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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남북의 경제협력이 안정화된 이후에야...
만리장성 북쪽에 대한 역사적 사실확인이 가능하다.
이후 한족을 내륙으로 밀어낸 후에...
고조선과 백제의 역사를 확인 가능하다.
국가의 멸망에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강성했던 발해가 갑자기 왜?
https://www.youtube.com/watch?v=0CFPHwt9Lyc
이 영상에서는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이 이루어집니다. 발해의 역사적 기록 부족으로 인해 그 멸망이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요나라의 공격과 내부의 혼란, 그리고 백두산 화산의 폭발 가능성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강조합니다. 발해의 멸망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역사적 맥락과 여러 이론을 통한 통찰을 제공하여, 시청자는 복잡한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그 과정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핵심주제
발해의 멸망 원인은 다양한 내부 및 외부 요인에 있다.
- 역사적 기록이 부족한 발해는 뚜렷한 요인으로 인한 약화와 거란의 강력한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 특히 발해의 내부에서 고구려 유민과 피지배층 말갈족 간의 갈등이 국력 약화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 924년에 대인선이 요동을 재확보한 사실은 외부의 강력한 적에 대한 저항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요나라의 전성기는 발해의 패권 붕괴와 깊은 연관이 있다.
- 요나라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점령할 정도로 국력을 강화했으며 이 시기에 발해는 큰 위기를 맞았다.
- 발해와 요나라 간의 상충은 발해가 국력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을 초래했다.
- 역사적 충돌과 요나라의 군사적 압박이 발해의 국력과 통합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의 멸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 과학자들은 10세기 경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이로 인해 발해는 내부에서 혼란을 겪었다.
- 백두산의 대폭발은 만주 지역에 큰 재앙이 되었고, 발해의 부흥 운동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을 것으로 보인다.
- 발해 내부의 단합이 어려웠던 시점에 거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러한 재앙과 맞물려 발생한 사건이다.
타임라인
1. ️📜발해의 멸망 원인과 역사적 미스터리
- 저는 역사 강사 황현필입니다, 오늘은 발해의 멸망과 그 원인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 발해의 멸망은 우리 역사에서 유독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그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서는 남아있지만, 발해 역사서는 전해지지 않아 요나라의 역사를 살펴봐야만 합니다.
- 요나라의 역사는 몽골족이 쓴 것이지만, 그 내용은 발해와 거란족 간의 전쟁에서 발해가 패배했다는 사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역사적으로 팩트는 925년 12월 30일에 거란군이 부여성을 에워싸고 발해를 멸망시킨 것입니다.
2. ️⚔️거란의 공격과 발해의 빠른 함락
- 거란군이 바래의 중력 교통로를 통해 공격해왔으며, 이 길은 거란의 침략 가능성을 보여준다.
- 부여성이 3일 만에 함락된 후, 거란군이 상경에 당도하는 데 6일이 걸렸다.
- 부여에서 상경까지의 거리인 500km를 이동하는 동안 바래의 저항이 있었으나, 부족한 저항으로 노상이 항복하였다.
- 결국 발해는 요나라의 습격으로 무너졌으며, 역사적으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사례가 존재한다.
3. ️📜발해의 역사적 약화와 멸망 과정
- 발해는 100년 전 요동을 차지하고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이후 약화되었다.
- 초창기에는 약 30년 동안 6명의 임금이 교체되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9세기 초반 선한 때 요동을 포함한 큰 영토를 확보했다.
- 그 후 100년 간 발해에 대한 기록이 부재하며, 국력 약화의 여러 이유로 요나라에게 무너진 사실이 있다.
- 내부적으로는 고구려 유민과 피지배층 말갈족 간의 갈등과 왕족의 동요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국력이 통합되지 못했다.
- 926년에 멸망했지만, 924년 대인선이 요동을 재확보했음을 고려하면, 발해의 내부 혼란과 외부의 강력한 적의 압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4. ️🇰🇷요나라의 전성기와 발해의 무너짐
- 당시 요나라는 중국 중원에 진입하여,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까지 점령할 정도로 국력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 이 시기에 발해가 요나라와의 충돌로 꺾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시 서태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자'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면, 발해의 패권이 쉽게 무너진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그중 백두산 화산의 폭발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 실제로 자연재해는 인재보다 더 무섭고, 큰 화산이 폭발할 경우 그 위력은 핵보다도 몇 천 배가 강할 수 있다.
- 백두산의 폭발 또한 그런 상황으로, 핵이 떨어지면 국가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 화산 폭발로도 국가가 무너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5. ️🌋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 멸망의 관계
- 정근대 시대 국가에게 백두산 화산의 폭발은 재앙이었고, 과학자들은 10세기경 화산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화산 폭발로 발해가 혼란스러울 때 요나라의 공격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2017년에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알려졌다.
- 946년 이전부터 백두산에서 폭발 징후가 나타났고, 이로 인해 발해 내부의 단합이 힘들었을 수 있다.
- 백두산의 대폭발은 만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의 부흥 운동이 화산 폭발로 인해 좌절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6. ️📜발해 멸망 원인과 백두산 화산 폭발의 관계
- 거란은 발해 땅에 동난국을 세웠고, 발해의 대인선 왕은 늙은 재상 노상이 3만 병력을 이끌고 가서 항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노상은 발해의 왕으로부터 3만 병력을 받고 거란 군을 요격하라고 갔지만, 쉽게 패하고 동남국의 제상이 되었다.
- 동남국은 크게 기지개를 펼지 못했으며, 만주 땅의 발해 피지배층인 말갈족과 여진족은 10세기와 11세기에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 12세기쯤 아구타가 나오고 금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을 보면, 946년 백두산 화산 폭발이 만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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