게 팔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잘 팔리는 것도 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품목이 많이 팔리기도 할 것이다. 
개업 후 한두 달 동안 품목별 판매목록을 작성해 판매가 월등히 부진한 품목은 과감히 없애는 게 
좋다. 그리고 판매가 많은 품목을 더욱더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치중해야 한다. 잘 팔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매상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냥 유지하다 보면 재료비에서도 
손실요인으로 작용하며 손님 입장에서는 복잡한 메뉴의 가짓수로 인해 전문성이 결여돼 보이게 
마련이다.
    (전략7) 신선한 D.M발송으로 고객의 관심을 끌어라
  일반적으로 진행하는 전단 같은 방법이 아닌 항공우편 봉투나 특이한 규격의 봉투를 사용한 
D.M으로 내용에서 타업종과 엄격히 차별된 그러한 D.M발송은 받는 이로 하여금 신선함을 
유발시키고 그런 감정은 호기심과 관심으로 발전할 수 있다.
    (전략8)회사체계를 갖추어라                                                            
  회사체계를 갖추면 종업원의 소속감을 고무시키고 경영하는 본인 자신도 일에 질서가 잡히며 
더불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까지도 얻게 될 것이다.
  요즘에 일식집을 가보면 주방장이라 불리던 주방기술자를 '실장'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걸 볼 
수 있다. 대단히 좋은 현상이다. 개중에는 그러한 현상을 업주가 주방장을 다독이기 위해 
사용하는 말장난이라고 판단하는 이도 있으나, 본인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설령 그런 얄팍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해도 그 결과는 상당히 좋게 나타나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음식업만 하더라도 식당은 음식점, 밥집 등으로 불리우고 그 경영자는 밥장사, 음식장사, 먹는 
장사, 빵장사, 고기장사, 물장사 등 많은 호칭으로 불리고 있으나, '요식업이라든지 음식업 등 
일반인들이 듣기에도 상스럽지 않은 호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전자에도 밝혔듯이 음식업은 상당히 보람 있고 수준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이상한 분류를 하고 있다.
  사업가와 장사꾼이라는 명칭의 구분이 그것이다. 난 사업가와 장사꾼의 구분을 모르겠다. TV나 
전축을, 비누나 샴푸를 제조해 팔면 사업가이고, 음식이나 기타 생필품을 제조, 혹은 단순 
도·소매 형태로 팔면 장사꾼이란다. 거기에다 음식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 성공해 그 업소를 
체인점으로 하든지 그 가게의 숫자를 늘이면 그때부터 사업가가 된다. 소매업에서 도매업으로 
가야 사업가인지 아니면 도매업에서 제조업, 혹은 상장법인까지 설립해야 사업가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떨 땐 그 영업의 규모를 가지고 구분하다가 어떨 땐 그 영업의 종류룰 가지고 구분하기도 
한다. 정말 아리송한 일이다.
    (전략9)최신 흐름에 민감하라
  먹는 장사가 시작이 용이하다?
  먹는 장사처럼 수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곤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쉽고 그렇게 만만하다면 돈 못 벌 위인이 어디 있을 손가?
  먹는 장사는 그렇게 쉽고 우스운 사업이 아니다. 아니 과거에는 우습게 시작해서 우습게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렇지 않으며 앞으로는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만큼 이 땅의 수입원은 고갈되어 있고 그리하여 먹는 장사에 참여하는 숫자는 늘어만 가고 
있지만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눈과 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으며 경쟁식당의 수와 
내용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으며 경쟁식당의 수와 내용도 하루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또 약간은 지금도) 대구식당, 서울식당 간판만 걸어놓고 자기가 먹는 밥에 
그릇, 수저만 조금 더 사서 대충대충 장사해도 때가 되면 손님이 들곤 했다. 그러나 이제 
하룻밤만 자고 나면 갓 시집온 새색시의 몸단장처럼 저마다 갖가지의 모양새로 손님을 유혹하는 
식당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단골손님이 내 눈이 무서워 가까운 길 놔두고 뒷길로 삥 돌아 다른 가게로 들어서는 게 행여 
내 눈에 들어오면 5년 전 앓던 위장병이 도져 밥도 못 먹고 자리에 눕게 된다. 그렇다. 그렇게 
장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음식업의 단순히 먹는 장소로만 
소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식당도 문화의 공간이요, 휴식의 공간이다. 즐거움과 편안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못살던 시절 죽어라고 앞만 보고 내달리던 시절 우리의 선배, 어른들은 마라톤 선수가 
달리면서 꿀꺽 한모금 마시고 집어던지는 물통처럼 그렇게 대강 아무것이나 꿀꺽 한끼니 떼우곤 
했다. 그러나 한숨돌린 지금 우리는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우리 세대가 이럴진대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며 대접받고 자라는 요즈음 신세대들이 맞이할 
앞으로의 세상을 생각한다면 앞으로의 외식업은 고도의 감각과 노력 없이는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 필연성을 슈퍼에 나와 있는 각종 상품에서도 느끼고 있으며 사람들의 옷모양에서도 
느끼고 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옷의 디자인이 무슨 소용이 있었으며 상품의 포장이 무에 그리 
대수였던가, 그지 입는 것은 튼튼하고 값싸면 제일이요, 먹는 것은 양 많고 값싸면 최고였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의 욕구가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욕구형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으며, 그 흐름을 직시하고 파악할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전략10)업주가 반드시 지켜야 할 네가지 조건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음식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러한 경우를 보고 사람들은 
음식업이 수월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크게 밑질게 없는 장사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옳지 않다. 음식장사도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크게 밑질 게 없는 장사는 크게 벌지도 못하는 장사이며, 크게 벌일 수 잇는 장사는 크게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시내에 위치한 1백 평짜리 가게를 임대해서 10명도 넘는 종업원을 고용한 
사람이 자기의 영업계획이 잘 맞아 떨어졌다면 그는 불과 몇 년 안에 큰 부자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가정할 땐 한 달에 꼬박꼬박 1천만 원 이상씩은 손해를 봐야 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앞에 탁자 2개 놓인 분식집을 부부가 나가서 운영한다면 장사가 시원치 않다해도 손해볼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손해의 개념이 문제다. 두 부부가 남의 가게 종업원으로 종사를 한다 해도 백만 원 
이상은 될 것이고 조그만 가게라도 투자한 돈의 이자도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벌지 못하고 
흘러가버린 그 시간들의 손해가 가장 큰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그 부부의 경우는 영락없이 
손해인 것이다. 잃지 않았다고 해서 손해가 아니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첫 번째
  이제 다시 성공한 사람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음식업으로 성공한 사람이 10명 있다면 그들을 
눈여겨보자. 아마도 10명 중 8명 이상은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한 사람들일 것이다.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하면 어려워야만이 절실한 바람이 생기는 것이고 절실한 바람은 곧 처절한 
의지를 부르고, 그 처절한 의지가, 곧 사업의 가장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 좋은 맛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하고자 하는 의욕이 부족하다면 그 사업은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해서 나는 첫 번째 성공의 비결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꼽는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
  두 번째는 끊임없는 연구다. 우리 주위에 잘되는 가게는 무엇 때문에 잘되는가? 우리 주위에 
잘 안되는 가게는 무엇 때문에 잘되는가? 우리 주위에 잘 안되는 가게는 무엇 때문에 잘되지 
않는 건가? 가게 인테리어는 이런 스타일이 어떨가? 이 음식에 어떠한 재료를 첨가해야 색다른 
맛이 나올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꾸민다면 손님이 즐거워하지 않을까? 이렇게 끊임없는 
몰입과 연구가 당신의 성공을 만들어준다.
    종업원에게 고마움을 수시로 표현한다.
  세 번째는 종업원과의 좋은 관계이다. 당신이 운영하는 가게가 잘돼가고 있다면 당신은 두 
군데에 고마워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두말 할 것 없이 내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이고,  또 하나는 
나와 같이 그 손님을 대접하는 우리 가게의 종업원인 것이다.
  그 고마움을 수시로 표현해라. 때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 한마디가 그 종업원을 당신 
가게의 평생종사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배려와 관심이지만 그 다음은 물질적인 분배이다. 자신이 돈을 
많이 벌고 있다고 턱없이 나누어주자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종업원 사정만 생각하고 급료를 
마구 높인다면 큰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낭패스런 상황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급료의 인상이 아닌 그달 그달의 정해놓은 목표에 의한 성과금이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주는 방법도 권할 만하다. 아울러 종업원의 신상과 생활을 잘 파악하여 항상 관심과 
주의를 갖는다면 종업원이 나에게 해줄 약속이 무엇무엇이며 내가 요구한 사항이 어느 정도 
만족치에 도달했을 때 당신은 그 종업원에게 급료 외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위해 하루종일 고생하는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가능한 실천할 일이다.
    아침이 활기차야 더 많이 번다
  네 번째는 부지런함과 청결함이다. 어릴 적 잠에서 막 깨어나 무릎발로 마루로 기어나와 
마루와 지붕을 연결한 기둥에 기대어 미처 못 떨군 잠이 아쉬워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노라면 
이제는 돌아가신 먼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마당을 천천히 거닐다가 나를 보고는 
"일찍 일어난 개가 먹이도 많이 구하는 벱여." 하시곤 손목을 끌며 세수를 재촉하시던 기억이 
난다.
  업주가 아침 일찍 가게를 분주히 오가면 그 집의 종업원도 덩달아 바빠진다. 아침이 활기차지 
아니한 식당치고 돈버는 식당 없다. 업주가 졸고 있으면 종업원은 자고 있다. 가장 부지런해야 할 
사람이 업주이며, 부지런한 업주일 때 부지런한 종업원을 얻는다.
  어느 낯선 식당에 들어갔을 때 깔끔하고 정갈한 복장의 종업원과 기물들을 보게 되면 마음이 
안심된다. 그러나 복장도 지저분하고 손톱에 때까지 낀 종업원이 아무말 없이 물컵을 덜컥 
내려놓고 가는 식당엘 가면, 나는 갑자기 두고온 물건이 생각나거나 급한 일이 생겨 황급히 그 
식당을 나오고 만다. 아마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일걸.
  이상 네 가지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당신은 머지 않아 부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사업의 
성공이란 도깨비 방망이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두들기면 돈 나오고 두들기면 집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는 바로 당신의 마음, 그리고 생활자세에 있다. 우리 모두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도깨비 
방망이를 끄집어내어 마구 돈을 만들자. "돈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전략11)서비스의 질로 승부하라
  요즘음엔 참으로 시장이 많다. 가끔 다방에 들러 차 한잔 하고 있으면 "K 사장님, 전화예요." 
하는 소리에 두세명이 같이 일어선다. 그만큼 흔해진 호칭이다. 사장, 몇 십억을 투자한 어느 
중소기업의 진짜(?) 사장이 얼마전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이봐 장형, 이거 정말 사장노릇 못해 먹겠네. 몇십 년 고생 끝에 수십억 투자해서 겨우 회사 
하나 만들었는데 내가 일 년에 벌어들이는 수익금이 얼만지 아나? 잘 돌아가면 은행이자야. 
그런데 자네는 얼마 투자에 얼마 번다고? 기가 막히군. 기가 막혀..."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산업전선에서 많은 사원에게 급료를 주며 일 년 
내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야 조금씩 조금씩 커나가는 것이 우리의 중소기업들이다.
  그렇다면 음식업이 성공해서 그 사장이 투자한 돈의 10분의 1을 가지고 그 사장의 일 년 
벌이와 똑같이 벌어들인다면 이 혜택은 누가 주는 것인가? 그것은 내 가게를 찾아주는 고마운 
손님들이 주는 것이다.
  회사는 큰 돈 들여 광고도 하고 영업사원 여럿 두어 우리 물건 사달라고 판촉도 하고, 사장은 
사장대로 밤마다 억지술 먹어가며 일 년을 꾸려나가는 데 음식업을 하는 이들은 도대체 무얼 
해주냐? 수익을 주는 손님들에게 무얼 해주고 있냐?
    효과적인 서비스 방법
  나는 외식을 하고 그 외식비에 해당하는 충분한 감사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선 안된다. 
그렇게 해서 되는 장사라면 그건 그리 큰 수익을 올리는 가게가 아니다. 그리고 계속 번창할 
가게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이제 음식점은 배만 채우는 장소에서 탈피해야 한다. 앞으로의 음식점은 문화공간의 역할도 
함께 해야 하며 내집만큼 편하고, 우리 식구만큼 날 위해주는 그런 자리가 돼야 한다. 남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당신이 차린 가게에서 먼저 실천한다면 남조다 먼저 시작한 시간만큼 당신은 
돈을 벌 것이다.
  1. 큰소리로 인사해라
  인사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주인도, 음식을 나르는 이도, 주방에서 일하는 이도, 
모두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2. 항상 웃어라
  어딘가 한군데 고장난 사람처럼 매일매일 웃어라. 웃는 자에게 침 못 뱉고, 웃으면 복이 온다 
했지 않은가. 그대들이 웃으므로 손님이 웃고 가게 전체가 활기차진다.
  3. 바삐 움직여라
  한 사람의 손님이 홀에 앉아 있어도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고 활발히 움직여라. 조금이라도 그 
손님이 한적함을 느낀다면 그 손님이 우리 가게에 오는 횟수도 그만큼 한적해질 것이다.
  4. 손님이 음식 탓하면 재빨리 교환해줘라
  눈에 두드러지지 않은 음식의 흠을 손님이 탓한다고 버티지 말고 재빨리 교환해줘라. 그리고 
조금도 서운함을 보이지 마라. 더욱더 정성을 다해라. 항상 맑은 날만 없듯이 손님도 별의별 
손님이 다 있게 마련(그러나 경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까다로운 손님이 일단 단골이 되면 그 
지속적인 성원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5. 보너스를 넉넉히 주어라
  기대 이상의 수입이 발생하면 종업원은 물론 손님들에게도 그 이익의 잉여분을 반환해라. 
그것은 다시 당신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그 이익의 반환방법은 광고편을 참조하고 
기타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별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전략12)새로움은 곧 돈이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발한 착상으로 사업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기막힌 
지혜를 지닌 천재들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은 어느 날 발견한 기발한 아이템으로 오늘을 맞이했다. 그것은 우연히 용꿈 꾸고 만난 
행운이 아니다.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나 후일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들의 
도전심과 연구심, 그리고 삼루에 대한 색다른 시각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언제 어느 때라도 무엇인가를 연상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으로 생기는 일종의 습관이다. 그렇나 습관 속에서 
새로움이 탄생하고 그 새로움이 곧 사업으로 이어진다.
  '새로운'은 곧 돈이다.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꿔보자. 1백 번의 쓸데없는 발상이 
101번째의 새롭고 놀라운 발견을 찾아낸다. 1백 번의 쓸데없는 발상 없이 101번째의 성공은 없다. 
쉴새없이 몰두하고 거꾸로, 옆으로, 뒤로 시각을 바꿔보자. 나에게 밀려오는 사회의 모든 
고정관념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자.
  여지껏 그렇게 해왔고 모두들 그렇게 한다는 것에 더 이상 속지 말자.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것밖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을까? 만약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 만약 또 다른 길이 
있다면? 하고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한 반복 속에서 어느날 우리는 정말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훌륭한 것들은 독창력의 결실이다."
    음식업자의 자격과 각오
음식업자들이 성공하기 위해선 몇 가지 지녀야 할 것이있다. 첫째로 취급하는 음식에 남다른 
자신이 있어야 하며, 둘째는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처절한 승부욕이 있어야 하며, 셋째로 
인테리어 감각과 비지니스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 외에도 종업원 관리능력이나 메뉴 개발, 서비스 개발에 남달라야  한다. 위의 내용을 보고 
어떤 이는 그 많은 걸 어찌 다 갖출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제목을 붙여 
나열하면 거창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위의 내용은 거의 비슷한 일직선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 겁낼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많은 걸 굳이 겸비하지 않았더라도 돈을 벌 수 있다. 취급하면 음식의 특이함이나 
그 맛의 각별함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번 사람도 있다. 당신도 50리 밖에서 당신이 취급하는 
음식을 찾을 수밖에 없는 각별한 음식의 노하우가 있다면 위의 내용에 충실하지 않더라도 성공할 
수가 있다.
  위에 나열한 점들은 조건이 아니며, 재목에도 밝혔듯이 먹는 장사를 하고자 하는 이가 
갖추어야 할 각오와 자격인 것이다.
    시대에 맞는 상술을 빠르게 포착
  이쯤에서 우리는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모래 위에 지은 대궐이 과연 모진 바람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봄직하다. 어떠한 맛이나 음식의 특이함으로 얼마간 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하더 라도 시대의 흐름에 맞는 상술을 지니지 못한 자는 그 돈을 지니기가 힘든 
법이다. 또한 잘되는 장사를 10년, 1만 년 지속할 수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기에는 우리의 
현실은 장애가 많다. '호사다마'라 하지 않았던가. 좋은 일에는 어려운 장애도 많이 생기는 
법이다. 예를 들어 그 음식점이 남의 건물을 임대했다고 가정하면 그 임대관계에 따른 변동도 
쉽게 예측할 수 있으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마시나 영업 내용을 모방하는 가게들이 
속출할 수 있고, 또한 그 음식을 손님들이 과연 얼마만큼 줄기차게 선호할 수 잇는가 하는 
의문을 상상하는 건 그리 무리가 아닐 듯싶다.
  불과 10년 전에 있던 음식점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면 우리는 굉장히 놀라워한다. 
놀라워한다는 것은 이례적이기 때문이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10년을 견디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도 되는 것이다.
    성공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음식업은 쉽다

  비단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음식업자는 많은 것을 갖추어야 한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에 유달리 뒤떨어진 우리네들,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야 그때서야 급한 
불 끄느라고 급급해 하는 우리의 습성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그냥 신고하고 장사하면 
그만이던 음식업이 이제는 각 지역 요식업협회에서 허가 전 교육도 며칠 받고 허가 후에도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그만큼 음식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미리 준비할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주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래도 굉장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보자. 언행이 매끄럽지 못하고 지독히도 유식하지 아니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사람 몇이서 얼마의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베풀었다고 가정할 때, 초대받은 사람 
앞에 공짜라고는 하지만 불결해 보이는 음식, 혹은 굉장히 맛없어 보이는 음식을 공손하지 않은 
말투로 권한다면 그 초대가 즐겁겠는가? 그래도 공짜라고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즐겁기는커녕 
공포감마저 느낄 것이다.
  다소 과장된 감은 있으나 그만큼 음식업의 영업행위는 인간의 감정과 밀접한 것이다. 내 집에 
오는 손님 하나하나의 감정을 손상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야하며 오히려 즐겁고 가까운 
식사대접으로 내 집을 기억하도록 해야 할 일이다.
  음식업은 쉽다. 적어도 꼭 성공을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잇는 자에게만 음식업은 수월하다. 
손님을 내 집사람 대하듯이 정성을 가진 자에게만은...
     점포의 위기 극복 방법
  요즈음 전에 비해 수입이 많이 줄었다. 수입이 좋던 때는 한 달에 중형아파트 한 채 값도 
벌었다. 그런데 요즈음 15퍼센트 정도 매상이 급감한 것이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이 항상 
청신호일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먹는 장사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다른 업종에서는 안되던 사업이 다시 좋아지고 얼마의 기간이 흐르면, 다시 하향선을 
그리고 하는 것과는 달리 이 식당업은 일단 하향 사이클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회생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이미 그 식당이 갖고 잇는 분위기나 맛, 서비스, 관리능력이 문제를 보이고 잇다는 
얘기이고 그런 것들을 다시 복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혁신이 하향선을 막을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애초 그 식당에 투자됐던 시설 금액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비용이나 노력이 재투자된다는 
점이 우릴 힘들게 한다.
  점포가 퇴보했을 때는 매매도 좋은 방법

  또한 업주가 점포의 퇴락요인에 대해 정확한 처방과 그 당시의 소비흐름(애초 점포개설 
시기에서 많이 지났을 때)과 소비자의 기호 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새로운 
시도가 엄청난 재산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행하던 사업이 점점 후퇴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의 점주들은 가장 주된 처방으로 그 식당의 매매나 전세(재임대) 등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 
대 그 식당의 임대조건이나 시설조건에 따라서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방법이다.
  내가 업주라고 가정했을 때 내 식당의 퇴보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경우는 점포의 매매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점포의 매매에는 어느 정도의 재산적 손실도 
각오해야 한다. 영업이 잘되지 않는 점포는 남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게 마련이며, 그에 따라 시설 
및 권리금에서 손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가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상징후가 발생하면 그에 따른 조치에 신속해야 
한다. 그리고 점포의 위기가 곧 실패라는 단어로 연결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어려움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라는 말이다. 그 시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더 큰 성장도 처절한 실패도 있다.
    바뀌어야 한다
  나는 91∼92년 동안 '훼밀리 관광회사'라는 회사를 경영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다. 그 사업의 내용은 훼밀리 카드라는 서비스 세일 카드(service sale card)를 
회원들에게 판매하여 각종 관광서비스와 가맹점을 이용한 할인혜택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맹점에 들러보곤 했다. 그즈음 매일 느꼈건 것은 구매금액이 큰 
가맹점에서는 카드이용회원이 다소 있었으나 이용금액이 적은 (예를 들면 분식집, 혹은 커피 
전문점 등) 업소에서는 하루 한두 명이 고작이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습관상 능히 예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커피값 
1천원, 1천5백 원에 카드를 내밀기가 창피했던 거다. "에이! 그거 10퍼센트 15퍼센트 깎아보아야 
1,2백 원인데 내밀어봤자 나만 쫀쫀해 뵈고..." 대충 그런 심리였을 것이다.
    2천만 원을 날린 사업
  결국 그러한 너그럽고도 멋스러운 많은 이들의 성원에 힘입어 우리 회사는 출범 10개월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자본금 2천만 원으로 시작한 회사였기에 금액적으로는 그리 ms 손해는 
없었지만 못난 이 몸을 믿고, 잘난 회사를 맡고,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줬던 그 많은 사람들, 특히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다니던 K. J. B의 희망과 의욕에 지칠 줄 모르던 
그들에게 입사합격 소리가 채 떨어지기 전에 "야호!" 하고 소리치던 그 순수한 젊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기업이 이윤을 못 남기면 죄악을 남긴다는 말이 이 순간에도 귓가에 맴돈다. 아픈 기억이다. 
돌이켜보면 전자에 언급한 체면의식이나 적은 돈의 절약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시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지속적이고도 과감한 광고와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영업논리가 부족했던 것이 가장 
설득력 잇는 패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푼돈이라도 불필요한 지출은 할 이유가 없으며, 내가 가진 권리라면 단돈 일 
원이라도 챙겨야 한다. 그런 사고가 정립됐을 때 비로소 선진국형 경제생활인으로 입문하게 될 
것이다.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주위에서 이러한 말들을 왕왕 듣게 된다.  "나에게만 손해만 없다면 나설 이유가 없지.", 
"그저 모나지 않게 둥글게 가는 거야. 튀어나오던 망치밖에 더 맞아?" , "죽어라고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때가 있는 거야. 때가.." "될 놈은 어떻게든 되고 안될 놈은 때려 죽인데도 안뒤야.", 
"야! 그놈이 잘나서 벌였냐? 운이 좋은 거지, 운이." 아마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많이, 그리고 
흔하게 듣던 말들이리라.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대단히 잘못된 
말들임을 알 수 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인생낙오자들이나 쓸 말이다. 대단히 비겁하고, 옹졸하며, 이기적이고 
치사한 이 말들을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도 자주하고 나도 한두 번 해봤다.
  위에 나열한 그러한 말들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와 분쟁과 미움을 
만드는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바뀌어야 한다 2
  몇 년 전 TV좌담회에 전직 장관을 지낸 분이 나온 적이 있다. 우연히 그 프로를 보고 있던 그 
대담내용에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대담내용은 전직 장관을 지낸분이 음식점을 개업했는데 그 
사실이 충격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전직 장관이 식당을 차릴 것이 온국민이 지켜보는  
TV좌담회에 소개할 정도의 충격이란 말인가? 전직 장관이 음식점을 낸 것이 어떻게 화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회자는 말했다. "전직 장관이 음식점을 차린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라고 (어렵긴 뭐가 
어려운가. 간판 달고 음식 만들어내면 되지).
  그 말은 결국 식당이란 사업은 지위도 명예도 없는 무지렁이들이나 하는 거지 고위관리를 지낸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 아닙니까? 라는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그 좌담회는 식당을 하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당신들은 어떠한 높은 명예나 지위를 
가질 수도, 가졌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오"라는 말을 온 국민이 듣는 가운데 공표한 거나 
다름없다.
  난 그날 내내 불쾌했다. 하루종일 입안에 볼멘소리를 굴리고 다녔다. 그따위 사고방식을 가지고 
방송을 만들고 내보내며 그렇게 남의 심사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한 
우리 의식은 영영 문화후진국 대열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라고...
  나는 배웠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거라고. 나는 보았다. 골목길 포스터에 망치 들고 일하는 
남자의 그림을 그려 놓고, 그 밑에 "아빠, 나는 아빠가 자랑스러워요."라는 표어를... 그러나 그 
방송을 보고 그러한 것들이 참으로 허망하게 느껴진 것이 단지 그 좌담회 때문만은 아는 듯 
싶다. 바뀌어야 한다. 바뀌어도 한참은 바뀌어야 한다.
  핑계, 그 치졸함
  내가 그 장사를 하는 동안 나의 성과를 보고 많은 이웃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는가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들도 돈을 많이 벌고자 했다. 그들의 물음은 
한결같았는데, 그 물음은 대충 이러했다.
  "돈이 얼마 있는데 무슨 장사를 해야 돈을 벌까?"
  "이런 거 하나 하려면 얼마나 있어야 하지?" 
  "먹는 장사가 그래도 괜찮지?"
  "나도 무얼 하나 해야 쓰겠는데 무얼 해야 하나 해서..."
  "모모 동에 가게 하나 났다는데 거기다 이런 거 하면 잘될까?" 따위 등등이다.
  이러한 물음들을 만날 때면 난 참으로 난감하고 두려워진다. 난감한 건 해줄 말이 너무 낳기 
때문이고 두려운 건 한국 사람의 유별난 버릇 때문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핑계박사들이 많다. 사업이 망했을 때도 자기 잘못으로 망한 사람은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돈이 부족해서, 동업자가 나쁜 놈이라, 경기가 안 좋아서, 운이 안 
따르기에, 눈에 무엇이 씌어서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핑계들이 많다. 그렇게 핑계박사들이 
이런 사업을 이렇게 하면 좋겠다 했다가 잘되면 자기 잘났다고, 못되면 내 탓이라고 할 
것이뻔한데 어찌 함부로 입을 열 수 있을가(그런 손해보는 장사 왜해?). 
  그러나 성격 탓으로 그러한 손해보는 장사도 몇 번 겪어보았다. 이젠 죽어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가도 딱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면 아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잘되면 만나기 
힘들고, 안되면 억울한 소문만 무성했다. 깨끗이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 또한 크게 하는 
법이다. 우린 모두 그걸 배워야 한다.
  죽는 것도 법이 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자기가 생각한 이상으로 큰 성과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러한 확률보다는 
기대한 만큼의 결과는커녕 엄청난 손해로 끝을 맺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물론 그 성공과 
실패의 내면에는 남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원인이 숨어 있겠지만 남들은 그 속을 알지 
못하며 굳이 알려고 들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은 부러움으로, 실패한 사람은 무관심으로 지나칠 
뿐이다.
  우리는 모든 사업을 시작함에 있어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공존함을 잘 알고 있다. 그 사업의 
성격상, 또는 사업을 진행하는 사람의 능력 정도로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크고 작겠지만, 그 
결과에 대한 장담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야 말로 '열어봐야 아는 것' 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업 시작은 어렵고 힘들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고민하고, 어려워하고 힘들어한다 해도 '실패의 확률'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확률을 각오해야 한다. 나의 능력과 최선의 노력이 그 '실패의 
확률'과 맞부딪쳤을 때를 각오해야 한다.
  "그럴 리가 없다거나", "나는 문제 없어" 등의 염불은 실패의 확률을 피해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주문'이지 실패의 확률을 없애버리는 '주술'은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실패의 확률'과 만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 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진짜 실패'일 수도 있고, 또는 '예비 실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실패라는 단어와 
'종말'이라는 단어를 혼동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패가 곧 끝은 아닌 것이다. 먼길을 가는 
나그네가 지팡이가 부러졌다고 가는 길을 멈출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패의 확률'과 만났을 때, 사람들은 흔히 "망했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그 표현은 
옳지 않다. '망'이란 말은 그 존재의 완전소멸을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산의 손실이 곧 그 
사람의 소멸이라는 연결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결국 망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딱 한 
번' 사망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인데도 우리는 그 말을 자주 사용한다.
  망한 때도 법이 있다.
  자신의 재산적 피해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 골골 피해를 주고 그래서 결국 
여러 명이 단체로 손해를 보는 것을 많이 보아온 사람들은 "죽으려면 보증을 서라" 는 말을 
만들어내서 보증인만 있으면 쉬 일이 풀릴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망해도 뒤를 생각하고, 적어도 본인과 가까운 주위 사람들에게 만큼은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길만이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렇듯 당연한 일도 이행하는 자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망'한다는 말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고나서도 두고두고 원망을 듣고 내 주위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만드는 
그러한 '망함' 은 참으로 어리석은 죽음이다. 나의 망함이 모든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나의 흥함을 모든 이들이 염원할 수 있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성공습관
  코비 리더쉽 센터의 창설자 겸 회장인 스티븐R.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그 동안 자신이 연구해온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7가지의 습관을 소개했는데, 그 
7가지 습관은 다음과 같다.
  1. 주도적이 되라.
  2.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3. 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4.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5.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6. 시너지를 활용하라.
  7. 심신을 단련하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정해진 성공의 이치에 또 한 번 탄복하게 되는데 그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기억되어지는 한 줄이 있다.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시작하라'란의 제일 윗부분에 나오는 데이비드 스타 조단'의 "이세상에서 
진정한 우수함이란 올바른 삶과 분리될 수 없다"라는 글이다. 어찌 보면 으레 듣게 되는, 그래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하지만 실상 그 진리를 실행하고 지켜나가는 노력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순간 생각날 때마다 진행하는 일회성의 성격을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 더욱 어렵게 한다.
  그 글이 지니고 있는 뜻대로 올바른 삶이 진정한 우수함을 창조해낸다는 것까지는 모든 이가 
마음으로 동의하나 '올바른 삶'이라는 큰 제목 앞에서는 그 이행 여부에 자신감을 내보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승리자
  '올바른 삶'이라는 큰 제목은 그 한계성을 긋기가 쉽지 않고 몇 가지의 행동이나 표현으로 
대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영원한 승리자란 올바른 삶을 진행하는 자의 
것이란 말에 우리는 모두 동감한다.
  결국 '올바른 삶' 이란 각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조금씩 틀린 모양새를 지니고 
있더라도 본인이 '올바른 삶'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인식 하에 서로 같아지는 
것이리라.
  올바른 삶을 진행하는 방법에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것은 어떠한 반복성으로 결정되는 자신의 
올바른 습관이며 그 습관이라는 마디마디를 하나로 이어지는 자신의 올바른 생활을 견지해 
나가는 것. 그것이 올바른 삶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에서 진정한 우수함이란 올바른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영원한 인생의 숙제이자 흔들리지 않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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