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친 분이 한중 철도망 지도를 올리신 걸 보고 눈이 번쩍 떠졌다.
중국 사서에 낙랑에 대한 기록이 결국 이 철도망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낙랑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평양과 낙양 사이에 물류 교역의 중간 센터로서 '낙랑'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요동 낙랑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그래서 후한서에서 이를 언급하며 '낙랑은 요동에 있다'고 한 것이다.
고대에 郡의 개념은 행정 구역이 아니라, 기관이 있는 소재지 명칭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원래 邑의 개념도 그런 것이었다. 조상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는 곳이 邑이었다. 지역 포괄의 개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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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단 요동 낙랑설 이해하기 : 낙양~평양 사이에도 있었을 낙랑]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식민사학이 아니다.
이미 고고학적으로 다 검증된 것이고 결론이 난 사안이다.
그럼에도 낙랑군이 요서(엣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은 후한서의 기록 때문이다. 후한서 권1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대한 당나라 이현(李賢)의 주석은 이렇다.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이덕일은 이를 내세워 낙랑 요동(현 요서)설을 주장하는 걸로 그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윤병모 교수 (성신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2023년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낙랑군이 漢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사건이 있었다.
후한서 왕경열전(王景列傳)에는 낙랑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조를 토벌할 때 "요동에서 토벌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후한서의 낙랑 요동설은 이 사건과 관련되어 기술된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평양의 낙랑과 요동의 낙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여기서 부터는 필자의 생각이다.
일단 가능한 설명은 평양에 있던 낙랑이 漢의 식민통치 기구가 아니라 중국이 동북방을 관리할 때 사용하는 토착 세력을 자치 제후로 봉하는 관행상, 이를 조계지 성격의 교역의 중심이었다는 점으로 생각해 보자.
그러면 물자나 사람이 낙양과 평양을 오고 가야 한다.
당연히 중간 기지가 필요할 것이고, 그 기지 역시 '낙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낙양-평양의 중간 지역인 북경 근처에 '낙랑'이라는 이름의 중간 집결 교역 센터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이를 좀 더 확장해 보면 '낙랑 교역 루트'라는 것이 평양~낙양 사이에 물류나 숙박 거점으로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상인들과 이들을 보호하는 호송 운반 인력들이 거주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낙랑'이라는 개념을 군현의 지역 개념으로 이해하면 모순이 발생하지만, 통일신라 시기의 '신라방', '신라소'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해결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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