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확인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금나라와 청나라, 우리 역사인가?
📌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 역사인가?
강사는 금나라와 청나라가 우리 역사라고 보는 것은 큰 오바라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 그 주장의 핵심 근거는 무엇인가?
당시 고려는 금나라에 사대하고 청나라는 스스로 고구려와 발해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의 후예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뿌리인 고구려 역사를 지우려 하는 등 민족적 일체감이나 역사 계승 의식이 없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이 콘텐츠는 금나라와 청나라 역사가 우리 역사에 포함되는가라는 논쟁적인 질문에 대해, '아니다'라는 명확한 결론과 그 근거를 제시하며 우리의 자주적 역사관을 확립하도록 돕습니다. 단순히 두 왕조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왜 그들이 우리 역사가 아닌지 실증적 사례(예: 김부식, 단재 신채호의 입장)를 통해 분석하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진정한 역사 인식의 자세가 무엇인지 통찰을 제공합니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을 버리고 자긍심을 가져야 할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는 이 영상은, 역사 왜곡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지키는 실질적인 기준점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 역사인가? - 결론 및 기본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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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목적: 성리학 사관과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의 역사를 비판하며, 우리 역사의 자주성에 대한 논의를 재확인하고 금나라와 청나라 역사가 우리 역사에 포함되는지에 대한 결론을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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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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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사랑하는 것은 영토의 크기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유구하게 내려온 역사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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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역사를 열등의식 없이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며, 옆집 아저씨가 아버지보다 나을지라도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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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대주의에 빠진 젊은 세대가 많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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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의 비교를 통한 자주성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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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자국 역사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제 자국 역사의 절반 가까운 시간 동안 역사적 단절을 겪었으며, 한족이 이민족 지배를 넘어 나라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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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제강점기 35년의 단절 외에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나라를 계속 유지해 왔으므로 중국에게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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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의 결론 (미리 제시):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라고 명확히 결론 내리고 강의를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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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대응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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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금나라/청나라 역사를 억지로 우리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찻잔 속의 태풍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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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대응은 중국의 역사 과장과 타 민족 역사 편입 시도에 대해 "너희들은 이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라고 반박하며, 우리 역사의 유구함에 자부심을 갖고 비판해 나가는 것이 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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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넘어 발해와 만주 전체 국가 역사, 나아가 부여와 백제 역사까지 빼앗아가려는 수준으로 심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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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의무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틀렸음을 자료를 제시하며 신랄하게 반박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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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 구성 및 금나라 건국 과정
2.1. 만주 지역의 다양한 민족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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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방 만주 지역의 민족들: 동호, 선비족, 거란족, 몽골족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만주족이라고 칭해지는 민족들이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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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연관된 계통의 민족들: 예맥족, 옥저, 신라, 물길, 그리고 말갈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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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정체성: 말갈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층이었으며, 이후 고려 시대에는 여진, 조선 시대에는 만주족이라고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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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족의 정체성: 예맥족은 우리(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며, 고조선 멸망 후 예맥족이 한반도로 많이 이주하면서 만주 북쪽에는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이 살게 됨.
2.2. 금나라의 건국과 고려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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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건국: 여진족에 의해 금나라가 건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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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건국 시점: 정확히는 여진족이 1104년(고려 의종 때) 별관을 만들고, 1107년에 예정인(아골타)이 별모반을 이끌고 검북구 성을 축조하며 만주 지역으로 영토가 넓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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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구 성 반환: 여진족의 침략과 조공 요구 때문에 검북구 성 축조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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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건국: 이어진 1115년(예종 치세)에 금나라가 건국되었고, 이 금나라는 중국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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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형성: 당시 중국 대륙의 남쪽은 금나라에게 밀려나 남송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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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처: 금나라에 대해 당시 고려의 권력자 김부식은 사대를 했으나, 묘청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함.
3. 금나라가 신라 후손이라는 주장의 근거와 반박
3.1. 금나라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주장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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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의 근거 자료: 청나라 시대의 거란족 역사서 《요사》, 여진족 역사서 《금사》, 한족 역사서 《원사》가 편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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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의 기록: 금나라 시조 아구타(아무타)의 시조는 완안함보이며, 이 완안함보의 시조는 신라 사람이라는 기록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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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관련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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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함보의 성씨는 완안(完顔)인데, 이를 우리식 한자로 해석하면 김씨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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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시조가 신라 사람이라는 기록이 상당수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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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를 뜻하는 '금(金)'이 김씨를 뜻한다고 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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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함보가 진씨였는지 왕씨였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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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고려 초의 결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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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신라 왕족이었던 경주 김씨와 고려 왕족이었던 왕씨가 신라 멸망 후 고려 통일 시기에 많이 결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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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김씨)이 왕건에게 항복하며 경주의 사신이 되었고, 왕건이 자신의 딸을 경순왕에게 주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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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추정: 이러한 결혼 관계 때문에 금나라 시조 완안함보의 아버지가 왕씨이거나 어머니가 김씨, 혹은 아버지가 진씨이거나 어머니가 왕씨였을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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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해석: 결과적으로 금나라 시조가 한민족이었다는 것은 민족이 어디 가서도 리더가 된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울 수 있음.
3.2. 금나라 시조가 한민족이었다고 우리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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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선례 비교 (고려): 우리 고려 역사 기록에도 고려 왕들이 당나라 서쪽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명확히 있음에도 고려 역사를 중국 당나라 역사라고 보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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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선례 비교 (신라): 신라의 석탈해가 흉노나 스키타이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음에도 신라 역사가 흉노 역사가 될 수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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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통한 설명: 케냐 사람이었던 오바마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미국이 케냐와 같은 나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금나라를 우리 역사라고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임.
3.3. 김부식과 신채호의 입장을 통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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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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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진족과 민족적 일체감이 있었다면, 금나라가 창건되었을 때 김부식이 동북구 성을 쌓고 여진을 공격했던 행위를 설명하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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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쓴 김부식(경주 김씨, 신라 6부 품의 후예)은 완전히 친 신라 인물이었고 김유신에게 3골을 할애할 정도로 팬이었지만, 삼국사기 기록 어디에서도 금나라가 신라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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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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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백제가 무너질 때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를 친 죄를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물을 정도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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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조차도 금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던 고려를 옹호했으며, 금나라에게 사대하려 했던 김부식을 친중파, 대중국주의자, 보수주의자로 매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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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가 금나라를 우리 역사로 인식했다면, 여요(청)가 금나라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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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려, 백제는 우리 역사로 인식했기에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친 행위(형제가 형제를 침)를 비판했던 것이며, 금나라는 달리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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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의 결론: 김부식과 신채호 모두 금나라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3.4. 금나라 사신에 대한 예우 해석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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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주장의 근거: 금나라 사신이 송나라에 올 때마다 신라 사신에 대한 예우를 했으므로 금나라가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는 주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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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 이는 답답한 해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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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당나라에 멸망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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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는 신라보다 크고 강성했던 나라였고, 금나라와 대립했던 나라(남송) 입장에서 금나라를 대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신라 사신에 대한 예우는 금나라가 신라보다 한 칸 내려왔다는 이야기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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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금나라는 우리 역사가 아니라고 합시다.
4. 금나라의 계승 의지와 고려의 고구려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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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입장: 금나라는 항상 고구려 계승 의지를 밝혔고, 스스로 고구려 후예임을 자처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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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고구려: 당시 대립하던 고려 역시 고구려의 후예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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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고려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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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자들은 원래 나라 이름이 고구리였으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며 고구려로 바꾼 것으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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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왕건의 고려는 고구려의 '고려'를 그대로 계승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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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고구려 계승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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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흔적이 국호뿐 아니라,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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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경)에 왕이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도록 명령했고, 서경에 학교를 만들고 행정 기능을 분산시키는 군사 제도를 실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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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를 청천강에서 압록강까지 확장시켰으며, 발해 멸망 시 발해 유민 대광현을 우대하는 것을 보았을 때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이 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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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계승 의식: 금나라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도 고구려를 계승했으니 전하(고려 왕)는 우리에게 사대만 하니 공격하지 말고 살려달라"는 식의 인식을 가졌을 수 있음. (척중경 무력에 공포를 느껴 공격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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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중국 대륙 절반을 차지했던 금나라는 실제로 고려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음.
5. 후금(청나라) 건국과 신라 후손 주장에 대한 반박
5.1. 후금(청나라) 건국 배경과 '아이신 겔로' 성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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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지배: 금나라가 몽골에게 무너진 후, 여진족은 만주 본거지로 돌아가 후금이라는 나라를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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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동진국 지배: 몽골이 동진국과 함께 압록강 유역의 거란족을 공격할 때 거란족이 도망쳐 내려왔고, 이때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올라가면서 몽골과 고려가 처음 만났으며, 이 동진국 역시 나중에 몽골에게 지배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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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건국: 원나라 멸망 후 부족 단위로 생활하던 여진족을 누르하치가 통합하고 후금을 건국했으며, 그 후계자인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며 나라 이름을 청나라로 처음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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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우리 역사로 보는 근거와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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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우리 역사로 보는 사람들은 누르하치의 성씨가 아이신 겔로(Aisin Gioro)인 것을 근거로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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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아이신'이 '금(金)'을 뜻하며, '겔로'가 '성'을 뜻하고,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며 신라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성씨라고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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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명백히 잘못된 해석('응 차')이며, 아이신 겔로를 위해 한자를 억지로 빌려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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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은 '황금', '겔로'는 '부족'을 뜻하는 황금족이라는 의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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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프랑스를 '불란서'라고 할 때 '란'이 난초와 상관없는 것과 같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응 차'일 뿐이므로 신라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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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사서 기록: 만주사학의 대표 서적인 《만주원류고》에는 금나라가 신라의 후손이라는 편이 분명히 존재함.
5.2. 금나라 시조의 신라 후손설과 여진족의 정통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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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시조의 신라 후손설: 일설에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만주로 건너가 완안함보의 시조가 되었다거나, 아골타의 손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야사 수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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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지점: 많은 사람들이 금나라가 신라 후손이므로 그 뒤를 이은 청나라 역시 신라의 후손을 자처한다고 오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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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내부의 분파와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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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진족은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으로 나뉘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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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어렵게 건주 여진을 통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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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가장 힘이 있었던 것은 해서 여진이었으며, 해서 여진의 우두머리 부족은 예허부(Yehe)였고, 예허가 바로 옛날 완안부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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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난(완안)'이라는 발음은 그들의 발음이고, 자식을 낳으면 예허부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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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허부가 금나라의 적통을 이어받은 정통 부족으로 자부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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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허부는 누르하치가 죽을 때까지 대립했으며, 명나라와 편먹고 공격했던 것이 바로 사루 전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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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허부를 무너뜨린 후에야 비로소 여진족을 통합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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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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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허부가 세운 금나라가 신라 후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나라는 스스로를 거란, 요나라의 후예라고 칭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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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허부까지 포용해야 했기 때문에 수금(後金)이라는 나라를 만들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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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청나라 역사서의 문제점과 우리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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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역사서의 편향성: 만주 지역에서 세워진 모든 국가에 대해 다루고 한반도 국가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나, 만주의 최초 중앙집권 국가이자 만주의 천하를 형성했던 고구려에 대한 역사는 단 한마디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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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역사서의 의도: 이 역사서는 청나라식 동북공정을 위한 역사서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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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고구려 역사를 지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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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옛날 말갈족이라고 주장하는데, 말갈족은 고구려의 지배층이 아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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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것이 한반도의 고려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조선(고려/신라 계승국)을 지배하는 선조들의 지배를 받았다는 논리가 싫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뿌리를 아예 없애려고 했던 것이 청나라 사람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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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져야 할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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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청나라를 같은 민족으로 인식하려고 하거나, 청나라가 우리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코미디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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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람들이 입었던 치파오, 인조가 굴욕을 당했던 삼전도 비문, 만주어, 변발 등이 우리 전통인지 질문하며, 금나라, 청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라고 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오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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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 동북공정에 맞서는 올바른 역사 인식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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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한 대안적 논리: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차라리 금나라, 청나라 역사라도 우리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 이는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라고 재차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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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역사 대응: 중국이 역사를 과장하고 타 민족 역사를 편입하려는 것은 역사적 열등의식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실제로 너희들이 그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라고 큰소리 칠 수 있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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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 기반의 비판: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다는 자부심을 가지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차곡차곡 비판해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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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의 심각성: 최근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뿐만 아니라 발해와 만주 전체 국가의 역사를 빼앗아가고, 부여 역사까지 빼앗아가려는 단계에 이르렀음. 백제의 뿌리도 부여에 두고 있는데 백제 역사까지 빼앗아가려는 상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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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의무: 중국 학자들에게 '양심을 지켜라'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역사학자의 의무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틀렸다는 것을 신랄하게 반박하는 자료를 준비하여 알려주는 것이라고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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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소신 표명: 본 강의는 대본 없이 주저리주저리 생각을 떠든 것이지만,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황현필로서 소신을 밝힌 것이며, 이는 역사 사랑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임.
https://www.youtube.com/watch?v=uSD-oWG0rnI
★★★★★★★
아이디어링 : First Mover. 퍼스트무버의 시대. 원격근무시대. 아이디어 회의 방법론 1편
https://kmong.com/gig/317273
원격근무시대. 아이디어 회의 방법론 1 드립니다. - 크몽
스몰미 전문가의 전자책 서비스를 만나보세요. <p>※서비스 설명</p><p><br></p><p><strong><u>언제까지 회의실에서 ...
km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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