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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HD역사스페셜 – 첫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 KBS 2005.5.27 방송

by 리치캣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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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고)조선이다.   

그리고 고려이후에 이성계가 만든 조선은 (고)조선의 국호를 그대로 가져왔고...이를 구분하기 위해  동일한 조선, 그리고 조선인데...

고조선과 조선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알고 있는가?

KBS HD역사스페셜 – 첫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 KBS 2005.5.27 방송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이 영상은, 고조선의 정치적 중심지와 마차의 사용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특히, 고조선의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을 통해 고조선의 영역과 사회적 구조를 탐색합니다. 고조선은 단군 왕검이 세운 첫 나라로, 그 문화는 고대 한국 사회의 뿌리가 됩니다. 영상은 고조선의 초창기 역사부터 후기로 이어지는 발전 과정을 통해, 선조들의 뛰어난 문화 수준과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설명합니다.

 

핵심주제

고조선의 수도는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 있다.
  • 고조선의 수도에 대한 의견은 평양과 서울 근처의 동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여 고조선의 영토정치적 중심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 특히 고조선의 뿌리인 단군과 관련된 신화적 요소가 역사 이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고조선의 문화유산인 고인돌은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다.
  • 고인돌은 당시 권력자의 무덤으로, 사회의 정치구조와 노동력의 대규모 동원이 필요했다.
  • 북한 지역에서 발견된 1만 기 이상의 고인돌은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 고인돌의 규모와 구조는 당시 고조선 사회의 기술적 발전을 보여준다.
고조선의 마차 기술은 독창적인 문화 발전을 나타낸다.
  • 청동제 부품이 사용된 마차는 고조선 후기의 기술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 발굴된 마차 부속품은 당시 귀족의 생활 양식을 나타내며, 고조선의 국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마차와 관련된 문화는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다.
고조선의 역사적 변천은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 깊이 연관된다.
  • 고조선은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강력한 군사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 고조선과 연나라 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경쟁 구도를 낳았다.
  • 장기간의 전투 끝에 고조선은 결국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고조선의 역사적 기억은 제사와 같은 문화 전통을 통해 보존되고 있다.
  • 고조선에 대한 제사는 주민들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전승되고 있으며, 그 문화적 중요성이 강조된다.
  •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고조선의 신화적 순환을 통해 역사 속에서 생명을 얻고 있다.
  •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제사와 전통은 과거를 돌아보며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타임라인

완벽노트(GPT-4o) 적용됨1. 🐎 고조선의 마차 문화와 단군 신화

  • 고조선의 귀족들은 말 두 마리가 끄는 쌍두 마차를 사용했다.
  • 마차는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일부는 금 도금이 되어 화려했다.
  • 마차 중앙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우산이 있었다.
  • 이러한 마차를 타고 귀족들은 왕검성을 질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고조선의 창시자는 단군으로, 그는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 고조선의 유서 깊은 역사와 전통

  •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단군 이후의 역사와 중요한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 고조선이 작은 나라였는지, 중국 북경 근처까지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는지에 대한 의견이 나뉘고 있으며, 수도에 대한 주장도 엇갈린다.
  • 서울 근처의 동우에 위치한 작은 사당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한반도의 평안을 기원하며 매년 제사를 지낸다.
  • 단군 왕검은 기원전 1333년에 조선을 개국한 시조로 전해지며, 제사 준비가 성대하게 이루어진다.
  • 이와 같은 전통과 제사는 주민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으며, 고조선의 기억이 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다.

 

3. 단군과 평양: 고조선의 진실에 대한 탐구

  • 단군 조선은 신화적 요소가 강하며, 단군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 및 아사달 같은 미확인 지명 때문에 역사 속에 온전히 포함되지 않고 있다.
  • 맏아지스 지명이 단군왕검이 정한 석영, 즉 평양으로 전해져, 과거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다는 주장이 있다.
  •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중요성과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평양이 고조선 시대의 수도였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 북한 학계는 단군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 고구려 시기로 밝혀졌다고 주장하지만, 이 유물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 또한 비파형 동검의 출토 지역이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만주에서 더 많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다.

 

4. 고조선과 비파형 동검의 문화적 관계

  • 비파형 동검은 여러 문화를 거쳐 확장 발전되어, 고조선 연구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 이 동검은 직위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다르지만, 손잡이는 조립식으로 제작되어 조정 가능한 특징을 지닌다.
  • 기원전 당시, 동아시아의 3종족과 문화를 구별하는 기준이 청동검이었다.
  • 조양 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들은 고조선과 연결될 수 있는 배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조선은 심양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 따라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지역들은 고조선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수도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5. ️🏺고조선 시대의 고인돌과 문화유산 탐구

  • 고조선의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중요하지만, 유물 하나만으로 수도를 파악할 수는 없다.
  •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유적이며, 중국의 만주 지역에도 존재한다.
  • 강화도 지역의 고인돌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북방식인 탁자형 고인돌이 특징적이다.
  • 고조선 시기에 고인돌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청동기 시대의 중요한 표지로 작용하며, 특히 대동강 유역에서 많은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 북한 지역에서의 활발한 조사 결과, 1만 기가 넘는 고인돌이 발견되어 고조선 이해에 기여하고 있다.

 

6. 고조선의 고인돌과 평양의 관계 탐구

  • 단군을 발굴하며 평양 일대에서 서거 성관계 유적을 조사한 결과, 거인들의 무덤에서 비파형 창과 청동 방울이 발견되었다.
  • 고인돌은 당시 권력자들의 무덤으로, 축조에는 최소 2000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자원이 필수적이었다.
  • 특히 대동강 유역의 고인돌은 고조선의 수도임을 입증하며, 청동기 문명의 발상지로 주장하고 있다.
  • 요동반도 남단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청동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고인돌의 규모와 축조 방식을 통해 그 시대의 노동력을 추정할 수 있다.
  • 남한 지역과는 다르게, 석궁 상 고인돌은 인공적으로 잘 다듬어진 흔적이 있어 노동자의 기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7. ️🔍고인돌의 크기와 정교함에 대한 설명

  • 뚜껑 돌의 길이는 8.6m, 포기의 길이는 5.6m로, 요동반도와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정교한 고인돌이다.
  • 기둥에 사용된 돌은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마치 하나의 석조 건축물처럼 보인다.
  • 이 고인돌은 야트막한 구릉 지대에 위치하며, 주변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독립적으로 있다.
  • 또한, 이 고인돌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주민들은 고인돌을 찾아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빈다.
  • 고인돌 내부에는 시설의 흔적이 있으며, 벽면에는 상향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8. ️🏺고인돌의 분포와 고조선 정치 중심지

  • 개주와 해성시에는 태형 고인돌이 자연석이 아닌 화강암으로 매끈하게 가공되어 있다.
  • 고인돌은 고조선의 정치 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특히 요동반도 남단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 대형 고인돌은 권력자의 무덤으로 간주되며, 요양 남쪽 지역에서 구체적인 흔적이 발견된다.
  •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해당하며, 고인돌의 분포도를 통해 이 지역이 고조선의 정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 요동반도와 북한 평양 지역의 대형 고인돌은 그 차이를 가지며, 고조선의 영토 확장을 잘 보여준다.

 

9. ️🗿요동반도의 고인돌과 고조선의 역사 탐구

  • 요동반도의 고인돌은 북한 지역의 고인돌보다 인공적으로 더 잘 다듬어져 있으며,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세워졌다고 중국 학계에서는 주장한다.
  • 기원전 10세기에는 철기가 등장하기 전인데, 어떤 도구로 돌을 매끈하게 다듬었는지 궁금해진다.
  • 게다가 요동에 있는 고인돌은 평양의 고인돌보다 더 세련된 모습과 빠른 제작 시기를 가지며, 이로 인해 고조선의 초기 석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실린 중국 문헌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검토하고자 하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다.
  • 사기에는 고조선 멸망 직후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고조선의 수도에 대한 논란도 중국 학자들의 추정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10. ️🇰🇷고조선의 수도와 관련된 고고학적 조사

  • 넓은 벌판에 남아있는 손 성자는 고구려 성으로 불리며, 기와 조각과 전돌 등이 쉽게 발견된다.
  • 하지만 발견되는 기와는 대부분 한나라와 고구려의 것으로, 고조선과의 관련성을 찾기는 어렵다.
  • 중국 학자들이 지목한 지역이 고조선의 수도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의문을 제기하며, 동천산이 중심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 고조선의 도성을 찾기 위해서는 적절한 위치와 방어력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필요하다.

 

11. 고조선의 수도와 요하의 역사적 사실

  • 면담에서는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펼쳐진 치약과 대연고 인도의 위치에 대한 어려움이 논의되었다.
  • 해성 도시와 개주 지역은 여호와를 자연 방어선으로 삼고 있으며, 뒤에는 참산 산맥이 둘러싸여 있다.
  •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던 증거를 찾기 위해 중국 문화를 다시 검토하며, 험독의 위치와 3차 하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 현대의 중국 지도에서 3차 하는 혼하, 태자하, 유하가 만나는 지점으로 확인되며, 이는 대유하 유역과 관련이 있다.
  • 따라서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선과 계주 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 고조선의 발전과 중국의 전국 시대

  • 고조선은 기원전 8세기 경부터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다가 점차 사형 동검으로 변해갔으며, 주요 출토 지역은 북한의 평양 일대이다.
  • 기원전 3세기경에는 고조선이 요아 하구 중심으로 수도를 세우고 번성하던 시기로, 중국은 춘추전국 시대였고, 다수의 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 당시 고조선은 강력한 군사적 존재였으며, 전국 시대의 연나라와 상황이 맞물려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 고조선은 중국의 여러 제국들과 관계를 맺으며 강력한 왕국으로 자리 잡았다는 관점이 있다.

 

13. 연나라와 고조선의 역사적 대립

  • 연나라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자, 고조선은 독립된 왕국임을 선언하고 연나라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웠다.
  • 고조선은 한 나라 중에서도 강세를 보였고, 기원전 11세기에는 수도를 북경에 두고 있었으며, 당시의 수도 이름은 개성이다.
  • 연나라의 국력은 북경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기원전 4세기에는 대규모 성문과 청동 유물이 발굴되었다.
  • 연나라의 소왕은 고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을 계획하게 되었고, 제나라를 제압한 후 고조선을 공격했다.

 

14. 🏰고조선과 연나라 간의 전쟁 및 역사적 배경

  •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가장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연나라와 고조선 간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투였습니다.
  • 연나라 장수 징계는 동호를 상대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장성을 쌓았습니다. 현재 그 자리는 흙더미와 돌무더기로 남아 있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 전쟁에서 승리한 연나라는 고조선과의 국경을 정립하고, 그 이후로도 전쟁의 준비작업을 했습니다. 기원전 300년 경, 전쟁은 연나라의 승리로 끝났으며, 고조선의 손실은 상당했습니다.
  • 연나라가 고조선의 땅을 차지하면서 조선은 요동 지역에서 사라졌고, 이후 고조선은 평양으로 천도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15. 고조선의 역사와 마차의 상징성

  • 고조선은 진시황의 장수 몽이에 의해 요동 지역을 잃었으나, 진시황이 죽고 중원이 혼란해지면서 다시 요동을 재탈환하였다.
  • 또한 후기로 갈수록 고조선은 한나라와 겨루며 국가를 발전시켰으며, 평양에서 마차가 국력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 고조선 시기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평양 통일 거리 지역에서, 마차의 부속품과 무덤이 발굴되었다.
  • 발굴된 마차 부속품은 정교하여 고조선에서 마차가 널리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되며, 이는 당시의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 마차 복원 과정에서 6m 길이와 24기까지의 바퀴 구조가 확인되었으며, 이로 인해 고조선의 마차 기술이 매우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16. 🛡️특이한 형태의 마차 부속구와 그 쓰임새

  • 마차의 부속구 중에는 형태가 특이한 것들이 있어 쓰임새를 판단하기 어렵다.
  • 청동기로 제작된 사각 동기는 수레에 장식으로 사용되며, 고조선 지역에서만 출토된 고유한 청동기이다.
  • 일본 와세다 대학의 보 카우치 교수는 고조선 마차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청동 부품의 사용 방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 특히 권총형 동기는 말의 고삐 줄이 통과하도록 설계되어 말의 움직임을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7. 고조선의 마차와 문화

  • 고조선의 마차는 청동제 부품이 사용되었고, 각 마차는 두 마리의 말로 끌려졌다.
  • 일반 평민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고조선의 노래 '공무도하가'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며, 이는 아내가 남편의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고조선은 기원전 107년에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이는 새로운 시작의 신호탄이 되었다.
  • 멸망 이후, 많은 고조선 사람들이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2000년 한국 역사에 디딤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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