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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명장 살리타이, 왜 보잘것없는 처인성을 공격하다 전사했을까?

by 리치캣 202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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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도 우리와 같은 뿌리다.

몽골과의 전쟁을 내전수준으로 보는 것도 가치있어 보이는 시점이다.

그래야 중국의 역사왜곡, 문화왜곡, 문명왜곡의 진실을 노출시킬 수 있다.

 

몽골의 명장 살리타이, 왜 보잘것없는 처인성을 공격하다 전사했을까?

📌 몽골의 명장 살리타이는 왜 보잘것없는 처인성을 공격하다 전사했을까?

몽골군의 전쟁 매뉴얼에 따라 큰 성(광주성)을 고립시키고 포로와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작은 처인 부곡을 공격했지만, 고려군의 집중 사격으로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전사한 것이 핵심입니다.

 

💡 살리타이 전사가 고려 역사상 갖는 의미는?

고려 역사상 3대 대첩을 포함한 수많은 승전에서도 적장을 사살한 경우가 없었기에, 총사령관을 사살한 유일무이한 승리이자 대몽 항쟁의 중요한 순간입니다.

 

 

 

 

몽골의 명장 살리타이를 전사시킨 처인성 전투의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파헤칩니다. 이 콘텐츠는 고려의 대몽항쟁기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결정적 승리의 실체와, 당시 지휘관이었던 김윤우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을 상세히 분석합니다. 몽골군의 치밀한 전쟁 매뉴얼과 달리, 예측 불가능한 작은 성에서 발생한 이 사건이 어떻게 고려에 유리한 강화 협상의 발판을 마련했는지 구체적인 적용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고려 대몽항쟁기: 살리타이를 전사시킨 처인성 전투의 재조명

 

1.1. 콘텐츠 소개 및 몽골에 대한 관심 증대

  1. 방송 개요: '이강민의 잡치사' 12월호 콘텐츠로, 몽골과의 역사적 만남(박몽일 선생님과 함께)을 다룸 .

  2. 이전 콘텐츠: '고려 무명 구광전 킹어인' 시리즈에서 광종까지 다룬 후 잠시 휴식기를 가짐 .

  3. 화제 콘텐츠: '잡지선 최초의 메가 히트 콘텐츠'인 '쿠빌라이 칸을 만난 원종편'이 100만 뷰를 달성함 .

  4. 반응: 콘텐츠 제작자(화자)는 의외의 인기에 뿌듯함을 느끼며, 최근 몽골에 대한 호감도 및 관심이 증가하는 추세임을 언급함 .

  5. 최근 몽골에 대한 긍정적 인식: 몽골이 한국을 덜 위협적이며 발전한 나라로 인식하여 경제 시스템, 산업 구조, 자연 체계 등을 도입하고 있음 .

  6. 한국인 체감: 이사짐 센터 등에서 몽골인들의 성실함과 뛰어난 체력(피지컬)을 체감하고 있음 .

  7. 역사적 의문 제기: 이러한 몽골인들과 150년 가까이 악연의 역사를 가진 고려 사람들이 겪었던 싸움에 대한 궁금증이 발생함 .

  8. 대몽항쟁기 재평가: 고려가 이 시기를 버텨낸 것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전 세계 채식 비율이 높은 한국과 육식 비율이 높은 몽골의 만남이라는 이색적인 측면도 언급됨 .

 

1.2. 대몽항쟁기에 대한 일반적 인식과 처인성 전투의 특수성

  1. 대몽항쟁기에 대한 일반적 경향: 1231년 시작되어 약 40~43년간 지속된 이 시기는 역사에서 대체로 소략되거나 비판 위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음 .

  2. 주요 비판 사항:

    1. 전쟁 책임 정부가 1차 침입 직후 강화도로 피난가 백성을 버렸다는 비판 .

    2. 항쟁 과정에서 대장경 소실(부인사 팔만대장경) 등 국가 유산 훼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음 .

  3. 승리의 기록: 몽골의 침입을 6차(또는 9차)로 보았을 때, 고려가 이긴 전투도 존재함 .

  4. 고려의 결정적 승리, 처인성 전투: 고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곳은 용인에 위치한 처인성이라는 작은 곳임 .

  5. 처인성 전투의 의의: 6번의 주요 전투 중 한 번의 승리였을 뿐만 아니라, 적장을 사살한 거의 유일한 사례에 해당함 .

  6. 사살된 적장: 살리타이(살레탑, 살리타이)라는 적장이 사살되었으며, 이 전투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 .

  7. 적장 사살의 특별함: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대첩 등 3대 대첩을 포함하여 임진왜란 등 다른 수많은 승전에서도 총사령관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은 사례가 거의 없음 .

    1. 살수대첩: 우중문, 우문술을 죽이지 못함 .

    2. 귀주대첩: 소배압을 죽이지 못함 .

    3. 한산도: 와키자카가 도망감 .

    4. 임진왜란 일본 장수들(가토, 고니시, 구로다 등) 중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 자가 없음 .

  8. 살리타이 사살의 위상: 살리타이가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이 전투는 역사상 대서특필되어야 함 .

  9. 현대적 비교: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적장)를 사살한 사례가 가장 가까울 뿐, 실제로 다른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사살한 예는 드묾 .

 

2.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의 등장과 2차 침입의 배경

 

2.1. 살리타이의 경력과 2차 침입의 시작

  1. 살리타이에 대한 질문: 몽골 내에서 유명하지 않거나 이름만 사령관인 인물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됨 .

  2. 살리타이와 고려의 악연의 시작: 2차 침입 이전, 몽골과 고려 사이에 몇 가지 사건이 있었음 .

    1. 강동성 거란족 처리 (첫 만남): 고려가 강동성에 도망쳐 온 9만 명의 거란족을 막아야 했을 때, 몽골군도 이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쫓아왔음 .

    2. 이 만남에서 몽골 사령관이 살리타이였음 .

  3. 고려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 저고여(몽골 사신)가 돌아가던 중 국경 지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함 .

    1. 배경: 저고여는 단순 사신이 아니라 공물을 요구하며 상국처럼 대했던 존재였음 .

    2. 원인 규명 복잡성: 역사 연구자들은 여진족, 도적, 또는 고려의 소행으로 보며 복잡한 외교 문제로 남아 있음 .

    3. 결과: 몽골은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했고, 1차 침입의 사령관 역시 살리타이였음 .

  4. 살리타이의 위상: 살리타이는 고려 전쟁에 관한 역전의 용사이자 몽골 내에서 명망이 높은 장수임 .

  5. 2차 침입 (1232년): 이러한 명장인 살리타이가 처인성 전투에서 사사당했다는 것은 상대했던 고려군 지휘관을 살펴볼 필요성을 제기함 .

  6. 지휘관: 처인성에서 용맹하게 싸운 지휘관은 김윤우 장군임 .

 

2.2. 2차 침입 전개 과정 및 몽골의 전술적 변화

  1. 1차 침입 결과: 저고여 피살 후 1차 침입이 있었으며, 살리타이는 박서 장군에게 공격당해 패배하는 등 찝찝한 승리였음 .

  2. 고려 정부의 초기 대응: 당시 최씨 무신정권 하에서, 고려 정부는 몽골 측에 왕(고종)을 입조시키겠다고 제안했으나, 최우는 긴급히 강화도로 천도함 .

  3. 2차 침입의 동기: 강화도로의 천도와 협상 기만 행위에 대한 불만으로 몽골군은 다시 대규모 군대를 몰아 2차 침입을 감행함 .

  4. 2차 침입의 목표: 살리타이의 첫 번째 목표는 당연히 강화도였음 .

  5. 강화도 접근 경로 파악 시도: 몽골군은 강화도를 잘 몰라 황해도 일대에서 고려 관리 변여를 사로잡고 고문을 가함 .

  6. 변여의 저항: 변여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강화도는 물길이 세서 너희 기술과 연장이 준비된 상황으로는 갈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저항하며 강화도를 지키고자 함 .

  7. 몽골군의 전술 변경: 살리타이는 현장에 있던 변여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강화도 직접 공격 대신 고립 전략을 세움 .

    1.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일대의 바닷가 마을과 큰 고을들을 무력화시켜 강화도를 고립시키기로 함 .

    2. 강화도로 물길이 닿는 예성강, 한강 등의 큰 고을들을 공격하는 전술로 변경함 .

 

2.3. 몽골군의 별동대 운영 및 주요 공격 목표

  1. 별동대 파견 (경상도): 몽골군은 공포심 유발을 위해 별동대를 먼저 경상도 일대로 침입시킴 .

    1. 이 과정에서 부인사 대장경이 불에 탐 (이후 8만 대장경이 새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됨) .

  2. 본대의 주요 공격 목표: 본대는 큰 고을들을 하나씩 무력화시킴 .

    1. 한양산성 공격: 개성을 지나 남쪽에 있는 한양산성(현재 북한산성 일대)을 먼저 함락함 .

    2. 광주산성 공격: 한양산성 밑에 있던 주장성(현재 남한산성 일대)인 광주산성을 공격함 .

      • 광주는 양광도(현재 경기도 지역)의 중심 고을이었음 .

 

3. 광주산성 방어와 작은 성, 처인 부곡 공격으로의 전환

 

3.1. 광주산성의 난공불락과 살리타이의 계획 수정

  1. 광주산성의 예상치 못한 저항: 몽골군은 광주산성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맞이함 (합락이 되지 않음) .

  2. 이세화의 기록: 당시 광주 부사였던 이세화의 묘지명 기록에 따르면, 몽골군은 10월부터 12월까지 약 두 달 동안 광주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함 .

  3. 계획의 전환: 광주산성 함락에 실패하고 정부는 강화도에 있는 상황에서, 살리타이는 뜻밖에 더 남쪽에 있는 작은 고을인 처인 부곡(처인성)으로 공격해 들어가게 됨 .

  4. 처인 부곡의 성격: 처인성은 현(縣)이 아닌 처인 부곡으로, 향·소·부곡민처럼 천한 사람들이 살았던 특수 행정 구역이었음 .

    1. 중앙 정부나 몽골군 모두 관심이 없는 작은 고을이었기에 군사 지휘관도 파견되지 않은 곳이었음 .

  5. 역사적 의문: 연구자들은 몽골이 왜 광주성이 안 풀릴 때 충주 같은 큰 고을 대신 천시받던 처인성으로 갔는지에 대해 고민함 .

 

3.2. 몽골군의 전쟁 매뉴얼과 작은 성 공격의 연관성 추정

  1. 몽골군의 탁월한 전투력: 몽골 제국의 전투력은 거란이나 여진의 유목 민족 전투 체계를 정교하게 정립한 것으로 평가됨 .

  2. 대규모 원정 준비 과정 (쿠릴타이 회의):

    1. 2년 전에 부족장들(노연)을 불러 최고 회의인 쿠릴타이(또는 쿠릴타이)를 열어 대규모 원정을 논의함 .

    2. 대칸(오고타이)이 고려를 치자고 제안하면, 각 부족장은 부족으로 돌아가 실무 군인들과 함께 공격 계획에 대한 의견을 수렴함 .

    3. 이 의견들을 취합하여 칸 측에서 침공 계획서를 만듦 .

  3. 침공 계획서 실행 조치:

    1. 스파이 파견: 침공 장소인 고려에 스파이를 먼저 보내 현재 상황 파악, 분위기 조성 가능성, 내부 회유나 폭동 유발 가능성 등을 확인함 .

    2. 보급로 확보: 몽골군은 기병 중심이므로 침략로 초원 지대의 방목을 금지시키고, 전투 말들의 먹이를 위해 풀을 놓아두게 하여 현장 보급을 해결함 .

    3. 현장 정찰: 현장에 도착하면 50기(기병 50명과 말 50마리) 단위로 움직이며, 이틀 간격으로 척후대를 먼저 보내 현지인을 생포하여 정보를 빼내는 역할을 수행함 .

      • 현지인 정보가 가장 정확하기 때문에(예: 변여 사례), 크로스 체크를 통해 확보된 정보의 신뢰도를 확인함 .

  4. 결론: 변여를 심문한 것은 몽골 전쟁 매뉴얼에 따른 것이며, 그 결과 강화도 진입의 승산이 없음을 파악함 .

 

4. 몽골군의 공성 및 방어 전술: 작은 성 공격의 이유

 

4.1. 성 함락 후 몽골군의 주둔 방식과 기습 대비

  1. 성 함락 후 처신: 몽골군은 성을 함락해도 성 안에 머무르지 않음 .

    1. 이유: 성 밖으로 쫓겨난 적군이 다시 성을 공격하면 고립될 수 있고, 몽골군은 기병 중심이라 보병 중심의 성 방어를 이겨내기 어려움 .

    2. 몽골군은 성 밖에 모여 천막을 치고 주둔함 .

  2. 기습 대응 방식: 기습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사냥개를 이용하는 것임 .

    1. 몽골군 1만 명당 개가 5천 마리가 동행했으며, 이는 몽골군 1명당 말 6~7필(항상 안장 씌운 채 출동 가능한 말 포함)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연관됨 .

    2. 사냥개의 역할: 적군이 쳐들어오면 짖거나 공격하며, 이 개들은 눈썹이 짙어 멀리서 보면 '네 개의 눈'처럼 보여 용맹하다고 알려져 있음 .

  3. 적용: 이와 같은 몽골의 전체적인 전쟁 매뉴얼은 고려 침입 때도 그대로 적용되었음 .

 

4.2. 몽골의 공성법과 처인성 공격의 연관성

  1. 공성법: 몽골군은 성문 파괴(충동기 사용) 외에 다양한 방법을 사용함 .

    1. 대포 사용: 1205년 이후부터 대포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여 돌이나 쇠덩이를 날려 성벽/성문을 파괴함 .

    2. 가죽을 이용한 방어 시설: 가죽으로 작은 동굴(텐트)을 만들어 성벽 공격 시 위에서 오는 불이나 기름 공격을 방어함 .

    3. 터널 파기: 큰 돌 공격이 어려울 경우 땅으로 터널을 뚫어 성 밑부분을 파내 성벽을 무너뜨림 .

    4. 화공 및 사람 기름: 마지막으로 사람 기름을 써서 적을 화공 공격함 .

  2. 초기 학살 정책: 전쟁 초기에는 공포심 조성 및 소문 확산을 위해 남녀노소 모두를 죽였으나, 모든 성에서 그랬던 것은 아님 .

  3. 처인 부곡 공격과의 연관성: 사람 기름을 쓰는 공성법과 처인 부곡 공격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이 있음 .

  4. 몽골 공성 매뉴얼: 주변의 작은 성이나 마을을 공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매뉴얼 중 하나임 .

    1. 포로 확보: 매뉴얼에 따르면 기병 하나당 적 포로를 무조건 10명씩 잡도록 지시함 .

    2. 포로 활용: 확보된 포로들은 다음과 같이 활용됨:

      • 해자(垓子) 메우기: 흙을 메우는 작업에 포로들을 이용하며, 이때 몽골군은 뒤에서 화살을 쏨 .

      • 인간 방패: 활 공격 시 고려군 포로들을 먼저 쭉 세워 몽골군을 보호하는 인간 방패로 사용함 .

  5. 처인성 공격의 추정 이유:

    1. 큰 성 주변의 물자나 인적 자원을 주변 성 공략으로 확보하여 대성(광주성)을 고립시키기 위함 .

    2. 즉, 광주성이 안 되자, 필요한 포로 및 정보 확보, 광주성 고립을 위해 매뉴얼대로 처인 부곡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됨 .

 

5. 처인 부곡의 상황과 김윤우 장군의 활약

 

5.1. 처인 부곡의 방어 준비 부족과 김윤우의 등장

  1. 처인 부곡의 취약성: 몽골이 여기까지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방비가 전혀 되지 않았음 .

    1. 성 구조: 처인성은 흙으로 쌓은 성이며, 둘레가 약 350m에 불과한 사각형 평지 성으로, 산지에 기대지 않아 매우 약했음 .

  2. 김윤우의 신분과 역할:

    1. 절망적인 상황에서 김윤우 장군(당시 승려)이 처인 부곡 근처 백현의 절 주지로서 스님들과 함께 피신해 숨어들었음 .

    2. 김윤우는 고려 시대 승려로서 평민 이상의 신분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음 .

    3. 정부가 군사 지휘관을 파견하지 않아, 김윤우 스님이 지휘관 역할을 맡게 되었음 .

  3. 방어 준비 및 적장 사살: 김윤우는 민병대와 활 잘 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부대를 배치한 후,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게 됨 .

  4. 승리의 결과: 적장(살리타이)이 죽자 몽골군은 기세가 꺾여 패배할 수밖에 없었음 .

 

5.2. 김윤우의 공적과 리더십 재확인

  1. 고려 정부의 포상: 몽골 총사령관 사살 소식에 놀란 고려 정부는 김윤우에게 상장군 배설을 내리려 함 .

  2. 김윤우의 반응: 김윤우는 "내가 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적장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활을 들고 있지 않았다"고 답함 .

    1. 해석: 이는 겸손의 표현으로 보거나, 실제로 자신이 직접 쏜 화살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됨 .

    2. 결과: 이후 김윤우는 상장군 칭호를 포기하고 조은장을 받기로 함 .

  3. 사실 관계 추정: 김윤우가 이끌던 궁수 부대가 적장의 위치를 파악하고 집중 사격하는 과정에서 살리타이가 죽었을 가능성이 합리적으로 해석됨 .

  4. 처인성 승리의 의의: 소수의 부곡민과 승병을 데리고 대몽골 제국의 총사령관을 맞아 성을 지키고 적장을 죽였다는 것은 높게 평가될 일임 .

 

6. 김윤우 장군의 이후 활약과 대몽항쟁의 유산

 

6.1. 5차 침입 시 충주성 방어전 (김윤우의 리더십 발휘)

  1. 김윤우의 다음 행보: 김윤우는 이후 몽골 침입에서 크게 활약하며, 승려가 아닌 김윤우 장군으로 불리게 됨 .

  2. 5차 침입: 정부에서 파견하는 방호별감으로 충주성에 들어감 (충주는 대읍임) .

    1. 당시 5차 침입 시기는 고려군이 속절없이 밀리던 때였음 .

  3. 충주성의 저항: 김윤우 장군은 처인 부곡에서 했던 것처럼 군사와 백성을 재배치시켜 적극적으로 막아낸 결과, 몽골군이 70일 동안 충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함 .

  4. 성 내부의 위기: 70일간의 저항으로 성 내부의 사기 저하, 식량 및 화살/병장기 부족 등 위기에 직면함 .

  5. 김윤우의 인센티브 제공: 김윤우는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약속을 함 .

    1. 승리 시 귀천을 가리지 않고 관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2. 노비들을 평민으로 만들어 주겠다.

    3. 약속의 증거로 공비 문서(노비 문서)를 현장에서 가져와 불태워 버리는 퍼포먼스를 보임 .

  6. 결과: 이 최고의 인센티브로 힘을 얻은 병사들은 결국 몽골군을 물리치고 물러나게 함 .

    1. 이 사건은 처인성에서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재확인시킴 .

 

6.2. 6차 침입 활동 및 강화 협상의 발판 마련

  1. 6차 침입에서의 역할: 마지막 6차 전쟁에서는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되어 민심을 다독이는 역할을 수행함 .

  2. 인재 한계령 전투: 덜 알려진 전투 중 하나로, 인재의 한계령 내 한계산성에서 몽골군을 다시 한번 물리침 .

  3. 전략적 의의: 만약 인재에서 밀렸다면 몽골군이 쌍성총관부를 거쳐 강릉까지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 방어 덕분에 쌍성총관부가 강원도 북쪽에서 유지되고 원산 쪽으로 올라갈 바탕을 마련함 .

  4. 강화 협상으로의 연결: 이러한 연이은 전투들이 고려에 유리한 강화 협상의 근거가 됨 .

    1. 무신정권이 끝난 후, 고종이 퇴자였던 원종에게 개경 환도를 위해 몽골과 협상하도록 지시함 .

    2. 몽골은 고려가 일방적으로 밀린 것이 아니라, 적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고려가 강인한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유리한 입지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음 .

 

6.3. 승리의 의의와 결론

  1. 유리한 협상의 근거: 서희, 윤관의 사례처럼, 고려는 유리한 강화 협상을 할 때 그 현장에서 승전을 거두고 적을 압박할 힘을 가졌던 군인, 장군, 백성들의 공로가 든든한 지원이 되었음 .

  2. 결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임기응변적으로 이기는 것은 가끔 있을 수 있으나, 계속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처인성 전투를 포함한 승리는 고려의 힘과 실력이었음을 확인하게 됨 .

  3. 마무리: 2차 침입을 막아낸 것은 고려의 결정적 승리로 평가해야 함 .

 

https://www.youtube.com/watch?v=zF3Lsq_Hc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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