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사태때...시위를 주도하다가 공안들에게 쫓겨서...신장위구르 지역에 2년간 도피해있다가 온 조선족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안난다. 여러사람들과 술집에 같이 갔었다는 기억만..난다. )
그는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서 전자제품 방문수리업 같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때 한참 내 직업이 여의도에서 경영컨설턴트를 했었던터라...
운영에 대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
엑셀만 도입해서 업무관리, 매출관리를 해도 분석가능한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데...
그 회사는 종이에 적어놓기만 하는 수준이었다.
아뭏든...천안문사태는 한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움직임이다.
솔직히 다르다고 봐도 된다.
인간(?)들은 통상 프레임을 짜놓고 그 안에서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전파한다.
그러니...그냥 다른 역사적 사건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뭏든...중국은 이런 공산당 통제때문에...인류보편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기에...
패권국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아 그리고 꿀팁 하나.
요즘은 좀 잠잠해졌는데...
한참동안은...중국의 얼라들이,,,사실에 근거한 역사를 배우지 못한 얼라들이...중국국뽕에 완전 마약수준으로 취한 얼라들이,,,
온라인상에서 중국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욕하고, 비판하고, 죽이네 살리네 하는 댓글을 다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도 있을 듯 하다.
그 친구들을 잠재우는 방법이...바로 이 "천안문 학살사건"이다.
그 얘기를 댓글의 답글로 남기면....그 무식하고 무지한 얼라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활용하시라~!
'20만이 죽는다해도 20년의 안정을' 중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화 운동 천안문 사태
https://www.youtube.com/watch?v=zHKuhyfZwW4
'20만이 죽는다해도 20년의 안정을' 중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화 운동 천안문 사태
1.중국의 역사적 검열: 천안문 사태와 '5월 35일'
- 1989년 중국 베이징에서 대규모 민주와 항쟁이 일어난 천안문 사태는 ‘황금 방패’ 프로젝트로 중국 정부가 검열하여 민간에서 알지 못하는 사건이 되었다.
- 사건 날짜 같은 검열을 통해 중국 국내에서 천안문 사태에 대한 정보 검색이 불가능한 상황인데, 중국 젊은 세대 대다수는 이 사건을 모르거나 피하기도 한다.
- 소설가 위화조차 ‘5월 35일’ 정신이라는 글을 영어 신문에 투고하기도 했으나, 이는 또한 검열을 받아 중국 내에서 알 수 없는 내용이 된 것이다.
- 중국 정부의 역사 지우기 정책 덕분에 중국인들은 천안문 사태에 관해 추모나 토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으며,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2.중국의 현대 역사와 덩샤오핑 국가 성장 정책
- 1989년 천안문 사태 시 중국의 변화 사건에 대한 과거 사건들을 살펴봄.
- 마우서 등과 사인방 전원의 사망 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
- 중국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균형 유지, 1989년 천안문 사태로 빈부격차 확대.
- 덩샤오핑의 정책은 초기 비판을 받았으나, 중국의 경제 성장과 빈부 격차 심화되는 문제 발생.
3.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와 1989년 막극리 민주화 시위
- 중국학자 박려진 교수가 민주주의를 촉구하여 민주화 시위를 촉발.
- 대학생들은 후야우방 사망 후 중국 공산당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에서 시위.
- 학생시위는 점차 민주화 요구로 발전, 4월 15일부터 학생들이 광장에서 집결.
- 시위 요구사항은 후야우방의 민주주의 중요성 인정과 부패척결 등 다양한 내용 포함.
4.중국에서 대규모 민주 시위의 경과와 내부 갈등
- 국가 지도자와 가족 소득 공개, 민간 언론 자유 보장, 교육 예산 증가 등의 요구를 전달.
- 대규모 시위로 퍼지며 베이징 총서와의 대면, 학생들의 요구 무시되며 폭력 사태 시작.
- 공산당 내부 갈등과 당서 자우 지향의 학생 요구 수용 의견 차이, 문화 대혁명 공포에 중국 위기감 증폭.
5.천안문 사태: 보수파 대립 속에서 강경파와 시위 대처
- 보수파 중국 간부들은 *학생 운동을 반혁명*으로 이해하는 사설을 발표하며 대립 강화.
- 시민들의 분노가 더 커져 10만 명 이상이 천안문 광장으로 몰려들었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분노를 표출함.
- 강경파는 *진압에 물러서지 않으며 경찰 동원*을 지지하나, 유열 진압까지 고려하지 않았음.
- 학생 세 명이 주도한 천안문 광장 단식 농성으로 *소련의 중국 체제 방문*에 부제 발생.
6.️천안문 사건: 시위대와 군대 간의 충돌과 희생자
- 천안문 페이퍼에는 소련 지도자 방문 후 공산당 무너짐에 대한 걱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 덩샤오핑의 명령에 따라 25만 명의 인민 해방군 병력이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 6월 4일 새벽, 진압군은 계획대로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고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 군인들은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총사살하고 탱크로 짓밟았다.
- 시민들은 화염병과 벽돌을 사용하여 저항했지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7.️천안문사태, 학생운동 후속
- 천안문 광장 시위대는 해산과 사살을 당하며 6월 5일의 탱크맨 사건을 겪게 되었다.
- 탱크를 막는 의문의 남성은 남성으로 선정되어 천안문 사태의 상징이 되었고, 현재는 미국과 대만에서 활동 중.
- 천안문 시위대는 공산당의 제안으로 해산되었으며, 주요 인물은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학교에 입학해 현재 무탈하게 살고 있지만 중국 문제에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다.
- 中 共산당은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어 반항을 방지하고, 천안문 사태는 민주화 운동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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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의 역사적 검열은 어디까지 이어지나?
덩샤오핑의 중국 성장 정책의 영향은?
박려진 교수에 의한 중국 민주화 시위
중국 대규모 시위의 경과는?
천안문 사태: 강경파와 시위 대처의 연이은 결과
천안문 사건의 피해 후 온도 현황은?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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