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부하기/잡학다식

[군사] 피튀기는 중세 유럽 전쟁사 - 딴지일보

by 리치캣 2010. 4. 21.
728x90
반응형


[군사] 피튀기는 중세 유럽 전쟁사

2003.5.24.토요일
딴지 군사부


먼저 왼쪽 사진을 보자. 그래, 중세 아니고 로마 병사란 거 안다. 일단 따라와 바라. 결국엔 다 디비준다. 이거 재구성 한 게 일반에 처음 공개됐을 때 나름대로 한 눈빨한다는 사람들 다 한마디씩 했다. '너거 학자들 머리는 장식품이가? 우찌 저걸 틀리노?' 라고. 그게 뭘까? 함 맞춰바라. 답은 밑에서 갈켜주께.

야가 입고 있는 갑옷.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라고 부른다. 어차피 역사상에 잠깐밖에 안나오고 나도 더 이상 이거에 대해 쓸 일도 없으니깐 괜히 번역해서 부를 필요도 없다. 너거뜰, 러셀 크로가 주연한 영화 검투사(the Gladiator)에서 많이 봐서, 로마 병사들은 전부 다 저거 입었다고 믿고 있는 거 내 안다. 시저가 데리고 댕긴 병사들도 저거 입었을 꺼 같제? 아이다. 저거 AD 9년 경에 처음 나와서 꼴랑 200년밖에 안입었다. 그라고 다시는 저런거 안나온다.

와, 200년이면 많이 입었네. 하는 사람 있을끼다. 근데 옛날 사슬갑옷은 아들한테 물려주고 하면서 한 몇 백년씩 입었다. 손질만 잘하믄 진짜 오래갔다. 근데 저건, 이거 싸고 너거뜰 몸도 잘 막아줘, 라며 정부의 대대적인 계획에 의해 최전방에 쫘~악 보급됐다가 순식간에 뿅! 하고 사라진다. 무슨 치명적인 결함이 없으면 그렇게 사라질 수 있나?  이 갑옷은 기술의 달인이었다는 로마인의 실패작이다.

이제 위의 문제 답 알겠쩨? 칼이 오른쪽에 달려있다고 사람들 막 갈아댔다. 저 병사가 왼손잡이가 아니었을까? 라는 잡소리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참다못한 우리 학자선생 직접 나와 한수 보여줬다. '이놈들아!! 무식하면 입이나 쳐다물고 있어, 이렇게 뽑는거여!!' 사람들 와~ 했다. 너거뜰도 와~ 하고 있는 거 안다.

거기 학생, 질문 잘 했다. 근데 왜 저렇게 뽑았을까? 로마병사가 전진할 때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투창을 든다. 그리고 거리가 되면 창을 던진다. 그 담에 칼을 뽑는데, 생각해 봐라. 내가 던질 거리면 저기서도 뭐 날라온다. 너거뜰 로마 방패 잘 알끼다. 울나라 방패연같이 생긴 커다란 거. 그걸로 제대로 방어하는 데 걸리적거리지 않게 오른쪽에서 뽑는 거다. 직접해봐라. 의외로 쉽다. 특히 로마병사들의 주무기 그라디우스(Gladius)는 칼몸이 50cm 정도로 짧아서 더욱 문제 없었다. 그리고 조금만 연습하면 더 긴 칼도 쉽게 뽑는다.

방금 위에 이야기들, 고대, 중세 무기에 조금 안다는 사람도 처음 듣는다는 거 내 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정보가 거의 안들어와 있고, 판타지 문학, 게임(특히 TRPG)등에 의해 정보가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거 소개한답시고 나온 책에 제대로 된 사진 하나 없는 거 보고, 나도 분노한 적 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염원을 감지한 본인은 제대로 된 연구에 착수해서 무기, 갑옷 등에 관해 멋들어지게 정리 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입산연구 5년만(뻥이다)에 깨달은 게 있다.

'무기는 사용 예가 없이는 평가될 수 없다.'

어떤 책에서 신무기가 전황을 바꾼 예로 나와있는 잉글랜드 장궁(長弓, Longbow)을 예로 들어보자. 특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해본 사람들, 이 장궁이 갑옷도 뽕뽕 뚫었다고 알고 있을 꺼다. 위에 말한 그 어떤 책에도 그렇게 적혀있었으니깐. 결론은, 그거 뻥이다. 못 뚫는다. 숙련된 장궁수가 복원한 장궁과 화살들고, 그 당시 사용되었던 갑옷 갔다 놓고 바로 앞에서 똑바로 쐈는데도 활촉만 틱 구부러지더라. 그리고 석궁(Crossbow)의 경우, 12세기에는 이거 악마의 무기라고 불렸다. 근데 14세기부터는 조금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참 이런 걸 가지고 게임 데이터로 위력 숫자놀이하는 거 보면 대단하다.

 

그나마 갑옷은 쉽다. 무기에 비해선 종류가 한정되어 있으니깐, 왼쪽부터 사슬갑옷(Chain mail 또는 Ring mail), 이건 길이에 따라 셔츠, 코트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다음 껀 미늘갑옷(Scale mail), 확실히 하자. 비늘갑옷이 아니고 미늘갑옷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관용구) 미늘(을) 달다
(기와나 비늘 모양으로) 위쪽의 아래 끝이 아래쪽의 위 끝을 덮어 누르게 꾸미다

가장 오른쪽은 조각갑옷(찰갑, 札鉀, Lamellar)이다. 이건 서유럽에선 별로 안나오고 동유럽에서 많이 나온다. 결국엔 사슬갑옷이 가장 기본이다. 그 위에 철판  하나하나 붙이다가 전체가 다 철판이면 왼쪽 아래같이 전신철판갑옷(Full plate mail)이 되는 것이다. 이것도 시기마다 지역마다 모양이 틀리다.

무기의 경우도 모양에 따라 설명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변종이 좀 많아야지. 요거 바꿔놓고 이거요, 저거 바꿔놓고 저겁니다, 그러는 건 사람 헷갈리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본인은 많이 돌아가지만 정확한 정보를 주기로 작심했다. 대표적인 전투나 전쟁을 골라서 배경도 설명하고, 사회적인 상황도 설명할 거다. 일단 잉글랜드에 관련된 사건들이 먼저 나오는데, 왜 그러냐면 여기가 영국이라 이쪽 자료를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중에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옮기면 당연히 그쪽이 주 전장이 되니깐 천천히 기둘리라. 내 딴지 안 망하고, 나도 안 망하면 평생 걸려도 다 해 줄테이.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특별히 무기에만 관심있는 사람은 [장비나 무기와 갑옷]라고 적혀있는 편만 읽어라.


 
이걸로 함 맞아볼텨?
 
담편부터 펼쳐지는 이야기식 문체부분은 1차 & 2차 사료에 의한 3차 가공물이다. 스또오리를 매끈하게 전개시키기 위해 뺀 부분도 있고, 첨가한 부분도 있으니 이게 역사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문제가 있다. 뭐 결국에는 의문점 코너에서 다 밝혀준다만... 자 할 얘기는 다 끝난 것 같다. 그럼 이제 어떤 식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지 한번 훑어보고 끝내자. 어이 거기, 제목에 속았다고 투덜거리는 양반, 옆에 아저씨가 한 대 팰쑤도 있으니 입 다물고 있자. 어허, 입술 집어넣고.

이 셤난 아저씨가 들고 계시는 칼은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어지던 크레이모아(claymore)이다. 원래는 그냥 그곳에서 쓰이던 양손검을 지칭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 늘어진 V자 칼자루 모양을 가진 칼을 일컫는 말로 변형되었다. 저 칼 나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군사] 피튀기는 중세 유럽 전쟁사-1066년 

2003.5.24.토요일
딴지 군사부


자, 이제 시작입니다. 뭐가 시작이냐구요? 뭐가 시작인지 모르는 사람은 요 밑에를 살포시 누질러서 젤 처음 꺼에 잠깐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것이 이해하기 훠~얼씬 편합니다.

첫 시간이니 많이 안 나갈랍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나가면 부담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잉글랜드 대빵 자리에 도전하는 우리의 주인공 3명이 각각 자기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게 되었나?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가? 까지만 알아봅시다.

주의사항
윌리엄이니 에드워드니 똑같은 이름 많이 나옵니다. 유럽 아해들 이름이 별로 없어서 몇 개가지고 계속 돌려 쓰니 헷갈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람 이름과 지명은 가능한 한 현재 현지 발음으로 표기했습니다. 그러니 영어로는 로버트(Robert)인데 왜 로베아라고 적어놓았냐고 토 달지 맙시다.


--------------------------------------------------------------------------------


강감찬이 거란군을 심하게 밟아준 지 어언 50년, 그 거란도 나라이름을 요(遼)로 바꾼 1066년의 4월, 유라시아 대륙 반대 편 끝 조금 너머에 위치한 잉글랜드의 밤하늘에 혜성이 출몰했다.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라며 수근거렸다. 그 해 가을, 역전의 용사 두 명이 잉글랜드에 발을 디딘다. 국왕 해롤드는 나직히 외쳤다. "조때따"


 잉글랜드의 사정

앵글로 색슨(Anglo-Saxon, 이하 색슨)은 약했다. 아니, 바이킹이 강했다. 색슨 사람들은 정기 행사처럼 바이킹을 상대해야 했다. 그냥 약탈당하기도 하고, 싸워 물리치기도 하고, 돈 줘서 돌려보내기도 하고. 이런 상태가 수세기 동안 계속 되었다.


 
잉글랜드 왕위와 관계된 인물들의 가계도. 검은 색 이름은 색슨, 보라 색은 바이킹(Viking), 파란 색은 노르만(Norman)이다. 이름 앞의 숫자는 제위 순서이고, 밑의 연도 표시는 제위 기간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기지만 특별히 크게 쓰여진 에마(Emma)는 동일인물이다.
 


카눗 대왕이 이룩했던 북해 제국

결국 덴마크 왕이던 카눗(Cnut 또는 Canute)이 왕위에 오르며 바이킹의 이름을 계보에 올려놓는다. 카눗의 그 다음 행보가 주목할 만 한데, 전 왕의 미망인 에마와 재혼한 것이다. 이 결혼으로 카눗의 왕위는 더욱 탄탄해졌지만 나중에 복잡한 문제를 불러오게 된다.

그 후, 카눗의 자손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일찍 죽자, 아버지 에델레드(Æthelred)와 같이 왕국에서 도망 나와 노르망디에 살고 있던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이하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제법 안정적인 치세를 펼쳤지만 공식적인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는데, 먼저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1051년에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William the Bastard, the duke of Normandy, 이하 윌리엄)에게 왕위를 제안했다가, 몇 년 후에는 헝가리에 도망 가있던 추방자 에드워드(Edward the Exile)를 불러서 왕위를 넘겨줄 것 같이 하고, 그가 잉글랜드 땅을 밟은 직후 덜컥 죽어 버리자, 이번에는 조카 히어포드 백작 랄프(Ralph the earl of Hereford)에게 줄려나 하는데 그도 같은 해, 1057년에 죽어 버리고, 덴마크 왕인 스웨인 2세(SweynⅡ Estrithsson)도 그런 소리들은 적 있다고 하고. 도대체 이놈의 왕이 누구에게 왕위를 주려 하는지 아무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타이틀 보유자, 해롤드 고드윈슨 


 
백성들로부터 왕관을 권유받고 있는 헤롤드
 
먼저 해롤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 고드윈슨은 성이 아니라, 고드윈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칭이다. 이하 해롤드)의 아버지, 고드윈(Godwin)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자. 이 사람은 카눗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을 때 그의 편에 붙는다. 그리고 카눗의 친족과 결혼해서 더욱 입지를 굳히고, 얼마나 수완이 좋은지, 결국엔 왕국의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의회에서는 여우, 전쟁터에서는 사자. 항상 침착하고, 열심히 일하며, 달변에, 정중하고, 모두에게 예의 바르며, 아랫사람에게 특히 상냥했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을 때, 고드윈의 세력이 어찌나 크던지, 에드워드는 그의 딸을 데려다 왕비자리에 앉히고, 고드윈과의 관계를 좋게 풀어 나가려고 했다. 사실 고드윈의 딸 에디스(Edith)와 에드워드는 20살 정도나 차이가 났고 둘의 관계는 부부보다는 차라리 부녀에 가까웠다고 한다.

자, 이런 왕국의 제1 귀족과 국왕의 정치적 대결이 펼쳐지는데, 1050년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 임명사건, 1051년 도버(Dover)사건이 그 도화선이었다. 에드워드는 도버를 소유하고 있던 고드윈에게 사건에 관계된 도버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고드윈은 도버 사람들의 편을 들며 에드워드의 명령을 거부했다. 

"어쭈, 이게 내 말을 씹어? 너 이제 죽어봐라. 내가 이 날을 기다려온게 몇 년 째냐."

에드워드는 회의를 열고, 여기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로베아(Robert of Jumieges)는 고드윈에게 위의 사건에다 국왕 살해 음모 죄를 얹어버렸다.

고드윈은 군대를 모으지만 상대가 쉽지 않음을 느끼며 주저했다. 그 순간에도 왕국의 귀족들은 국왕 아래 차곡차곡 모이며 충성을 확인 시켜주고 있었다. 특히, 고드윈 일가에 대항해 그런대로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레오프릭과 씨와드(Leofric the earl of Mercia, Siward the earl of Northumbria)가 군대를 몰고 내려와 국왕 옆에 섰다. 로베어 대주교는 국왕을 부추겼다.

"예전에 전하의 동생을 공격했던 사람입니다. 전하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기냥 화끈하게 조져버리지요."

"좋다, 하나 더 얹어!! 왕족인 내 동생 살해 죄다."

예전에 자신이 관여했던 에드워드의 동생, 알프레드의 죽음에 관한 일까지 입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고드윈은 자신의 패배를 직감,

"아차, 저 소심한 놈이 10년 넘은 일까지 떠벌리는 걸 보니 이거 글렀구나."

먹고 있던 밥상을 엎어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왕국에서는 고드윈 일가를 역적으로 규정했고, 왕비도 수녀원에 유배되었다. 그들의 영지는 에드워드의 편에 선 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복귀를 막기 위해 함대를 증가시켜 조카 랄프에게 맞기고, 윌리엄에게 왕위를 제안하며 그의 힘을 요청했다. 이제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든든한 협력자가 될 것 같아 보였던 윌리엄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도움이 되지 않았고, 랄프와 그 외 지휘관들은 경험과 재능 부족으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아 돌아온 고드윈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압박했고, 두 군대는 템즈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그래도 내전은 피하려는 에드워드의 노력에 의해 벌어진 협상에서, 윈체스터 주교 스티간드(Stigand)의 뱀같은 혀는 위력을 발휘했다.


 
고드윈 일가는 3~6번에 이르는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다. (1번 노스움브리아, 2번 머시아, 3번 웨섹스, 4번 이스트 앵글리아)
 
고드윈 일가는 완벽하게 예전의 위치로 복귀했다. 모든 영지를 되찾았으며, 더욱이 로베아 대주교를 포함한 많은 외국인들을 왕을 홀린 죄를 물어 쫓아냈다. 대주교 자리는 고드윈 영지 사람, 스티간드가 차지했다. 왕비도 다시 궁정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부활절, 국왕과 저녁을 같이하던 고드윈은 갑작스런 고통으로 쓰러져 왕의 침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며칠 후 사망했다. 그의 모든 것은 둘째아들, 해롤드가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가졌던 권력을 더욱 활발하게 휘둘렀다. 참을성 많고, 자비로우며, 약자에게 친절한 것은 아버지와 같았다.'

 

 

 

 

 

 

 

 

성지순례를 갔다 죽은 큰형을 대신해서 아버지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해왔던 해롤드는 1055년과 1062년 겨울, 두 번에 걸친 웨일즈 군주 그루피드(Gruffydd, 웨일즈 어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음.)와의 전쟁으로 그 자신만의 명성을 얻는데 성공했다. 특히 웨일즈 원정에서는 과감한 진군과 동생, 토스티그(Tostig)와의 협력으로 그루피드의 궁전을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그루피드는 도망쳤다가 불만을 품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귀족으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아버지 고드윈이 섰던 자리에 다다랐다고 생각되던 해롤드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커다란 사건이 1064년에 발생했다. 노르망디 공식 방문. 로우엥(Rouen)에 위치한 궁정에서 윌리엄을 만난 해롤드는 1051년에 에드워드에 의해 노르망디에 인질로 보내졌던 그의 동생과 조카의 석방을 요구했다.

"귀공은 그 두 분이 어떠한 절차로 이곳에 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까?"

"알다 뿐입니까, 그때 공작께서 너무 바빠서, 약속하신 역할을 못하신 관계로 저희 집안이 덕 좀 봤지요."

"험험, 백작은 잉글랜드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거야 국왕의 뜻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저같은 신하가 무얼.."

"지금 백부(에드워드)껜 가까운 친족이라곤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누구가 왕위를 물려받든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죠. 백작께선 자신의 역할을 잘 명심하고 계시겠지요?"

"그거야...." 


 
노르반 병사 구출
 

해롤드는 윌리엄에 뜻에 따라 브리따뉴(Brittany)원정에 참가했다. 윌리엄의 조심스러운 병력 운용과 노르만 기병의 위력을 가까이서 살펴 볼 좋은 기회였고, 그 자신도 뀌스농 강(River Couesnon)을 건너다가 위험에 처한 노르만 병사들을 구해주는 등 여러 가지로 활약했다.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들어주지 않으면 왕국으로 돌아갈 꿈도 꾸지 말라는 윌리엄의 협박에, 윌리엄의 왕위 계승을 위해 목숨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왕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겨우 동생만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 해롤드의 머리는 빠르게 하지만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역할, 왕가의 피를 이어받지 않고, 왕국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새로운 왕에 대한 나, 왕국 제1 귀족의 역할. 토스티그와 다른 동생들을 포함한 우리 집안의 협조가 없으면 누구도 왕위를 유지할 수 없다. 잠깐, 내 힘이 없으면 아무도 왕위를 지킬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이듬해, 토스티그의 영지 노스움브리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055년에 백작 씨와드가 사망하고 새로 영주가 된 토스티그가 남부에서 행해지던 높은 세금과 깐깐한 법률을 북부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 결국 반발을 샀던 것이다. 토스티그가 런던을 방문 중이던 10월, 지방 소영주들이 이끄는 폭동세력은 요크(York)를 공격해서 토스티그의 가신 두 명과 부하 200여명을 죽여 버리고, 머시아 백작 에드윈(Edwin)의 동생 모르카(Morcar)를 초청, 백작으로 추대했다. 에드윈이 합세한 북부의 군대는 런던으로 진군하여, 영주교체를 승인해 달라고 국왕에게 압력을 가했다. 또 다시 쓸모없는 백성들의 피해를 피하려는 에드워드의 뜻으로, 이 사건은 그냥 종결되고, 토스티그는 왕국을 떠나 처가, 플랑데아로 갔다.

해롤드는 이 사건에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위계승을 인식하기 시작한 해롤드에게 토스티그는 경쟁자일 뿐이었다. 자신에 필적하는 군사적 명성을 지니고 있고, 플랑데어 백작의 동생과 결혼해서 플랑데아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고, 광활한 북부 영지를 소유하고, 더구나 더 북쪽의 스코틀랜드 왕과 친분도 있다. 마지막으로 누이 에디스에게 총애를 받는다. 이 말은 곧 왕비에게 귀가 얇은 에드워드에게 더욱 선호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정치적 경쟁자인 토스티그를 북부 영주민의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제거한 것인데, 해롤드가 이 사건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설이 돌기까지도 했다. 결국 토스티그는 형을 마음 속 깊이 원망하게 되었다.

예순이 거의 다 되었지만 여전히 정정하던 에드워드는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갑자기 앓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부터는 정신이 오락 가락하는데, 침대 맏으로 다가온 해롤드에게 왕비와 대륙출신 측근들을 잘 보호해주고, 왕국을 잘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제가 왕이라고 선언해 주십시오."

"그대는 잉글랜드의 왕이니라, 하지만 이제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대의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네."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는 사망했다. 그 다음날, 잉글랜드 사람들 대부분이 수긍하는 가운데 해롤드 고드윈슨은 잉글랜드 왕 해롤드 2세로 왕관을 받았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에드워드의 사망과 해롤드의 대관


 1차 도전자, 노르웨이 왕, 하랄드 하드라다

어렸을 때, 국왕이 그의 형들의 볼을 잡아당기자 그들은 무서워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랄드 하드라다(Harald Hardrada, 이하 하드라다)는 빤히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국왕이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자 그는 왕의 수염을 잡아당겨 그 손을 놓게 만들었다. 왕이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형들은 양식과 재산이라 답했으나 하드라다는 용맹한 전사라고 말했다.

1030년 노르웨이(노르웨이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맨 위의 지도에서 확인해 봅시다.) 벌어진 내전에서, 국왕인 형 울라프(Olaf)와 함께 싸우던 하드라다는 전사한 형을 뒤로 한 채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노르웨이를 탈출, 스웨덴, 러시아를 거쳐 동로마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으로 들어갔다. 동로마 황제 미카엘 4세(Michael Ⅳ)에게 고용된 그는 그리스 해적퇴치, 시실리 원정, 불가리아 반란진압, 성지 원정등에 참가했다. 미카엘 5세 때에 이르러서는 바랑인 부대(Varangian 발트해 연안에서 활동한 바이킹)의 수장이 되었다. 이쯤부터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여러 번 청원하는데, 계속 거부당하다가 결국 감금당했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 나자, 그는 그냥 아무 말없이 떠나 버렸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형의 아들인 마그누스(Magnus the Good)가 노르웨이를 통치하고 있었다. 하드라다는 그의 능력과 재력을 나눠주는 조건으로 노르웨이를 공동통치하게 되고, 마그누스의 덴마크 침공을 도와줬다. 마그누스는 덴마크를 정복하자마자 죽어 버렸다. 하드라다가 노르웨이의 왕위를 받고, 덴마크는 마그누스가 정복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하드라다는 키가 아주 크고 힘도 장사였는데, 아주 위압적으로 사람을 대했다. 너무 무서워서 감히 그와 말다툼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 대적하는 사람들은 아주 무자비하게 다루어졌다. 세금을 거부하거나 그를 적대하는 세력의 대표는 바로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발겨져 버리고, 그 땅은 불태워졌다. 그의 이런 성격 때문에 그의 일족과 지지자들이 그를 멀리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하드라다는 잉글랜드 왕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카눗과 그의 아들들이 잉글랜드 왕위를 지녔기 때문에 바이킹은 어떻게든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잉글랜드 동부 해안에는 바이킹의 정착지도 상당히 많아서 지원 받기 쉬웠다. 때마침 해롤드의 동생 토스티그가 하드라다의 궁정으로 찾아와 그의 마음을 굳히게 했다.

1066년 9월, 베르겐(Bergen)에 군대를 모은 하드라다는 큰아들에게 노르웨이를 맡기고 배를 띄웠다.
 

 2차 도전자, 노르망디 공작, 사생아 윌리엄


 
윌리엄
 

제 6대 노르망디(노르망디가 어디에 붙어 있는가도 맨 위의 지도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봅시다.) 공작 로베아(Robert)는 귀족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이 윌리엄이 내 후계자다.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 애가 공국을 물려받을 것이니, 모두 차기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하라."

며칠 후 그는 성지순례를 떠났고, 돌아오던 중 불귀의 객이 되었다.

로베아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노르망디는 즉각 혼란에 빠져들었다. 영주들은 저마다 성을 쌓고, 서로들 싸우기 시작했고, 질서는 땅에 떨아졌다. 8살밖에 안된, 더구나 정식 결혼에서 난 것도 아닌 사생아에, 그 어미는 가죽 만지는 사람의 딸이었으니, 새 공작에게는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긴 있었다. 윌리엄을 제거하려는 자들 말이다.

"공작, 공작 일어나시오!!"

누군가가 곤히 자고 있던 윌리엄을 흔들어 깨웠다. 윌리엄을 보호한답시고 맨 날 그와 같이 자는 외삼촌 왈테아(Walter)였다.

"아흥..삼촌, 무슨 일이에요?"

"공작, 시간이 없소. 빨리 이리로."

그는 윌리엄의 팔을 급히 잡아 끌었다. 그제서야 잠이 깬 윌리엄은 알아채고, 잠옷바람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왈테아는 그를 한 허름한 집으로 인도했다.

"자, 이리로."

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윌리엄은 겁에 질려 울먹이기 시작했다. 왈테아가 윌리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눈을 쳐다 보았다.

"공작, 겁먹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공작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공작의 몸에는 조그만 상처 하나라도 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날 밤, 수석가신 오스베른(Osbern)은 윌리엄의 침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윌리엄의 스승을 비롯한 여러 측근들이 이와 비슷한 사건에 운명을 달리했다.

사생아란 것은 엄청난 약점이었다. 더구나 정치적 후견인들도 모두 일찍 죽어 버렸다. 윌리엄은 공국은 물론 가신들조차 통제할 수 없었다. 특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던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들의 횡포는 더했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측근들에 의해 착실히 교육받고, 보호되던 윌리엄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공작의 자리에 오른지 12년만이었다.

1047년, 윌리엄의 고모의 아들인 브리온느 백작 귀이(Guy the count of Brionne)는 영주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발레듄(Val-es-Dunes)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 왕 앙리 1세(Henry Ⅰ the king of France, 이하 앙리)가 이끌고 온 군대에 힘입어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앙리는 예전에 로베아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고, 지금 무서운 속도로 크고 있는 앙주(Anjou)를 견제하기 위해서 노르망디의 힘이 필요했다. 아무튼 이 전투 이후 윌리엄의 상황은 점점 긍정적으로 변해갔다. 이제 공국의 질서도 서서히 돌아오고, 윌리엄도 공작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앙리를 따라 앙주 백작 조프리(Geoffrey Martel the count of Anjou, 이하 조프리)와의 싸움에 몇 차례 참가하고, 프랑스-플랑데아-노르망디 연합의 한 부분으로 플랑데아 백작의 딸과 결혼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직접 전투를 이끌게 되었다. 노르망디 남부, 조프리의 세력하에 있던 돔프롱(Domfront)을 포위하고 있던 윌리엄은 5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알렝쏭(Alencon)을 급습했다. 공격도중 수비군으로부터 자신의 출생과 외가에 관한 욕설을 듣고 분노한 윌리엄은 알렝쏭 점령 후, 그 일과 관련된 32명의 손과 발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에드워드의 사신이 온 때가 이쯤 이었다. 공국은 안정되어 가고, 주변국과 유대도 강한 지금, 그다지 손해 볼 것 없는 윌리엄은 인질을 받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1052년 초, 윌리엄은 이상한 정보를 입수했다.

"앙리가 조프리와 손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윌리엄은 가장 신뢰하는 부하인 로제아 드 몽고메아(Roger de Montgommery)의 의견을 구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최근에 공작께서 보이신, 저 프랑스 왕도 두려워 마지 않는 조프리에 대항해서 달성한 군사적 업적을 보고 공작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죠. 용의주도한 계획 아래 군사를 움직이는 조심성, 언제나 최전선에서 병사를 이끄는 용맹함, 적절한 시기에 잠깐씩 보여주는 잔인함으로 공작께 대항하려는 마음을 꺾어버리는 현명함, 백성과 병사들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시는 자비로움. 이 정도면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아니겠습니까?"

"로제아...자네에게 이렇게 놀라운 아첨꾼의 재능이 있는지 미처 몰랐네...."

"험험, 좌우지당간에, 저번에 잉글랜드 왕께서 제의한 왕위계승이 실현된다면, 넓은 왕국과 공국을 동시에 가진 부유하고 유능한 군사 지도자... 우리에겐 멋진 얘기지만.., 프랑스 왕이나 앙주 백작에겐, 벌어져선 안되는 일이지요. 흠, 그 둘의 주요 분쟁지역인 앙주 남서부 지역에 대한 욕심을 둘 중 한명이 버린다면..."

"그렇게 생각하나? 좋아, 내 한번 왕을 만나 봐야겠군.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니니."

그 해 9월에 빠리를 방문하고 돌아온 윌리엄의 표정은 어두웠다.

노르망디 동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고, 두 번에 걸쳐 침입해 왔던 윌리엄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앙리와 조프리가 1060년에 죽었다. 프랑스는 8살난 필립 1세(Philip Ⅰ)가 물려받고, 앙주는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거대한 적들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노르망디에 걱정거리는 없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 남쪽의 맨(Maine)을 접수하고, 브리따뉴 원정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브리따뉴 원정 중에 벌어지는 성 공격, 병사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있다.

이제, 윌리엄의 눈은 해협건너로 향했다. 그의 옆에는 그의 힘들었던 시절이 단련시켜 준, 듬직한 측근들이 함께 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