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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친일청산을 못한 것이...
토착왜구 청산이라는 꼬리까지 제거해야 하는 상황...
쿠데타 세력의 뿌리를 뽑지 못해 망해버린 스페인!
https://www.youtube.com/watch?v=MWFLxl-6zqQ
스페인의 역사적인 내란 사건을 통해 쿠데타의 옳고 그름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영상입니다. 프랑코의 군부 독재와 민주화 과정은 현대 정치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스페인 언론의 반응과 비교함으로써 현재 한국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독재가 국가를 망가뜨리기도 하고, 그 뿌리를 뽑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보여줍니다. 특히, 영상을 통해 우리는 역사에서 어떻게 교훈을 얻고 미래에 대비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핵심 용어
- 스페인 역사: 스페인은 긴 역사를 가진 나라로, 내란과 쿠데타 같은 많은 정치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스페인의 정치,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 🌳 스페인 23F 사건과 비슷한 현대 사례
- 스페인 23F 사건은 1981년 2월 23일 발생한 내란 시도로 스페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 당시 스페인 기자는 23F 사건을 한국의 12·3 내란 사건과 비교하며 두 사건이 쌍둥이처럼 매우 비슷하다고 언급하고, 한국 상황이 더 나쁘다고 평가했다.
- 포르투갈을 포함한 유럽 언론들도 한국의 12·3 내란 기도를 스페인 23F 사건과 동일시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 이러한 비교를 토대로 세계사적 사건들과 현대 사례 간의 유사성을 다시금 되새겨보게 된다.
2. 📉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의 독재
- 스페인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패하고 모든 식민지를 잃은 후, 실직 군인들이 반발하게 된다.
- 이들은 나라의 문제를 부패한 정치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프랑코 장군 중심의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다.
- 프랑코는 내전 이후 40년 동안 철권 독재 통치를 하여 스페인을 심각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 그는 매일 아침 사형 대상자의 명단을 정리하며 대중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 또한, 그는 카를로스 왕자를 바지 사장으로 앉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3. 🏰 스페인 민주화를 향한 전환점
- 프랑코는 1975년에 죽었고, 그의 죽음 이후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으며, 카를로스가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 카를로스는 권력을 포기하고 총리를 선출하여 상징적인 존재로 남겠다고 선언하였다.
- 수아레스 총리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공무원으로, 민주화를 시도하기 위해 카를로스 국왕의 지지를 받았다.
- 수아레스와 메도 부총리는 민주화의 핵심 인물로, 공산당과 사회당의 합법화를 추진하여 정당 활동 보장을 선언하였다.
- 그러나 과거 프랑코 정권의 군부 극우 세력은 다시 군사 독재를 시행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4. 🚨 스페인 쿠데타의 전개와 실패 과정
- 1977년, 테헤로 헌병 중령은 쿠데타를 추진하고 의회를 해산하려고 했으나, 모의 단계에서 실패 후 11개월 징역 형을 받고 복귀한다.
- 중령은 다시 쿠데타를 준비하며, 국왕 까를로스를 공격하는 발언을 한다.
- 1982년 2월 23일, 국회에서 부총리 임명 동의가 처리되는 날, 중령은 200명의 헌병과 함께 국회의사당에 침입하여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총기를 사용한다.
- 국왕은 쿠데타에 대한 동의가 없다고 선언하며, 방송국 점령에 대응하기 위해 국군을 소집하고 명령을 내린다.
- 결국 중령은 조건을 내세우며 국회 봉쇄를 풀고 항복하지만, 이에 대한 처벌이 미비해 국민들 사이에서 문제로 제기된다.
4.1. ️ 스페인의 쿠데타 시도와 그 결과
- 1977년, 테헤로 헌병 중령이 쿠데타를 계획하여 의회를 해산하려 했으나 모의 단계에서 발각되어 11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 실질적으로 쿠데타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역을 마치고 복귀한 후에도 추가로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 국왕 까를로스가 공산당을 지지하면 그 또한 빨갱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이로 인해 내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위험을 높였다.
- 보슈 중장과 헌병대의 다른 세력도 쿠데타에 관여하며 정보 공유를 거부하였다.
-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조되었다.
4.2. 스페인 의회 사태와 총격 사건
- 1982년 2월 23일, 스페인 의회에서 부총리 임명 동의를 처리하던 중 대규모 테러 발생했다.
- 테러 헌병대의 유권 중령이 200명의 헌병을 이끌고 생방송 중인 국회 본회의장에 침입했다.
- 국민들은 총격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보았으며, 두 명의 고위 군 관계자는 총을 맞으며도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다.
- 부총리는 자신을 공격하는 헌병 중령에게 과거 군 선배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상대방은 총격을 감행하였다.
- 이 사건은 스페인 군부 내에서의 갈등을 드러내며, 군 관계자들이 반역자로 여긴 부총리에 대한 강한 반발을 나타냈다.
4.3. 스페인 쿠데타와 국왕의 저항
- 까를로스 국왕은 쿠데타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즉각 방송국에 대국민 생방송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으나, 방송국은 이미 쿠데타 세력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 쿠데타 세력을 향해 왕궁으로 의원들을 보내지 않으면 내란죄로 처벌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쿠데타 세력은 이를 무시하였다.
- 국왕은 불법 쿠데타임을 강조하고 방송에서 국민에게 절대 따르지 말 것을 촉구하며, 자신이 국민과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 방송 송출이 지연되는 가운데, 국회의원들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협상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쿠데타 세력이 국회를 풀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 최종적으로, 국왕은 일반 병사들에 대한 처벌을 면제하겠다는 제안을 수용하며,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추정된다.
4.4. 🪖 스페인 내란과 처벌의 문제점
- 쿠데타는 시작한 지 7시간 만에 실패해, 항복하고 무기를 모두 버리게 된다.
- 내란 상황에서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지만, 실제 처벌이 약하다고 지적된다.
- 국회를 점령한 중령이 30년 형을 받은 것은 부족한 처벌로 여겨지며, 보수 측은 징역 20년에 그쳤다.
- 이후 카를로스 왕과 예비역 유군 중장이 수권 작업을 철저히 진행하지만 ,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5. ⚔️ 스페인 내란과 한국의 상황 비교
- 스페인에서는 2월 23일 내란이 왕 중심으로 쉽게 종료되었으나, 대한민국은 국군 통수권자인 신군부의 개입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민의 영향력으로 내란을 막아냈고, 이에 대한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스페인 내란 이후에도 세 번 더 대사 시도가 있었으며, 특히 1985년에는 보수파가 연단에 있어 대규모 척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 스페인의 내란 여파가 20년간 지속된 반면, 현재 한국에서도 방심하지 말고 감시해야 한다는 당부가 있다.
- 마지막으로, 내란의 끝을 기다리며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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