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부하기/military. warfare.

영국은 지역전문가도 없이 복잡한 민간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by 리치캣 2024. 9. 16.
반응형

영국은 지역전문가도 없이 복잡한 민간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여기서부터 문제다. 

지역전문가의 부재.

한국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다.

지역전문가가 부족하다.

영국의 깡패짓, 미국의 깡패짓에 가까운 패권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다각화된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사회가 준비해야 할 역량이며...동시에

새로운 세대에게 제안할수 있는 방향중에 하나가 아닐까?

이 영상이 만들어진지 10여년이 지난 지금....영국군, 영국육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면...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잘 해낼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전투력이 강해졌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탈레반 진압 시도 → 탈레반에게 포위된 군부대💥 전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 | 아프가니스탄, 제국의 마지막 포효 2부 #BBC

 

https://www.youtube.com/watch?v=2YjIEw1iBM0

이 영상은 13년 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영국군의 경험을 통해 군사 개입의 복잡성과 그로 인한 사회적 여파를 다룹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실패, 정치적 난관, 그리고 전사자 수의 증가가 영국 내부의 여론과 군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살펴보며, 전쟁의 본질과 군사적 개입의 한계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핵심주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영국군의 군사력과 정치적 신뢰를 변화시켰다.
  • 2014년 마지막 영국 부대의 철수는 13년간의 군사적 개입을 마감하며, 영국군의 희생은 453명에 달했다.
  • 이는 영국 내에서 군사적 개입에 대한 의견을 크게 흔들었으며, 전후에 남긴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 전쟁 중 정치적 목표와 군사적 필요가 상충하면서, 영국의 군사 정책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해졌다.
영국 육군의 진입은 초기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많은 고통을 초래했다.
  • 2006년부터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작전은 전투 중 민간인 피해와 군의 손실로 이어졌다.
  • 민간인 사망자는 300명 이상에 달하며, 이는 영국군의 전략과 지역 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했다.
  • 결과적으로, 전투의 실제 목표는 점점 모호해지면서 탈레반의 재침투를 허용하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갈등은 지속적인 민주주의 구축에 어려움을 주었다.
  • 헬만드주는 두 차례의 총선에도 불구하고 뇌물과 부패로 얽힌 무법지대가 되었다.
  • 영국의 헬만드 재건 계획은 지역 문화를 무시했으며, 이는 효과가 없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 하미드 카르자이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이는 지역의 안정화에 큰 장애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대중의 반응 변화에 직면했다.
  • 전사자가 늘어나면서 국민의 지지가 하락했고,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추가 파병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 대중은 군인들의 희생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정책에 대한 비판이 증가하면서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 전투 중 민간인의 피해가 증가하면서 정부는 탈레반과의 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타임라인

완벽노트(GPT-4o) 적용됨GPT-3.51. 🇦🇫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군 철수와 그 여파

  • 2014년, 마지막 영국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고 이는 13년 만의 완전 철수였다.
  • 그동안 453명의 영국군이 목숨을 잃었다.
  • 2006년부터 영국 육군은 헬만드주에서 과감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 그러나 작전은 원활하지 않았고 목표는 빠르게 잊혀졌다.
  • 전쟁이 악화되자 정치인들은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영국군과 군사력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켰다.

2. 영국 육군의 아프가니스탄 작전과 어려움

  • 영국 육군은 5년 만에 시작된 복수로 인해 궁지에 몰렸으며, 2006년 초 아프가니스탄의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나토 작전의 일환으로 진입했다.
  • 서방 연합국들이 각기 다른 지역을 맡으면서, 영국은 탈레반 반군의 근거지인 남부 헬만드주를 담당하게 되었다.
  • 그러나 이미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3,300명 중 전투병력은 600여 명에 불과하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압도하기에는 부족했다.
  • 교전 개시 2개월 만에 11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음에 따라, 낙관적 전망은 사라졌다.

3. ️🇬🇧영국군의 무사칼라 철수와 탈레반의 재침투

  • 일부 지역에서는 헬기가 유일한 부상자 호송 수단이었으나, 탈레반의 공격으로 상황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 영국 정부는 군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3년 안에 치안을 확보하겠다고 파병을 승인했지만, 2006년 9월 전사자가 급증하며 군에 대한 국민의 반응이 차가워졌다.
  • 영국군은 헬만드주 북부의 무사칼라에서 포위된 군인들의 생존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공중폭격은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 결국 영국군과 탈레반 간의 합의로 군은 마을 밖으로 철수했으나, 탈레반은 4개월 만에 협정을 깨고 돌아왔다.
  • 이로 인해 영국군은 다시 맞서 싸워야 했고, 헬만드주 전역에서 반군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4. 영국군 헬만드주와 아프가니스탄의 안정화

  • 영국의 전쟁은 영국의 전쟁과 동일한 전쟁이었으며, 헬만드주는 아프가니스탄 안정화를 위한 NATO의 계획이었다.
  • 반란을 진압하려면 강하고 효과적인 정부가 필수적이었지만, 2007년 당시에는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 하미드 카르자이는 2002년부터 서방의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직을 수행했지만, 부족과 군벌들 때문에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확실한 비전을 갖고 있었으며, 정보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지원도 강화했다.
  • 헬만드주에서는 군과 민이 함께하는 헬만드주 재건팀이 만들어졌다.

5. 헬만드주의 지속 불가능한 민주주의와 사법체계

  • 헬만드주는 두 번의 총선과 5년의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패한 무법지대였다.
  • 지역과 부족이 정치를 지배하면서 정부는 거의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고, 영국의 헬만드 재건 계획은 지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실패했다.
  • 변호사 출신의 프랭크 레드위지는 뇌물과 착취로 얼룩진 사법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임무를 맡았으나, 지역 주민들에게 익숙한 탈레반의 사법체계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 영국은 헬만드 지역의 언어인 파슈토를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조차 보내지 못해 복잡한 민간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6. 영국군과 탈레반의 갈등, 민간인 피해 심각

  • 정체성에 따라 흙을 흘리며, 언어와 역사, 국가를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6개월 동안 친구들은 이러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영국군 전사자는 50명이 넘었지만 반군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 전투로 인해 3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영국 육군은 민간인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탈레반을 추격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난민 수용소로 가야만 했습니다.
  • 결국 영국 정부는 무장 병력만으로는 적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탈레반과의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7. 탈레반과의 대화를 시도한 마이클 샘플.

  • 마이클 샘플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탈레반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고, 정치적 해결의 실마리를 제안했다.
  • 그는 탈레반 전사 수백 명이 무사 칼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들을 포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샘플은 정부와 전 세계의 싸움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장기적인 일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그의 두 번째 목표였다.
  • 그는 헬만두주 주지사를 찾아가 기획을 설명하고, 대화 중 몇 가지 문제를 제기받았다.
  • 결국 마이클 샘플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8. 카르자이, 영국과의 관계와 탈레반 상황

  • 카르자이의 진짜 목표는 영국이었으며, 그는 외국 세력에 맞서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힘을 키우려 했다.
  • 그는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며 자신에게 쏠린 비난을 잠재우고자 노력했다.
  • 카르자이는 영국군 주둔 이후 헬만 두주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주장했다.
  • 영국은 카르자이의 비난에 대해 우리의 행동에 대한 완전히 불가능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반응하였다.
  • 2008년에는 고마움을 모르는 동맹에 대한 지원이 점점 더 어려워졌으며, 탈레반은 제레시 교전을 피하고 급조 폭탄 공격을 늘렸다.

9. 2008년 아프가니스탄 전사자, 군의 새로운 전략 필요성

  • 2008년 6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영국군의 수가 100명을 넘었고, 매년 사망자는 2배 가까이 증가하고 있었다.
  • 그러나 국방부의 일부 관료들은 최악의 상황이 끝났다고 믿으려 했고, 이로 인해 국방 장관 주관의 세미나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 세미나의 주제는 전쟁에 관한 언론의 역할이었고, 군은 전장의 병사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낼 전략을 세웠다.
  • 전사자들의 부고를 언론에 지속적으로 내보내면서,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효과를 보였고, 영국 월트스의 마을에서는 장례 행렬이 진행됐다.
  • 과거와 달리, 영국군은 이제 전사자들을 조용히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몰려드는 방식으로 추모하는 시대가 열렸다.

10. 군인의 희생에 대한 인식과 영국의 전쟁 정책

  • 군인들이 누군가의 남편이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희생에 대한 관심과 보호 의식이 점점 커졌다.
  • 육군은 대중의 이해와 존경을 얻었지만, 이에는 대가가 따랐다.
  • 영국의 전쟁 위기가 심화되면서, 그는 자신의 목적을 공개하며 미국의 공격이 영국군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했다.
  • 영국 대규모 수력발전소인 카자키댐은 1950년대부터 진행되었으며, 군은 200톤이 넘는 장비를 안전하게 수송해야 했다.
  • 하지만 영국 대사관은 전기가 흐르기까지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기존 전력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인식했다.

11. 영국 육군의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작전과 극복하지 못한 장애

  • 2008년 8월 말, 3천 명의 영국 육군이 위험한 경로로 이동하며 작전의 열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 그들은 집요한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해야 했고, 9월 3일에 댐에 도착했으나, 물자와 인력, 기반 시설 부족으로 인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 새 부품들은 2014년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미국이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영국군의 역량 집중이 탈레반에게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 이로 인해 영국군의 역량이 북부에 집중되면서 헬만두주 중부가 위험에 노출되었고, 탈레반 반군이 주도인 라슈카르의 근처 마을 두 곳을 장악하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2.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세력의 확장과 영국의 대응

  • 탈레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빠르게 확대되어 2009년까지 34개 주 중 33개 주를 장악했다.
  • 영국군은 헬만드 주에서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려다 많은 병력을 잃고, 7월에는 단 열흘 만에 15명이 전사했다.
  • 이로 인해 이라크 전쟁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자 수가 더 많아졌고, 영국 정부는 500명을 추가 파병하겠다고 발표했다.
  •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영국 내부 반응이 달라지며, 2009년에는 국민의 지지가 29%까지 하락했다.

13.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정치적 전략과 군사적 상황

  •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미군 총책임자가 화해 전략을 이끌었던 인물로, 그의 정치적 견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그는 탈레반과의 정치적 견해를 논의하며, 이 사건이 매우 중요하고 흥미롭고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 2008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주재 미 대사관은 영국의 헬만드 주 안정화 실패를 알리는 전문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 헬만드 주에 주둔한 영국군과 추가된 미 해병대는 총 2만 8천 명이었으나, 실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병력은 부족했다.
  • 2005년, 영국군은 제한된 자원을 헬만드주 중부의 특정 지역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14. 영국군,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의 변화와 희생

  • 하지만 5년 동안 계획이 없던 전투를 벌인 것이 문제였고, 이제 미군이 전투를 담당하며 영국군은 기존 역할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헬만드주 중부지역을 방문했을 때, 전임 총리들이 보지 못했던 진전이 이루어졌으나, 영국군 만 명의 병력이 필요했다.
  • 이 과정에서 두 배 되는 미군 병력이 다른 어려운 일을 처리해준 덕분이었다.
  • 영국군의 야망은 줄어들었지만, 2009년 한 해에 한 대에 100명 이상 전사하면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 캐머런 총리는 2014년 말까지 모든 전투병력을 귀국시키겠다고 발표하며, 협력이 아프가니스탄의 정부와 사람들에게 공개적 의견을 제한할 것이라고 밝혔다.

15.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작전과 남긴 유산

  • 정치적 필요성이 군사적 우려보다 중요했으며, 캐머런 총리가 정한 첫 수시안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 군은 아프가니스탄 장교들의 훈련에 집중했으며, 이들이 향후 몇 년간 지금까지 이룬 것을 탈레반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 2014년 영국군의 마지막 병력이 헬만드주를 떠난 뒤, 영국군과 서방 연합국은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 오늘날 800만 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아동들이 교육을 받고 있으며, 기대 수명도 20년 증가했다.
  •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이며, 영국의 원조의 장기적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16. 영국의 군사적 영향력 유지의 어려움

  • 앞으로 영국이 과거와 같은 규모의 파병을 감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미국의 전쟁이 끝난다면, 영국군은 헬만드주에서 더 이상 국제 무대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군사력의 세태와 함께 해외 개입에 대한 욕망도 줄어들었으며, 대중의 시각도 변하고 있다.
  • 정치 지도자들은 군사 개입을 고려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고위 장성들은 영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유지를 위해 군사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17. 영국에 미친 13년 전쟁의 영향

  • 13년간의 전투와 453명의 전사자는 영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이 전쟁은 군인의 희생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수백 년 동안 지속해온 나라 밖 갈등 개입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다.
  • 북한이 탄 전쟁 이후, 영국은 이제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