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
홍하상 지음
(주)비전코리아 / 2005년 6월 / 334쪽 / 10,500원
▣ 저자 홍하상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25년간 다큐멘터리 및 논픽션 분야에서 일하면서, 주로 경제ㆍ경영에 관한 책을 써냈다. 저서로는『이건희 - 그의 시선은 10년 후를 향하고 있다』『카리스마 vs 카리스마, 이병철 vs 정주영』『개성상인』『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등이 있는데, 그의 요즘 테마는 한국형 경영자상의 정립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쓴 책이다.
▣ Short Summary
오늘날 삼성은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경계를 넘어,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측면도 있지만, 삼성인들, 더 나아가 삼성을 이끄는 CEO들의 열정과 도전을 보면 그렇게 구조적인 측면으로만 말할 수 없는 강인한 힘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삼성의 CEO들이 처음부터 CEO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한때는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샐러리맨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는 삼성의 사장단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의 입사에서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의 위기 극복과 출세의 비결, 삼성에서 살아남은 노하우 등이 담겨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보편적인 경영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오랜 경험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경영 원칙들을 세워 온, 그들만의 독특한 자기관리와 삼성의 사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경영 스타일이 삼성이라는 그룹 내에서 어떤 식으로 발휘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구분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삼성 CEO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2부에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그들의 삶에 내재된 공통적인 노하우를 짧고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소개된 요약본에서는, 요약본의 특성을 반영하여 독자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2부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 다음 1부 이야기를 소개하는 방법을 택했다.
▣ 차례
1부 삼성의 CEO들
01 삼성그룹의 철벽 수비수 -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부회장
02 경영의 전도사 -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03 35년 반도체의 산 증인 -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04 삼성생명 글로벌화의 주역 - 배정충 삼성생명 총괄사장
05 관리 경영의 대부 - 배종렬 삼성물산 사장
06 휴대폰 하나로 세계를 개척하다 - 이기태 휴대폰 부문 사장
07 소리없이 강하다 - 송용로 삼성코닝 사장
08 삼성그룹 최장수 CEO -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
09 영원한 반도체 유목민 -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
10 든든한 지원사격 대장 -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지원 총괄사장
11 흔들면 기획이 쏟아진다 - 김순택 삼성 SDI 사장
12 뚝심의 제왕 - 이상완 삼성전자 LCD 담당 사장
13 작은 경영의 성공 - 원대연 삼성아트앤드디자인 인스티튜드 학장
14 삼성이 기른 초특급 엔지니어 - 임형규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15 변신 경영의 대가 - 강호문 삼성전기 사장
16 첨단기술 개발의 메카 - 손 욱 삼성 SDI 상담역
2부 그들의 노하우 - 삼성의 CEO들을 통해 본 7계명
1 신념을 가져야 한다
2 대의명분을 가져야 한다
3 위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4 작은 것에서부터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5 건강에 신경 써야 한다
6 자기만의 경영철학을 갖춰라
7 현장을 떠나지 마라
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
홍하상 지음
(주)비전코리아 / 2005년 6월 / 334쪽 / 10,500원
그들의 노하우 - 삼성의 CEO들을 통해 본 7계명
신념을 가져야 한다
삼성의 CEO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처음부터 최고 경영자가 되겠다는 욕심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자기 분야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로정신이, 월등한 자기 기량이나 철저한 직업정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삼성의 사장단들을 통해 봤을 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바로 자기 분야에 대한 신념이었다. 그들에게서는 이 신념이 일차적으로 선행된 후에야 프로정신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 대한 신념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한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배정충 삼성생명 총괄사장은 33년 동안 보험업 외길을 걸어왔고, 이기태 휴대폰 부문 사장도 줄곧 무선 사업 쪽의 일을 도맡아왔다. 이것은 CEO가 되기 위해서는,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해야 할 필요가 있고, 아울러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넌지시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삼성그룹의 2인자이며 이건희의 그림자라는 평가까지 받는 이학수 삼성구조조정본부장은 한때 숙직도, 일직도 모두 도맡아 하는 신입 말단 사원이었다. 허태학 사장 역시 호텔의 면세점 입주라든가, 각종 편의시설을 도입하는 데 맨발로 뛰어다녔던 사원 중 한 명이었다. 이들 외에도 대부분의 삼성 사장단들은, 어느 날 갑자기 그들에게 벼락같은 진급 기회가 주어졌다거나, 낙하산식으로 높은 직책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삼성 그룹의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온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자기 분야에 대한 신념이 없고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대의명분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신념은 개인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의 신념은 대의명분과 관련되거나 또는 그 이상의 개념으로 발전했는데, 삼성전자의 일명 ‘반도체 사장단’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대제 전 사장은 ‘일본을 이겨보기 위해서’ 백지수표까지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윤우, 황창규, 임형규 사장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반도체가 언젠가는 미래 기술을 선도하는 분야가 될 것이라는 확신 외에도, 한국을 최고의 반도체 기술 국가로 만들고 싶다는 또 다른 사명감이 있었는데, 이 사명감이 곧 대의명분이다.
훗날 삼성 CEO들이 CEO가 된 이후, ‘극일주의’를 표방한다거나, 자신들의 정책을 ‘국가 발전 정책의 한 일환’으로 표명하여 정진하는 것, 또 바쁜 와중에도 몸소 봉사활동에 나선다거나,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모두 이런 대의명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CEO가 되기 이전부터 이런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CEO가 된 이후에 사명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CEO가 되기 위해 사명감을 가졌다’라고도 볼 수 있는데, 대의명분에 입각한 사명감은 오늘날 CEO가 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조건이다.
위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삼성그룹에서 있었던 두 번의 화형식 일화는 매우 유명한데, 한번은 이기태 사장의 휴대폰 화형식이고, 또 한번은 제일모직 원대연 사장의 옷 화형식이었다. 이런 화형식에는 안일함과 나태함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즉 휴대폰이든 옷이든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덤핑처리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생각하겠다는 미래 지향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강렬한 의미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미이다. 삼성의 CEO들은 CEO가 된 이후이든 혹은 그 전이든, 크고 작은 위기를 맞이했는데,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그들은 도피하거나 책임을 떠넘긴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주도적으로 그 위기 상황을 정면 타개하려고 했다. 이러한 그들의 공통된 속성이 오늘날 삼성을 위기에 강한 그룹으로 남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것에서부터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삼성의 CEO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 작은 소모임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간 경험을 갖고 있거나, 혹은 삼성에 입사한 후에 팀장이나 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서 작은 그룹을 이끌어본 경험들을 갖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CEO가 되기 전부터 암암리에 리더십을 익혀왔음을 뜻한다. 즉, 어느 날 갑자기 CEO자리에 오르고, 그 이후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리더십은 하루아침에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직책이나 직위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력한 리더십에는 그만큼의 훈련과 고난이 뒤따른다. 삼성의 CEO들 중에는 야전 사령관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상완 LCD 사장도, 또 배정충 사장도 야전 사령관으로 불리는데, 이때 야전 사령관이란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령관을 뜻한다. 즉 그들의 현장에서의 강력한 통솔력은, CEO가 되기 전부터 작은 위기들을 주도적으로 헤쳐 나오면서 얻을 수 있었던 역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건강에 신경 써야 한다
삼성의 CEO들은 역동적인 CEO들로 평가받는다. 여기에는 단순히 젊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동성과 빠른 상황 대처 능력, 그리고 창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실성이다. 창의성이 소프트웨어라면, 성실성은 하드웨어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이기태 사장은 한때 하루 서너 시간씩 자며, 나머지 시간들을 온통 휴대폰을 생각하는 데에만 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창의성 문제이기 이전에 성실성의 문제이다. 그런데 성실성의 기반은 바로 체력이다. 체력이 좋지 않고서는, 스물네 시간도 부족한 삼성 CEO로서의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낼 수가 없다. 참고로 삼성의 CEO들은 모두 자기만의 건강 비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건강관리’의 측면이 아닌 ‘자기관리’이다. 자기관리에 서툰 사람은, 한 기업의 CEO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삼성 사장단들이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자기만의 경영철학을 갖춰라
삼성의 CEO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철학을 발전시켜왔다. 관리 경영, 삼발이 경영, 불도저 경영, 내실 경영, 밀착 경영, 서비스 경영, 기획 경영 등 그들의 경영 방식은 다양하다. 이것은 마치 삼성 그룹 내에서의 경영의 포지셔닝화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삼성은 공격형 경영의 CEO들과 수비형 경영의 CEO들, 그리고 이 둘을 통합시킨 CEO들이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경영의 포지셔닝화는 CEO들 자신의 오랜 경험과 개인적인 기질과 성격, 그리고 각 분야가 필요로 하는 경영 스타일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성 사장단들이 삼성그룹이 제시한 경영 비전 외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경영 방식을 구축해 왔으며, 또 그렇게 해간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조직생활과 소그룹의 경영을 통해 수없이 수정, 보완되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 사장단들은 최고 경영자의 직위에 오르기 전에 삼성의 간부로서 여러 경영 방식을 전개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경영방식을 구축해 왔다. 삼성그룹의 사장단들이 이건희 회장이 제시하는 비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그 개성을 잃지 않아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신들만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장을 떠나지 마라
삼성 사장단들의 경영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은 삼성그룹의 전체적인 경영 비전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 경영 안에서의 개별적 경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 경영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현장 경영을 최우선시 한다. 그들이 현장 경영을 최우선시하는 것은 그들이 삼성에 입사하던 시절부터 오랫동안 견지해온 습성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기업 활동은 현장에서 비롯된다는 가치관에 기초한다.
따라서 그들은 신입사원 시절부터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간부 시절에는 현장을 리드하려고 했으며, 최고 경영자가 된 후에는 가장 먼저 현장에 대한 혁신과 각종 편의 정책을 실시했다. 더 나아가 직접 현장의 민원을 챙기기도 하고, 제품의 품질 여부와 시장의 동태를 살피는 등 현장의 목소리에 민감함을 잃지 않고 있다. 오늘날 삼성그룹의 CEO들은 경영현장에서 닦은 자기만의 노하우로 삼성의 계열사들을 세계 초일류로 발돋움시키고 있다. 삼성의 CEO경영,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경영철학은 한국식 경영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삼성의 CEO들
삼성그룹의 철벽 수비수 -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부회장
매주 수요일 오전 7시 30분,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28층에는 삼성그룹의 사장단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일명 삼성그룹 사장단 모임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는 딱딱한 업무 보고가 없다. 대신 대한민국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삼성그룹의 사장단들을 상대로 강의를 한다. 그래서 사장단들이 모였음에도 ‘사장단 회의’가 아니라 ‘수요 간담회’이다. 그런데 이 ‘수요 간담회’에서 사회를 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삼성전자의 맏형 역할을 하는 윤종용 부회장이고, 또 한 명은 이학수 구조조정 본부장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삼성의 좌청룡, 우백호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삼성의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CEO는 누가 뭐래도 이건희 회장이다. 그래서 그는 삼성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이에 반해 윤종용 부회장은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학수 구조조정 본부장은 어머니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삼성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지금 사장단의 인사권까지 쥐고 있는데, 그래서 그를 삼성의 2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학수 구조본부장의 삼성 내에서의 위상은 그가 삼성의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맡아 처리하는 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삼성 자동차 사업 정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학수 본부장은 대우와의 빅딜 협상이 결렬되자, 삼성 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이라는 카드를 빼 들었다. 여기에는 완강한 반대가 뒤따랐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건희 회장이 이학수 본부장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이처럼 삼성 내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다. 이학수가 이건희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2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부사장급인 비서실 차장에 오른다. 이때부터 비서실 재무팀을 총괄하는 것은 물론, 이건희 회장을 곁에서 보좌했는데, 당시 삼성의 골칫거리였던 그룹 계열분리 실무 작업을 담당한 사람도 그였다.
그가 이건희에게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지는 외환위기 상황에서의 전폭적인 지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그는 삼성 내부의 현금이 유출되는 일을 막는 일뿐만 아니라, 윤종용 부회장과 손발을 맞춰 덩치만 큰 삼성을 슬림화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룹의 대세를 결정하는 일인 만큼 매사에 경영진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이때 이건희 회장은 ‘전자와 금융업 외에는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다.’라는 단 한마디로 모든 사안에 대한 허가를 내어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학수 본부장은 삼성 이건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첫 출발점부터 살펴보면, 우선 그가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 출신이라는 것이다. 제일모직 경리과 라인은 일명 ‘삼성 인재 사관학교’라 불리는 곳이다. 이것은 현재 삼성의 CEO 대부분이 제일모직의 재무통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일모직 경리과’와 ‘삼성 비서실’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 코스였는데, 현재 이 구도는 ‘삼성전자’와 ‘구조조정본부’라는 새로운 코스로 전환되고 있다.
이학수 본부장이 신뢰를 받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삼성가와의 오랜 인연을 들 수 있다. 1982년, 당시 삼성의 회장 비서실에는 경영관리를 담당하는 운영팀이 설치되었는데, 이학수 사장은 운영 1팀장으로 발탁되어, 20여 년 동안 이병철 전 회장과 이건희, 이건희와 이재용의 핵심 브레인 역할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계열사 사장단과 임원 인사까지도 주도하고 있다. 오랜 동안 한 분야에 종사하며 한 집안과 인연을 맺은 것이 두터운 신의를 쌓는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지 위와 같은 외적인 이유만으로 한 기업의 CEO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학수 본부장이 삼성 내에 최고의 CEO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동적인 자세에 있다. 이학수 본부장이 막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에 발령을 받았을 때,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위해 숙직과 일직, 심지어는 야간근무까지 도맡아 하겠다고 자청했다고 하는데, 그 때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개발한 원가 분석 시스템은 국내 모방직업계의 최초의 기본 매뉴얼이 되었고, 이것은 최근까지도 업계의 기본 매뉴얼로 통한다고 한다.
이학수 본부장의 또 다른 비결은 그가 상사, 즉 이건희 회장의 의중을 꿰뚫어 본다는 데 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의중을 꿰뚫는다는 것은 그 사람처럼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학수 본부장이 이건희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잘 안다’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이건희가 바라보는 방향을 똑같이 바라보고 있으며, 이건희가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똑같이 이루고자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건희의 신뢰가 두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삼성이 가장 큰 성장을 이룬 기업인 동시에 가장 안정적인 기업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삼성 이건희의 의중을 미리 꿰뚫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하는 이학수 본부장 같은 CEO가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의 전도사 -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윤종용 부회장이 삼성그룹에 입사한 것은 1966년 대학교 졸업과 동시였다. 이후 그는 1977년 삼성전자 도쿄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80년대 8개 사업 부문을 거치면서 명실공히 최고의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천>이 2004년 8월 9일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리더 25인’을 선정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윤종용 회장은 5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그렇다면 그의 어떤 면들이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성공한 CEO로서 설 수 있게 한 것일까? 우선, 그의 꼼꼼한 기질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사전에 ‘대충대충 또는 적당히’라는 낱말은 없다. 또 그는 메모광으로 통한다. 그의 또 다른 기질은 고집스럽다 할 정도로 지독한 성실함이다. 예를 들어, 그가 세계에서 네 번째, 국내에서 최초로 독자적인 VCR 개발을 성공시킨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이러한 성공 뒤에 가려진 고생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JVC의 표준 인증을 받기 위해 영하 20도의 혹한에서 실험에 몰두하는 직원들과 밤을 새웠고, 원가절감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으며, 심지어 경쟁사 담당자와 저녁식사를 하고 밤에는 전화로 국내 직원들에게 그 정보를 알려줄 정도였다.
삼성 사장단 내에서 그보다 해외 출장이 잦은 CEO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그는 1999년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중국, 영국, 미국 등 세계 곳곳에 삼성을 알리는 홍보 대사관 역할을 맡아왔다. 하지만 그의 활발한 해외 홍보 활동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공식적인 의견 표출을 자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각 총괄사장들에게 전권을 주고, 그 입지를 넓혀주기 위해서이다. 이런 행동은 본질적으로 동료와 아랫사람을 신뢰하는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어렵다. 또한 상대방의 위상을 존중해주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윤종용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은 바로 그의 이러한 마인드에서 비롯된다. 즉, 그는 입을 열어야 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것이다.
한편 윤종용 부회장은 애독가로도 유명하다. 그를 ‘움직이는 백과사전’ 등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자업계는 물론 문학, 미술, 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그는 2004년『초일류로 가는 생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두 가지의 큰 주제가 흐른다. 그것은 일류를 넘은 초일류 기업에 대한 염원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위기 경영론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이 시대에 적합한 경영자상과 경영혁신론은 무엇일까? 그는 이 시대를 창조성이 바탕이 되는 디지털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의식을 갖춘 CEO가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경영자인데, 이런 경영자는 변화를 주도하고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오늘날의 경영자라면 인재를 키울 줄 알아야 하고, 현장 경영을 중시해야 하며,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경영혁신론의 요체는 몇 가지로 나눠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어떻게든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경영 혁신에 있어 강력한 추진 조직을 구성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경영자, 즉 최고 책임자가 직접 혁신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혁신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며, 경영을 혁신할 때에는 그 희생을 이겨낼 용기와 인내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경영자상과 경영혁신론은 그가 삼성전자를 이끌면서 직접 경험하고 또 실천한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다.
윤종용 부회장의 또 다른 강점은 위기를 겁내지 않고, 정면돌파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의 경영 스타일은 그의 성격과 많이 닮아 있다. 그는 문제를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그런가 하면 또 철저한 합리정신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위기에 대한 처세는 경험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1995년 삼성전자는 창사 이래 최대 수익을 올렸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해이해지고, 방만해져 있었다. 과잉투자와 과다경비에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2년 후에는 IMF까지 닥쳐왔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안일했다. 경기가 회복되면 다시 좋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엄청난 불행이 무서운 속도로 뒤쫓아 오는데 삼성전자라는 거대한 공룡은 어기적어기적 걷는 것과 같았다.
여기에는 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1998년 행해진 삼성전자 최대의 구조조정이었고, 그 최전선에는 그가 있었다. 당시 100여 개에 달하는 사업부 중 30여 개가 사라졌다. 해고된 종업원 수는 23,000여 명이었다. 차량 유지 같은 비핵심 부문은 과감히 아웃소싱되었고, 이사진에는 외국인들도 영입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삼성전자 전체를 갈아엎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새롭게 개편된 조직을 기반으로 그는 자신만의 스피드 경영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오늘날 윤종용 부회장이 ‘가장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위기 경영론이 그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면, 그의 초일류 삼성전자에 대한 염원은 그의 꿈에서 비롯된다. 그는 삼성전자가 시장에서 지금보다 더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초일류를 향한 꿈을 후배 삼성전자 인들에게서 바라보고 있다.
윤종용 부회장의 CEO로서의 성공 요인 중 또 하나는 현실의 안정에 안주하지 않고, 그 스스로가 끊임없이 변화를 추진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카오스 메이커’라고 부른다. ‘카오스 메이커’, 이것은 그의 별명이자, 그의 핵심적인 경영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윤종용 부회장이 2004년 제 16회 인촌상 산업기술 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었을 때, 당시 그는 수상 소감에서 ‘경영은 사람, 돈, 기술, 정보 등의 자원을 잘 관리하고, 의사결정, 제품 생산, 서비스를 끊임없이 혁신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끊임없이 혁신한다는 것은 곧 혼돈이다. 따라서 혼돈이 없는 조직, 혼돈이 없는 경영, 혼돈이 없는 기업은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는 삼성전자 내에서 혼돈 제조기로서의 역할을 도맡아 해왔다.
연공서열을 바탕으로 한 보수제도나 승진제도를 철폐한 것도 그였는데, 간부들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고, 능력과 성과 위주의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는 성과급 제도를 대폭 개선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삼성전자의 각 사업 부문을 독립화시켜 독자적인 사업 단위 체제로 변화시켰는데, 계열사라고 해서 외부 기업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윤종용 부회장의 혁신 경영은 대체로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기술의 혁신이었고, 또 하나는 조직의 혁신이었다. 전자는 1997년부터 삼성전자를 세계 첨단기업으로 변모시킨 것을 가리키고, 후자로는 IMF를 맞아 삼성전자 인력의 30%를 줄이며,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이끈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이러한 경영 방식의 원동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받아들이는 젊은 마인드에서 비롯된다. ‘잃어버린 1인치를 고객에게 돌려드립니다.’라는 삼성전자 TV광고의 카피는 윤종용 부회장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윤종용 부회장이 엔지니어 출신이면서도 이토록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젊은 마인드와 무관하지 않다.
35년 반도체의 산 증인 -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는 명실공히 국내 반도체의 개척자이고, 또한 반도체 기술의 1인자이다. 그가 오늘날 국내 반도체 역사의 산 증인이자, 반도체 기술의 1인자가 된 것은 뛰어난 기술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74년의 12월, 당시 중앙일보와 동양 방송의 이사를 맡고 있던 이건희는 부친인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 미국의 캠코사가 운영하는 한국반도체 부천공장을 인수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다면 아버님, 제가 개인적으로라도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할 것이니 지켜봐 달라는 뜻이기도 했고, 책임을 지겠으니 믿고 맡겨봐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명의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는데, 오늘날 이 공장이 삼성반도체의 초석이 된 삼성전자 부천 반도체공장이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1983년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인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반도체에 관한 기술이 거의 전무했던 때라, 고육지책으로 선택된 방안이 일본에게서 배워 오자는 것이었다. 이윤우 당시 개발실장은 단원들을 이끌고 일본의 샤프사로 갔다. 당시 샤프사는 일본 최고의 반도체업체는 아니었고, 속된 말로 하자면 ‘2류’였다. 그런데 당시 파견된 개발단의 단원들은 박사급 연구원들이었는데, 샤프사에서는 그들을 기술 연수생처럼 대우했고, 생산 공정도 자유롭게 견학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개발단원들은 사프사의 고졸 출신 엔지니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훔쳐봐야 했다. 이것은 기술 없는 회사가 겪어야 하는 아픔이며, 설움이었다.
이윤우는 그때의 경험을 통해 이를 악물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윤우는 반도체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1983년 말 드디어 64K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도쿄 선언’이 있은 후,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적에 평가절하가 잇따랐는데, 아쉽게도 64KD램의 설계 기술이 삼성의 것이 아니라, 설계 기술 이전에 합의한 미국의 마이크론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자존심이 상한 그들은 256KD램의 자체 개발에 나섰고, 1984년 10월 드디어 성공했다. 삼성의 자체 순수 설계로 이뤄진 것이었는데, 이는 64KD램의 생산 이상 가는 기적이었다.
이윤우 부회장이 개발한 256KD램은 오늘날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에 있어서 많은 의미를 지닌다. 즉 256KD램이 있었기에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D램 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삼성이 64KD램을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일본 업체의 덤핑으로 국제 시장에서 64KD램 가격은 대거 폭락해 당시 삼성은 1천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일본의 이러한 덤핑전략은 호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 기업에 대해 공세를 취하면서 일본의 256KD램의 생산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삼성이 이를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삼성도 곧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로부터 견제를 받게 되어, 결국 삼성은 72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
삼성은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에 제소를 당하던 그해 1MD램을 개발했고, 2년 후인 1988년에는 4MBD램을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16MD램을 개발했다. 그리고 93년에는 64MB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더니, 1994년 8월에는 256MD램을 개발했다. 이 역시 세계 최초였다. 이는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 관한 한, 미국 IBM, 일본 도시바, 유럽 지멘스 등 세계 최고의 기업들을 제친 것과 다를 바 없는 쾌거였다.
이윤우 부회장은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하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그가 오늘날 삼성을 이끌어가는 최고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최고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외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삼성 내 엔지니어 출신 CEO 대거 등용이 그것이다. 그 결과 당시 삼성전자는 이사 이상 임원 중 절반이 넘는 47명이 공대 출신으로 채워졌고, 기초과학 분야까지 포함하면 51명에 이르렀다.
한 때 이윤우 부회장과 함께 근무했던 유원식 사장(한국선마이크로시스템즈 대표이사 사장)은 이윤우 부회장이 단순히 기술만 아는 CEO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즉 그는 그 당시부터 이미 뛰어난 리더십과 경영 마인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오늘날 삼성전자의 최고 경영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리더십, 경영 마인드,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경영자의 3요소를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이윤우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총괄사장을 맡으면서 외적으로는 공격 경영에, 내적으로는 관리 경영에 모두 성공을 거두어, 그의 경영 스타일은 공격 경영과 관리 경영의 종합형 경영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반도체 제품을 판매하는 것 이상으로 그 기술을 향상시켜오기도 했는데, 그의 관리 경영 중 하나는 기술 중시 경영이었다. 그런데 그는 공정과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 즉 직원들의 관리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참고로 그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삼성반도체 공장을 설립할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안전이었다. 이 같은 철저한 사고 예방 덕분에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는데, ‘무재해 신기록’이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프랑스의 재보험회사로부터 보험료를 되돌려 받았는데, 그 액수가 무려 80만 달러였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재보험회사가, 무사고를 이유로 보험료를 되돌려주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다.
아울러 그는 사내 커뮤니케이션 관리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또 회사의 이익이 클 경우 그 초과이익을 임직원에게 별도로 나눠주는 이익분배제를 실시하기도 했으며, 한국 기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사내 대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최고의 기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외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이처럼 높은 기업문화를 창출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4년 들어 이윤우 삼성전자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해, 현재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부회장 겸 기술원장도 겸하고 있다.
삼성그룹 최장수 CEO -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
삼성은 오늘날 한국의 기업들 중에서 최고 경영자 선택 기준이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이런 삼성에서 가장 오랫동안 최고 경영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바로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이다. 그가 삼성그룹 내에서 최장수 CEO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탁월한 능력을 증명하고 있는 셈인데, 오늘날 한국의 크고 작은 기업의 CEO들은, 그를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CEO 중 한 명으로 꼽고 있다.
그의 닉네임은 ‘서비스 마술사’, ‘서비스 CEO’, ‘서비스 마스터’ 등인데, 이러한 닉네임을 얻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오랫동안 서비스업에 종사해왔기 때문이고, 둘째는 스스로가 서비스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인데, 그의 이러한 서비스정신은 그가 경영한 에버랜드와 신라호텔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제대 후 삼성에 입사한 그는 신규 프로젝트 추진팀에 줄곧 배치를 받았다. 당시 그가 참여한 프로젝트는 서울에 신라호텔을 오픈하여 면세점을 입점시키는 것, 제주도에 신라호텔을 오픈하는 것, 호텔업계 최초로 외식산업을 도입하는 것 등 이었다. 사회 초년병인 그로서는 무척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굳센 도전정신으로 당시의 힘겨운 상황을 정면돌파했다.
2003년 1월, 허태학 사장은 삼성석유화학으로 옮겨 오게 되는데, 당시는 낙관보다 우려가 더 많았다.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사업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제조업 쪽으로 옮겨 왔으니 그러한 우려는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삼성석유화학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2003년 삼성석유화학은 전년보다 20% 성장한 창사 이래 최대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성과를 허태학 사장의 도전정신과 서비스정신이 이뤄낸 혁신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혁신기업의 3가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는데, 첫째, 기업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경영자가 먼저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했다. 둘째, 우수 인력을 확보하고 전면에 배치해야 한다고 했다. 셋째, 적극적인 지원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중에서도 허태학 사장은 CEO의 강력한 리더십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이처럼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조직을 혁신해가면서도 동시에 서비스 경영을 잊지 않았다.
그는 우선 직원들에 대한 서비스 경영부터 나섰다. 그에게 있어 서비스는 일방적으로 주거나 혹은 받는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경우 직원들의 업무 여건이 좋지 않으면 그만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석유화학 사장에 취임하고 나서, 직원들을 외부고객과 똑같은 내부고객으로 대접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피트니스 센터와 샤워장을 한 건물로 합치고, 사무실 분위기도 밝은 느낌으로 바꿨다. 아울러 협력업체 직원들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까지도 만들어 주었다. 또 ‘아침의 대화’라는 시간을 마련하여, 아침을 굶고 출근한 직원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 회사에서 제공한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허태학 사장은 그것이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직원들이 즐거우면 당연히 생산성도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그의 철저한 서비스 경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장을 호텔로 바꾸는 석유화학맨.’ 오늘날 그가 듣고 있는 새로운 닉네임이다. 여기에는 제조업에 서비스정신을 새롭게 접목시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 그만의 독특한 경영이 담겨 있다.
변신 경영의 대가 - 강호문 삼성전기 사장
경기도 수원시 매탄동에 위치한 삼성전기 수원공장에는 거북선 센터가 있다.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일명 삼성전기의 ‘싱크 탱크’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삼성전기의 모든 혁신적인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저 제품 개발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을 굳이 거북선 센터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바로 강호문 사장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이라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일본을 이기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처럼, 삼성전기도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서 선진 경쟁사들을 물리치자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특히, 이 거북선에서는 삼성전기가 세계 일류로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잡아야 하는 일본에 대한 추격 의지가 암암리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삼성의 사장은 회사의 사장이 아니라, 국가의 사장이라고 생각하며 일하자.’ 이것이 오늘날 삼성이라는 두 글자를 일군 고(故) 이병철 회장의 경영지론 중 하나이다. 오늘날 삼성의 경영철학은 그 초기의 싹이 모두 이병철 회장에 의해 구축된 것이고, 이것을 오늘날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정립한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다. 그래서인지 삼성의 사장들은 애국심과 민족주의가 남다르다. 진대제 전 사장은 ‘일본을 이겨보기 위해 간다’며 IBM 사장의 손을 뿌리쳤다. 당시 IBM 사장은 연봉 백지위임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 상태였다. 황의 법칙을 만들어낸 황창규 사장이나, 비메모리 분야를 세계적인 클래스로 끌어올리는 데 초석을 다진 임창규 사장도 모두 국가와 삼성의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신념에서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했었다.
강호문 사장의 거북선도 이러한 삼성의 국부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의 부품산업 강국론도 이러한 삼성의 국부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04년, 그는 기자 간담회를 통해 “한국의 전자부품 산업은 일본의 견제와 중국의 추격을 받고 있다. 삼성전기가 앞장서 초일류 부품산업 국가로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단순히 삼성이라는 회사의 전자부품 산업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자부품 산업 전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호문 사장은 그때그때의 상황 대처 능력이 탁월한 CEO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의 그런 경영방식을 ‘변신 경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삼성전기 사장이 된 후 ‘쇼트트랙론’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한국이 쇼트트랙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메달밭을 일궈 동계올림픽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성전기에서도 이처럼 강력한 포지셔닝과 브랜드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그는 사업 구조를 1등 육성 제품, 수종 사업, 유지 사업의 세 개 분야로 좁히고, 그 역량을 집중했다. 제품으로 보면,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고밀도 인쇄회로기판, 광픽업 등의 세 개 제품이 그것이었다.
2003년 들어서 그는 ‘수레바퀴론’을 들고 나왔는데, 요지는 경영의 가속도를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수레바퀴는 처음 움직이려면 힘이 들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점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인 것처럼, 쇼트트랙론으로 집중 강화되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제품 등의 가속력을 높여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세계 1위를 할 수 있는 제품에 역량을 계속 강화하여 그 제품을 세계 1위로 만든 후, 이미지를 제고하고 브랜드를 공고히 한 후, 다른 제품들 역시 그 가속력의 힘에 자연스레 편입되는 것을 노린 것이다. 그는 이 수레바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섯 가지 핵심 전략을 내어놓았는데, 선택과 집중, 핵심역량 확보, 인재 확보, 기술력 강화와 디지털 문화 정착 등이 그것이었다.
이후 수레바퀴론이 잠잠해질 때쯤, 그는 ‘333혁신활동’을 창안해 내놓았다. 333혁신활동의 첫 번째 3은 3년 이내, 두 번째 3은 생산성 300%, 세 번째 3은 이익률 30%를 뜻한다. 즉, 333혁신활동은 2007년 이내에 생산성과 이익률을 각각 300%와 30%씩 달성한다는 혁신활동이다. 이 활동의 의미는 쇼트트랙론과 수레바퀴론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 동시에 정확한 마무리를 위한 경영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쇼트트랙론을 통해 핵심 제품에 대한 역량을 집중하고, 수레바퀴론을 통해 세계 1위 달성을 위한 박차를 가했다면, 333혁신 활동은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경영 논리라 할 수 있다. 강호문 사장은 현재 삼성전기를 2010년 매출액 9조 원, 영업이익 7천 5백억 원 등 세계 톱3의 종합 전자부품 기업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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