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항
고려채....
아마 찾아보면...
백제항, 백제채는 더 많을 것이고,,,
더 많은 우리글자 기반의 명칭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하이까지도 바다쪽 땅은 모두 백제영토 였으므로...
"이건 분명 고려인.." 우연히 발견한 700년 전 이슬람 묘비, 분석해보니 고려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 KBS 역사스페셜 20060224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d37YBU0kAjk
고려인 미비가 발견된 광저우는 남중국회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이해로부터 해양실 크로드의 관문 역할을 해온 도시다. 지금도 광조 최고의 번화가에는 그때 유적이 남아 있어 보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거리 한가운데 마련된 유리 전시실시례는 동서 교육의 전성기로 접받아 당나라 때부터 건설된 도로 유적이 보존되 있다.
이러한 고대 해양 실크로드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해대적으로 정비한 것이다. 고려인 미호비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도 그때였다. 해양 실크로드 유물로 채워진 광저우 박물관. >> 입구에서부터 관람객들의 눈길를 끄는 것은 흙으로 빚어든 각양각색의 토우들이다.
등잔을 들고서 있는 사람을 표현한 용화 등 토우. 서역에서 건너온 외국인을 묘사한이 토도 활발했던 동서 교육의 증거품이다. 고려인 묘비 역시 광조 해양실 그로드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 한에 있었다.特別的原來不在我們這裡是在這個清仙那裡是1985年偶然發現的那麼發現完以後 特別去回來的,他原來不在我們這裡,他原來是在這個清仙古墓那裡,是1985年偶然發現的,那麼發現完以後他們這個伊斯蘭教學會就把他收起來了,因為他這個是一個很珍貴的一個후의 동소교육사를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유물로 평가받아 원본을 그대로 복지해 둔 것이었다. 묘비 중앙에는 아라보가 새겨져 있고 가장 자리는 묘비 주인의 인적 사항이 한자로 적혀 있었다.
뮤비 주인의 이름은 라마단. 이름 석자만 보면 아랍인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름 아래 국적이 적혀 있었다. 고려인이라고 밝혀놓은이 다섯 글자가 라마단을 고려 사람으로 되살려 주었다.
그렇다면 뮤비 원본은 어떤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원본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회성사.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성지로 여기는 곳이다. 그래서 무슬림이 아니면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라 취재 허락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이 이 사람은요이 사람 자기는 얘기를 못하겠다 이러고 >> 광저우 이슬람교 협회 양 회장에 도움을 받아 >> 일반에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묘비 원본도 취재할 수 있었다. >> 양탕 회장이 취재진을 안내한 것은 회성사 교육관.
응. >> 이슬람교 자료를 모아둔 교육관 모니 바로 그곳에 고려인 묘비 원본이 놓여 있었다. >> 한국 취재진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고려인 라마단의 묘비원본. 이은 묘비 안면에만 새겨져 있었는데 알아보는 선명하게 남아 있어 판독이 가능하다.但是沒有說這 但是沒有說這버 비문은 주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 적혀 있었다.
지금도 무슬림의 미비에 주로 인용되는 구절이다.이는 그는 고려인 라마단이 무슬림이라는 뜻이다. 라마단의 행적을 알려주는 비문의 한자 기록도 일부는 희미하게 남아 남아 있었다. 위관으로 확인된 내용은 대도 완평현 청현에 거주했고 라마다는 고려인으로 사망 당시 38세였으며 광소도 용주현 다루 가치를 지낸 인물이다. 훼손이 심한 나머지 하안 기록을 판독하기 위해 순천양대학교의 박현규 교수를 찾았다.
묘비 탁본과 좌령본을 대주해 가며 묘비 왼쪽에 훼손된 한자기록을 판독했다. 뜻입니다. >> 희미한 윤곽으로 남아 있는 글자는 사망 연도와 무친 장소였다. >> 보이네요.
예. 판동한데 상당히 에러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 아 탁본과 실물을 대조해 가면서 판독을 했는데 여기에 많은 정부를 담고 있습니다. 남은단에 죽은 연도와 묻힌 장소가 나옵니다.
지정 9년 1349년에 남아이 죽었습니다. 아, 남단이 38세로 돌아갔다고 하니 출생이 1312년으로 나타납니다. 판독한 한자 기록에 따르면 고려인 라마다는 1349년 3월 23일 죽었고 그해 8월 18일 광저우 북쪽에서 이슬람식으로 장사를 지냈으며 유화교 개화 언덕에 묻고 비석을 세운 것으로 되어 뮤비문에 나와 있는 유화교 개화 언덕이 바로 광조우 이슬람교 무덤인 청진선현 고미오다. 고려인 라마다는 지난 700여년 동안 그렇게 광조우 이슬람 성지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중국 역사 학계는 고려인 라마단의 묘비가 중국과 이슬람의 해양 실크로드 교류사를 직접적으로 측명해 주는 귀중한 당대의 기록으로 평가합니다. 대체 고려인 라마다는 누구일까요? 그는 어떤 사람이고 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던 사람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슬람교 신자가 된 것일까요?이 이 모든 궁금증을 풀어 줄 단서가 아라보와 한자로 기록된 바로이 묘비문에 있습니다. 우선 라마단의 거주지부터 찾아보겠습니다. 묘비문에 적혀 있는 라마단의 집주소입니다.
대도로 완평현 청현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도는 원나라의 수도인데 지금의 베이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려인 라마단이 원나라 수도인 대도 완평현 청현관이라는 곳에서 살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자,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고려인이라면 고려해 살아야 합니다. 요즘이야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이민을 오갈 수 있지만 고려는 중세 시대의 나라입니다. 그 시대 외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려인이 왜 원나라의 대도에 살았던 것일까요? 또 라마단이 살았다는 대도 완평현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중국 역사상 배증을 처음으로 수도로 정한 것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때다.
이후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원나라의 대도성은 철저히 파괴되고 자금성이 세워졌다. 그러나 원나라의 흔적을 모두 없애지는 못했다. 회의 시민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곳도 원나라 때 쌓은 대도성 유적이다. 남아 있는 성과은 2천에 불과하지만 한때 번성했던 원나라 대도의 흔적은 아직도 베이징 곳곳에 남아 있다.
베이징 시 동쪽 외곽에 위치한 통주에서는 고려와 관련된 원나라의 유적도 확인된다. 중국이 자랑하는 베이징에 내려군 하는 원나라 때 이곳 통주의 백화까지 연결됐다. 동으로는 고려와 일본으로 바닷길이 연결되고 남으로는 남중국회로 이어져 있어 대도성으로 들고 나는 모든 사람들과 물자는 이곳에 집결해 대도의 내륙군하로 운송되다. 제도성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던 통주에는 그때 흔적이 남아 있다.高國共識都得到這來,然後大城派禮把你們借得大借大多城,那麼這呢是水。 高立國啊共識都得到這來,然後大都城派禮不把你們借會聚得大多借大多城,那麼這呢是水。 這水衣呢有水的傳來傳進行了,所以他有碼頭這個石頭。 就是那當時碼頭用的那個 氣的石頭。 所以你們當時啊你們各各高國人到通州地方來得很多。 因為是 非常近啊,中國和 당시 통주에는 고려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초락을 이루고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송주 부두둑과에서 10분 거리의이 마을은 지금은 중국의 어느 시골 마을과 다름 없지만 원나라 때는 번성했던 한구 도시였다. 집집마다 대문 위에 붙어 있는 마을 이름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 이름은 대고력장. 원나라 때 고려장으로 불리던 마을 이름이 고력장으로 바뀐 것은 명나라 때다.
당시 통주는 세계 각국의 선박들이 이곳에 정박하였고 고려의 선박들도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이는 이는 몽고에 머물고 있던 구앙이나 관료들의 각종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 고려의 선박이 도착했고 이와 관련하여 고려 정부의 관료나 아 국제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고려 상인들이 이곳에에 집결하여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고려인 라마단이 살았던 대도 완평현은 어디일까? 완평현의 정확한 위치 확인을 위해 베이증의 역사 지도집 가능에 참여한 전문가를 찾았다. >> 그는 중국 저녁에 남아 있는 사료와 지도를 참고하여 제작된 베이징 역사 지도집에서 완평현의 위치를 찾아했다. 원나라 대도의 남소 관문 역할을 하던 곳곳이 완평시다.
所以他的政治上經濟上那個증시에서 남서쪽으로 15km 외곽에 위치한 완평성이 일대가 옛 완평현 지역이다. 파북 지방에서 배층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라 중국의 역대 왕주에서 방어의 만전을 기하던 성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중국 본토를 점령하기 위해 청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을 막았던 곳도 이곳이었다. >> 고려인 라마다는 무슨 까달그로 이곳에 살았던 것일까? 의문을 풀어줄 열쇠는 완평성일 때에서 대대로 양치고 농사지며 살아온 주민들이 쥐고 있었다.那個地方叫什麼高啊,整掛的意思在過去那個地方 方叫什麼啊這個地方什麼時候開始叫老上老爺 정확한 유는 모르지만 50대 이상의 고리장촌 주민들은 지금도 도 고려장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 마을 유례를 확인하기 위해 희현지에 전해오는 고리장촌의이 기록을 찾아보았다. 고리장촌의 이름이 고려촌으로 나와 있다. 中國一些中的生啊以及他的命往 원나라 때 이곳에도 고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한 고려인촌이 있었던 것이다. 700년 전 고려인들이 모여 살았을 때 이곳 고려초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이 이 고려촌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에 보관되 있다.
문헌 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이자 대문장가인 이곳과 그의 아들 이색을 기리는 곳이다. 원나라의 고려처녀 징발을 중지시켰던 이곡은 완평현의 모습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문헌서원 장판가에는 이국의 기록을 문집으로 찍어냈던 목판이 전해져 온다. 여기 보관 있습니다.
>> 이곡이 원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그곳에서 보고 듣고 조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많은 목판들. 그 속에서 찾아낸 한 장의 목판에서 완평현 고려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 발견됐다. 집 어 >> 고려인 김백 안찰이라는 사람이 완평현에 금손 미타사라는 절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절집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구심체 역할을 하던 곳이다.
무슨 이유로 고려인들이 이곳 완평현의 절집까지 세우고 고려촌을 형성했던 것일까?高他有一個通的關係,就是元朝的皇帝就是蒙古的皇帝的女兒公主嫁給高麗的國王。 當時元朝和高麗他有一個通婚的關係,就是元朝的皇帝,就是蒙古的皇帝的女兒公主嫁給高麗的國王。 所以呢,基本上在元朝的時候,那個高麗國王,每一個國王都要到大都來。 因為他要來結婚。 那麼在這個結婚的時候呢,他就很多人在大都還住很長時間,他就不回高麗,這個時候呢,就有很多的高麗人跟著 라마단이 완평현에 살았던 시기는 원섭기 80년에 막바지 무렵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뤄볼 때 그시기 완평현 고려초는 상당히 많은 고려인들이이 3대에 걸쳐 뿌리내리고 살았던 또 하나의 작은 고려였던 것이다. 우리는 라마단이 살았던 완평현을 통해 당시 원나라의 고려인촌이 상당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고리장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고려인촌.이는 그만큼 고려인들이 밀집에 모여 살았고 또 그러한 고려인촌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라마다는 이곳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묘비문에서 찾아보도록 하죠. 광소도 용주현 단로 화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달로 화적은 다루가치의 한자씩 표기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다루가치는 정복지를 통치하기 위해 원나라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지방 감독관을 말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다루 가치는 몽고종만 임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인이 원나라에서 다루가치를 지냈다.이는 몽고족이 아니면 다루가치에 오를 수 없다는 규칙을 깬 파격적인 일입니다. 대체 고려인이 어떻게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된 것일까요? 라마단이 다루가치로 파견된 6천은 베트남과 인접한 국경지대다. 지금은 광서장족 자치구에 속한 인구 80만의 작은 도시지만 동남아시아로 통하는 길목 역할을 하는 곳이다.
>> 먼저 육천현 문물 관리소를 찾았다. 역대 6천현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라마단과 관련된 기록이 이곳에 남아 있을까? 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보관된 기록을 조사했다. >> 다루가 출로 부임한 라마다나 행적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었지만 원나라 때 6천년의 위상을 볼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었다.那個中央政府就是原的中央政府為了把這個控制的地獄控制好一點就專門 那個中央政府啊,就是原的中央政府為了把這個控制的地獄控制好一點,就專門 加一個把那軍事呢加設備都是這樣加的 所以我們這個路的地理位置啊,還有那個從他的他對那政府那個影響力很大的,所以他專門關注我們的 6천현의 지리적 중요성은 유적으로도 확인된다.
농경지 한가운데 옛성터가 남아 있다. >> 얼핏 보면 바둑처럼 보이지만 흙을 다져서 쌓은 판축 토성의 흔적이다. 당나라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이 토성은 그때부터 줄곧 6천현을 에워싸고 방어하는 국경의 전초기지로 활용됐다.這裡這個土城土牆是為了保這個城裡面的民還有那底外來侵略,你看那邊就是我們路川海的那個最大的江九州江 這裡的 見這個土城土牆的呢是為了保這個城裡面的機民還有那底外來侵略你看那邊就是我們路川海的那個最大的江九州江 那邊就是一條小兩條和交的地方那個月那個交通啊那個水上運勢發達천현 다루가 부임한 고려인 라마단도 이곳에서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시찰하고 감독했을 것이다. 원나라 정부가 라마단에게 부여한 임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육천현은 동남아시아와 중국 대륙으로 가는 해상 무역의 중요 거점이었다. 이곳에 드나들었던 수많은 무역선들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수많은 무역선들이 오가는 동남아 무역의 거점이자 군사 유충지였던 육천희. 원나라가 이러한 막중한 지역에 고려인 라마단을 파견했던 것으로 보아 라마다는 원나라 정부의 시례가 두터운 범상치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他過來的目的內也是一樣看有可能這裡的那個那水上是發達,有可能那交通啊各方面都發達,那發達,還有那軍事內設施也 他過來的目的也是一樣,看到有可能這裡的那個那水上運勢發達,有可能那交通啊各方面都發達,那發達,還有軍事內設施也要重視一下,他來這裡發展一下,所以呢政府呢就要求他理這個 당시 고려인이 다루치에 오른 것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권나라가 민족을 분류한 기준에 의하면 몽고의 끝까지 저항한 고려는 다루같이 오를 수 없는 3등급의 민족이었다. 按照原代的制度,蒙古人的制度, 達華持這個官 是地方的行政熟, 斷事官 重要由他來說了算 而達一般只能有蒙古人和人나 원나라를 건국한쿠라인은 고려인의 능력을 매우 높이 사 주관에 등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중국 원사에 기록되 있다. 고려사에서도 그러한 단서가 확인된다. 원나라의 인질 요구에 따라 고려의 고관자재들이 공민왕 때까지 계속 파경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인질로 원나라에 파견된 고려인들은 학문적 소양과 정치적 경륜을 갖춘 고급 인재들이었다. 원나라에서 골모로 이러한 고려의 인재를 요구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원나라는 세계 제국이지만 실제로 어 몽골 출신으로서는 세계 제국을 경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나라는 능력 위주의 인재 정책을 핍니다.
어떤 국가나 민족을 초월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몽 어 원나라의 관리로 사용하는 어 능력 본위의에 인재 우대 정책이 원나라의 어떤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이 몽골족을 제외하고 나서는 한족 이슬람족 같은 여름 민족 가운데서 고려인들은 실질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우수했고 >> 원나라의 열린 인재 정책으로 고려인 라마다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다루가치로 임명도 했고 몽고족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세계를 경영하던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되어 국제인으로 살았던 라마단. 하지만 그가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던 것을 묘비문에서 이어볼 수 있다.
>> 고래인 출신이라는 것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고래인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평소에 생전에 상당히 자랑스럽게 얘기했기 때문에 비문에서 어 고래인 출신한 것이 특별히 명기된 원인이 아니냐 이런 점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시 원나라 사회였던 주류 세력은 아니었지만은 스스로 어 고래인으로서의 어떤 정체성을 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다. >> 중국 대륙의 동남아 교육 거점이자 군사적 요충진 6천현 다루가치를 지낸 고려인 라마다. 그는 원나라 정부도 능력을 높이 샀던 고려의 인재였던 것이다.
라마단의 묘비문을 통해 당시 고려인이 중국 대륙을 감독하는 다루가치에 임명됐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습니다.이는 이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에서는 고려인의 능력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당시 원나라는 능력 있는 많은 고려인들을 주요 관직에 등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이 묘비는 고려인 무슬림의 존재를 알려주는 첫 기록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비문도 아랍 적혀 있고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는 불교 국가가 아닙니까? 지금도 종교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더구나 불교 국가에서 외국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개종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고려인 라마다는 어떻게 이슬람교 신자가 된 것일까요? 베이징 남부에 위치한 우가 대로변의 소수민족 벽화는 우가의 상징이다. 벽화에 그려진 중국의 취인 여섯 개 민족 가운데 10여 민족이 이슬람교를 믿는다.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특색거리로 지정한 우관은 배증에서 이슬람교 신자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주민 5만 명 가운데 무슬림이 1만 명. 무슬림은 이곳에서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골목마다 질비하게 늘어선 식당은 대부분 이슬람계 식당이다. 무슬림들이 이용하는 이슬람계 식당에서는 무슬림의 금기 식품은 일체 판매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의 거주지는 이슬람 사원인 우가 예배사를 중심으로 형성되 있다. 오랜 세월 우가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무슬림들에게 우가 예배사는 자존심의 상징이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정신적 구심점이다. 그렇다면 이에 무슬림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언제일까?因為西回來的時候帶回好多阿伯和波斯人有好多呢是兵士兵 因為陳奇 他回來的時候呢帶回了好多這個阿伯人和波斯人有好多呢是兵士兵有好多呢也學者將來呢這個參加了中國的這個科方面的吧 所以呢在原的時候呢可以說伊斯蘭教在中國是一次大 유라시아 지역을 하나로 아울렀던 친기즈카는 무슬림을 정복 사업의 파트너로 삼았다. 한족을 배제한 채 거대 제국을 다스려야 했던 원나라는 그때부터 무슬림들을 불러들여 주은 지배층으로 우대하는 인사정책을 펼치다.
세계 정복 과정에서 이제 국제적인 정세와 그 교육에 대한 모든 자료를 무슬림으로부터 많이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정복 사업의 동참자로서 무슬림들에 대한 기대와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과 그 국제 교육을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인적 자원을 이제 원나라 이후부터는 특히 많이 활용하게 되었고 또 수적으로 열세인 몽고 그 조정 관리로서는 통치가 분류가능했죠. 그래서 거의 100만에 가까운 생목인들을 거의 준 지배총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 취한저우 해외교통사 박물관은 당시 생목인으로 부르던 무슬림에 대한 원나라의 인사 정책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시시를 가득고 있는 것은 대부분 무슬림들의 미묘이다. 그만큼 무슬린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전시된 묘비 가운데는 당시 원나라의 관직을 맡았던 무슬림들의 묘비도 상당수 있다.
특히 눈길를 끈 것은 다루가치를 지낸 무슬림의 묘이다. 那中文就很清楚了,這波人當了什麼呢? 奉獻大是永春縣達這個殘的一塊已經看到達兩個字了 我們就是發現了這一塊杯的時候才知道的永村縣的一個是 중국대륙을 마지막으로 허물어리고 기의 대을 완성했던 쿠빌라이 사냥에 나선 그의 수렵도에도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을 대원제국의 이름 아래 묶어낸 그대한 인정 네트워크가 잘 표현되 있다. 허허벌판이던 베이증의 수도를 건설하고 대원제국을 이루어낸 역사에는 그들의 두뇌 역할을 하고 손발이 되어 준 무슬림이라는 그대한 인정 네트워크가 있었던 것이다. 베이증을 설계한 인재도 무슬림이었고 중국의 대표적인 천문 과학 기기도 대부분 무슬림의 손에서 단생했다.
그러한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원나라에 진출한 고려인들은 선진문을 겸비한 무슬림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종교도 접했을 것이다. 아마도 대도에 머물던 라마단에게 이슬람은 더 이상 낯선 종교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사에서도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무슬림들이 고려 왕을 위해 새로 지은 궁전에서 향연을 열었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였다.
특히 고려로 귀화한 무슬림들을 통해 이슬람은 고려 사회에 자연스럽게 전파됐을 것이다. 경주 설시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는 전북 수훈창의 호치마을. 이곳에서 시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지 400여년. 경주 설씨가 모시는 조상은 원나라 때 고려로 귀화한 위그릇의 출신이다.
>> 귀화한 뒤림이라는 본관을 하사받고 경주 설시 일가를 이룬 시조는 설손이다. 손째 할아버지요. >> 공민왕때 귀한 설소는 고려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며 반직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다에 가서 바이 바이칼호 있는데 설령거라에서 사시다가 >> 고창 >> 지금 신강성 이구루 >> 어 신강선 투루판이죠.
투루판 옆에 가면 지금 고창성이 있습니다. 거기서 계시다가 나중에 이제 서안으로 해 가지고이 산동 쪽으로 넘어오죠. 서원과 유비를 세우고 조선시대 유학자들까지 그를 존경하며 기렸던 것을 보면 당시 설순의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한 집에서 새삼 충정효가 나왔다고 해서 중국에서 참 >> 널리 알려진 집안이에요.
그래서 그 세 분을 충이라고 에 >> 삼절이라고 했고 >> 4현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오셔 가지고 에 >> 등과해 가지고 벼을 하신 분을 지칭해서 사현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고려인들이 이슬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증거는 라마단 미오비에 잘 나타나 있다. 고려는 근본적으로 대회문화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이었습니다. 사회는 매우 유연하고 역동지역이었고 또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그 앞선 이슬람 과학과 기술 또 대회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와 있었고 따라서 라마당과 같은 이슬람계 전문제 관료나 그런 상인 집단들이 고려 사회에 자연스럽게 정창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이미 성숙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라마단 미오비의 아랍버 비문에는 그의 집안이 일찍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는 단서가 들어 있다. 아랍보 비문의 끝부분에 언급되 있는 라마단의 아버지 이름이 그 증거다. 죽음을보게 된다. >> 여기 지금 라마단이라고 하는 이름이 언급되 있고요.
>> 그다음에 빈. 빈은 아랍으로 아들이란는 얘기입니다. >> 누구의 아들인가? 알라오틴의 아들 라마단이라고 비문에 새겨져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이제 그 비문에 본인의 이름만 언급되는게 일반적인데 여기에 보면은 그 아버지 이름까지 나오거든요.
근데 아버지 이름까지 나올 경우에는 그 가문이 바로 저기 그 이슬람 가문이었다는 걸 우리가 바랄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으로 개정한 아버지의 코라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고려인 라마단. 라마단과 그의 아버지 알라우디는 일찍이 이슬람 문명과 교류하며 종교까지 받아들인 고려인이었던 것이다.이 >> 책에서도 당시 이슬람교에 대한 고려인들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 역사학자 선생이 쓴 조선불교통사입니다.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회 대조회 송축해궁이라고 되어 있죠. 고려 개경에 회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예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가 개경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아 선생이이 기록을 인용한 출처를 밝혀놓지 않아 그 진의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라마단과 그의 아버지 알라우딘을 통해 그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습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당시 개경 사람들 가운데는 라마단일가처럼 이슬람교로 개종한 고려인이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문명 교류는 어느 한쪽에 일방 통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태도로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가운데 종교도 전파됩니다.
그렇다면 이슬람과 세계의 만남은 인류 문명사에 어떤 자치를 남겼을까요? 당시 동서양을 넘나들며 문명 전파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슬람 상인들입니다. 원나라의 개방적인 정책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히 동서양을 오습니다.이 지도를 한번 봐 주십시오. 14세기 초반에 세계 지도입니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모두 몽골이 점령한 지역입니다.
고려가 있는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인도 북부를 거쳐서 이라크스도인 바그다드 그리고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슬람 상인들은 이러한 몽골리언 루트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쓰였던 국제 화폐입니다. 1260년 원나라에서 발행한 집회인데요.
중통원보 교초라고 쓰여 있죠. 당시 유라시아 대륙을 오가던 이슬람 상인들이이 집회를 유라시아 국제 화폐로 확산시키는 전파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어 그럼 이슬람과 중국의 만남은 어떤 문화를 탄생시켰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이 도자기는 원나라 때 제작한 청화백자입니다.이 이 1500백자의 정수는 바로이 푸른색 문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런데 백자의 문양을 그려 놓은 푸른색 알류를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회청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 줄 단서는 이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란의 천연구도 이스판의 도심 중앙에 있는 이맘 모스크입니다.이 모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푸른색 타일이 장관을 이루고 있죠. 바로이 모스크 타일의 푸른색 완료를 중국과 고려로 전파한 사람들이 바로 회인으로 불리던 이슬람 상인들입니다. 그래서 회인들이 가져온 푸른색이라고 해서 회청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이슬람의 푸른색 알료와 중국의 도자기 기술이 만나서 청와백자라는 세계적인 도자기를 만든 것이죠. 당시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와 유럽을 직접적으로 연결한 흔적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서구 근대화를 이끈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손꼽히는 구템베르크의 금속 활자로 찍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구템베르크의 금속 활자 탄생에 영향을 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1235년 고려에서 개발한 금속 활자로 찍은 직지 심체 유효절이 현존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 낸 서적으로 평가돼서 유네스코 세계 기록류선에 올랐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시죠? 이처럼 고려에서 개발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기술을 유럽으로 전파시킨 주역도 이슬람 상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은 이렇듯 인류 문명사의 기념비적인 자취를 남겨 놓았습니다. >> 네. 인류 문명사의 한 가운데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이 있었다니 세삼 놀랍습니다.
그럼 다시 라마단의 행적으로 돌아가겠습니다.이 지도를 봐 주십시오. 라마단일가 머물렀던 곳은 베이징의 왕평현입니다. 그가 다루 가치로 부임해 간 곳은 6천현입니다. 그런데 라마단이 묻힌 곳은 광저입니다.
보통 무덤은 망자의 거주지나 연고지에 쓰기 마련인데 라마단은 왜 광저우에 묻힌 것일까요? 고려인 라마단에게 광저우는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요?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이 시작된 일에 놀라운 속도로 발전 중인 광조우. 7세기 초부터 이슬람 문물을 실은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면서 광저우는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 특구로 자리잡은 곳이다. 주장강변의 광저우 최대 옥시장. 각까지 색상의 옥구로 만든 장식품들이 관광객들을 불러모다.
>> 지금은 옥시장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해양 실크로드의 전성기 때는 정교한 수긍품을 좋아하는 이슬람 상인들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던 곳이다. 就當時在這一代 是個馬靠近住江的地方,因為當古時這裡是個碼頭靠江,一般海外的那些石也好啊,貨物也好啊,都是在這裡岸,所以說這一代也成了一個預期的加工,一個廣州市的一個預期加工的地方 당시후의 무역 중심은사일 때다. 이슬람 상인들은 회성 주변에 집단 초락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무슬림들이 건설한 회성사는 중국에 세워진 최초의 모스크로 종교적 기능만 담당한 것이 아니었다.
회성사 광탑은 당시 광으로 들어오는 배드를 안내하는 등대 기능도 겸했다. 회성 광탑을 보고 무역선이 들어오면 회성 일대는 국제 방남 회장으로 바뀌었다. 이슬람 상인들이 씻고 온 진귀한 물건을 구경하라는 사람들이 끝없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동수양의 물건들이 거래도했고 세계로 팔려 나갔다.
有很多國家的船呢都來到了中國通過廣州的港口啊來做正常的貿易生意啊,我們相信呢也會有高力的船,也會有高力的商人在這裡做生意,拉馬丹只是其中高人中間的一個做的,他也肯定會和這些高的商人們聯繫有來的 상인들의 국제무역은 고려 상인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다. 교육품을 실어나려는 수많은 고려배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고려인의 활동은 중국의 또 다른 이슬람 경제 특구인 취한저우에서도 확인된다. 취한저우는 원나라 때 중국 최대 국제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청정사는 이름만 들으면 불교 사찰 같지만 취한 후의 대표적인 이슬람 사원 유적이다. 지금은 무너져 도울 기둥만 남아 있는데 코란 경문을 적어 놓았던 석판과 도울 무덤이 이곳이 이슬람 특구였음을 말해 준다. 청정사에서 불과 1km 거리의 규화항에서 어렵지 않게 고려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공식 지명은 규화항인데 취한 사람들은 이곳을 고려항이라 부른다.
이곳에도 고려인들이 모여 살았던 고려촌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고려항으로 불린 것일까? 可能是當時呢,宋時期或者更早以前在這裡居住了很多高麗來的商人或者是其他的一些人,他們在這裡呢住了以後呢形成一個高人的街區,所以才會把這個的名字叫做高麗,那現在已經改成是像是後來在明代的時候才改的,我想應該是這樣,但是他這個高的名稱呢,到現在 불려인의 흔적은 취한조 시장에도 남아 있다. 야채를 사고하는 노점상들과 이곳 주민들이 배출을 부르는 특별한 이름이 있다. >> 이곳에선 배추를 고려체라 불렀다. 오랜 세월 동안 구전돼 왔다는 고려체라는 이름.
역시 고려인들이 활동한 결과물일 것이다. >> 고려인들이 정착해 이슬람 상인들과 교류하며 번창했던 국제 무역항의 모습은 도시 곳곳에서 이어볼 수 있다. 취한우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9일산일 때는 지금도 중국인들이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찾아오는 유명한 기도처다. 이원 대상은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다.
중국인들이 바다의 신으로 모시는 통회왕이 모셔져 있다. >> 구일산으로 오르다 보면 가까지른 절벽이 나온다. 절벽마다 간절한 기원문들이 새겨져 있다. 먼 바닥기를 떠나기 전 안전운을 기원한 흔적이다.藍風啊順利把它送 국제무역항 취한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일산 석각 거친 바닥길로 고려와 취한를 오가던 고려 상인들도 이곳에 올라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무사운항을 기원했을 全在宋元時期啊是一個這個無名的海上失路起點也是世界貿易大綱,世界上很多商人都到這個地方來,包括高麗的商人都到全州來,還有我們全州的商人也到高生 이슬람 무역 특구가 설치됐던 중국의 해양실 그로드 도시들은 이처럼 고려인들의 동소 교육을 위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고려인 라마단에게 고려인들이 활동하는 광저는 낯선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광저는 당나라 때부터 중국 최대 이슬람교 성지로 통하던 곳이다. 이슬람교를 중국으로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와카스의 무덤이 있어 지금도 중국 전역에서 성지 수술례를 온다. 고려인 라마단도 이들 중국의 무슬림들처럼 성지 수술차 이곳을 찾아 와카스미오 앞에서 코란을 암송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送個一個新聞啊 공海로 가난 공수 화신 생수 오면 내가 바고 바고 서구 把這個這個地方來 성지를 온 광저에서 라마다는 수많은 고려인들을 만났을 것이다. 고려의 무역선들이 씻고 온 고향 이야기를 들으며 회포도 풀었을 것이다. 라마다는 그렇게 광조를 오가다 숨을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하마드의 언행록을 인용한 라마단 뮤비의 아라버 비문이이를 뒷받침한다.
우리 고려인이 이제 중국에 가서 >> 이슬람을 막 그 연구하고 >> 또는 전파하고 또 이슬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 공적으로 아마 그 기록하신 분이 >> 그 라마단을 순계자로 표기한 것 같습니다. 라마단의 미오비가 발견된 곳은 와카스미오가 있는 청진선현 고미오에서 10m 지점 중국의 문화대영명 때 뽑히고 파헤쳐진 무슬림들 미오비 속에 라마단의 묘비도 들어 있었다. 現在不如說我被 하마터면 영령 잊혀질 뻔한 고려인 무슬림 700여년 만에 발견된 라마단의 묘비는 머나먼 광저에서 고려인들이 이슬람과 만나고 교류한 역사를 호스안이 간직하고 있었던 시다..
#모모는철부지, #MOMOforeverYOUNG,
https://www.youtube.com/watch?v=XZ4mPsZwe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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