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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제 1부 최초의 중원침공, 당을 정벌하라 – 무왕 대무예

by 리치캣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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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쉽게 무너졌듯이...

한족도 쉽게 무너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발해 수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한 것은...

 

한국전쟁시 인천상륙작전과 비슷한 느낌이다.

 

KBS 한국사전_발해 제 1부 최초의 중원침공, 당을 정벌하라 – 무왕 대무예

 

https://www.youtube.com/watch?v=-2qW-r2NMAw

이 영상은 발해의 역사와 대조영의 후손 무한이 수행한 최초의 선제 공격을 통해 발해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발해는 당시 세계 최강국인 당나라에 맞서 두 차례의 공격을 성공시키며 독립적인 정치 운영과 자존심을 세운 사례로, 역사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 속 강국의 발전 과정과 그 자아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핵심주제

발해는 당나라를 정벌하며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 발해는 30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역사 속에 당을 두 차례 선제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 이 과정에서 내부 정치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당은 발해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 발해의 당 정벌은 신생 국가로서 절대 당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대조영과 무왕의 리더십은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 대조영은 발해 건국 후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당 문화도 창조적으로 받아들였다.
  • 특히 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고구려의 땅을 향해 진격하며 동북쪽 여러 민족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 이들의 군사 작전은 발해의 혁신적인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흑수 말갈 부족과의 관계는 발해의 외교적 긴장을 부추겼다.
  • 흑수 말갈은 전투력과 수렵 능력이 뛰어난 강력한 부족이었으나 식량과 철의 생산 능력은 부족했다.
  • 그들은 당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보충하였지만, 직접 조공을 하면서 질서가 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 결국 당은 그들을 직접 통치하게 되어 발해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발해의 해상 군사 전략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발해는 고구려 수군을 계승하여 동주를 공격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고, 이 지역은 무역의 거점 역할을 했다.
  • 많은 무역선들이 황해를 통해 동주로 들어왔으며, 발해는 이곳에서 전투 준비와 물자 수송 작업을 진행했다.
  • 이는 발해가 최초의 해외 원정을 단행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당나라는 발해와의 정치적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을 모색했다.
  • 무어는 발해의 친당 세력을 제거해야 독자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동생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 당의 이러한 정치적 수단은 발해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 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발해의 내적 결속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타임라인

완벽노트(GPT-4o) 적용됨1. 🌍 발해의 해외 원정과 무왕 대무예

  • 발해는 당나라를 상대로 최초의 해외 원정을 감행했다.
  • 기습 공격을 통해 당나라의 성을 빠르게 함락시켰다.
  • 이 원정은 한민족 최초의 해외 원정으로 추정된다.
  •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으며,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 무왕 대무예는 이 과감한 외교와 군사 작전을 주도했다.

 

2. ️🏔️지린성의 성산 자산 성과 대조영

  • 중국 북동부에 위치한 지린성에는 해발 600m의 노산이 우뚝 솟아 있다.
  • 노산 곳곳에는 유적이 존재하며, 중턱에는 움푹 파인 구덩이와 함께 돌을 쌓아 만든 요리어가 있다.
  • 이 성벽은 구역을 두르며, 성산 자산 성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 대조영은 동무산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으며, 이는 고구려의 후예로서 당의 고구려 세력 해체에 반기를 들기 위한 것이었다.
  • 결국 대조영은 698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다.

 

3. ️🇰🇷발해의 문화와 영토 확장

  •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당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 전성기에는 고구려를 능가하는 넓은 영토를 갖추었으며, 남북으로는 대동강에서 흑룡강까지, 동쪽은 중국, 서쪽은 러시아에 이르렀다.
  • 중국은 발해를 '해동 성국'이라고 부르며, 강성한 나라로 인식했다.
  • 대조영은 719년 3월에 건국하였고, 이후 많은 일을 해야 했다.
  • 대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고구려의 땅을 향해 진격하며, 동북쪽으로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다.

 

4. 722년, 당 현종의 불청객 흑수 말갈

  • 722년, 당 현종은 뜻밖의 손님인 흑수 말갈 부족의 추장을 맞이하게 된다.
  • 그는 조공을 바치러 왔으며, 견종은 그를 크게 환대하고 별술까지 제공하였다.
  • 흑수 말갈은 러시아 극동 지역에 거주하며, 조상 대대로 황룡강 유역에서 살아왔다.
  • 현재 이들은 '나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천년 넘게 좁은 지역에서 독특한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5. 흑수 말갈의 역사와 당과의 관계

  • 흑수 말갈은 중국 동북부의 여러 말갈족 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었다.
  • 그들은 전투력이 강하고 수렵 능력이 뛰어났지만, 식량과 철 등의 생산 능력이 부족했다.
  • 흑수 말갈은 당과의 교역을 통해 부족한 물품을 얻었으나, 이들이 돌연 당에 직접 조공을 하면서 질서가 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 결국 725년에 당은 흑수 말갈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며,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까지 파견하게 된다.

 

6. 정치적 상황과 왕위 계승 문제

  • 카는 강성희이며, 최근 정치적 사건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 현재 상황은 좋지 않으며, 왕위 계승자인 대돌이가 파견된 상황이다.
  • 발해 왕자는 이에 항의했지만, 탐 현종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전반적으로 긴장된 정치적 정세가 지속되고 있다.

 

7. ️⚔️ 발해의 전쟁과 흑수 말갈 정벌

  • 처음에는 당나라의 압제에 질려 있었으나, 현재는 전쟁을 선포하게 된 상황이다.
  • 무는 동생에게 흑수 말갈을 정벌할 것을 명령하고, 이 과정에서 적절한 장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 그러나 당나라의 반응은 의외였으며, 공격을 서두르지 말라고 경고했다.
  • 당은 중앙아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가장 강력한 통일 제국을 형성했으며, 강력한 군사력과 현대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 태 문제는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이는 발해에 큰 위기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8. 발해 건국 과정에서 아들의 역할과 대외 정책

  • 아들이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특히 대운은 발해와 당나라 간의 국교 교섭 시기에 당나라에 인질로 파견되어 오랫동안 있었다.
  • 대외 정책에서 대문이 한 업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 그러나 무왕은 대문을 무시하고 토벌군의 사령관을 임명하며 특정 작전을 계획했다.
  • 당과 발해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 여러 부족들 덕분에 당은 발해를 공격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9.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 유장 빙탕이 대문에 소환되지 않고 군영을 탈출했으며, 그는 만 명을 상대했던 사건이 있었다.
  • 탕 현종은 그를 크게 환영하고 교수를 내리며,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 완은 당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대문에는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 또한, 내부에는 왕자가 된다던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10. 당나라 외교에서의 권력 다툼과 비밀

  • 대문에도 당나라 유학파가 있을 것이고, 무항의 방치가 당 중심적인 분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 이런 상황에서 차기 동생이 그 행동에 대한 응징을 시도했지만, 현종은 그를 무시하고 귀한 사람들을 멀리 보내며 피신시켰다.
  • 그러나 이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완은 이후 파격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현종을 꾸짖었다.
  • 그는 '흥나는 시내를 보여야 하거늘, 어떻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11. ️⚔️당나라와 발해의 정치적 긴장 상황

  • 무어는 거듭해서 에 동생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는 친당 팔을 제거해야 독자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 반면, 대문에는 당나라가 발해에 대항하는 것이 자멸을 부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 728년 4월, 발해 부고가 전해지며, 당나라의 왕위 계승자가 죽자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 당 현종은 대문에를 죽이라는 무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대문에는 왕의 친동생을 활용해 발해를 정복할 절호의 기회를 잡으려 하였다.
  • 이 과정에서 발해의 차기 왕이 없는 상황에서 대문에를 왕으로 임명할 수도 있는 실력 행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2. ️📜무황의 첫 해외 원정 및 전략

  • 무황은 압록강으로 군사를 이동시켜 군사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 특히, 팔에 시대에서 발생한 큰 폭우로 인해 발해 군사들은 이곳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 발해에서 당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이 지역을 거쳐야 했고, 무황은 전투 준비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 장문휴는 몇 달 동안 군 선과 병력을 집결시킨 후, 732년 9월에 드디어 출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 이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으로, 압록강 하구를 따라 황해로 진격하여 중국 산동반도로 향했습니다.

 

13. 발해, 고구려 수군 계승 및 등주의 중요성

  • 발해는 건국한 지 30여 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고구려 수군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 당시 수군의 공격 목표는 동주였으며, 동주는 북방 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 역할을 했다.
  • 많은 무역선들이 황해를 통해 동주로 들어왔고, 이곳에서는 전대리 중 쟁탈전이 벌어졌다.
  • 또한 동주 성에는 당 수군의 거점이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격 시 조선 기술자들이 모였다.
  • 이곳에서 공격의 패를 만들고 물자를 수송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14.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 계획

  •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배를 출격시켰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 고구려와 망한 지 30년 만에, 지배층들이 경험을 통해 전략적으로 판단한 결과, 수군이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들은 치밀한 계산 아래에서 공격 목표를 정하고 선제 공격으로 당 수군의 거점 무너뜨려야 반격을 원천 봉쇄할 수 있었다.
  • 732년 9월 5일, 당나라 군은 치명적인 송 시를 읽으며 교전 중 자사 위조가 발해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 왕조가 평화 시기에 예당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이력이며, 공격은 개 성공했지만 발해 군의 기사를 꺾지 못했다.

 

15. ️신라와 발해의 군사 협력과 공격 계획

  • 방향 한방에서는 현종이 신라를 끌어들이며, 성덕왕의 교술을 높여 10만 명의 병력을 요청했다.
  • 신라는 이를 받아들였고, 통일 과정에서 당과의 거리감이 있었으나, 발해를 함께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 현종은 신라의 공격에 기대를 걸고 토벌 군을 이끌 장소를 직접 지명했다.
  • 신라는 약속대로 733년 1월 협력하여 1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며, 경주에서 출발해 발해의 남쪽으로 북상했다.

 

16. ️⚔️당과 발해의 갈등과 원정군의 실패

  • 복병인 날씨로 인해 신라의 원정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에서, 무학은 예상치 못했던 선제 공격으로 당 수군의 심장인 등주에 일격을 가했다.
  • 발해는 당 대국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 당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하였고, 현종은 토벌군의 총사령관으로 새로운 인물을 임명했다.

 

17. ️⚔️발해 왕자의 전략과 낙양 지배의 음모

  • 5대 태헌은 좋은 대문을 이용해 발해 토벌군의 주인으로 나선다.
  • 그는 동쪽을 향해 팔을 기도하며, 대무예는 비밀리에 작전을 시작한다.
  • 당나라의 동쪽 수도인 낙양에서, 현종은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낙양은 무역과 외교의 중심지였다.
  • 733년 1월, 대문이 남쪽에서 천징계로 진입하며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도망치지만, 도시에 대한 대담한 반격이 시작된다.
  • 결국 처형된 팔은 낙양에 침입한 자격을 모두 잃고, 대반격으로 중원으로 진격하게 된다.

 

18. ️⚔️발해의 공격과 당나라의 저항

  • 등주 공격의 윤발에 2차전으로 머리하며, 마도의 공격은 1차 공격과는 달라졌다.
  • 이번에는 부와 니가 직접 진도를 지휘하며, 발해가 전통적으로 해군의 힘을 발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 발해는 굳은 기세로 1군을 제압했지만, 파는 군사를 추가로 발병하며 저항했으나 발해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 발해는 마도 생물로 인해 승승장구했으며, 강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인성과 손실을 극복할 수 있었다.
  • 결국, 당나라의 잠수는 무릎을 꿇었고, 발해의 강력한 전투력이 강조되었다.

 

19. ️⚔️ 발해의 군사 원정과 만리장성 방어 전술

  • 발해 군은 1차 공격을 위해 복무산에서 출발하여 영주를 거쳐 마도사 4에 도착했다.
  • 마도사 4는 중국 본토의 북쪽 경계선인 만리장성과 가까워, 당은 발해 군이 만리장성을 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 현종은 새로운 장군을 임명하여, 발해와의 두 차례 전투에서 패한 각 나라의 군사들이 발해 군을 상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형을 이용한 전략을 세웠다.
  • 마도사 4의 돌이 많은 지형을 활용한 당의 전략은 발해 군에 대한 필사적인 방어를 나타냈고, 당시 장벽은 4백리에 이르렀다.

 

20. 당나라의 제국적 자신감과 정책 변화

  •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백리 길에 돌로 성을 쌓으면서 겨우 무항에 진격했다는 내용이 있다.
  • 또한, 당은 가까스로 8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마도 산청 벌을 계기로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 국가적 자신감을 얻은 후, 그는 그에 걸맞는 정책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 증국 지린 지역에서는 왕 상급 토성이 발굴되었고, 짐승 머리 형태의 건축 장식물과 최고급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 두 차례의 단정발호 이후 무한은 중경 새 고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동무산 남쪽에 위치한 충경도 이후 중요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21. 🇰🇷 새로운 국가의 도성을 세운 사연

  • 발에 공급이 급한 상황에서 국가의 도성이 적절한 장소에 세워지지 않았고, 따라서 새로운 도성을 위한 적당한 입지를 찾았다.
  • 현주는 날씨와 주변 여건이 좋은 지역으로, 도시는 좁은 통로가 산을 벗어나며 강이 흐르는 넓은 분지에 세워졌다.
  •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며, 성의 둘레는 3km이고, 4성의 둘레는 1km이다. 확인된 궁전 터는 5군데가 있다.
  • 무한은 두 차례의 단계로 국가적 자신감을 선포하며, 냉철한 판단과 대담한 전략으로 제국 팔에 꿈을 이루어 냈다.

 

22. 발해의 당 정벌과 동아시아 강국으로의 부상

  • 발해는 삼십 년도 안 되는 짧은 역사 속에, 당을 두 차례 선제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 이후 당은 발해의 내정에 전혀 간섭할 수 없게 되었고, 무왕은 국정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 발해의 당 정벌은 신생 국가로서 절대 당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 그 결과, 발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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