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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기/잡학다식

미국과 인류의 미래 - 도올 김용옥

by 리치캣 201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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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인류의 미래

― 트윈빌딩․펜타곤 폭파사건을 전후하여 ―

도올 김용옥

인간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명료한 사관과 체계적인 히스토리오그라피의 방법론을 가지고 서술한 사가로서 인류사에 가장 앞선 인물로 꼽히는 사마천(司馬遷)은 그가 가장 뛰어난 필치로 공을 들인 열전(列傳) 가운데 「자객열전(刺客列傳)」을 26번째로 삽입시켰다. 그 「자객열전」은 공자보다 2세기를 앞선 관중(管仲)의 시대, 약소국이었던 노(魯)나라의 장수 조말(曹沫)의 이야기로부터 그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다. 조말은 그 한 많은 여인, 애강(哀姜)의 남편인 노나라 장공(莊公)을 섬겼는데, 당대의 대국 제(齊)나라와 3번이나 싸워 모두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장공은 하는 수 없이 수읍(遂色)의 땅을 제나라에 바치고 화친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패장(敗將)인 조말은 계속 장수로 거느렸다.

패웅(覇雄)인 제(齊) 환공(桓公)은 노 장공과 가(柯)의 땅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을 것을 허락하였다. 환공과 장공이 단상에서 맹약을 맺으려 하고 있을 때였다. 요새 말로 한다면 항복문서에 조인을 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조말은 날쌔게 단상에 올라가 비수를 제 환공의 목에 대고 협박한다. 환공은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子將何欲?)”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합니다. 그런데 대국인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하는 정도가 지나칩니다. 지금 제나라의 국경은 노나라 깊숙이 파고 들어와서 이미 국도(國都)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齊强魯弱, 而大國侵魯亦甚矣。今魯城壞卽壓齊境, 君其圖之)”

그러면서 조말은 정복당한 노나라의 영토를 즉각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제 환공은 노나라에게서 빼앗은 모든 땅을 돌려줄 것을 수락한다. 이러한 수락이 제 환공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조말은 환공의 목에 대었던 비수를 던져버리고 단에서 내려와 북향을 하고 평화롭게 신하의 예를 다하였다.

자아! 이런 재미있는 상황을 한번 현실적으로 점검해보자! 제 환공은 천하무적의 패자이다. 그런데 그에게 패배당한 소국의 장수가 감히 그에게 칼을 들이대었고,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그 칼이라는 폭력의 순간적 위력을 빌어 잠정적으로 구두약속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자, 조말은 칼을 던지고 무기력한 평민으로 돌아가 신하의 예를 다한다.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제 환공은 과연 칼이라는 폭력에 순간적으로 제압당해 하는 수 없이 내뱉은 약속을 지킬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천하의 무적인 그가 맹약의 법도를 어기고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댄 약소국의 적장을 그냥 둘 리가 있겠는가? 조말은 무슨 심보에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벌리고, 또 칼을 버리고 태연하게 신하의 예를 다하고 앉아 있는 것일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장 그의 목에 내려칠 길로틴의 칼날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앉아있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제 환공은 약속을 거기고 조말의 목을 치려한다. 이때였다. 제 환공을 보좌하던 명재상 관중이 이를 제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됩니다.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대국의 체통을 잃고 한번 뱉은 말을 제멋대로 저버린다면, 제후들에게 신망이 떨어지게 될 것은 뻔한 일이고, 천하 각국의 지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약속대로 그 땅을 돌려주시는 것이 상책입니다.(不可。夫貪小利而自快, 棄信於諸侯, 失天下之援, 不如與之.)”

그래서 환공은 마침내 노나라에서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었을 뿐 아니라, 적장인 조말에게도 어떠한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조말은 세 번 싸움에서 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았고 그의 명예도 회복하였다. 조말이 패장의 참패를 회복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 비결은 바로 이 “자(刺)”라는 한 글자에 숨어있다. 자(刺)란 무엇인가? 이 자(刺)를 오늘 말로 환원하면 바로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뜻이 된다.

조말은 사마천이라는 사가의 손을 빌어 인류사에 등장한 최초의 테러리스트(terrorist)였다. 그 뒤에 나오는, 조양자(趙襄子)를 죽이려한 진(晋)나라 예양(豫讓)의 이야기나, 진시황을 시해하려한 위(衛)나라 사람 형가(荊軻)의 이야기가 모두 이 조말의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있는 논리적 구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테러리즘은 인류사에서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분명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정언명령이다. 그러나 여기 우리는 또 하나의 매우 어려운 명제를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테러리즘은 도덕성이 있는가?

이 어려운 질문에 희대의 사가 사마천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테러리즘에도 도덕성이 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인류의 예언자며 시대를 앞선 희대의 사가 사마천의 명언이다.

테러리즘은 근절되어야 마땅하다.(Terrorism must be eradicated.)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America should not retaliate.)

이 두 명제는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두 명제는 상호보완적으로 동시에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세의 정칙이다. 이것이 사마천이 말하는 역사다.

지금 부쉬에게는 관중(管仲)이 없다. 아니, 부쉬에게는 관중의 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제 환공의 도량이 없다. 아니, 이것은 분명 부쉬의 개인의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20세기 인류사를 리드해온 방식에 대한 업보의 필요적 구조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인류사에서 테러리즘이 없어 본 적은 없다. 테러는 오늘 내일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테러리즘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다. 사마천이 말하는 테러리즘에는 약자의 명분과 강자의 아량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사마천이 말하는 테러리스트의 삶의 원칙은 다음 한 마디로 축약되고 있다.

“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사내는 자기를 진정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을 줄 알고, 여자는 자기를 진정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헌신할 줄 안다.)”

이것은 자객 예양이 자기를 인정해준 진(晋)나라의 지백(智伯)의 죽음을 당해, 피신하여 산 속으로 도망가면서 외치는 절규의 한 대목이다.

“Being killed for Allah's cause is a great honor achieved by only those who are the lite of the nation. We love this kind of death for Allah's cause as much as you like to live. We have nothing to fear for. It is something we wish for.(알라의 명분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나라의 의식있는 엘리트만이 획득할 수 있는 위대한 영예다. 우리는 삶을 원하는 것만큼 알라의 명분을 위하여 죽는 것을 사랑한다. 우리에게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1997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과연 테러리즘에 도덕성이 전무하다고 단언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김구(金九)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애국자로 존경할 수 있으며, 어떻게 메이지유신의 기업(基業)을 완성하고 동경대학(東京大學)이라는 위대한 교육기관을 탄생시킨 이토오 히로부미와 같은 일본근대사의 거목을 쏘아죽인 안중근이나, 홍구(虹口)공원에 폭탄을 던지고 장렬하게 순국한 윤봉길을 의사(義士)로 추앙할 수 있겠는가?

조양자(趙養子)는 자기에게 항거한 지백(智伯)을 쳤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괴롭혔던 지백이 미워,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하였다.(漆其頭以爲飮器。) 그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지백에게 충성을 약속했던 예양은 복수의 칼날을 계속 간다. 그리고 성명을 바꾸고 죄수로 변장하여 조양자의 궁에 들어가 뒷간의 벽을 발랐는데, 조양자가 똥누러간 사이에 그를 찔러 죽이려다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그러나 조양자는 지백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예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사람은 의로운 자다. 단지 내가 조심하여 피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지백이 망하고 후사조차 없는데도 그의 신하된 자로서 원수를 갚겠다고 저렇게 자기희생을 서슴지 아니하니 이 자야말로 천하의 현인이로다."(彼義人也, 吾謹避之耳。且智伯亡無後, 而其臣欲爲報仇, 此天下之賢人也。)”

그리고 예양을 풀어주는 관용을 베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양은 제2차의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조양자는 그가 지나가는 길 다리 밑에 숨어있는 예양이 타고 있던 말이 섬칫하는 바람에 발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아! 예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절을 다하였다는 명예는 이미 이루어졌고, 과인이 그대를 용서함도 이미 충분하다. 이제 그대는 각오하라!(嗟乎豫子! 子之爲智伯, 名旣成矣, 而寡人赦子, 亦已足矣。子其自爲計, 寡人不復釋子!)”

이에 예양은 울며 말한다.

“현명한 군주는 남의 아름다운 이름을 덮어 가리지 아니하고, 충신은 의로운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죽을 의무가 있습니다. 지난번 군왕께서 이미 신을 관대히 용서하시어, 천하에 그 어짊을 칭송치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늘의 일로 말하자면, 신은 죽음을 당해야 마땅하오나, 원컨대 신이 군왕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쳐서, 그로써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臣聞明主不掩人之美, 而忠臣有死名之義。前君已寬赦臣, 天下莫不稱君之賢。今日之事, 臣固伏誅, 然願請君之依而擊之, 焉以致報之意, 則雖死不恨。)

이에 조양자는 옷을 벗어 주었다. 예양은 칼을 뽑아들고 세 번을 펄쩍 뛰면서 그 옷을 베었다. 그리고 “내 비로소 지하에 잠든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이내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다. 그가 죽던 날, 조나라의 지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우리는 뉴욕의 시민들에게 트윈빌딩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는 두 조종사, 모하메드 앗타(Mohamed Atta)와 마르완 알 쉐히(Marwan Al-Shehhi)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량을 보여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너무도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과 그 충격의 폭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대국이 조양자의 아량을 배우지 못한다면, 결국 앗타와 알쉐히의 테러리즘을 더욱더 조장시키고 영웅시하게 받드는 아이러니칼한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것이요, 역사의 정칙이다. 결국 어떠한 존재가 테러리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가 강대(强大)하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유래되는 것이다. 약소한 존재는 근본적으로 테러리즘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강대한 자는 강대한 자의 道를 터득치 않으면 안 된다. 老子는 말한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61장)(대국은 아랫물이다. 그래서 천하의 모든 윗물이 흘러들어 오는 곳이며, 천하의 모든 수컷이 꼬여드는 암컷이다.)”

上流에는 강대한 것이 있을 수 없다. 가늘고 약한 것만이 있을 수 있다. 모든 강대한 것은 반드시 下流에 위치한다. 下流의 특징은 모든 上流들 아래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下流요, 下流이기에 비로소 大國이 될 수 있는 것이다.

“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61장)(대국은 반드시 소국앞에 자기를 낮추어야만 그 소국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自然)의 법칙이요, 역사의 철칙이요, 도덕의 준칙이다. 이것을 어기면 대국은 대국됨의 도를 저버리는 것이다. 미국이 강대하다는 사실만으로 영원히 그 강대함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큰 나라는 중국도 있고 브라질도 있고 카나다도 있고, 오스트랄리아도 있다. 광막한 시베리아의 러시아도 있다. 미국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은 오로지 약소국들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즉 실체론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국제관계론의 역학에 보다 본질적인 통찰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미국은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다. 미국이 오늘날까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 강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가 구현하고자 하는 모든 이상적 가치를 앞서 구현하여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같은 천안 잿배기의 코흘리개도 어려서부터 미국을 동경하였고 그 유학의 꿈을 달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어김없이 나의 이상과 꿈을 교육시켜 주었던 것이다. 트윈빌딩을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자유의 여신상이 구현하고자 하는 자유는 미국만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며, 영원한 미래적 가치의 표상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윈빌딩이 폭파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20세기를 리드해온 미국의 자만감이 지나치게 패권주의에 흐르고, 지나치게 일방주의적 편협한 이권주의에 경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입증이라는 가혹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는 없다.

「자객열전」에는 韓나라의 嚴仲子의 원수를 갚는 섭정(攝政)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때가 무르익어 섭정이 원수를 갚으러 갈 때 엄중자가 도움이 될 만한 수레와 말, 그리고 장사들을 보태주려고 한다. 그러니까 섭정은 이 모든 보좌수단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결행한다. 그리고 원수 갚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죽이고 난 후 자기 얼굴가죽을 자기가 벗겨내고 죽는다. 이 섭정의 이야기는 테러리즘의 매우 중요한 속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성공하는 모든 테러는 조직을 최소화시키며, 동원되는 수단을 최소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얼굴을 반드시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번의 끔찍한 테러의 놀라운 적중률의 결과는 바로 이렇게 최소한의 조직과 수단으로 결행되었다는 속성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이번 테러리즘이 방대한 조직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에 의하여 감행된 사태라고는 판단키가 어렵다. 실패와 누설의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완결되는 모종의 X그룹의 독립세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과연 이 X그룹을 누가 어떻게 움직인 것인가 하는 시나리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복잡한 관계망의 소산일 수도 있다. 미국은 자체내의 복잡한 관계에 의하여 자신들이 선택했고, 누구보다도 열렬한 민중의 지지를 얻은 위대한 지도자 죤 에프 케네디를 가차 없이 암살해버리는 음모를 감행했다. 죤 에프 케네디가 미국 자체 내의 파우어 구도 음모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미 의회 보고서가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 해온 미국이 전 인류에게 테러리즘에 대한 순결한 도덕적 대가를 호소해본들, 그 호소가 과연 얼마나 많은 이 지구상의 인구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여기 우리는 테러리즘의 발생원인에 대한 시비를 논할 여유가 없다. 우리의 급선무는 앞으로 다가올 테러리즘을 막는 일이다. 앞으로 더 이상 이러한 테러리즘의 비극이 인류사에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일차적 판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America should not retaliate.)

“탈레반 정권에게 퍼붓는 포탄값으로 경제지원을”이라고 외치는 영국 BBC 방송의 지적은 과격하게 정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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