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래준비/1.인생

양반정신. 현대의 대한민국엔 사라지고, 돈의 양으로 양반을 정하는 사회가 된 암울함.

by 리치캣 2024. 2. 18.
반응형

양반정신. 

현대의 대한민국엔 사라지고, 돈의 양으로 양반을 정하는 사회가 된 암울함.

어떤 부자도 검증되지 않았고,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423) 조용헌 칼럼니스트가 강조하는 과거 사례를 통한 베푸는 의미 [TV멘토링] - YouTube

조용헌 칼럼니스트가 강조하는 과거 사례를 통한 베푸는 의미 [TV멘토링]

안녕하세요, 조용원입니다. 오늘은 그 우리나라의 양반 집안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음악] '삶의 질은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는 삶의 방식에서 결정된다'고 말하는 동양 학자 조용핫. [음악] 그가 찾아낸 양반가의 도덕적 책임과 솔선수범을 통해 배우는 삶의 가치.
[음악] 주인 방의 전화는 한국 양반 집안의 선배 정심.
[음악] [박수] 한국에는 이제 이 양반이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일본의 이런 그 직층들이 나 이런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에 가면 귀족이 없는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아, 이 나라가 좀 9급 문화가 다 사라졌지 않느냐' 이런 비판인데 이제 이렇게 된 이유가 우리나라가 6.25 때 전쟁이 나면서 다 양반 상놈이 이제 다 없어졌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는 생긴 지 6.25 로부터 계산하면 60 몇 년 된 거죠. 신생 국가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상류층, 사회지도층이 가지고 있는 어떤 그런 도덕성이 '나 이 책임' 그런 걸 갖출 시간과 그런 여력이 없었고 그냥 다 각자 도생 한 거죠. 각자 자기 알아서 양이 낮은 보복, 높은 포복으로 온 게 아닌가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압축 성장을 했단 말이죠. 그래서 건물을 높이 올려갔는데 이제 그 건물을 유지관리하는 그 콘텐츠가 없습니다. 에, 이게 이제 압축 성장의 불행이죠. 하드웨어는 됐는데 에 소프트웨어가 갖춰지지 않음으로써 에 거기에서 오는 그 불일치가 사회 전반의 각종, 그 부조리라든가, 그 뽀부패, 뭐 그 다음에 이런 안전사고 이런 걸로 다 연결되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정말 이런 고급 문화 사회를 지도해 갔던 지도층에 그런 그 양반 정신과 선비 정신은 어떻게 된 걸까? 지금 우리가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했던 거니까, 외국 사례를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한테 설득력이 있죠. 처음에 나오는 집이 바로 이 게 예로, 논산에 있는 그 명재 윤증 선생 집안인데요. 2 아주 장독이 아름답죠. 그래서요 집에 보면 담벽 또 없습니다..
그래서 뭐 주변에서 보려면 놓아서 다 볼라 '우리 집은 숨길 게 없다' 뭐 이런 상징이 있어요.  그리고 이 집은 에 야당인 소론당 수집 아니기 때문에 그 소론을 했어요. 소론은 조선시대의 그래서 그 반대당 파인 노로 내서 집 좌우에 감시어는 집을 탁 지어놓고 이 집에 누가 출입 오는지 감시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집은 2 논산에 이제 윤 시집 인양 반인데 양반이라는 건 돈도 있다는 거예요. 병반이라는 건 돈도 있는데 이 집에서 그 일련의 손님 접대하는 데 먹는 데 쓰는 쌀이 1 300 아마 자 들어갔다고 해요.

그러면 뭐 하루에 거의 1 뭐 0.8 감아 1 가 맛 좀 못 들어가는 밥을 해, 됐으니까 얼마나 손님들이 많이 왔겠어요? 그래서 이 집에는 독쌍도 하니 10개가 있습니다. 독사 혼자 먹는 상. 옛날에는 양반 손님이 오면 겸상을 하지 않고 1인용 상을 차렸습니다. 주죠, 그렇게 되면 숟가락에 서로 된장국에 찌게를 서로 숟가락 집어넣고 이렇게 먹는 거 아니에요. 양말, 자기 혼자 먹죠. 이게 우리나라가 6.25 이후에 생긴 습관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분 깜짝 놀래 줘요. 이렇게 막 찌게에 서로 자기 숟가락 섞어서 먹는 거요. 집은 그런 독쌍이 많았어요. 혼자 먹는 그걸 로써 이 자의 집 안의 북경꽈 그런 등급을 얘기하는 거죠. 예, 격이 높은 양반 집안일수록 독성이 많았어요. 독사의 많았는데 심지어는 적강릉의 선교장 같은 집안은 독사 한 700개 가 있었죠. 그럼 700명을 동시에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런 상위 있었죠. 그럼 하인이 얼 뭐 몇 명 있었겠어요? 700명을 동시에 대접하려면 하인이 최소한 100명 이상은 있어야 되겠죠. 어리니까 이게 대차원이 줘야 됩니다.

집에 선비 정신은 이제 뽕나무를 우리는 키우지 마라, 누에고치를 하지 마라 이거예요. 당시에 이게 이제 돈 된다 그러니까 막 이소민 들이 할 건데 이 집의 이제 윤씨 듯이 양반이 까마 우리도 누에고치를 해가지고 b 다니고 있는 거 하면 고소득 이다 해서 그걸 많이 했어요. 그러면 부자가 이런 거 하면 서민은 먹고 살 게 없죠..
그래가지고 이 집의 이제 그 어른이 계시는데, 그 윤증 선생 이 명제 호감형 제인데 밝은 지 비단은 뜻이에요.  우리집은 부자 양반이니까 절대 누에고치를 하지 마라. 그 서민들의 먹고 살 거다. 그러면 이거 하면은 엄벌을 내리겠다 이랬어요. 모르니까 그런 카리스마가 있죠. 그래서 우리나라 뭐, 작년인가 재작년인가도 재벌가에서 막 뭐 빵집이 되고 떡볶이도 되고 막 모두 해고다 그랬죠. 예, 그런 건 사실은 그 서민들 하는 건데 그게 인제 그 재벌이 하는 게 아니죠. 그런 게 범죄자돼. 그런 게 지금은 도망 놈은 상류층 됐어요. 엄마는 집에 챔피언이 재벌이 줘. 그러니까 지금은 재벌이 상류층 인데, 상류층으로서 갖춰야 될 그런, 그런 뭐라 그럴까 매너라 그럴까 품격은 없는 거지 음? 나 돈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 내 밑에 엎드려. 그리고 너희들 다 내 하인들이야. 내 종업원들이야. 이런 거 많이 있죠. 그러니까 이제 이런 게 잘못하면 큰일 날 텐데. 그건 철딱서니 가 없는 짓이지. 사회의 변동 기가 되면 그 사람 다 죽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다 그랬어요.

난리 나면 평소에 쌓인 개인 감정 처리하는 기관입니다. 그때 다 거들 내 버려요. 예, 거덜낸다는 건 뭐냐, 목숨 죽고 돈 다 뺏기고. 우리나라 역대 그랬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위세 떨고 나도 니스 했다가 안 죽은 집이 없어요. 다 목숨으로서 보상했어요. 아직 지금 그걸 모르고 함부로 떡볶이, 빵집으로는 거야 넘어갑시다. 또 예, 4기는 제 어해남의 윤선도 집안인데 압력이 집이 아주 코조인데 뭐, 그냥 불국사가 들어 안 줘도 될 만한 집이죠. 그래서 저희집은 그 지금 호남에서 오백 년 동안 계속 부잣집이에요. 왠지 분, 6.25 뭐 이런 거 아무 영향 안 받았어요. 6.25 때도 이 집은 두 손 들은 우파도 해고해요. 좌파도 했어요. 그래서 경찰서장 도윤치들이 했고, 인민군 무슨 도당 위원장 도윤치들이 했고. 그래서 엎어져 도용가요 뒤집어저도 이래 가지고 의 지분 오이 물도 하니까 저 종갓집 해도 나오겠습니까? 다 자기 집안 후손들이 인데 근데 이 집이 이렇게 부자가 된 건 윤선도 때 간척사업을 했어요..
우리나라 간척사업의 원조 집안이 집안이 뻘을 막을 가지고 앤 그래서 그런 윤선도 때 그간 척은 땀은 다이 집안으로 귀속시켜 가지고 토지개혁 때도 그건 토지개혁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요.  우리나라 해방 이후의 토지개혁을 해서 이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 나눠 없거든요. 이렇게 그때 우리나라가 굉장히 평등하게 됐어요. 그 토지개혁을 돼 가지고 우리나라가 평등이 됐기 때문에 그 뒤로 산업화돼 가지고 이렇게 성장을 할 수 있었어요. 왜 나도 하면 할 수 있다 이게 됐기 때문에. 인도 같은데 카스트가 심한 나라는 해도 안되고 도 누구를 땅을 나눠 없기 때문에 어느 좀 어느 정도 남아 이 기반이 됐는데 이 집안은 그 그 간척사업 은 땅은 그분 배 대상에서 제외 됐어요.
원체 고생을 했기 때문에 뻘뻘 그거 하면서 그래서 이 집은 3개 옥문 적선지 가라 3번 감옥 문을 열어준 적 써는 집이다. 옛날에는 세금을 주변 사람들이 못내면 감옥에 같거든. 그래서 이 주변 사람들이 그 과목을 갔을 때 이 집에서 세금을 대신 납부해 줬다. 이 거야 주변 사람들. 그래서 옛날 양반 소리 들으려면 뭐 대신 뭐 톤도 내주고 뭐 이래야 양반 되는 거지. 내가 변수를 없다 다 양반이 달에 이들로 그려 이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양반 집 안은 평판이 좋아야 되요.

참 사람이 점자 안 오고 후 워 다 점잖 오후 워 다. 그리고 그래서 사람 제 많이 오는 그런 손님들을 접대하고 그렇죠.
이 집은 하여간 호남에서 지금 5백년간 부잣집 인데 그 호남 기호나 미네 본 거 회장이라 그래서 예술인들이 또 많이 모였던 지리고 다산 정약용의 지뇌가 외가집이라. 다산 유베갔을 때도 이 집에서 책을 다 가져다 자기 그 윗대 외가집 이니까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다산이 그 시골에 갔어도 그렇게 책을 저술 수 있었던 거죠. 다 뭔가 답음답 우리가 있어야지 되는 거죠. 평지 돌출이 어렵습니다..
이제 그 다음에는 이 경주 최부잣집, 그래서 이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뭐, 이런 걸 g 아까 이제 저런 그 즉 명재 윤증 선생 이나 이런 분들은 도덕적인 처신 누구한테 책자 피지 않는 처신을 해서 유명한 집 아니고.  고산 윤선도라든가 근데 이 경주 최부잣집은 채무를 가지고 많이 주변에 나누었어요. 나 왔어요. 사람을 가장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은 돈이 도만 보니 도막 딴데 내내 겪어 보니까 에 그래서 이 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그 사회에 환원한다. 그리고 주변 100리 안의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한다 뭐니? 나만 떵떵거리고 맛있는 거 먹고 우연히 죽겠지요. 그 책을 먹고 어, 그리고 주변에는 굶어죽을 왠 어떻게 되요? 실제적으로 이 집은 경주 일대 왕이었어요. 실질적으로 그러니까 본인 집안이 왕이라는 비공식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을 굶길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책임을 져야 될 사람들이에요. 왕이신 분을 책임져야 되는 거 아닙니까? 책임도 못 추면서 무더기 왕 입니까.

그게 음... 그리고 또 주변 사람이 다 굶어 죽으면 다음에는 누가 지요? 다 죽어 버리면 2집 농사 져야 할까요? 그래서 이 집이 만석이라는 건 그 가지고 있는 호텔이 만석이니까 엄청날 거 아냐. 땅이 그러면 이 집은 호자글 다 줬지. 근데 이제 소장 유리 문제야. 이자율이 보통 좀 욕심이 많은지 주는 뭐뭐? 6할 치로를 받았어요. 예를 들어서 100만 원 농사 뒤어서 100만 원이 나오면, 70만 원은 주인이 가져가는 거야. 근데 이 집은 살만 가져간 것 같애, 다른 사람보다 훨씬 적게. 그러니까 최부잣집 소작을 올려고 서로 요즘 말로 치면 박이 터졌어요. 서로 그걸 하려고 잘 밖에 안 받으니까 그러니까 이 지분이 그 카리스마 받아 대단했죠. 음... 사람이 그래서 경주 최부자종손이 이렇게 길에 가면 비오는 날에도 옛날에 이 탕길이었을까 니 비우면 그래도 니 중순이 파악하면 는 그 흙탕길을 에서 엎드려서 절을 했대요..
경주 사람들이 이게 지금 요즘 우리가 이런 민주주의 시대에 보면은 좀 크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최부잣집 혜택을 다 봤다는 거지.  최부자 측 그리고 또 이 집이 그 과객 대접을 후하게 해라 해가지고. 이 집에도 항상 그 상주원은 그 손님들이 관객들은 100명 정도 있었대요. 100명 정도. 이게 밥에 주고 어떤 관객이 가면 또, 또 해 줬어 되고, 또 뭐 해 주고. 그리고 이제 이 집에서 머물다가 떠날 때는 그 이제 차비도 죽어. 옛날엔 차비를 돈으로 주는 게 아니고 그렇게 그 쌀 때 박을 1 쌀을 맏 시켜 때요.
그러면 이 집의 내가 들어보니까 그 뒤쪽이 좀 애니 4 입구가 두 손만 들어가게. 그래서 이름으로 퍼퍼 같아 그래서 너무 많이 원 많이 퍼가면 좀 그러니까 구멍을 적게 해 가지고 조금씩 퍼갈 수 있지. 자기 이때 노자 돈으로 이렇게 가지고 와서 쌀 가지고 다니는 비자 카드가 없으니까. 4. 그때는 쌀 자를 가지고 다녀야 하니까.

그리고 이제 그래서 옛날에 우리나라 선비들은 여행을 다닐 때 호텔이나 여인숙에 없고 그러니까 이런 부잣집 뜰 사랑채에 과객 대접을 후하게 하는 집 리스트를 뭐하노? 10군데 막이 부탁 저거에 다 외워둬. 그래서 한 오십 년마다 그런 집에 들어가 뭐 공짜로 다니는 거야. 그래서 제가 그 구례에 그 쌍산에 집안 그 선조들은 금강산갈 때도 그렇게 같아요. 전남 구례에서 금강 상까지 이렇게 과객 대접을 후하게 1집을 앉혀 가지고 그 짐에 묵으면서 그렇게 다녀 때 그러고 있냐? 그쪽 신대로 진 집안 사람들이 반대로. 잔이 집에 오면 자기도 그렇게 대접해 주는 거예요. 음, 그렇게 그러니까 옛날엔 또 이렇게 덕망이 있다 이런 소리를 들어야 양반이에요. 양반은 차 그 집안 덕이 있다 으, 주변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아니겠어요. 덕이 있다는 거리가 최고의 명예 했어요. 양반집 아니면 그러려면 우선 매개가 되는 거야. 한국사람은 머금은 몰리 줘 일단 먹고 봐야 돼. 매기고 보는 거야. 그럼 그 가슴에 적음이 각 되고 등 가슴에 새겨 남의 저집의 신 세졌다..
언젠가는 또 그 때가 되면 물론 얻어 먹고 또 당장 이 잊어버리고 그런 사람도 많아.  음, 10명 매기면 여덟 명은 잊어버릴 수 있어. 근데 한두명이 그걸 기억했다가 나중에 10배, 100배 이따 땀으로 감는 수가 있다.
이 거야.
예 딱 보니까 이제 그 다음에는 이 경북 칠곡의 2매 원 마을, 그러기가 이제 이 매운 마을인데 여기와 gb 에 6.25 이전에는 한 삽 액체가 있었대요. 아, 이 외관이 있는데 있어요. 합 액체가 있는데 이제 6.25 때 폭격 때문에 많이 없어졌는데.
그 이 집이 그 옛날에 저 서울대 총장도 해고 국무총리 됐던 이수성씨나 그 광주 이씨 3 거지 줘. 경기도 광주, 광주 이식.
그래서 이 우리나라의 광주 c&c 가 아주 그 점, 조선 성종 때, 나 이런 때, 인물이 많았습니다. 성경 때는 조정 의 이광주 25, 이 극도 니 극 뭐 이렇게 되는 흑자 들어가는 8명이 조정해 있었대요. 장관으로 장 차관 으로 8명이나 동시에. 그래서 조정 회의를 하는데 전부 광주 이싱 거야. 그래서 그 극작 한결 들 이길 극작 그래서 나온 얘기가 8급 조정 이다. 8명의 극장 항렬 들이 조정을 다 자리를 다 장악하고 있는 조정이 광주 의 시조 정이다. 이런 거지.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이제 이 그 집안 후손들이 사는 덴데 이제 이 중에 근데 이 집안은 그 당쟁이 아주 그치. 여러게 최전선에 있었어요. 나 미인을 대표는 집 아니에요.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간암 인을 많이 했는데, 남인이 아니에요. 노론은 이 기워 지방 충청도 나 기호가 노른 원했고 노론은 여당이 고 그래서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 이래로 경상도 남 인들이 1, 3 배경과 물 먹었어요. 그러니 벼슬도 못하고 노론 한테 밀려 가지고 그래서 일도 못하고 아주 참 춥고 배고파 따고..
그때 이제 이 경상도 남이 네 그 집을 대변해 가지고 노로 나고 정면 부딪친 집 중에 하나가 이적이 칠곡에 있는 광주 이씨 집안 들인데 이 집안의 숙종 조의 그이 단명 일하는 사람이 이제 경상 관찰사를 했는데 그때 경상도의 흉년이 들어서 답을 뭐 죽으니까 아침 저녁으로 막 죽는 사람이 속출 하니까 경상 관찰 썰어 와가지고 고통이 걸 해결해야 되겠는데 마침 그때 그 쌀을 실은 배가 낙동강에서 이제 이렇게 올라오고 있었대요.  우리나라는 3 곱 옛날에 쌓을 이름을 싫으면 남의 안에서 화면은 삼천포, 나 이쪽으로 해가지고 저 지금 목포 돌아서서 애한 저서 산 앞에 뭐 공성 이런 대로 해 가지고 이 한 방으로. 들어왔어요. 우리 나란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배로 음, 반했다고 쌀을 10 가마니를 어떻게 지게 해 지고 고개를 넘어 가겠어요. 우리 나란 길이 없는 나라 했어요. 배로 다녔는데 이제 더러는 저 지금 태안반도 앞에 그 거기가 암초가 많아 가지고 배가 많이 난 파 되니까 더러는 낙동강 상류로 올라가 가지고 상주 위쪽으로 해가지고 남한강으로 해서 그 육지 만 조금 옮기면 되니까 남한강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코스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전라 좌절 아도 순천 구례 쪽 쌀을 낙동강으로 싣도록 해서 올라가는 곳으로 있었는데 대구에 그 지금 가면은 그 화원이라는 데가 있어요. 하원 톨게이트도 있죠. 거기가 옛날에는 큰 나루토 했어. 금호강 낙동강이 만나는 되니까 그 물류의 중심지 다 익어요. 나루터라는 것.

그래서 그런 국가 5 임금 한테 받치는 세금을 실은 배가 거기를 지나가니까 이 관찰자가 그 패를 정지시키고 쌀을 퍼서 나눠줬어요. 근데 이제 그게 큰 위험부담이 있지. 왜냐하면 임금 결제도 안 받고 허가도 안 받고 자기 맘 데로 걸쳐서 맘대로 그걸 하는 건 잘 모르면 큰 범죄행위가 되지요. 근거 9도 그런데, 그 때 당쟁이 치열할 때인데 반대 당파에서 아잇 앞면에는 지맘대로 국가 세금을 지 마음대로 처분했다 이렇게 인지되면은 뭐 잘 못 오면 죽을 수도 있거든요..
그걸 무릅쓰고 2단 명인은 아이, 세금 되고 어차피 유타 충년에 백성들을 구제해야 되는데 이 배가 서울까지 갔다가 다시 또 이 쌀이 내려올려면 그 때문에 한 달 이상 걸리는데 그 사이에 다 죽는다 이 거야.  그러면 그래서 그렇게 직권으로 세금씨름 배를 정지시켜 가지고 그케 써요. 그래서 그게 되지. 이제 나중에 탄핵을 받았지. 노론이 저 광주 이시아목에는 지맘대로 적을 했다. 외조 걸 징역 10년의 처의 같읍니다. 그런 식으로 이제 적어 벌금 무리고 이래야 되는데 이제 나중에 가람 위헌이라고 가람이 한 일이라고 재령 2시집 아닌데 소설 나, 그 2문 열이나 지금 정치인 이제 온 아이 사람들 리그 재령 이신데 그 조상입니다. 이은 이리도 숙종 대당 대형 남나면을 대표하는 논개겠죠. 이은의 리가 변호를 했어요. 정치는 시위에 적절하게 하는 게 핵심인데 주자 말씀에 지금 이건 시의 적절한 행동이니까 이걸 가지고 벌리면 안 됩니다 이래가지고 결국은 넘어갔다.

그래요 그래서 이 그 뜩 이 쌀 배급 받아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 집안은 굉장히 칭송을 했죠. 그 지금도 그런 기록들이 남아 있어요. 그 다음에 이제 그 전남의 가면은 고경명 장군 임지한테 있지만 이죠. 이 이런 종가 1 큰 집 안 들은 장북 때가 좋아요. 예 왜냐하면 손님 접대를 많이 오니까 밑반찬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 아냐. 밑반찬을. 그래서 뭐 예를 들어서 이런 집들은 보통 사로 하루에 뭐 쌀 한방 가 많은 밥을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수십 명이 와서 먹는 단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많은데 이제 이 고경명... 장군 집안은 그 임진왜란 때 3 부자가 순절 했어요. 이런 옛날에는 순절에 따른 표현을 씁니다. 죽었다고 이렇게 안해요. 저는 큰 나라를 위해 장력의 전투에 나가서 전사 하면 그때 가서 죽었다. 그러면 도구로 아, 저 사람은 교육을 좀 못 받은 사람이구나 순절했다. 이렇게 좀 약간 어렵지만 그런 표현도 써야 됩니다. 그래야 양반 티가 납니다..
아, 이 지분이 이제 그 임진 들한테 삼부자 고경명 장군 이 그때 환갑 인데 그 때 상호 인데 난리가 난 있고 자기 피난 안가고 나가서 마상 경우 말 위해서 경 분 을 써서 이 호남 충청 일 때 의 병들을 타 보았지요.  내도 60대 선이 노인이 내가 나가서 앞장 설 테니까 청년들이여, 나를 따르라. 외적 이 강토를 짓밟고 있는데 이걸 내가 가만있을 수 있냐 해가지고 놓인 내가 60% 인 폐가 앞장서서 나주로 가겠다 하니까 닦다 왔어. 극 영문이 말 위해서 썼다고 치 킁 적으로 썼다고 해서 마상 경문 2마리 위해서 쓴 경우 이 유명한 문장입니다. 음 최치원 의 그 황 속 영문인가 왕 소의 나한테 그거하고 유명한 그 경 문으로 들어가는 건데 이 집이 그리고 이제 아들들이 또 다 따라 나갔지. 그래가지고 아들이 둘도 죽었어요. 아버지 죽고 아들 둘도 죽고 의 지분 요즘말로 면 우리 3월호 로 따지면 선장 급지 반인데 자기 충분히 다 피신도 할 수 있고 비행기 타고 어디다 외국으로 도망갈 수도 있는데 요즘으로 치면 자기 땀을 가지고 9월 했어요.

그래서 이 3 부자가 순절에서 국가에서 이불 천이 묘를 세계를 했지. 원래 4대 봉사 까지만 하고 그 이상 지남은 제사를 안 지내는데 불초 니는 나라에서 특별한 훈장 공원이 있는 사람은 영원히 계속 지낼 게 제사를 지내게 해 줘. 그런 제사를 불 1000이라고 게 옮기지 않는다. 위패를 불 1000 2000 도를 때 전 짝 옮긴다. 불천위 패로 옮기지 않는 불천위 제사 가 3집 있죠.
그건 a+ 급 양반 이정구 되면은 주변에서 서로 혼사를 하려고 했어요.으 이제 막 이제 여기가 이제 우당 이회영 선생 지방 미 서울을 그 대표는 양반 집이죠. 이 집은 그 저 3 1 갑 쪽이다.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40,000 옛날 삼한시대 그 갑 쪽 1번 재고 집이다. 그래서 지금 조 명동 성당 있죠. 명동 성당 그 길 건너편의 이 집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제 뭐 iwc 인가 도 들어서고 뭐 그 그렇게 돼 있죠. 그 일대가 다 우당 선생 집이었는데 재산이 한이 만 서겠습니다..
여러가지 9 2gb 이제 나라가 머니까 2gb 6형제 등과 전부다 망명을 했어요.  만주로 마차를 한 바운 %C3%A (겠가지고) 마차로 다 때 귀족 집 아니니까 그래서 에 완주에 가가지고 신흥무관학교 를 세웠어요. 신흥무관학교 이 집에서 연필 공책 뭐 얼싸 금 다 돼 준 거야 으 다 돼 가지고 쉬는 무관 학교를 세웠어요. 우리나라의 어떻게 보면은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아닙니까 사림 육군사관학교 g 이 집 안에서 자기 돈 다 팔아 가지고 올 때 아마 이 집안에서 팔아 가지고 간 돈, 요즘으로 지금 1천억 정도 될까요? 아, 1천억 정도를 가지고 만주로 간 거야. 그래서 그 무관 학교에 새로 가지고 거기서 졸업생들이 청산리 대첩, 있지요? 국, 우리나라가 이긴 거 아니에요. 일본 제대로 좀 반발해 갖고 이긴 거지. 그 얻어맞고만 하다가 우리가 예9 인력들이 다시는 무관 학교에서 나왔어요. 예, 이 집안 적 명동 성당 앞에 지 팔고 팔고 다 팔아 가지고 그도 싹다 돼 가지고 그거 신흥무관학교 와 청산리 대첩 했어요. 2기반의 다 돈으로. 그리고 이 집안 손들은 밥을 굶어 갖고 거의 굶어 죽다 집회 했어요. 만두 해서 가면 막 4 20 못 먹어 갖고 움직이기도 못해 때 나중에 돈이 떨어져 가지고 으, 돈이 떨어져 가지고 움직이기도 모를 정도로 되고.

그 6형제 가 전부 망명해 가지고, 뭐 막둥이 여섯째 이시영 지만 1 돌아와서 이승만 정권 때 부통령 했지. 아, 이 집안이 그 하나 사러 가지, 고급 양반 혼자 살어 가지고. 그래서 참, 이 집은 노 얇 패밀리 해요. 서울의 서울의 노야 할배 밀린 데 1천억을 다 가지고 가서 그냥 싹다 답 답 쉽고 돈 다하고 뺏기고 없어졌지만 그것을 그 명문 서울의 명문 집안이 뭐 다는 것을 보여준 지 말이지. 이게 그 다음에 이제 이 안동에 가면, 그 고성 이씨 임청각 집안인데, 유니 반도 역시 그 낙동강 그 안동의 전탑 있는데, 있거든요. 그래서 3대가 독립운동으로 했어요. 총 손이 그래 가지고 일본 사람들이 보복을 여고 집 앞에다 기차를 내 버린 거야. 기찻길을 내 버린게 집 앞에다..
원래 이 집 앞에는 크루즈 선착장 있었어요.  낙동강이 뱃놀이 어로 다니는 쫙 그 타고 다니는 배타는 나로, 그게 딱 앞에 섰다고. 대문 앞에 그러면 딱 문 앞에 나가면, 그냥 낙동강 뱃놀이 어로 다르고. 이제 반조상들이 그 뱃놀이 하면서 을 분 시들이 있는데.
여기도 역시 초대 종손이 속주 이상룡 선생, 영화배우 같이 생겼지. 그 초대 임시정부 국물이 어, 겠지. 가지고 이 집의 안동 일 때 제일 가는 부자 했어요. 그리고 집도 이게 언덕에 있는데, 이 집 있을 용자 로 되어 있는데, 아주 집이 입체적으로 동선이 편리하면서 독립적 이면서도 집이 연결돼 있어요.

그 쓸 용자 로 돼 있는데, 아주 집도 구경 글만을 언덕에 조각되어 써 집이, 그리고 임진왜란 이전에 지었기 때문에 이런 재료나 집짓는 공법이 아주 고급스럽게 찐 집에 다른 사람들은 임란 이후의 진 집들은 좀 기술이 떨어져 이미나 난리나 가지고 인프라가 다 파괴되었기 때문에 파괴되기 이전에 이지은 2집들이 인데. 이 집은 그냥 그 3대가 종손이 내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때까지 다 독립운동 있자 그래 가지고 그 후손들이 고아원에서 컸어요, e 부잣집 후손들이 고아원에서 나. 이 집만 보면 참 가슴이 아픈데 그 우리가 그 참 선비가 보다. 우리가 안동 양반 이라고 그런데, 안동을 양반의 도시 라고 그런데, 안동 양반 이 뭐 다는 것을 보여준, gb2, 고성 2시 안동 임청각 집. 아니에요, 너무나 풍류 있고 멋진 럭셔리한 집이었는데 그냥 일제 때 그냥 다 가서 그 후손들 고아원에서 크고, 음, 그 후손 하나만 그 뭐 그 형이 마 이래가지고 후손 하나만 대학 1명 나온 수리 있어가지고 좀 이 양반이 뭐 다는 걸 안동 양반 이 못하는 걸 그 보여준 그 기계를 보여준 GB 이런 집들이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그런 한국이 조선족 아 5백 년이나 역사를 가진 알았는데, 다종 신이 있고 어 도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간건데, 지금 우리 사회가 이제 돈 가지고 이걸 전부 양반이 되는 상류층이 되는 이런 시대에 왔는데 이 지금 한국에 돈 가진 사람들은 한번도 검증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집단 이에요.  이게 60 년 밖에 안 됐잖아, 6.25 유로 됐으니까 거다 못해 아프리카의 추장들도 추장 되려면 뭔가 놈을 에서 5 물리 주 보여줘야 돼. 뭔가 자기가 주변을 위해서 희생하고 모범을 보여야 주장으로 확 띄기 주장이 뭐, 날 일하면 젤로 먼저 도망가면 누가 추장 으로 봤습니까? 근데 우리 아직 한국 사회에는 6.25 이후의 그런 결정적인 어떤 사회 변혁 상류층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입증 해야 되는 테스트 한 번도 없었어요. 이게 이게 지금 4 상무가 기라 그러니까 아무도 존경하지 않고 근데 이렇게 되면 곤란에 서로 계속 치고 받으니까, 니가 돈 4분 있다보니 가 지금 그러냐 자식도 또 나쁜 놈 하냐 이런 식으로 되면 만 인과 만인의 투쟁이 되고 아무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잘못 어머니께 카오스가 되요. 난타 자나 다 자매로 는 수가 있어. 니게 기강이 안성 거야. 나라가 이렇게 극이 강은 주먹으로 세우는 게 아니고 역시 그 카리스마, 카리스마는 뭐겠어요? 다른 사람을 감동시켜 야지 오는 거지 승복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그 도덕적 보니. 이제 이런 게 지금 안 세워지면 한국 사회가 이 잘못 우문 난리 푼수 되는거 아닌가. 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우리 선배들의 우리 조상들의 선비 정신을 되새겨 봐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선비 정신의 뿌리가 있는 뼈대가 있는 나라에요. 우리가 콩가루 나라가 아니라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그런 뼈대 있는 집안, 그런 얘기들을 짧게나마 제가 우리나라 뼈대 있는 양반 집안 얘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뭐, 질문 있으시면 받겠습니다.

예, 요즘 인문학이 유행인데요..
이 물어내 인문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새 인문학을 오는 이유는 옛날에 그 여러 선조들이 나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생을 살면서 고생 했는가, 그 고생담을 듣는 게 저는 입문하게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나만 이렇게 고생하는 게 아니구나, 다 여러 사람들이 인생의 여러 가지 생노병사의 부대끼면서 살았구나를 알아서 마음이 좀 여유로워 지는 겁니다. 입문하게 효과는 마음이 좀 더 그 돼지고 그러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또 뭐, 질문이 있으신 분? 4 선생님께서 우리나라에게... 역사를 공부해 오시면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있는지 궁금 합니다. 역사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은 고운 최치원입니다. 고운 최치원은 우리나라 전통 사상인 유물썬 사상을 다융합한 분이세요. 그러면서도 풍류도라는 자기 주체 사장을 또 세운 분이죠. 그러니까 포용력이 있으면서도 자기 중심이 있는 점에서 존경해요. 우리가 나무 좌파 우파해가지고 치고 패는 데 그래도 좀 너무 융합을 해가지고 그리고 또 자기의 그 고유 정신을 세우는 그리고 또 전국을 다 아박람하여 돌아다녔고 마지막에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같아서 산속에 들어가서 안 나와 버려. 짠 그리고 급급매 짐을 멋있게 사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점에서 존경해요.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또 다른 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풍수지리로 유명한데, 집에 밝은 기운이 되게 하는 방법 있나요? 벌써 그 햇볕을 많이 받는 게 밝은 건데, 요즘 아파트에 사니까 어항 같은 걸 하나씩 놓는 것도 괜찮다고 해요. 우리가 고층 아파트는 너무 건조하니까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는 고층 아파트 살아도 좋은데 50대부터는 1, 2, 3층에 사는 게 처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1층을 선호해서 1층에 살고 있어요. 저는 땅 기운을 받으려고 근데 이게 사람이 젊었을 때는 고치게 살아도 상관없어요. 근데 나이 들면 저층에 다는 게 좋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습도를 왕관. 그리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공중에 떠 있으니까 아무래도 이 대자연을 많이 접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방송국 책을 봤는데 우리나라에는 대마한 산도 있고 남사람도 있고 아주 소수 주변에 산이 많으니까 아름다운 경도 나중에 한 번 가 보세요.  이런 산들이 있는 지 어서 우리 대단한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너무 과소평가하는 데 자연, 특히 그 바위 산을 많이 가서 바위에서 나오는 기운을 많이 받아야 됩니다. 바위 빠리약발 중에 최고입니다.
그러면 이걸로 이제 제가 오늘 강연을 다 마치고 우리가 누리. 그 우리, 지금 한국에는 선비 정신이 있는데 선비 정신을 알려야 하는 건, 지금 태생 쿠키 사회지도층들이 선비정신에 대해서 좀 공부해야 되지 않나요? 그게 제 소감입니다. 이걸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양반가의 도덕과 책임, 현재 한국의 상류층 부재 이유는?

한국의 양반 상류층의 도덕성과 책임성 배울 수 있는 '양반가'에 대해 말씀했어요.

그러나 6.25 전쟁 시대, 한국의 양반 상류층은 전부 없어졌죠.

한국은 신생국가이기 때문에 상류층, 사회 지도층에서 도덕성과 책임성을 배울 여력이 없어 많은 문제가 발생했어요.

이러한 문제는 건물을 높이 올려도 그 건물을 유지관리하는 콘텐츠가 없어 발생한 결과였죠.

그로 인해 사회 전반에서 각종 부조리, 부패, 안전사고 등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고 해요.

한국 양반 집안의 특징은?

한국 지도층의 양반 정신과 선비 정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해요.

논산에 위치한 윤증 선생 집안을 예시로 소론과 감시어의 사용이 강조됩니다.

이 집은 양반 집안이므로 돈이 있으며, 접대용 쌀도 많이 사용한다고 해요.

옛날 양반 집안에서 독쌍과 하인 관례는?

한때는 손님이 많을 때를 대비해 10개의 독쌍 상을 준비했어요.

이는 독사가 혼자 먹는 상을 뜻하죠.

일행들끼리 숟가락을 서로 교차하여 음식을 먹는 습관은 6.25 이후에 생긴 것이라고 해요.

격이 높은 양반 집안일수록 많은 독사를 둔다는데, 예를 들어, 일부 집안에서는 700개 이상의 독사를 가졌으며, 대접할 하인은 약 100명 이상이 필요했던 거죠.

부자들이 할 수 있는 누에고치 장난과 그에 따른 문제는?

'누에고치를 하지 마라' 라며 서민이 낱낱이 하던 누에고치 장난을 부자들이 돈을 벌이려 하면서 하자,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금지했고, 그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하인으로 보며 품격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데 부당한 구조로 인해 분노하고, 그것을 흉내내다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행동을 하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사회의 변동으로 인해 모두 죽을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고, 지금도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호남 부자 윤선도와 간척사업의 연결은?

윤선도 때 간척사업을 통해 부유한 집안이 된 호남 부자 집안이에요.

대한민국 해방 이후의 평등한 토지개혁을 통해 우리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느꼈죠.

이 집안은 대한민국 간척사업의 원조 집안으로 평판이 높아요.

과거에는 세금을 못 내는 이웃들을 대신하여 세금을 납부했다는 특별한 경험도 있답니다.

그 결과 이 집안은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좋은 평판을 누리게 되었어요.

한국 부잣집의 특징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터뷰어가 판문점에서 찍은 영상을 하나 더 보여주면서, 집안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이야기해요.

호남 부잣집에 대해서 말할 때는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문화인, 예술인 등의 손님이 많다는 특징을 언급해요.

경주 최부잣집은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중요시한다고 해요.

만석 이상의 재산도 환원하며,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노력해요.

이 집은 수십 년간 경주 일대의 대부호이지만, 그러한 지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요.

의식적으로 왕의 집안이어서 사회적 책임을 당연하게 느끼며 스스로의 권리보다는 타인의 권리를 중요시해요.

최부자가 수익을 취하기 위해 소작농에게 땅과 집 대여하는 방법은?

최부자가 소작농에게 땅과 집 대여를 하고 수확 시 6할의 수익을 가져가요.

그리고 대여받은 집이 만석인 경우, 호텔 카리스마로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어요.

최부자와 농민 사이에서는 서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알력이 섭렵해요.

최부자의 손님들이 많이 묵는 집에 상주하면서, 소작농들은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어요.

당시에는 비자 카드가 없기 때문에 농사 수확 시 쌀이나 돈을 이용해 다니는 것이 일상적이었어요.

️한국 고귀층의 부적 접대와 귀족정신에 대해 어떻게 배웠나요?

옛날 우리나라 귀족들은 부자집 뜰 사랑채가 호텔, 여관 대신이었고, 이를 위한 집 리스트는 외울 정도였죠.

한 오십 년마다 이러한 집의 목록을 보고 과객 대접을 받았으며, 선조들도 이 덕망을 중시했어요.

한국사에서는 금강산도 찾는 선조들의 대접과 귀족정신이 이야기 되며, 고객의 신뢰와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로스쿨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광주 이씨 3 혹은 경기도 광주 이씨 등, 조선 시대에는 광주 이씨 회의가 조정을 독식하며 대권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어요.

흉년 속결에서 쌀을 수송하기 위해 이용된 수단은?

경상도 간암 인인 광주 이씨 집안의 경상 관찰사는 흉년으로 고통받는 경상도의 남인들을 구해주기 위해 낙동강에서 쌀을 실은 배를 이용해 수송하기로 결정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길이 없어 배를 이용해 상주 위쪽을 거쳐 남한강을 통해 서울로 수송하는 코스나, 낙동강 상류를 올라가서 남한강을 통해 육지를 조금씩 옮겨가는 코스 등 다양한 수송 경로가 있었어요.

전라 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낙동강으로 싣되, 이때 대구의 화원 나루터를 거치는 여러 수송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화원 나루터는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으로, 옛날에는 큰 나루토가 있었어요.

광주 이씨 중 한 사람인 이은은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해당 지역에서 국가 5배의 세금을 지불하는 배를 관찰하고, 세금 미납으로 막고 옆에서 쌀을 나눠줬어요.

이에는 범죄 행위가 있을 수 있고, 그 후 임금 결제와 허가가 없으면 애초에 큰 위험부담을 안고 시행된 것이에요.

그러나 이듬해에, ‘배를 막아 세금을 강요’라는 이유로 탄핵이 되었으며, 대가로 노론의 군사정권이 들어섰어요.

이은은 광주 이씨 중 한 사람으로, 변호사로 일하면서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해주며 시위를 적절하게 이끌어내는 일을 했어요.

하지만 이한열 대통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은의 행위는 위헌으로 판단 받아 처벌을 당했어요.

고경명 장군 집안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나요?

전 남의 가문 중 가장 거대했던 고경명 장군 집안 이야기예요.

이 형님의 집은 쌀 배급으로 유명했고, 지금까지 그 기록들이 남아있죠.

임진왜란 때 3 부자가 순절하였고, 고경명 장군이 환갑 때 경 분을 쓰고 영웅적인 충신행각을 했다는 내용이 전해져 왔어요.

그의 유명한 문장은 '외적이 강도를 짓밟고 있는데 나는 가만 있을 수 없다'였답니다.

고경명 장군 뿐만 아니라, 아들 둘도 죽었어요.

그러나 그의 경우에도 자신의 가문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사람의 가문인데도 63대에 이르러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이자격박탈을 당했답니다.

제사를 통해 이 부자들이 얻은 것은?

이 부자들은 제사를 통해 이불 천을 세계로 퍼뜨려 국가적인 명성을 얻었어요.

이들은 기존에는 4대 봉사까지만 하던 제사를 불초 니라는 나라에서는 특별한 훈장과 공원을 제공받아 영원한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해요.

이 제사를 '불 1000'이라고 하며, 불천 위패를 1000번 이상 옮기는 행사를 진행하고, 어느 집은 3대 제사를 가지고 있어요.

이는 a+급 양반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망명하고 설립한 학교와 가난한 생활, 이 인물은?

문의씨 일가는 우당 선생 집이었지만, 재산을 팔아가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어요.

해당 학교에서는 연필과 공책 등을 제공하며 국가의 최초 육군사관학교로 알려져 있어요.

해당 집안 손들은 밥을 굶어가며 헌신하였고, 돈이 모자라면 만두를 해서 먹을 정도였답니다.

서울 명문 집안에서 낙동강 안동의 고성 이씨 임청각 집안으로 이주한 이유는?

서울 명문 집안에서 낙동강 안동의 고성 이씨 임청각 집안으로 이주한 적이 있어요.

한 때 서울 명문 집안으로 알려져 있던 이 집안은 재산을 잃고 가난해졌지만, 그 명문 집안의 위력은 여전하답니다.

그 뒤로 안동에 이주하게 된 고성 이씨 임청각 집안은 낙동강이 흐르는 고성에 있는데, 그곳에서 3대가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의 보복을 받았어요.

이 집은 낙동강에 위치해 있어 크루즈 선착장이 있는데, 예전에는 낙동강을 타고 돌아다니던 배들이 대문 앞에 섰대요.

초대 종손인 이상룡 선생은 영화배우처럼 생겼는데, 이 집안은 안동 일 때 제일 부자였대요.

이 집은 언덕에 위치해 있고, 입체적으로 동선이 편리하게 연결돼 있어요.

한국의 양반 집안에 대해 어떤 내용인가?

한국에는 5백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족이 있었고, 도덕적 가치가 강조되어 견고한 사회 구조를 가졌어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소수의 부유층은 돈만 가지고도 상류층으로서의 입증 없이 존재하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6.25 이후에도 어떤 결정적인 도덕적 변혁을 겪지 않아야 하는 상류층을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류층끼리의 갈등이 비례하고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혼란스러워질 수 있어요.

우리는 선비 정신을 되새겨야 하며, 콩가루 나라가 아니라 뼈대 있는 나라임을 기억해야 한다요.

인문학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선조들이 살면서 겪은 고생담을 통해 위로를 얻으려는 것이며,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유서 깊은 방법들과 융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에요.

또한 계급 분류와 같은 일부 기존적인 방법을 융합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문학적 사고방식을 키울 수 있다는데, 풍수지리와 같은 방법을 활용하여 밝은 기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꾸미기도 하고, 역사적 인물들 중 고운 최치원처럼 포용력과 자기주체성을 겸비한 인물들을 존경하기도 해요.

그리고 때로는, 인문학적 사고방식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옵션을 제공하기도 하죠.

왜 대자연의 경험과 선비 정신이 중요한가?

한국에는 대마한 산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존재합니다.

이를 알리고, 그 아름다움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바위 산에서의 에너지가 중요하다고 믿고, 선비 정신에 대한 교육 필요성도 언급해요.

사회지도층이 선비 정신을 공부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대자연과 선비 정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드렸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