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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면서 일하기/intotheKOREA

(분노주의) 대한민국의 뼈 아픈 역사.. 친일파들의 악랄한 친일 행위

by 리치캣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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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주의) 대한민국의 뼈 아픈 역사.. 친일파들의 악랄한 친일 행위

https://www.youtube.com/watch?v=g8N3wYysstA

이 영상은 조약과 늑약의 차이, 그리고 친일파의 역사적 인물인 이완용과 윤덕영을 비교하며 그들의 행위가 한국 역사에 미친 영향을 다룹니다. 특히, 윤덕영이 국가를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에 협력한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또한 친일파의 행동이 어떻게 나중에 청산되지 않았는지, 그로 인해 독립 후에도 그들의 혜택을 받았던 사례를 설명합니다. 이 영상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과거의 친일 행위와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핵심주제

윤덕영과 이완용의 매국 행위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악랄한 친일 행위를 상징한다.
  •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에 참여해 외교권을 일본에 넘겼고, 윤덕영은 더 큰 땅을 일본에 제공하며 강한 친일 행위를 이어갔다.
  • 그들의 행위는 한 나라의 정체성을 상실케 하는 치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벽수산장을 포함한 윤덕영의 재산은 그의 친일 행위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 벽수산장은 윤덕영의 사유지로, 그의 파워와 영향력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여겨진다.
  • 이곳에서 그는 기생들을 초대하여 사교적 활동을 하였으며, 이는 그의 부유한 삶을 암시한다.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인 배정자는 이중 스파이로서 일본의 이익에 기여하였다.
  • 배정자는 일본군에 정보를 제공하며, 러일전쟁 때 친일파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등 반목의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 그녀의 역사는 친일 행위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명성황후의 제거와 관련된 우범선의 음모는 당시 정치적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낸다.
  • 우범선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했으며, 이는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 명성황후에 대한 제거 시도는 건국의 위기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 경찰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점은 슬픈 한국 현대사의 일면이다.
  •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해방 후 친일 경찰에게 모욕을 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매국노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 이는 우리의 슬픈 근대 역사에서 영향력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타임라인

1. 조약과 늑약의 차이 및 이완용과 윤덕영00:00:52

  • 조약은 A와 B라는 당사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명한 것이고, 반면에 한쪽이 강제로 체결한 것은 늑약이라고 한다.
  •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처럼, 1905년에는 을사오적 5명이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겼다.
  • 이완용은 이러한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는 국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 그러나 그보다 더욱 악랄한 매국노가 윤덕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 윤덕영은 관심 받기를 싫어하며 숨겨진 매국노로 활동한 인물로, 서천 옥인동의 땅 54%가 그의 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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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근데, 작가님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조약이랑 늑약이랑 이게 차이가 뭘까요? 바로 조약이라고 하는 것은 A라는 당사자와 B라는 당사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인한 것이 조약이에요. 그럼 반면에 한쪽이 강제로 책과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 있죠. 이걸 늑약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을사조약이에요, 을사늑약이에요. 우리 늑약인데, 울산 늑약으로 하셔야 됩니다. 자, 그리고 을사오적 5명이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깁니다. 1905년 일이었죠. 자, 이런 과정에서 정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이완용이거든요. 그래서 외국 국노의 핵심 인물로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완용보다 훨씬 더 악랄한 매국노가 존재했습니다. 친일 오브 친일이다, 1순위 친구가 있구나. 바로 윤덕영이란 인물이 오늘의 주인공인데, [음악] 왜 우리가 이완용을 그렇게 기억을 하려면 이완용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를 좋아했어요. 관종이었네, 관종. 아, 그렇죠. 그런 반면에 윤덕영은 관심 받기를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뒤에 숨어서 실속화 매국노였어요. 여러분, 서초나 아시죠? 서천, 경복궁협회는, 서천 통인시장, 여러분 기름떡볶이 많이 드시러 가고. 이게 현재 지금 경복궁 옆에 있는 옥인동 행정구역이거든요. 당시 이제 윤덕영이 땅 규모가 어느 정도였냐하면, 서천 옥인동 땅 54%는, 지금 54%가 반 이상이 윤덕영의 땅이었습니다. [음악] 축구장 10배, 엄청납니다.

 

2. 윤덕영의 친일 행위와 순정효황후의 저항00:02:49

  • 윤덕영은 이완용보다 훨씬 더 큰 땅을 일본으로부터 받았고, 이는 그의 강한 친일 행위를 의미한다.
  • 1910년 8월 29일, 한국은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었으며, 이는 치욕적인 날로 여겨진다.
  •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창덕궁에서 열렸고, 당시 순종 황제가 이 회의에 참석했다.
  •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는 이 회의를 지켜보며 부당한 행동을 하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뛰어나왔고, 그들에 대한 강한 저항을 보였다.
  •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은 이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같은 집안에서 발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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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완용보다 훨씬 큰 땅을 일본으로부터 받은 거예요. 아니, 그러면 사실은 저 크기의 차이만큼, 사실은 윤덕영은 이완용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강하게 친일의 행위들이 있었다는 걸 의미하겠네요. 맞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른바 경술국치예요. 경술련의 일어난 나라의 치욕적인 날이다. 한일 합방이라는 표현도 쓰시면 안 돼요. 경술국치 일주일 전, 8월 22일 날 창덕궁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 회의, 국무회의가 열려요. 신일 내각들이 다 있고 장관들이죠. 지금으로 치면 그 다음에 당시 순종 황제가 앉아 있어요. [음악] 겁박을 해요.. 순종, 이거 찍는 순간 자기는 역사의 매국노가 되는 거예요. 나라가 넘어가는 이 모든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였는데요. 뒤에 듣고 있다가 뛰어나와요.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면서, 몹쓸 놈의 나라를 낚아채가지고 자기 치마 폭에 넣어 버립니다. 여기에 친일파 내각들 멘붕이 와요. 아무리 친일파라고 하더라도 일국의 황후 치마 속에서 손을 넣을 순 없잖아요. 이걸로 이때, 이것도 못 해. 내가 할게 한 사람이 바로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였던 윤덕영. 큰아버지, 같은 집안이니까요.

 

3. 외교권과 시민권의 거래에 대한 비판00:04:37

  •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한 이완용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넘겼으며, 윤덕영은 우리나라 전체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주었다.
  • 윤덕영은 은사금과 공채 증권으로 46만원을 받았으며, 이는 1910년 당시 약 23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 사진 속 장소는 윤덕영의 별장인 벽수산장으로, 그 규모는 상당히 컸다.
  • 어렵게 섭외한 특파원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싶었음을 밝혔으며, 그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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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을 올린 다음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순간 우리나라가 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돼요. 이완용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넘겼지만, 윤덕영은 우리나라 전체를 윤도경은 고맙다라고 주는 돈이 은사감이거든요. 은사금이랑 공채 증권, 46만원을 받는데 1910년 당시에 이제 일원이 지금의 한 5만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오시니까 46만원은 약 230억 원이에요. [음악] [음악] 그리고 이 사진이 벽수산장이라는 산장, 윤덕영의 별장이었어요. 벽수는 윤덕영의 효모거든요.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제가 벽산에 있던 자리에 정말 제가 어렵게 한 특파원을 제가 섭외를 했어요. 어쨌든. 어른을 위해서 제가 정말 이 사람한테 제발 좀 나와 달라고 [박수] 말씀드리고 싶어요.

 

4. ️🏯벽수산장 흔적과 윤덕영의 영향00:05:50

  • 벽수산장을 보기 위해서는 통인시장을 지나야 하며, 이 지역 전체가 윤덕영의 소유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또한 서천의 먹자골목 역시 이완용의 땅이었다.
  • 빨간 벽돌은 벽수산장 입구의 흔적이며, 현재 옥인동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다.
  • 벽수산장은 200평 규모의 연못과 최초의 양변기가 설치된 곳으로, 윤덕영은 여기에 기생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 윤덕영의 첫 집은 현재 국가 소유이며, 외관은 현재 잠겨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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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수산장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는 이 통인시장을 일단 거쳐 통과해야 됩니다. 근데 이 주변 전체가 다 윤덕영의 땅이었다는 거 아셨습니까? 친일을 한 대가로 일제에게 받은 땅이 주변 다예요. 그리고 저 밑에 내려가면 서천에 우리가 먹자골목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거긴 또 이완용 땅이었어요. 네, 저거 보이시죠? 저한테 이게 벽수산장 입구에 흔적이에요. 빨간 벽돌 보이시죠? 벽돌 여기가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던 그런 현관의 흔적이거든요. 빨간 벽돌이에요. 이게 지금은 옥인동 주택가에 있습니다. 자, 산이 보이시죠? 여기가 인왕산이거든요. 저축산장이 있던 부분이고 여기가 대문이에요. 그 말은 대문으로 들어가서 걸어서는 못 가는 구조였어요.. 차가 있어야지 벽수산장에 초대를 받고 갔다, 이거를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거죠. 뿐만 아니라 더 가슴 아픈 사진 하나 보여드릴게요. 여기가 지금 벽수산장이 있었던 것으로 수정되는 장소에서 제가 내려다보면서 찍은 영상인데요. 여기에 경복궁이 보여요. 경복궁 근정전이고 이게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신하였잖아요, 윤덕영이. 근데 위에서 산 위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면서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을 비웃은 거예요.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서 우리 파티하면서 경복궁을 내다볼까 싶으신가요? 굉장히 저자리에 직접 가시면, [음악] 벽수산장이 얼마나 큰 규모였냐면요, 일단은 그 안에 200평 규모의 연못이 있었어요. 200평, 거기서 뱃놀이를 하고 천장에 어항이 있었대요.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양변기가 설치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었습니다. 좋은 거 다 갖다 윤덕영이 매일. 밤 기생들을 불러 가지고 여기서 파티를 했는데, 명월관 출신의 한 기생이 화장실이 급해서 갔더니, 이거 웬걸, 옹달샘만 있더구나. 이런 기록을 남겨놨어요. 그래서 옹달샘 물만 떠먹고 나왔다고 하네요. 모르니까 자, 윤덕영 첫 집도 있어요. 여기 가면요, 첫 집이요. 척 여기가 윤덕영 척 집 외관이에요. 지금 잠겨 있어 가지고 아무나 못 들어가요. 저 집은 그러면은 누구 소유입니까? 지금은 아, 국가, 국가소예요. 아무도 안 살고 있습니다.

 

5. ️🏛️윤덕영의 집과 안중근 의사와의 연결00:08:40

  • 저는 어렵게 윤덕영의 집을 들어가 보았고, 이 집은 일반 한옥 주택이 아닌 궁궐 스타일의 특별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다.
  • 윤덕영의 파워를 알 수 있고, 그의 최후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긴다.
  • 그는 해방되기 5년 전에 호의호식하며 생을 마감했으나,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와 관련된 조선인 양녀, 배정자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 배정자는 아버지가 흥선대원군 진영으로 처형당하고, 연좌제로 인해 가족이 모두 관노가 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이후 기생으로 팔려가면서 승려 수업도 받은 이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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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렵게 또 이안을 한번 들어가 봤거든요. 예전에. 지금 여기가 이제 윤덕영 첫 집 아닌데요. 지금 낡았지 않습니까? 처마 밑에를 보시면요, 일반 한옥 주택이 아닙니다. 궁궐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이 집은요 군거를 만드는 특별한 목수가 있거든요? 편수가 지어진 집이에요. [음악] 윤덕영이 파워가 얼마나 컸는지 우리가 알 수가 있죠. 야, 대단한 사람이다, 진짜. 이 사람은 어떻게 죽었는지 이제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윤덕영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천수를 누리다가, [음악] 천수를 누리다가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5년 전에 나라를 판 돈으로 정말 호의호식 하다가 아무 문제 없이 생을 마감하고, 혹시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선인 양녀가 한 명 있었다는 얘기 혹시 들어보셨나요? 아니요, 바로 이 사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배정자라는 조선 여인이었습니다. 일단 집안은 좀 약간 가슴 아픈 역사를 갖고 있어요. 아버지가 흥선대원군 1파로 몰려가지고 민씨 일가에서 처형을 당해요. 둘은 라이벌이었어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며느리지만. 서로 원수였어요. 그런 다음에 이제 연좌제가 걸려가지고, 가족들이 다 관노, 노비가 됩니다. 그런 다음에 이 배정자도 기생으로 팔려 가거든요. 그 이후에 또 승려 수업을 받아요.

 

6. 배정자의 이중 스파이 활동과 매국적 행위00:10:21

  • 배정자는 비구니가 되었다가 도망쳐 아버지의 지인인 정병하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의 식객이 되며, 이때 다이아마 사닥보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 그녀는 특히 미모와 지성을 가지고 있어 수영, 승마, 변장술, 국제 예절 등을 배우고, 귀국 후 일본 공사관의 통역사로 일하며 고종과 가까워졌다.
  • 그러나 배정자는 고종의 부탁을 악용하여 러일전쟁 당시 친일파의 계획을 일본에 전달하여 무산시켰고, 결국 일본의 스파이가 되었다.
  • 그녀는 일본군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로 가서 밀정 역할을 하였고, 마적단의 두목과 동거하며 일본군에 넘겨진 후에도 이중, 삼중 간첩 노릇을 하였다.
  •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위안군 송출 업무를 맡아 100여 명의 정신대를 끌고 가는 만행을 저지르며 매국적인 행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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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가 된 거죠. 그런데 거기서 도망을 쳐 가지고, 이제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정병하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의 식객으로 보내지는데, 이토 이로 보면 눈에 들게 됩니다. 그래서 배정자는 이때부터 다이아마 사닥보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합니다. 이 동의로 보면 이제 그 미모와 똑똑함까지 갖춘 배정자에게 수영, 승마, 변장술, 사정, 국제 예절 이런 걸 다 가르치고, 배정자는 우리나라에 귀국해서 일본 공사관의 통역사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또 이 배정자는 고종과 굉장히 가까워지거든요. 전적으로 실내에 빠졌습니다. 이런 말까지 했어요. 고종은 배정자에게 일본 사람들과 친하지 제발 우리 한국을 위해서 네가 중간에서 싸워줘, 배정자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해요. 하지만 배정자는 이런 고종의 총회를 악용해 가지고, 러일전쟁 당시 친일파가 고종을 평양이나 아니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라는 걸 듣고 이를 일본에 알려요. 계획을 바로 무산시킵니다. 일본의 스파이가 된 거예요. 나중에 사이에서 사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배정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음악]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고 해요. 지금은 전폐하고, 진심으로 매국노가 된 거죠.. 죽은 이후에는 배정자는 일본군을 따라 가지고 만주, 시베리아로 떠나 가지고, 거기서도 밀정 노릇을 하는데, 중국 마적들 있잖아요. 마적 토로로 잡혀요. 그런데 마적단의 두목과 또 동거를 해요. 일본군에 넘겨져요. 그러니까 어떻게 한중일 삼국을 넘나들면서 이중, 3중 간첩 노릇을 한 겁니다. 태생이 스파이네요. 그렇죠, 그렇죠, 맞습니다. 배정자의 친일 행위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어요. 최악의 남아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이제 그 위안군 송출 업무를 맡아 가지고, 군인 이문대라는 이름으로 무려 100여 명을 정신대로 끌고 가는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배방 이후에 이제 반민족 행위에 대한 그 응징이 두려웠겠죠.

 

7. ️💔명성황후와 배정자의 역사적 관계00:12:44

  • 배정자는 1948년 반민족 행위자 특별 처벌법이 통과되자 처음으로 구속되었고, 법정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라고 주장하며 허세를 부렸으나 결국 안타깝게도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고 풀려났다.
  •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에서 사망하게 되었고, 그는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을 숭배한 인물이었다.
  • 일본이 고종의 아내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한 이유는 그녀가 내정에 집중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확보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어긋날 것을 우려해 일본에게 압력을 가한 상황도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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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만 숨어 지냈다고 해요. 그러다가 1948년도에 이른바 그 반민족 행위자 특별 처벌법, 범인특기법이라고 하죠, 통과되자 제일 먼저 철컹철컹 구속이 돼요. 배정자가. 근데 그 반민 투기 법정에서도 당당했다고 해요. 나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다. 그리고 고정은 나를 정비 왕비로 삼으려고 했다, 이런 허세까지 부렸다고 해요. 그런데 이제 그 반응 크기가 안타깝게도 흐지부지, 흐지부지 끝나버려요. 그래서 풀려납니다, 배정자가. 그런데 이제 주변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렵게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때 또 6.25 전쟁이 터지거든요. 서울에서 6.25 동남 과정에서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배정자는 조선인이었지만 뼛속까지 조선을 부정하고 일본을 숭배한 사람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배정자가 보정의 총회를 얻어서 일본과 한국의 이중 스파이로서 했다고 하면, 지금 소개시켜드릴 인물은 고종의 아내, 명성황후의 앞장선 사람입니다. 조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 언제일까, 제가 생각했을 때는 아마 명성황후가 일본의 그 낭인들, 무뢰배들에 의해서 시혜된 을사변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일본의. 낭인들, 무뢰배들이 어떻게 경복궁, 답 높아요? 경복궁으로 들어가서 저 손에 분모를 죽일 수가 있었을까? 굉장히 높습니다. 아, 진짜 열어줬구나. 여기에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 긴밀하게 협조를 했었어요.. [음악] 그러면 일본이 고정도 아니고, 왜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러니까 명성황후가 내정에 좀 집중할 줄 알았는데, 이제 나라에 관심이 많아 가지고 저 사람은 좀 거슬린다 해서 좀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크기는 맞는 정답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죽기 전 그 조선 상황이 굉장히 복잡해요. 일단 1894년에 청일전쟁이 벌어지는데, 청나라가 박살나버려요. 일본이 승리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요동반도를 일본이 가져가요. 지금 압록강 바로 위에 있는 청나라 땅을 일본이 가져가요. 승리했으니까. 그런데 그걸 가만히 누가 보고 있었냐면 러시아가 보고 있어요. 우리 러시아가 만주, 시베리아로 진출해야 되는데 저 요동반도를 일본이 가져가버리면 우리 계획이 어긋날 것이다 해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압력을 가해요.

 

8. ️중국과의 전쟁 속에서 러시아의 영향력.00:15:22

  •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줘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며,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을 깨달았다.
  • 그러자 일본은 고통스럽게 요동반도를 포기하게 되는데, 이 상황을 명성황후가 관찰했다.
  • 명성황후는 당시 남편 고종과 함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청나라에 대해 러시아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 그러면서 친일파 내각을 모두 제거하고 친러파 인사를 앉히며 민씨 집안을 세운다.
  • 일본은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조선이 러시아에게 넘어갈 가능성을 우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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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은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라고. 일본도 우리가 러시아와 싸울 수 있을까? 못 싸운다. 난 결론 내리고, 일본 입장에서 봤을 땐 피눈물을 흘리고 자기의 요동반도를 청나라한테 돌려줘요. 그걸 가만히 누가 보고 있었냐면 명성황후가 보셨어요. 옆에 있는 남편 고정보고, 청일전쟁에서 이긴 청나라를 박살 낸 러시아한테 지금 엎드린 상황이잖아요. 러시아한테 붙어야지 우리가 살 수 있다라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면서 친일파 내각을 싹 다 몰아내고 그 자리에 친러파 인사를 앉힙니다. 민씨 집안 사람을 앉힙니다. 그걸 일본이 보고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뭐야 이거. 까딱 잘못하면 조선도 이거, 이거 러시아한테 넘어가게 생겼네.

 

9. 명성황후 제거를 계획한 우범선의 음모00:16:07

  • 모든 계획을 세운 사람은 고종이 아니라 명성황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조선 훈련대의 제2대대장인 우범선은 을미사변 11일 전인 9월 27일, 일본군과 연합하여 광화문으로 향한다.
  • 그곳에서 일본 경찰이 담벼락을 넘어가고, 조선 순경은 아무 저항도 없이 도망을 친다.
  • 일본 경찰은 광화문의 문을 활짝 열어,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해 모인 군대가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 하지만 우범선은 사건이 발생한 후 두려움에 떨며 일본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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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다 계획하고 있는 사람 누구야? 어? 찾아냈구나, 고종이야. 아니다, 고종 뒤에 있는 명성황후가 모든 걸 다 계획하고 있다. 이 상황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고종이 아니라 명성황후를 없애야 되겠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조선 훈련대라고 있었어요. 조선 훈련대가 일본이 만든 시식 군대거든요.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꼭 기억하셔도 돼요.. 아, 우범선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가 11일 전인 9월 27일 날 일본군에게, 10월 8일 새벽 일본군 경찰 그리고 공사, 그리고 일본 낭인들이 모여서, 그다음에 조선군 훈련대까지 구성된 말도 안 되는 기괴한 연합이 광화문 쪽으로 가요. 그때 선발대로 이제 뽑힌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도착한 일본 경찰들이 긴 사다리를 광화문 담벼락에 대고 올라가 가지고 넘어갑니다. 광화문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순경 병사들이 아무 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놀라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 일단 담 넘어 들어갔지 않습니까? 일본 경찰들이 광화문의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들어오셔라. 그래서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해서 모일 군대가 일제히 광화문 안쪽으로 몰려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범선은요, 일단 일을 저질러 버렸고 무섭겠지요. 군인이 황후를 죽이는데 앞장섰잖아요. 두려움에 떨던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을 해버립니다.

 

10. 🇰🇷우범선과 그의 아들 우장춘 박사의 역사적 이야기00:18:36

  • 우범선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 후 아들을 낳았지만, 고영근의 공격으로 일본에서 피살당했습니다.
  • 그 아들은 우장춘 박사로, 한국 농업 근대화에 기여하며 유명해졌습니다.
  • 우장춘 박사는 조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으며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 그의 이야기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드러내며, 친일 행위의 후손들이 소신 없는 행동을 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 일제 강점기 친일 경찰 노덕술은 항일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여 악명이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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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살아요. 또 잘 살았습니까? 아니요, 이번에는 조선의 자객 고영근에 의해서 일본 땅에서 피살이 됩니다. 근데 이 우범선과 일본인... 여인 사이에 아들이 한 명 있었거든요. 이 아들이요, 나중에 자기 아버지의 과오를 대신했으면서 한국에 들어옵니다. 우범선의 아들이 여러분도 다 아시는 유명한 분이세요. 바로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예요. 뭐 제주도 감귤, 강원도 감자, 병충해에 강한 무, 배추 종자를 개발한 한국 농업 근대화의 커다란 업적을 남기신 우장춘 박사가 우범선의 친아들입니다. 근데 우리나라를 위해서 여러 업적을 남기셨죠. 그 공정을 인정받아서 대한민국의 훈장을 받았는데, 우장춘 박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훈장을 받으시면서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고요. [음악] 참, 우범선과 우장춘 박사 부자의 이야기를 보면 역사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가 저지른 그 친일 행위의 바울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한국 발전에 매달린 우장춘 박사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그 후손들까지 있으면 떵떵거리면서 허위 허식을 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그 친일 행위와 매국 행위를 바로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악독하고 혹독한 고문술로 일제 총회를 한 몸에 받았던 친일 경찰이 있습니다. 친일 경찰의 이름은 노덕술이라고요. 울산에서 태어난 노덕술은 그 일본인이 경영하던 떳고 잡화점에서 잠깐 일하다가 홋카이도를 건너가서 이제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에 귀국해 가지고 이제 경찰이 되기 위해서 경남 순시 교습소에 들어가서 졸업을 해요. 그리고 일제 때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하는데, 일제의 눈에 들어야 되잖아요, 조선 인일보. 그래서 더욱더 악랄하게 항일 인사와 항일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다 싹 잡아들입니다. 가지고 무자비하게 고문을 합니다. 노덕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문 귀신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뭐 별의별 새로운 형태의 고문을 만들어낸 것으로 악명 높았는데, 피해자의 혀와 머리카락을 잡아 뽑아요.

 

11. 고문 기술과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역할00:21:03

  • 노덕수는 일제의 고문 기술 중 70%를 개발하며 총경급까지 승진했다.
  • 그는 경찰 경험이 없던 조선인이었지만, 독립 이후에는 고문을 통해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려 했던 역사를 들려준다.
  • 김원봉 선생님은 3.1운동 이후 의열단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이끌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 백범 김구 선생님과 비교했을 때, 김원봉 선생님에게는 100만 원의 현상금이 붙어 있었고, 현재 가치로 환산 시 약 320억 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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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와 머리카락이요, 머리카락. 그리고 좁은 상자에 사람을 가둬버리고 밖에서 못지르릅니다. 사람의 손발은 다 묶은 다음에 구타하는데, 놀랍게도 이거는 세발의 피해에 불과해요. 철에 따르면 일제의 고문 기술 가운데서 70% 가량이 노덕수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말도 있는데, 비록 학력도 낮고 든든한 배경도 없었지만 정말로 승승장구를 합니다. 아, 지금 직급으로 보면 총경급이 이제 경시의 자리까지 오르는데, 일제강점기식의 조선인 일제 경찰로 경시의 자리까지 오는 사람은 총 21명밖에 없다고 해요. 게다가 노덕수를 제외한 조선인 경찰들은 이미 대한제국 시절부터 경찰 경험이 있었고, 또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대부분이었거든요. 이 말은 뭐냐면요, 일제의 눈에 들기 위해 가지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 겁니다. 그러다가 8월 15일, 드디어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합니다.. 그러면 독립 후에 우리 정부는 노덕수를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똑같이 고문을 해야 되잖아요. 상자에 넣고 똑같이 못 박힌 데 걷게 하고, 그냥 너무 예, 그리고 이제 피부를 하나씩 벗긴다던가. 무한대로 고문을. 이분이 그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 씨가 역할을 했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님이십니다. 그 3.1운동 이후에 의열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항일 무장 투쟁을 하신 독립운동가거든요. 그러니까 친일파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겠죠. 일자가 얼마나 김원봉 선생을. 두려워했냐면요, 백범 김구 선생님의 현상금이 60만 원이었어요. 근데 김원봉 선생님은 100만 원이야. 얼마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320억 원의 현상금을 붙였습니다.

 

1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비극적 역사00:23:34

  • 일제 강점기, 김원봉 선생은 일본 제국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단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었다.
  • 그러나 해방 이후, 노덕순에게 체포되어 모욕을 당하며 울분을 토했는데, 그는 조국 해방을 위해 싸웠던 시기에 겪은 수모보다 더 큰 수모에 분노했다.
  • 일제의 탄압에 맞섰던 독립운동가가 해방 후에도 친일 경찰로 일하며 훈장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 해방 후에도 매국노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는 우리의 슬픈 근대 역사 중 하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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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일제가 두려움에 떨었던 인물이 바로 약산 김원봉 선생입니다. 김원봉을 잡기 위해서 일제가 정말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고 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단 한 번도 체포된 일이 없었어요. 근데 해방된 이후에 노덕순에게 체포가 됩니다. 말에 의하면 노적수리 김원봉 선생을 잡아가지고 뺨을 때리면서 모욕을 줬다고 해요. 그때 김원봉 선생님이 얼마나 억울하셨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라고 울분을 토하셨다고 하죠. 일제의 강점기 시절부터 앞장섰던 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두 개의 훈장을 받아낸 도덕술은요, 해방 후에도 경찰로 계속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해방 이후 6.25 전쟁에서 또 공을 세웠다는 명목으로 우리 정부로부터 세계의 훈장을 또 받습니다. 근데 왜 전에 저질렀던 그 죗값은 안 치르죠? 아, 당신은 이제 남북이 대치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반공을 외치면 친일 행위는 이제 깨끗하게 사라지는 거예요. 묻히는 그런 안타까운 상황이었어요. 그건 정말 안타까운 우리의 근대 역사 중에 하나죠. 앞서 소개해드린 크비슬링은 독일이 패전하자마자 붙잡혀서 총살당했잖습니까? 그리고 그 이름도 아직까지 이런 빌어먹을 흡입 슬림이라고 욕으로 쓰이고 있는데, 우리는 해방 후에도 매국노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않았다라는 것을 이런 걸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죠.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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