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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기/★[모모쌤] KOREA language

[ 阿修羅場 ] 한자는 우리 문명이 만든 뜻글자이다. 한글은 우리 문명이 발명한 소리글자이다.

by 리치캣 202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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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阿修羅場  ] 한자는 우리 문명이 만든 뜻글자이다. 한글은 우리 문명이 발명한 소리글자이다. 

阿修羅場 언덕 닦을 비단 마당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의 싸움터
아 수 라 장
阿修羅는 범어(梵語) ‘asura'의 음역(音譯)이다. 약칭 修羅라고도 하며 또 아소라(阿素羅), 아수륜(阿須侖)이라고도 하는 ’추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수미산(須彌山) 아래 거대한 바다밑에 살며 수억 만리나 되는 크기에다 수백억년이나 長壽하는 鬼神이다. 모습도 흉칙하기 그지없어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개다.
본디 그는 착한 神이었는데 후에 하늘과 싸우면서 惡神이 됐다고 한다.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戰神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好戰性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印度의 敍事詩 [마하바라타]에 보면 비슈누신의 原盤에 맞아 많은 피를 흘린 阿修羅들이 다시 칼, 곤봉, 창으로 공격을 당해 피에 물든 그들의 시체가 마치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나 悽慘한 光景을 일컬어 阿修羅場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由來되었다. 그는 正義의 象徵인 하늘과 싸우기도 한다. 이 때 하늘이 이기면 豊饒와 平和가, 阿修羅가 이기면 貧困과 災殃이 온다고 한다.
그 勝敗를 갈라 놓은 것은 人間들이다. 곧 人間이 善行을 해 이 세상의 正義가 널리 행해지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지만 반대로 못된 짓이나 하고 不義가 만연(蔓延)해 있으면 阿修羅의 힘이 세져 하늘이 지게 된다.
阿修羅를 물리치는 것은 결국 人間의 勞力 如何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人間이 善行을 하고 正義로운 사회를 이룰 때 惡의 象徵인 阿修羅는 발을 못붙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피비린내 나는 阿修羅場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有備無患 있을 준비 없을 근심
대비가 돼있으면
근심이 사라짐
유 비 무 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다. 形便이 좀 나아지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쉬이 잊어 버리곤 한다. 열심히 노력해 좀 살게 되었는가 했더니 어느새 過消費가 문제다. 이래 가지고는 닦쳐 올 危機에 對處할 수 없다. 豊足할수록 窮乏했던 때를 생각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對備해야 한다.
春秋時代 진(晋)의 도공(悼公)에게는 사마위강(司馬魏絳)이라는 忠臣이 있었다. 그 때 오랑캐 나라 무종국(無終國)이 和親을 目的으로 使臣과 함께 珍奇한 禮物을 바쳐왔다. 하지만 悼公은 冷淡했다. “녀석들은 信義도 없고 貪慾스럽기 그지 없소. 차라리 拒絶하고 치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自請해서 和親을 要求해 왔다는 것은 晋으로는 커다란 幸運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結局 그의 建議대로 和親을 맺고 晋은 外患을 줄일 수 있었다.
몇년 뒤, 晋은 司馬魏絳의 勞力으로 超强大國이 될 수 있었다. 悼公이 그에게 金銀寶貨를 下賜하자 司馬魏絳은 정중히 拒絶하면서 말했다. “便安할 때에 危機를 생각하십시오{居安思危}. 그러면 對備를 하게되며{思則有備}, 對備 態勢가 되어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는 법입니다{有備則無患}”
이리하여 悼公은 마침내 그의 도움으로 패업(覇業)을 이루게 되었다.

 

世 代 인간 대


한 세대는 약 30년
세 대


世는 삼지창처럼 세 갈래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에 잎이 붙어 있는 모습에서 나온 글자다. 따라서 본디 뜻은 ‘잎’이다. 참고로 ‘葉’은 풀이나 나무{木}의 잎{世}이라는 뜻이다.
잎이 떨어지면 새 잎이 난다. 그것은 父母가 죽으면 子息이 태어나는 것과도 같다. 여기에서 옛 사람들은 父母와 자식간의 關係도 落葉과 같다고 하여 ‘世’라고 불렀다. 그런데 옛날에는 平均 壽命이 짧았으므로 대체로 30년을 前後해 家長이 바뀌었다. 그래서 [禮記]를 보면 30년을 ‘一世’라고 했다. 이때부터 1세는 祖上의 ‘한 마디’를 뜻하게 되었다.
그것이 代로 바뀌게 된 것은 唐나라 때부터이다. 옛날 專制君主 시대에는 天子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수도 없을 뿐더러 쓸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天子 뿐아니라 동일 王朝내 그 이전 모든 天子의 이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唐太宗의 이름은 李世民이다. 이 때부터 文章이나 말에서 一切 ‘世’자는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같은 뜻인 ‘代’자로 바뀌게 되었다.
代는 사람 인(人)과 문지방 익(弋)의 결합이다. 문지방은 문안과 문밖을 ‘區別’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간이 區別되는 것도 代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唐나라 이후부터는 ‘世’자를 忌避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世와 代를 함께 사용하면서 지금의 ‘世代’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世代 差異’는 시간상 30년 差異를 뜻한다.

 

有備無患 있을 준비 없을 근심
대비가 돼있으면
근심이 사라짐
유 비 무 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다. 形便이 좀 나아지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쉬이 잊어 버리곤 한다. 열심히 노력해 좀 살게 되었는가 했더니 어느새 過消費가 문제다. 이래 가지고는 닦쳐 올 危機에 對處할 수 없다. 豊足할수록 窮乏했던 때를 생각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對備해야 한다.
春秋時代 진(晋)의 도공(悼公)에게는 사마위강(司馬魏絳)이라는 忠臣이 있었다. 그 때 오랑캐 나라 무종국(無終國)이 和親을 目的으로 使臣과 함께 珍奇한 禮物을 바쳐왔다. 하지만 悼公은 冷淡했다. “녀석들은 信義도 없고 貪慾스럽기 그지 없소. 차라리 拒絶하고 치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自請해서 和親을 要求해 왔다는 것은 晋으로는 커다란 幸運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結局 그의 建議대로 和親을 맺고 晋은 外患을 줄일 수 있었다.
몇년 뒤, 晋은 司馬魏絳의 勞力으로 超强大國이 될 수 있었다. 悼公이 그에게 金銀寶貨를 下賜하자 司馬魏絳은 정중히 拒絶하면서 말했다. “便安할 때에 危機를 생각하십시오{居安思危}. 그러면 對備를 하게되며{思則有備}, 對備 態勢가 되어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는 법입니다{有備則無患}”
이리하여 悼公은 마침내 그의 도움으로 패업(覇業)을 이루게 되었다.

 

世 代 인간 대


한 세대는 약 30년
세 대


世는 삼지창처럼 세 갈래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에 잎이 붙어 있는 모습에서 나온 글자다. 따라서 본디 뜻은 ‘잎’이다. 참고로 ‘葉’은 풀이나 나무{木}의 잎{世}이라는 뜻이다.
잎이 떨어지면 새 잎이 난다. 그것은 父母가 죽으면 子息이 태어나는 것과도 같다. 여기에서 옛 사람들은 父母와 자식간의 關係도 落葉과 같다고 하여 ‘世’라고 불렀다. 그런데 옛날에는 平均 壽命이 짧았으므로 대체로 30년을 前後해 家長이 바뀌었다. 그래서 [禮記]를 보면 30년을 ‘一世’라고 했다. 이때부터 1세는 祖上의 ‘한 마디’를 뜻하게 되었다.
그것이 代로 바뀌게 된 것은 唐나라 때부터이다. 옛날 專制君主 시대에는 天子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수도 없을 뿐더러 쓸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天子 뿐아니라 동일 王朝내 그 이전 모든 天子의 이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唐太宗의 이름은 李世民이다. 이 때부터 文章이나 말에서 一切 ‘世’자는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같은 뜻인 ‘代’자로 바뀌게 되었다.
代는 사람 인(人)과 문지방 익(弋)의 결합이다. 문지방은 문안과 문밖을 ‘區別’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간이 區別되는 것도 代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唐나라 이후부터는 ‘世’자를 忌避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世와 代를 함께 사용하면서 지금의 ‘世代’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世代 差異’는 시간상 30년 差異를 뜻한다.

 

慢 慢 的 늦을 늦을 목적

느린 것이 빠른 것
만 만 적

흔히 中國사람을 두고 ‘만만디{慢慢的}’라고 한다. 中國語에서 ‘的’은 動詞나 形容詞 뒤에서 붙어 名詞化 시키는 作用을 한다. 그래서 解釋은 ‘~하는 것’, ‘~하는 사람’이 된다.
慢이 ‘느리다’를 뜻하므로 慢慢的은 ‘느릿느릿한 사람’, 곧 ‘느림보’를 뜻한다. 參考로 慢의 반대는 ‘急’이 아니라 ‘快{쾌․콰이}’다. 中國에서 이른 아침 公園에 나가 보면 흔히 접하는 光景이 있다. 男女老少 莫論하고 다들 太極拳(일명 쿵푸)을 즐긴다. 節度있고 빠른, 그것도 不足해 口號까지 덧붙이는 우리의 跆拳道와는 달리 느리기가 말할 수 없다.
中國人은 확실히 느리다. ‘천천히’는 日常 用語가 되어 있다. 食堂에서 料理를 내오며 하는 말이 ‘만만츠{慢慢吹․만만취-천천히 드세요}’다. 물론 料理를 재촉하는 ‘빨리’라는 들을 수 없다.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만쩌우{慢走-천천히 가세요}’며, 일을 시키고도 ‘만만라이{慢慢來-천천히 하세요}’라고 한다. 그 뿐인가. 道路에도 追越線의 반대가 만차도(慢車道)다. ‘천천히 달리라’는 뜻이다.
臺灣의 경우 우리의 京釜高速道路와 비슷한 것이 있다. 타이페이{臺北}에서 까오슝{高雄}을 連結하는 道路로 南北 4백km가 넘지만 좀처럼 補修 工事를 하는 法이 없다. 물론 工期는 우리의 몇배나 더 들었다.
이퇴위진(以退爲進-물러서는 것이 나아가는 것이다), 이유극강(以柔克剛-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을 즐겨 말하는 그들이다. 그렇다면 이만위쾌(以慢爲快-느린 것이 빠른 것이다)라는 말도 可能하지 않을까. 특히 우리에게 말이다.

 

端 午 끝 낮

음력 5월 5일
단 오

端午는 본디 ‘端五’(초 닷새)라고 불렀다. 陰曆의 5월 초 닷새 날이다. 一名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一年中 陽氣가 가장 旺盛한 날이라 하여 예부터 설, 寒食, 秋夕과 함께 4대 名節로 일컬어 졌다. 또 모내기를 막 마칠 즈음이라 그해의 豊年을 비는 祈豊祭를 올렸으며, 女人들은 창포(菖蒲)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는 등 다양한 民俗 놀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中國 戰國時代 楚나라에 굴원(屈原)이라는 愛國 詩人이 있었다. 본디 王族이었던 그는 朝廷 대신들의 腐敗를 보다 못해 과감한 改革 政策을 建議했다. 그러나 그의 建議는 姦臣들의 頑强한 抵抗에 부딪쳤고 雪上加霜으로 暗混했던 君主 회왕(懷王)은 姦臣들의 모함(謀陷)과 참언(讒言)을 듣고 그만 그를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는 가슴 가득 鬱憤을 안고 외로운 放浪의 길에 들어갔다.
그는 南方의 여러 곳을 轉轉하면서 갖은 苦生을 했지만 祖國에 대한 우국충정(憂國衷情)만은 변치 않았다. 그는 이 期間에 이소(離騷), 구가(九歌), 구장(九章) 등 珠玉 같은 詩를 써서 自身의 衷情을 펴보였다. 후에 秦이 도읍 영(玲)을 침략하자 楚의 社稷은 頃刻에 달리게 되었다. 귀양 도중 이 소식을 들은 屈原은 너무도 원통한 나머지 陰曆 5월 5일 돌을 품고 멱라수(覓羅水-현 湖南省 長沙 부근)에 몸을 던져 自殺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2세 였다.
屈原의 憂國衷情에 感服한 楚나라 사람들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江에 나가 그를 祭祀지내고 용주(龍舟-용 모양의 배놀이)놀이를 한다. 端午의 由來다.

 

慢 慢 的 늦을 늦을 목적

느린 것이 빠른 것
만 만 적

흔히 中國사람을 두고 ‘만만디{慢慢的}’라고 한다. 中國語에서 ‘的’은 動詞나 形容詞 뒤에서 붙어 名詞化 시키는 作用을 한다. 그래서 解釋은 ‘~하는 것’, ‘~하는 사람’이 된다.
慢이 ‘느리다’를 뜻하므로 慢慢的은 ‘느릿느릿한 사람’, 곧 ‘느림보’를 뜻한다. 參考로 慢의 반대는 ‘急’이 아니라 ‘快{쾌․콰이}’다. 中國에서 이른 아침 公園에 나가 보면 흔히 접하는 光景이 있다. 男女老少 莫論하고 다들 太極拳(일명 쿵푸)을 즐긴다. 節度있고 빠른, 그것도 不足해 口號까지 덧붙이는 우리의 跆拳道와는 달리 느리기가 말할 수 없다.
中國人은 확실히 느리다. ‘천천히’는 日常 用語가 되어 있다. 食堂에서 料理를 내오며 하는 말이 ‘만만츠{慢慢吹․만만취-천천히 드세요}’다. 물론 料理를 재촉하는 ‘빨리’라는 들을 수 없다.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만쩌우{慢走-천천히 가세요}’며, 일을 시키고도 ‘만만라이{慢慢來-천천히 하세요}’라고 한다. 그 뿐인가. 道路에도 追越線의 반대가 만차도(慢車道)다. ‘천천히 달리라’는 뜻이다.
臺灣의 경우 우리의 京釜高速道路와 비슷한 것이 있다. 타이페이{臺北}에서 까오슝{高雄}을 連結하는 道路로 南北 4백km가 넘지만 좀처럼 補修 工事를 하는 法이 없다. 물론 工期는 우리의 몇배나 더 들었다.
이퇴위진(以退爲進-물러서는 것이 나아가는 것이다), 이유극강(以柔克剛-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을 즐겨 말하는 그들이다. 그렇다면 이만위쾌(以慢爲快-느린 것이 빠른 것이다)라는 말도 可能하지 않을까. 특히 우리에게 말이다.

 

端 午 끝 낮

음력 5월 5일
단 오

端午는 본디 ‘端五’(초 닷새)라고 불렀다. 陰曆의 5월 초 닷새 날이다. 一名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一年中 陽氣가 가장 旺盛한 날이라 하여 예부터 설, 寒食, 秋夕과 함께 4대 名節로 일컬어 졌다. 또 모내기를 막 마칠 즈음이라 그해의 豊年을 비는 祈豊祭를 올렸으며, 女人들은 창포(菖蒲)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는 등 다양한 民俗 놀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中國 戰國時代 楚나라에 굴원(屈原)이라는 愛國 詩人이 있었다. 본디 王族이었던 그는 朝廷 대신들의 腐敗를 보다 못해 과감한 改革 政策을 建議했다. 그러나 그의 建議는 姦臣들의 頑强한 抵抗에 부딪쳤고 雪上加霜으로 暗混했던 君主 회왕(懷王)은 姦臣들의 모함(謀陷)과 참언(讒言)을 듣고 그만 그를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는 가슴 가득 鬱憤을 안고 외로운 放浪의 길에 들어갔다.
그는 南方의 여러 곳을 轉轉하면서 갖은 苦生을 했지만 祖國에 대한 우국충정(憂國衷情)만은 변치 않았다. 그는 이 期間에 이소(離騷), 구가(九歌), 구장(九章) 등 珠玉 같은 詩를 써서 自身의 衷情을 펴보였다. 후에 秦이 도읍 영(玲)을 침략하자 楚의 社稷은 頃刻에 달리게 되었다. 귀양 도중 이 소식을 들은 屈原은 너무도 원통한 나머지 陰曆 5월 5일 돌을 품고 멱라수(覓羅水-현 湖南省 長沙 부근)에 몸을 던져 自殺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2세 였다.
屈原의 憂國衷情에 感服한 楚나라 사람들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江에 나가 그를 祭祀지내고 용주(龍舟-용 모양의 배놀이)놀이를 한다. 端午의 由來다.

 

聖 域 성인 범위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왕궁
성 역


聖域은 본디 ‘聖人의 境地’, 또는 ‘聖人의 범주(範疇)’로서 ‘사람’을 對象으로한 抽象的인 槪念일 뿐이었다. 記錄에 의하면 聖域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요순(堯舜)이나 孔子 같은 人物 程度에 不過했다니 대단한 境地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神聖한 地域’으로 뜻이 바뀌어 어떤 特定 地域을 指稱하는 意味로 使用되게 됐다. 勿論 여기에는 專制君主 時代의 觀念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 임금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絶對 權力을 한 손에 움켜 쥐었다. 이때부터 그는 神聖不可侵의 存在로 認識됐으며, ‘聖’은 곧 ‘임금’을 象徵하게 돼(聖德, 聖恩, 聖節, 聖旨, 聖寵 등) 聖域이라면 임금과 관계되는 ‘神聖 不可侵의 地域’을 뜻하게 되었다. 대체로 궁궐(宮闕)이나 宗廟, 王陵, 出生地 등으로서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聖域임을 표시하고 말에서 내릴 것과 함부로 接近하지 말것을 命했다.
후에는 範圍가 넓어져 聖人은 물론 高官, 將軍들의 出生地나 무덤 따위도 聖域으로 指定해 下馬碑를 세우곤 했다. 지금은 宗敎的 意味로도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民主化가 된 지금 聖域의 範疇도 많이 바뀌었다. 청와대는 이미 聖域에서 除外되었으며 過去의 聖域이었던 王宮은 지금은 名勝古蹟으로 指定돼 張三李四도 자유롭게 出入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다만 國家를 위해 獻身하신 殉國先烈의 墓域이나 特定 祠堂만이 聖域의 地位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사건이 터질 때 마다 ‘聖域없이…’라는 말이 등장하곤 하는데 도대체 무슨 聖域이 또 존재하는지 모를 일이다.

 

封 套 봉할 껍질


봉해 덮어 씌우는 것
봉 투


封이 部族간의 境界를 表示하려고 둑에 심은 나무에서 비롯되었고 후에는 ‘諸侯에게 땅을 封하는 것’으로 발전, ‘封하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套는 크고(大) 긴것(長)으로 ‘덮어 씌우다’는 뜻이다. 參考로 장갑을 ‘수투(手套)라고 한다. 덮어 씌우면 가지런하게 되므로 套는 ’세트‘, ’짝‘, ’틀‘, ’버릇‘의 뜻도 가지고 있다. 투습(套習), 語套, 常套的 등의 表現이 있다. 그러니까 封套는 ’封해 덮어 씌우는 것‘이란 뜻이 된다. 지금은 廣範圍하게 使用되고 있지만 본디 公文書를 담은데서 비롯돼었다.
의심 많기로 有名한 中國 사람들이 傳令을 시켜 각종 公文書를 수발(受發)하자니 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죽간(竹簡-대나무쪽)으로 된 公文書를 묶은 다음 진흙으로 쌌는데 그것을 봉니(封泥)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不足해 진흙에다 一定한 表示를 했는데 그것이 현재 도장(圖章)의 始初가 됐다.
지금도 計器나 出入裝置 따위에 납으로 封印해 두는 겨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봉연(封鉛)’이 아닌가. 후에 종이가 발명된 뒤 진흙 처리가 불가능해 지자 現在의 封套로 바뀌면서 그냥 도장만 찍었다. 그렇다면 封套는 疑心의 産物인 셈이다.

 

聖 域 성인 범위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왕궁
성 역


聖域은 본디 ‘聖人의 境地’, 또는 ‘聖人의 범주(範疇)’로서 ‘사람’을 對象으로한 抽象的인 槪念일 뿐이었다. 記錄에 의하면 聖域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요순(堯舜)이나 孔子 같은 人物 程度에 不過했다니 대단한 境地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神聖한 地域’으로 뜻이 바뀌어 어떤 特定 地域을 指稱하는 意味로 使用되게 됐다. 勿論 여기에는 專制君主 時代의 觀念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 임금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絶對 權力을 한 손에 움켜 쥐었다. 이때부터 그는 神聖不可侵의 存在로 認識됐으며, ‘聖’은 곧 ‘임금’을 象徵하게 돼(聖德, 聖恩, 聖節, 聖旨, 聖寵 등) 聖域이라면 임금과 관계되는 ‘神聖 不可侵의 地域’을 뜻하게 되었다. 대체로 궁궐(宮闕)이나 宗廟, 王陵, 出生地 등으로서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聖域임을 표시하고 말에서 내릴 것과 함부로 接近하지 말것을 命했다.
후에는 範圍가 넓어져 聖人은 물론 高官, 將軍들의 出生地나 무덤 따위도 聖域으로 指定해 下馬碑를 세우곤 했다. 지금은 宗敎的 意味로도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民主化가 된 지금 聖域의 範疇도 많이 바뀌었다. 청와대는 이미 聖域에서 除外되었으며 過去의 聖域이었던 王宮은 지금은 名勝古蹟으로 指定돼 張三李四도 자유롭게 出入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다만 國家를 위해 獻身하신 殉國先烈의 墓域이나 特定 祠堂만이 聖域의 地位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사건이 터질 때 마다 ‘聖域없이…’라는 말이 등장하곤 하는데 도대체 무슨 聖域이 또 존재하는지 모를 일이다.

 

封 套 봉할 껍질


봉해 덮어 씌우는 것
봉 투


封이 部族간의 境界를 表示하려고 둑에 심은 나무에서 비롯되었고 후에는 ‘諸侯에게 땅을 封하는 것’으로 발전, ‘封하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套는 크고(大) 긴것(長)으로 ‘덮어 씌우다’는 뜻이다. 參考로 장갑을 ‘수투(手套)라고 한다. 덮어 씌우면 가지런하게 되므로 套는 ’세트‘, ’짝‘, ’틀‘, ’버릇‘의 뜻도 가지고 있다. 투습(套習), 語套, 常套的 등의 表現이 있다. 그러니까 封套는 ’封해 덮어 씌우는 것‘이란 뜻이 된다. 지금은 廣範圍하게 使用되고 있지만 본디 公文書를 담은데서 비롯돼었다.
의심 많기로 有名한 中國 사람들이 傳令을 시켜 각종 公文書를 수발(受發)하자니 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죽간(竹簡-대나무쪽)으로 된 公文書를 묶은 다음 진흙으로 쌌는데 그것을 봉니(封泥)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不足해 진흙에다 一定한 表示를 했는데 그것이 현재 도장(圖章)의 始初가 됐다.
지금도 計器나 出入裝置 따위에 납으로 封印해 두는 겨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봉연(封鉛)’이 아닌가. 후에 종이가 발명된 뒤 진흙 처리가 불가능해 지자 現在의 封套로 바뀌면서 그냥 도장만 찍었다. 그렇다면 封套는 疑心의 産物인 셈이다.

 

一字千金 한 글 일천 쇠
손질할 필요없는 매우 고귀한 문장
일 자 천 금
戰國末의 여불위(呂不韋는 趙의 巨商이었다. 우연히 趙나라에 人質로 잡혀와 있던 秦의 公子 子楚를 만나게 된다. 理財에 능했던 그는 첫눈에 반한 나머지 그를 投資의 對象으로 삼았다. 金錢攻勢를 펴는가 하면 高官을 불러 파티를 열어주었으며 자신의 愛妾인 趙嬉까지 바쳤다. 그의 勞力 德分에 子楚는 歸國해 王位에 오르게 되니 이가 장양왕(狀襄王)이다. 후에 愛妾이 政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王位를 繼承하니 이가 秦始皇이다. 사실 그는 呂不韋의 아들이었다.
그는 秦의 實勢가 되어 國政을 마음대로 料理했다. 당시 大學者인 筍子가 亂世를 叱咤하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리자 自身도 질세라 食客을 시켜 무려 20만자가 넘는 大作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고는 [呂氏春秋]라고 했다. 그는 이 책을 수도였던 咸陽의 城門에 陳列해 놓고는 방을 내걸었다.
“누구든지 이 책의 내용에 첨삭(添削)할 수 있는 자에게는 한 자당 千金의 賞을 내린다” 一見 사람을 無視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뛰어난 商術의 發露일 뿐이다. 그는 이를 통해 더욱 奇拔한 頭腦를 가진 食客을 끌어 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후 一字千金은 ‘매우 高貴한 文章이나 著述’을 뜻하게 되었으며 內容이 너무도 完壁하여 손질할 必要가 없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以卵投石 써 알 던질 돌
계란으로 바위치기
이 란 투 석
한번은 筍子가 趙의 효성왕(孝成王) 앞에서 임무군(臨武君)과 用兵에 대해 論難을 벌인 적이 있다. 臨武君이 먼저 말했다. “天時와 地利를 이용하고 敵의 動靜을 보아 機先을 잡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筍子는 먼저 民心을 모으는 것이 더 重要하다며 이에 反對했다.
그 까닭은 簡單하다. 아무리 활의 名手인 사람이라도 활이 좋지 않으면 맞힐 수 없고, 명 騎手도 鈍馬로는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臨武君도 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用兵의 核心은 形勢를 보아 勝利하는 데 있고, 行軍은 謀略과 變化에 있으니 用兵에 能한 將帥는 新出鬼沒하듯 합니다. 孫子나 吳子의 用兵이 그러했습니다. 戰爭과 民心은 別個의 問題지요”
筍子도 反論을 提起했다. 權謀術數로 攻擊하는 것은 帝王의 用兵이 아니라 諸侯의 用兵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桀과 같은 暴君을 치러면 혹 權謀 必要할 지 모르겠으나 그런 方法으로 堯와 같은 聖君을 對하는 것은 마치 鷄卵으로 바위를 치는 것{以卵投石}과 같고, 손가락으로 끓는 물을 휘젓는 것{이지요비(以指撓沸)}과 다름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無意味한 짓’이라는 것이다.

 

一字千金 한 글 일천 쇠
손질할 필요없는 매우 고귀한 문장
일 자 천 금
戰國末의 여불위(呂不韋는 趙의 巨商이었다. 우연히 趙나라에 人質로 잡혀와 있던 秦의 公子 子楚를 만나게 된다. 理財에 능했던 그는 첫눈에 반한 나머지 그를 投資의 對象으로 삼았다. 金錢攻勢를 펴는가 하면 高官을 불러 파티를 열어주었으며 자신의 愛妾인 趙嬉까지 바쳤다. 그의 勞力 德分에 子楚는 歸國해 王位에 오르게 되니 이가 장양왕(狀襄王)이다. 후에 愛妾이 政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王位를 繼承하니 이가 秦始皇이다. 사실 그는 呂不韋의 아들이었다.
그는 秦의 實勢가 되어 國政을 마음대로 料理했다. 당시 大學者인 筍子가 亂世를 叱咤하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리자 自身도 질세라 食客을 시켜 무려 20만자가 넘는 大作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고는 [呂氏春秋]라고 했다. 그는 이 책을 수도였던 咸陽의 城門에 陳列해 놓고는 방을 내걸었다.
“누구든지 이 책의 내용에 첨삭(添削)할 수 있는 자에게는 한 자당 千金의 賞을 내린다” 一見 사람을 無視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뛰어난 商術의 發露일 뿐이다. 그는 이를 통해 더욱 奇拔한 頭腦를 가진 食客을 끌어 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후 一字千金은 ‘매우 高貴한 文章이나 著述’을 뜻하게 되었으며 內容이 너무도 完壁하여 손질할 必要가 없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以卵投石 써 알 던질 돌
계란으로 바위치기
이 란 투 석
한번은 筍子가 趙의 효성왕(孝成王) 앞에서 임무군(臨武君)과 用兵에 대해 論難을 벌인 적이 있다. 臨武君이 먼저 말했다. “天時와 地利를 이용하고 敵의 動靜을 보아 機先을 잡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筍子는 먼저 民心을 모으는 것이 더 重要하다며 이에 反對했다.
그 까닭은 簡單하다. 아무리 활의 名手인 사람이라도 활이 좋지 않으면 맞힐 수 없고, 명 騎手도 鈍馬로는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臨武君도 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用兵의 核心은 形勢를 보아 勝利하는 데 있고, 行軍은 謀略과 變化에 있으니 用兵에 能한 將帥는 新出鬼沒하듯 합니다. 孫子나 吳子의 用兵이 그러했습니다. 戰爭과 民心은 別個의 問題지요”
筍子도 反論을 提起했다. 權謀術數로 攻擊하는 것은 帝王의 用兵이 아니라 諸侯의 用兵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桀과 같은 暴君을 치러면 혹 權謀 必要할 지 모르겠으나 그런 方法으로 堯와 같은 聖君을 對하는 것은 마치 鷄卵으로 바위를 치는 것{以卵投石}과 같고, 손가락으로 끓는 물을 휘젓는 것{이지요비(以指撓沸)}과 다름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無意味한 짓’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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