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상 경영 K씨의 하루
선적기일 맞추느라 식은 땀
한여름을 방불케하던 더위가 지나고 장마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오락가락한 날씨 탓에 감기 손님이 가실 날이 없는 K씨.
그래도 새벽 6시에 맞춰 놓은 자명종 소리엔 눈이 번쩍 뜨인다. 어제
자정무렵까지 야근을 한 그는 ‘잠시 게으름을 피워 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오퍼상에게 잔꾀는 금물이라는 선배들의 톡 쏘는 말이 떠올라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겨울 재킷과 점퍼를 취급하고 있는 K씨는 1∼2월에 받은 오더의 물량을
맞추느라 지금 한창 바쁘다. 말레이지아, 베트남, 미얀마 등에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는 제조업체의 작업상황을 매일 점검하고
바이어측의 수정요구를 수렴하느라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생산
막바지에 바이어가 자꾸 수정을 요구하면 작업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선적일자를 맞추기가 어렵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랑스
바이어는 “등길이를 넓혀 달라, 지퍼를 올려 달라.”는 등 주문이
끊이질 않는다. 바이어를 설득하느라 어젯밤에도 12시까지 팩스와 전화로
계속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결국 원가인상을 바이어측이 부담하는
것으로 협상은 마무리됐다.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팩스 오더를 점검한 뒤 팀별로
미팅에 들어갔다. 오늘 K씨가 해야할 일은 어제 바이어와 협상한 내용을
제조업체에 전달하는 것이다. 아마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안되는 일은 되게 만들어라’는 사나이 배짱을 이때
발휘할 때라고 생각한 그는 용기를 내 수화기를 들었다. 말레이시아
현지의 퉁명스런 작업반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수고가 많으시죠!” 미안한 마음에 지레 겁을 먹은 K씨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아양을 떨어 본다. “저기…. 아무래도 며칠동안
야근을 해야할 것 같은데….” 말꼬리가 흐려지자 금세 눈치를 챘는지
작업반장은 “아니, 또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고 대뜸 목소리가
커진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사정사정을 한 끝에 납품기일까지
맞추기로 했다. 어찌나 신경을 곤두세웠든지 전화를 끊고 나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2월부터 6월까지는 생산라인이 한창 가동중이라 주로 바이어와
제조업체간의 요구사항을 중재하는 일이 주요 업무다. 따라서 대개 이
기간에는 사무실 근무가 많다. 하지만 8월경에 바이어가 샘플을 갖고
방문할 것을 대비해 오퍼상측도 미리 새로운 유행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기 때문에 틈틈이 정보사냥에 나서기도 한다. 프랑스,
이태리, 포르투갈 등 유럽의 의류상이 주요 거래처다. 그들의 패션감각을
따라잡기 위해선 대충의 정보만으론 어림없다는 것을 간파한 K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을 찾아 외국 패션잡지를 모조리 훑어본다. 물론
패션쇼를 보러 가는 것은 이미 필수코스가 된 지 오래다.
아울러 오퍼상에게 외국어 실력은 기본. 영어는 필수지만 유럽쪽
바이어를 상대하다 보면 불어에도 능통해야만 한다. 불혹의 나이에 20대
초반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도 쑥스럽지만 발음이
뜻대로 안될 때는 괜한 나이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벽 한켠의 괘종시계
바늘이 6시를 가리키면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불어학원으로 가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전화벨이라도 울리면
K씨는 지레 겁부터 난다. 며칠동안 수업을 빠져 ‘지진아’ 소리를
듣겠구나 하는 걱정을 하며 오늘은 귀를 틀어막고 사무실 문을 힘차게
나섰다.
하루의 시간이 촘촘한 그물처럼 빡빡하지만 오퍼상은 우리나라
수출무역의 최전방부대라고 불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에
K씨는 오늘도 휘파람을 불며 하루를 마감한다.
황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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