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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기/military. warfare.

베트남전 미라이 대학살 그리고 한국전에서의 사례

by 리치캣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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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미라이 대학살 
베트남전 미라이 대학살은 1968년 3월 16일에 베트남 중부 산간 지역 미라이에서 일어난 미군의 대량살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베트남전 중 미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가장 대표적인 대량살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해당 지역에 주둔한 미군은 미국 정부의 "모든 적을 처치하라"는 지시에 따라, 주민들을 "적"으로 분류하고 대규모 살해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총 504명 이상의 미라이 주민이 살해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노인, 여성, 어린이였습니다. 또한, 여러 명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가족들이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등 인신비행도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전투 상황이 아닌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량살인 사건으로, 미국 국민들의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베트남전의 종전을 앞두고 많은 미국 군인들이 범죄행위를 일으켜 전쟁의 비참함과 악몽을 떠올리게 했으며, 미국 정부는 대량살인 사건을 비롯한 전쟁 중 발생한 범죄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미라이 대학살을 저지른 캘리 중위
미라이 대학살의 주범으로 꼽히는 캘리 중위는 당시 미국 군대의 병사로서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마을에서 이 대량살인을 지시하고 주도한 인물입니다.

캘리 중위는 대학살 이후 미군 상급자들에게 이 사건을 위조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으나, 이에 실패하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이후 다른 병사들이 대학살에 참여한 사실을 고발하면서 캘리 중위는 재차 조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대학살 지휘 책임을 지고 전쟁 범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캘리 중위는 이 판결을 뒷받침할만한 입증 자료가 부족하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미국 내외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후 많은 논쟁과 재판이 있었지만, 결국 캘리 중위는 대학살 지휘책임을 인정받고 미국 군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캘리 중위의 사례는 미국 내에서 전쟁 범죄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법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대량살인이라는 비참한 사실을 인식하게 하여 베트남전이 가지는 의미와 전쟁이 가져온 인간적 비참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군의 베트남전 학살사건은
베트남전 중 미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대량살인 사건은 미라이 대학살 이외에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 중 일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소년 마을 학살 (1967년) - 베트남 중부 지방의 소년 마을에서 미군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5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동막 학살 (1968년) - 베트남 북부의 동막 마을에서 미군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4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베놈 학살 (1969년) - 베트남 중부 지방의 베놈 마을에서 미군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3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마이렝 학살 (1969년) - 베트남 중부 지방의 마이렝 마을에서 미군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504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라이 대학살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대량살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외에도 베트남전 중 미군이 범죄행위를 일으킨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미국 내외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베트남전의 참상을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미국 정부는 대량살인 사건을 비롯한 전쟁 범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미라이 대학살에 참여한 군인들의 처벌결과는?

미라이 대학살에 참여한 군인들은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재판에서 몇몇 군인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캘리 중위는 대량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1971년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징역 20년의 신고형을 받았지만, 군법상의 사면으로 3년 만에 출소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미라이 대학살에 참여한 군인들 중 일부는 군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군인들은 대부분 징계나 처벌 없이 일반 부대로 이송되어 복무를 마쳤습니다.

미라이 대학살 이후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범죄행위를 추적하고 처벌하기 위한 법안들이 제정되었으며, 이를 통해 베트남전 중 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처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왜 민간인학살을 한 미군의 처벌이 경미한 것인가?
민간인학살을 저지른 미군의 처벌이 경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베트남전 당시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군인들은 적군과의 전투에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이 상대적으로 가볍게 이루어졌습니다.

둘째, 베트남전은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전 범죄를 추적하고 처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전 범죄를 무시하거나 숨기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셋째, 미국은 베트남전 이후 범죄 처리를 위한 새로운 법적 체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베트남전 범죄를 처리하기 위한 법적 규제나 제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처벌이 경미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베트남전 범죄에 대한 처리와 재판이 더욱 엄격해지고 있으며, 범죄에 가담한 군인들의 책임을 추적하고 처벌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일으킨 민간인학살은 ?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일으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사례는 다양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노량진 학살"과 "구미 학살"이 있습니다.

노량진 학살은 1950년 10월 26일, 한국전쟁 초반 미군이 서울의 노량진 지역에서 실시한 학살입니다. 미군은 노량진 지역을 공격하면서 많은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건물들을 불태웠습니다. 이 학살로 인해 약 500명 이상의 노량진 주민이 사망했다고 추산됩니다.

구미 학살은 1950년 7월 25일, 한국전쟁 초반 미군이 구미 지역에서 실시한 학살입니다. 미군은 구미 주민들이 북한군과 공모하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건물들을 불태웠습니다. 이 학살로 인해 약 400명 이상의 구미 주민이 사망했다고 추산됩니다.

이외에도 한국전쟁 중 미군이 일으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사례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조사 및 평가되고 있습니다.


---> 위의 내용은 챗GPT가 답한 내용임.

그런데... 인공지능은 미군의 한국인 학살에 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를 검색하면 어떠한 자료도 없음.

미군의 한국인 학살은....자료를 모두 삭제해서 파묻은 것인가?

천안함과 세월호처럼???

천안함과 세월호는 미군의 잠수함과의 충돌에서 발생했다는 다수의 주장이 있는데...모두 감추기에 급급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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