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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탐방] 1607년, 조선 사신단의 일본 조총 직구 후기 - 일본 사카이시 탐방
📌 1607년 조선 사신단이 일본에서 조총을 직구한 목적과 구매처는 어디인가?
임진왜란 이후 조총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생산량과 품질이 부족했던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 회복을 겸해 일본의 대표적인 조총 생산지였던 사카이(구 개빈촌)에서 조총 500자루를 구매하려 했습니다.
💡 당시 사카이에서 조총을 구매하려 했던 조선의 구체적인 상황은?
조선은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던 일본 조총 수입을 위해 생산 비용을 모아 구매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품질 좋은 조총 확보에 절실했으며, 이를 위해 포수 3명을 동반하는 등 조총 구매에 진심이었습니다.
1607년 조선 사신단이 조총 직구를 위해 일본의 대표적인 조총 생산지였던 사카이시를 탐방한 생생한 여정을 추적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 부족을 겪던 조선이 일본의 선진 기술을 배우고 실제 물품을 대량 구매하려 했던 구체적인 전략과 실상을 파헤치며, 당시 일본의 규격화된 분업 생산 시스템과 독특한 총열 제작 방식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절실했던 국가적 필요에 대응하기 위한 실용적 노력과 당시 양국의 기술 격차를 이해하는 실질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1.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조총 부족과 1607년 일본 사신단의 조총 구매 임무
1.1. 임진왜란과 조총의 유용성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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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규모: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약 16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으며, 이 중 약 15%에 해당하는 24,000정 가량이 조총으로 무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조총 제작 노력: 조선은 전쟁을 겪으며 조총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임진왜란 초기부터 조총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조선은 항해사들을 통해 조총 제작을 시도했으며, 조총 관련 기술과 정보도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조선의 생산 능력 한계: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도 조총 제작은 가능했지만, 생산량이나 품질 면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전쟁 후에도 지속된 부족: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도 조선은 여전히 조총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1.2. 1607년 사신단의 조총 구매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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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 사신단의 파견: 1607년, 조선은 일본에 사신단을 보냈다.
공식적 임무: 사신단의 주요 임무는 일본이 보낸 화의 국서에 대한 답신을 전하고,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별도의 중요한 임무: 공식 임무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가 있었는데, 바로 조총 구매였다.
실제 조총 구매 성과: 사신단은 개빈촌으로부터 조총 500자루를 사가지고 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량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3. 조총 구매지 '개빈촌(사카이)'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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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빈촌의 위치: 개빈촌은 사카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현재는 오사카 남부의 한적한 중소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화천, 섭진, 한해 세 주의 경계에 끼어 있어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개판과는 육지가 연달아 있었고 거리는 30리였다.
사카이의 중요성: 에도 시대까지 사카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조총 생산지였다.
현재의 흔적: 현재는 조총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지만, 도시 곳곳에서 조총과 관련된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1.4. 사카이 조총 생산 배경 및 사신단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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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시립박물관 방문: 사카이 조총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사카이 시립박물관을 방문했다.
사카이의 조총 발달 배경:
13세기와 14세기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철을 다루는 장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리를 다루거나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 모여들었고, 에도 시대에 철포(조총)와 도자기 제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규슈 남쪽과 연결되는 항로(해상 루트)를 가지고 있어 조총에 필요한 재료들을 수입하기에 용이한 입장에 있었다.
사신단 구매 의지: 사신들이 사카이를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이는 철저한 준비의 결과였다.
사신단은 출발 전 조총 구매 예산을 준비했다.
선조는 특별히 성능 좋은 조총을 구매하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거래를 위해 포수 세 명을 데리고 갈 정도로 조총 구매에 진심이었다.
기술 격차 인정: 일본이 조총 제작을 시작한 것은 조선보다 약 50년 가까이 앞선 상황이었기에, 조선이 상대적으로 제작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조총 생산 중단 의견: 당시에는 조총 생산을 잠시 중단하고 그 비용을 모아 일본 조총을 수입하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의견에 따르면, 조선이 정해진 기간(4~5년) 동안 군기를 만드는 것을 정지하고, 그 비용으로 외국의 조총을 사면 일이 훨씬 편리할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15필을 지불한다면 그 품질이 정교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카이 인지: 당시 조선은 이미 일본 조총의 품질을 인정하고 구입하려 했기 때문에 조총 생산지인 사카이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사카이 조총 공방의 구조와 이노우에 가문의 분업 생산 시스템
2.1. 조총 제작 공방의 규모와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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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의 수: 사카이에는 '철포(조총)'라고 불리는 공방(친방)이 있었으며, 대략 20여 개 정도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에도 시대 중반의 구조: 에도 시대(17세기) 중반에는 약 5명 정도의 주요 공방이 리더 역할을 하며 전체를 이끌어갔다.
에도 시대 후반의 변화: 18세기경부터 실력을 갖춘 조총 제작자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지역에 전문화된 공방들이 생겨났다.
이노우에 가문: 사신단이 주목한 이노우에 가문은 에도 시대 유명한 조총 제작자 집안이자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조총 제작 브랜드였다고 한다.
이노우에 가문의 저택은 에도 시대 주거지이자 조총 제작 공간으로 온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사례이며, 사카이시에서 지정 유형 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하고 있다.
2.2. 조총 구매 상담 장소와 재활용된 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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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장소: 이노우에 저택 내에는 조총을 구매하러 온 손님과 상담하던 장소가 남아 있는데, 어쩌면 에도 시대에 조선 사람들이 이곳에서 가격 협상을 했을 수도 있다.
조총 부속품과 자재 발견: 저택을 조사하던 중 조총의 부속품과 자재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조총 제작 자재들이 건축 자재로 재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2.3. 조총 제작의 분업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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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가문 고문서 기록: 이노우에 저택 창고에서 발견된 고문서에는 조총 부품들의 거래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분업 내용: 이 기록에 따르면, 목공을 하는 사람, 화약을 장착할 바라 장치(발화 장치)를 만드는 사람, 문양을 넣는 사람, 탄환을 만드는 사람 등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여 조총을 만들었다.
조선의 분업 내용: 조선의 금이형 등록 기록을 보면, 야장, 찬열장, 연마장, 조가장, 장가장, 취색장 등 다양한 장인들이 모여 분업 생산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 조선 역시 분업화를 통해 조총을 생산하고 있었다.
3. 일본의 총열 제작 방식 및 규격화 시스템
3.1. 일본의 독특한 총열 제작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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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열 제작 1단계 (기본 형성): 가운데 철봉을 두고 주위의 철판을 두드려 둥글게 말아 기본 총열을 만든다.
총열 제작 2단계 (보강): 이렇게 만든 총열 위에 다시 한번 납작한 철판을 둘둘 말아 감싸서 한 번 더 보강한다.
총열 제작 3단계 (내부 나사선 제작): 총열 끝부분을 뜨겁게 달구고, 여기에 나사 형태의 미전(기폭 장치)을 넣고 두드려서 총열 내부에 나사선을 만든다.
총열 완성: 미전까지 설치하면 총열이 완성된다.
사카이에는 대포 수준의 큰 총열도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앞서 설명한 대로 총열 위로 철판이 둘둘 말려 있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3.2. 조총의 규격화 및 대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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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생산을 위한 규격화: 조총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는 규격화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규격화의 내용:
구경(총구의 지름)과 길이를 포함하여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몇 문(何門)'과 같은 단어가 조총의 무게를 나타내는 규격 이름이 되었다.
전쟁 시 생산 증가: 임진왜란이나 이후 일본의 큰 전쟁 시기에는 실질적으로 생산이 늘어났을 것이라고 언급된다.
최대 크기 조총의 등장: 길이는 3m, 무게는 무려 135kg에 달하는 일본 최대 크기의 조총이 존재한다.
이 거대한 총은 조총이라기보다는 대포로 불러야 할 수준이다.
3.3. 초대형 조총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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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사용 여부: 사카이시 하계사(역사 담당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거대 조총은 아직 실전에서 사용한 흔적이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기념품적 성격: 황동 상감 기법으로 신(神)의 가오(가오)를 빌리는 글자를 정성스럽게 새겨 넣은 점을 볼 때,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념품이나 상징적인 성격을 띤 조총일 확률이 높다.
화약 재료 조달: 이 정도 크기라면 상당한 양의 화약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며, 일본은 화약 재료를 다음과 같이 조달했다.
유황: 일본의 지방, 특히 규슈 지역의 화산에서 얻었으며, 이를 운반해 오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초석: 일본 내에서 운반되는 방식으로 조달되었다고 한다.
조선과의 비교: 일본도 화약 재료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자체적으로 유황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조선의 사정보다 나아 보였다.
4. 조선 사신단의 노력과 조총 발전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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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변화의 흐름: 조선과 일본 모두 조총을 주력 무기로 사용했지만,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총 역시 밀려나게 되었다.
사신단 노력의 의의: 400여 년 전 일본 최대 조총 생산지를 찾았던 조선 사신단의 모습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더 빨리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노력은 이후 이어지는 조총의 생산 및 성능 계량을 위한 수많은 시도 중 하나였다.
조총의 나라였던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모두 제한된 상황 속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조총을 발전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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