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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면서 일하기/intotheTHAILAND

태국이 겪은 일제 시대 -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by 리치캣 2025.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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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richcat.tistory.com/303871?category=1141959 [리치캣의 현재 그리고 미래: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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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2차대전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 영상

태국이 겪은 일제 시대 -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 태국이 겪은 '일제 시대'는 실제로는 어떤 모습이었고, 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동맹국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일본과 갈등을 겪으며 주권을 지키려 노력했고, 이러한 복잡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관계가 실제의 모습입니다.

 

💡 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인가?

  • 일본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 불가 및 태국 의견 수용

  • 태국 총리의 일본 침공 초기 대응 지연 및 반발

  • 일본군의 영사관 건물 매입 시도 저지 및 북부 토지 조사 지시

  • 일본군의 쌀 수출 요구 거절 및 쌀 판매 거부

  • 일본군 지휘부의 태국 폭격 피해 위로금 제안 거부 (동맹국이므로 당연히 겪을 일로 간주)

  • 태국 내 자유태국 운동 세력 활동 가능성

목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태국의 관계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이 콘텐츠는, 태국이 단순히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불완전한 동맹국’이었음을 구체적인 사례로 증명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빤 사건'을 비롯해 일본의 일방적 압박과 태국의 주권적 저항이 교차했던 순간들을 생생하게 추적하며, 양국 관계의 복잡한 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1. 태국과 일본의 관계: 식민지가 아닌 '불완전한 동맹국'

이 타임라인 노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기록입니다. 핵심은 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불완전한 동맹국'이었다는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양국은 겉으로는 동맹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많았으며, 일본은 태국의 의견을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 자료의 출처 및 저자 소개

  1. 자료 출처: 이 내용은 일본에서 최근 출간된 '동맹국 태국과 주둔 일본군'이라는 책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2. 책의 내용: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태국에 어떻게 주둔했고, 어떻게 철수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3. 번역 및 접근성: 해당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으며, 한국인들에게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은 적은 편입니다.

  4. 저자 정보: 저자는 일본 명문대학교에서 태국어 학과 전공 교수를 지냈으며, 태국 라빠건 대학교에서도 객원 교수를 역임하다가 태국 현지에서 사망한 인물로, 이 책은 그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 태국은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주장의 근거

  1. 책의 반복적 강조: 저자는 이 책에서 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논문 심사 계기: 저자는 한 태국인이 쓴 박사 논문에서 '일본 점령하의 태국'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고,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삼았습니다.

  3. 일본 내 인식: 태국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태국을 식민지나 점령국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4. 사실 관계 명확화: 저자의 집필 목적은 태국이 일본의 동맹국이었지 식민지나 점령국이 아니었다는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5. 주장 확신: 책을 읽어보면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내부적 갈등: 양국은 겉보기에는 동맹이었지만,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일본이 원하는 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었으며, 태국의 의견을 일부 수용해야 했습니다.

  7. 식민지였다면 불가능: 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면 이러한 내부적 갈등 조정 과정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태국-일본 관계의 배경

 

2.1. 국제연맹에서의 태국의 중립적 태도

  1. 만주국 승인 거부 투표: 1930년대 초, 국제연맹(UN의 전신)에서 중화민국의 요청으로 만주국 승인 거부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2. 투표 결과: 대다수 회원국이 승인 거부표를 던졌고, 일본만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3. 태국의 기권: 이때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진 국가가 태국이었습니다.

  4. 기권 이유: 태국은 일본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어느 쪽의 편도 적도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기권했습니다.

  5. 외교적 스탠스: 태국은 오래전부터 멀리 떨어진 분쟁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왔으며, 현재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2.2. 1930년대 태국 내 일본 영향력 증가

  1. 미일 관계: 1930년대부터 일본이 태국에 들어오기 직전인 194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 미국의 외교 관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2. 민간 교류 및 기업 진출: 민간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미츠이 물산 방콕 사무소가 1930년대에 태국에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3. 일본 대기업 진출: 미쓰비시 상사, 요코하마 전금은행(현재 미쓰비시 UFJ 은행 전신) 등 일본 대기업들도 1930년대에 태국에 진출했습니다.

  4. 일본인 체류자 증가: 태국 체류 일본인 수는 1931년 309명에서 1940년에는 566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참고: 당시 조선인은 방콕 외 빠다니 일부에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5. 일본 영향력 배경: 일본이 태국에서 영향력을 늘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양 세력(영국, 프랑스)에 대한 거부감과 당시 태국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화교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6. 기대 요인: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새로운 신흥 세력인 일본에 대한 기대가 태국에 어느 정도 존재했습니다.

  7. 이해 관계: 아시아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목표와 중국과도 싸우고 있던 일본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일본이 태국의 영토 회복에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8. 실상: 겉보기와 달리, 실상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일본 침공 임박과 외교적 마찰 (1941년)

 

3.1. 일본군 주둔 전 태국의 부정적 인식과 경계

  1. 피분송크람 총리의 발언 (1941년 11월 26일): 총리는 내각 회의에서 일본인들이 태국 내에서 말을썽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1. 일본인들의 행동: 돈을 엔화로 지불하거나 여성의 가슴에 담배꽁초를 끼워 넣는 등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2. 마찰 증가: 태국인과 일본인의 마찰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언급했습니다.

  2. 선제적 경계: 일본 침공이 임박하기 전부터 태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일찍부터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3. 영미에 도움 요청: 피분송크람 총리는 일본 침공 몇 달 전, 주태국 영국 및 미국 공사를 만나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도움을 문의했습니다.

  4. 영미의 답변: 영국과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대한 무기 지원 방식으로만 도울 수 있으며, 일본 침략에 대한 방어는 태국 스스로 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5. 총리의 고뇌: 영국과 미국의 답변을 들은 피분송크람 총리는 판단이 서지 않아 내각회의에서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발언을 했습니다.

 

3.2. 일본의 침공과 총리의 부재

  1. 일본의 침략 시작: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새벽 1시경 태국을 침략했습니다.

  2. 총리의 행적 파악의 어려움: 당시 피분송크람 총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태국 기록에서는 방콕에 없었다는 정도로만 확인됩니다.

  3. 책에 기록된 총리의 행적: 책에 따르면 침략 전날인 12월 7일, 총리는 프랑스로부터 할양받은 동부 행정구역 영토 시찰을 나가 있었습니다.

  4. 복귀 지연: 총리는 일본군의 침략 정보를 듣고도 급하게 방콕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5. 개인적 기록: 총리는 개인 기록에서 시찰을 권유받아 머물렀다고 했으나, 책에서는 나라가 침략받는 상황에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4. 일본군 진주와 태국 각료들의 초기 대응 (12월 7일 밤)

 

4.1. 총리 부재 시 긴급 회의 소집

  1. 일요일 저녁: 침략 전날인 12월 7일 일요일, 각료들은 자택에서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2. 긴급 소집: 부총리 아둔 아둔데짜는 영국 공사와 저녁 식사 중 경제부 총리의 전화를 받고 식사를 중단하고 총리 관저로 급히 이동했습니다.

  3. 총리 관저 집결: 외교부장관, 재무부 장관 등 태국 각료들과 일본 대사관 직원 약 20명, 일본측 무관 다수가 총리 관저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

  4. 일본 측의 요구: 주태국 일본 대사 찌보카미 테이지가 등장하여, 일본이 미국 및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영국령 버마 및 말레이시아 공격을 위해 태국 통과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5. 태국 측의 초기 대응:

    1. 외교부장관 디렉 차이아남: 태국은 중립국이므로 어느 편도 들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2. 부총리 아둔: 총리가 부재 중이므로 총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6. 일본 측의 압박: 일본 측 인사들은 이미 일본군이 태국 영토에 들어와 전투가 일부 진행 중이라며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결정하라고 압박했습니다.

 

4.2. 총리 도착 및 일촉즉발의 상황

  1. 긴급 조치: 부총리는 장성급 군인을 동부 국경지대로 급파하여 피분송크람 총리의 위치를 찾게 하고, 총리에게 방콕으로 귀환하라는 메시지를 다시 보냈습니다.

  2. 총리 도착: 양국 의견 대립 속에서 날이 밝았고, 피분송크람 총리는 아침 7시경에야 총리 관저에 도착했습니다.

  3. 일본의 재압박: 총리가 관저에 들어가자마자 일본 측 인사들은 총리를 둘러싸고 일본군 통과 즉시 허락을 압박했습니다.

  4. 총리의 답변: 총리는 국가 존립이 달린 문제이므로 내각회의 심사와 구왕(국왕)의 재가를 받은 후 답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5. 협정문 투척 및 위협: 일본 총영사 아사다 스케가 관저 문을 발로 차서 닫고, 가져온 협정문 서류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일본군은 꾀는 것을 싫어하니 빨리 서명하라"고 위협했습니다.

  6. 태국 측의 반발: 일본어 소통 담당인 완빠나논은 일본인들에게 "태국 총리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외치며, 이 행동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7. 신체적 대치: 총리가 2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일본 무관 모리아 세이지가 총리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이를 떼어내려는 닛시와 대치하던 모리아 대자는 군도에 손을 댔고, 교육부 장관 브라윤 파먼트리와 하원 의원 자이 브라티파센도 권총에 손을 대어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8. 일단 중지: 일본 대사 찌보카미 테이지가 양측을 말리면서 태국 측에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총리는 각료들과 긴급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5. 긴급 내각 회의 및 항전 중단 결정

 

5.1. 회의 중 논의 과정

  1. 총리의 최우선 과제: 총리는 국방부 장관 만건 프롬디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군인들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휴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언급했습니다.

  2. 현장 상황 문의: 총리는 빠다니 지역에서는 대대 한 개가 전멸했다는 보고를 들었다며, 사모브라간 지역에서 지금 싸우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3. 국방부 장관의 답변: 국방부 장관은 "총리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으나, 총리는 회의 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4. 국민 여론: 외무부 차관은 국민들은 정부가 어느 방향으로 가든 따를 것이며, 사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5. 결론: 짧은 시간 동안 논의 후, 결국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며 항전을 중단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5.2. 스웨덴 사례와의 비교 분석

  1. 프리디 파노미용의 제안: 재무부 장관이자 반맛사 대학교 설립자인 프리디 파노미용은 독일군의 국토 통과를 허용한 스웨덴의 사례를 들며, 일본과 협의 시 비슷한 조건을 제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2. 태국이 스웨덴과 달랐던 점: 태국은 스웨덴처럼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침략 여부: 스웨덴은 독일의 직접적 침략을 받지 않았으나, 태국은 일본의 직접적 침략을 받았습니다.

    2. 허용 범위: 스웨덴은 독일군 통과 허용 및 원자재 보급에 국한되었으나, 태국은 일본군 통과 허용, 일본군 주둔 허용, 미국/영국에 선전포고, 군사 작전 동참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5.3. 영국 및 미국 공관의 억류와 대피 지연

  1. 영미 공관의 대피 계획 좌절: 일본군이 태국에 들어오자마자 영국 공사 조사이아 크로스비와 미국 공사를 공사관에 가두어, 자국민과 미국인을 영국령 식민지로 대피시키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습니다.

  2. 외교부 장관에게 요청: 크로스비는 외무부 장관 디렉 차이아남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3. 연락 두절: 이후 일본군이 전화선을 끊어버려 더 이상 연락이 불가능해졌습니다.

  4. 대피 시점: 일본군 대신 태국 경찰이 근무를 서게 되면서 제한이 다소 완화되었으나, 공사관 인원들이 태국을 빠져나가는 데는 7~8개월이 더 소요되었습니다.

 

6. 연합국 포로 및 자국민 관리와 주권 유지

 

6.1. 서양인 포로 및 민간인의 수용과 관리

  1. 강제 이주시킨 서양인: 일본군은 태국에 거주하던 영국인, 미국인 등 서양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2. 탐마사 대학교 수용: 처음에는 공사관이나 호텔을 이용했으나, 수용 인원이 많아지자 태국 측의 동의를 얻어 탐마사 대학교 타프라잔 캠퍼스로 옮겼습니다.

  3. 수용 인원 구성: 이 캠퍼스에는 영국인, 미국인, 네덜란드인, 호주인 등이 있었으며, 많을 때는 천여 명, 적을 때는 200~300명 정도가 수용되었고 대부분 영국인이었습니다.

  4. 태국의 관리: 태국이 이들에 대한 관리를 맡았는데, 이동의 자유만 제한했을 뿐 여가 활동은 보장해 주었습니다.

  5. 일본의 불만: 태국이 여가 활동을 보장하는 것을 일본은 좋지 않게 여겼으나, 일본은 간섭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6. 주권 유지 근거: 일본은 태국이 식민지가 아니며,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유지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태국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7. 아시아인 보호: 일본은 서양인에 대해서는 자유를 제한했지만, 태국 거주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적대 행위만 하지 않으면 보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8. 식량 조달: 이 영향으로 공사관에 억류된 서양 공사 및 직원들의 식량을 중국인 직원이 시장에 나가 사 올 수 있었습니다.

 

6.2. 영국 재산 압류와 배상 문제 발생

  1. 영국 선전포고 후 조치: 1942년 1월 태국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이후, 태국 당국은 태국 거주 영국인들의 개인 재산을 모두 압류했습니다.

  2. 재산 분실 및 배상: 이 압류 재산 중 일부가 전쟁 중 혼란으로 인해 분실되는 경우가 발생했고, 이것이 전쟁 후 태국이 영국과 배상 문제를 남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7. 버마 침공 및 영토 할양 (빤 사건 이전)

 

7.1. 버마 침공 작전과 초기 갈등

  1. 군사 작전 동참: 일본과 한패가 된 태국은 일본과 함께 버마 침공 작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2. 태국의 적극성: 중국 운남성에 있는 십성 빤나를 향하는 버마 영토 진출에 대해 태국 측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같이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3. 일본의 거부와 지시: 일본군은 처음에는 태국군의 실력을 신뢰하지 않아 거절했으나, 대본영으로부터 신속히 태국과 함께 버마 침공 작전을 진행하라는 특별 지시가 내려와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4. 작전 지도 및 점령: 비분송크람 총리의 팔을 붙잡았던 모리아 세이지 무관이 태국 측 작전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태국군은 1942년 5월, 태국어로 지양(Chaiya)이라 불리는 뚱뚱 지역 일대를 점령하고 '사하라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5. 영유권 갈등: 전쟁 끝날 때까지 태국군이 통치한 이 지역에 대해, 처음에는 일본군이 영유권을 주장하여 약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6. 도조 히데키의 방문과 영토 결정: 1943년 7월 도조 히데키 일본 수상이 태국을 방문했을 때, 이 지역을 태국에게 할양하기로 결정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태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7.2. 추가 영토 할양과 피분송크람 총리의 반응

  1. 추가 할양 지역: 도조 히데키는 이 지역 외에도 현재 말레이시아 영토인 트란카누, 사이보리, 빨릿, 끌란이 지역들도 태국에게 할양하기로 했습니다.

  2. 할양 이유: 도조는 피분송크람에게 동맹으로서 은혜에 보답하고, 장래 합동 작전의 편의를 위해 할양한다고 말했습니다.

  3. 총리의 반응과 복잡한 심경: 피분송크람 수상의 표정은 전혀 기쁘지 않아 보였습니다.

    1. 사하라타이듬 지역: 태국인과 문화/풍습이 비슷하여 통치가 용이했습니다.

    2. 말레이시아 지역: 태국과 민족, 문화, 종교가 전혀 달라 통치에 부담이 되었고, 전시라 재정적 여유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4. 실제 의사: 비분송크람은 북쪽 지역은 필요하지만 말레이시아 지역 영토는 필요 없다는 생각을 나중에 밝혔습니다.

  5. 영토 귀속 시기: 해당 지역들은 1943년 10월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태국의 영토였습니다.

  6. 일본 내부의 반응: 일본 내부적으로는 총리가 해당 지역 사령부와 상의 없이 태국에게 영토를 할양한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그럼에도 총리의 반응이 무덤덤했던 것에 일본 측이 당황했습니다.

 

8. 빤 사건 발생과 신뢰 악화 (1942년 말)

 

8.1. 빤 사건의 발단 및 전개 (1942년 12월)

  1. 사건 발생 시점: 빤 사건은 앞서 영토 할양 논의(1943년 7월) 이전에 발생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양국 관계의 분열이 심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사건 위치: 빤 사건은 방콕 근처 크라채부리 짱맛의 반뽕이라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3. 사건 배경: 이곳은 1942년 12월 당시 태국과 미얀마(버마)를 잇는 태면철도 건설 현장으로, 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이 철도 건설을 위해 데려온 연합국 포로(영국, 호주 등)가 모여 있던 장소였습니다.

  4. 직접적 발단: 한 태국 승려가 연합국 포로에게 담배를 건네주자, 이를 본 일본군 한 명이 승려를 구타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5. 일본군의 규정: 당시 일본군은 포로에게 무언가를 주는 현지 태국인 행위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처벌했습니다.

  6. 노동자들의 반격: 이 소식을 들은 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군에게 해코지를 했고, 일본군이 보복하고자 노동자 숙소에 난동을 부렸습니다.

  7. 사상자 발생: 태국인 노동자들은 농기구와 삽으로 반격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8. 사상자 통계: 양측 모두 피해가 있었으나, 정확한 사상자 통계는 확인된 바 없으며, 특히 태국 측 피해 기록이 없는 편입니다.

  9. 사건 후 조치:

    1. 태국 측 반감 확산: 태국인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거나 철도를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일본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습니다.

    2. 태국 정부의 보도 통제: 비분송크람은 사건 보도를 금지하여 소문 확산을 막았으며, 이것이 태국 측 통계 부족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3. 태국 정부의 수습: 총리는 태국군 병력 이동을 제한하고 사건 관련 태국인을 처벌했습니다.

    4. 일본의 화답: 일본 측은 일본군 사망자에 대해 태국이 지급하기로 한 배상금을 받지 않음으로써 이에 화답하고자 했습니다.

  10. 불신의 심화: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의 불신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8.2. 빤 사건 이후 태국의 주권적 저항 강화

  1. 치앙마이 궁전 매입 저지 (1943년): 1943년, 일본 대사관이 치앙마이의 옛 란나 왕국 궁전을 영사관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 신청을 했으나, 피분송크람 총리는 정부가 긴급 매입하도록 지시하여 일본의 사용을 막았습니다.

  2. 토지 구매 조사 지시: 총리는 일본인이 태국 북부 지역에서 토지 구매를 시도할 경우 철저히 조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3. 합동 군사 작전 중단: 1942년 버마 침공 작전 이후, 양국 간 합동 군사 작전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으며, 이는 양국 간 불신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9. 쌀 수출 요구와 갈등 (1943년~전쟁 말기)

 

9.1. 일본의 쌀 수출 요청과 태국의 곤경

  1. 쌀 수출 요청: 1943년 7월, 일본은 태국 측에 매월 약 7만 톤의 쌀 수출을 요청했습니다.

  2. 태국의 난색 표명과 합의: 태국은 흉작과 국내 사정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이미 일본으로부터 기관차와 화물차를 제공받은 상황이었기에 마지못해 합의했습니다.

  3. 합의 수량 미달의 원인: 실제로는 합의한 수량을 맞출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연합국 공습: 1942년부터 시작된 연합국의 공습으로 철도가 파괴되어 수송 능력이 상실되었습니다.

    2. 지역 유지의 거부: 일부 지역에서는 가뭄과 흉작으로 인해 지역 유지들이 일본군에게 쌀 판매를 거절했습니다.

  4. 전쟁 말기 상황: 쌀 재고가 있어도 나중에 부족해질 것을 우려하여 반출을 거부했고, 심지어 일본이 돈을 주고 구매 완료한 쌀까지 반출을 막았습니다.

  5. 담합 행위: 1945년 3월에는 이산 지역 11개 장왓이 담합하여 일본군에게 쌀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로 인해 베트남 대기근 때 이산 지역 쌀을 구매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6. 수송 방해: 수리인 지역에서는 대금 지불이 끝난 쌀 1,330톤을 태국 측의 방해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송할 수 없었습니다.

  7. 일본의 입장: 태국이 식민지나 점령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손쓸 도리가 없었으며, 태국의 이러한 태도를 좋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10. 동맹국에 대한 냉담한 대처와 일본군 입지 불안정

 

10.1. 방콕 폭격 시 일본 지휘부의 반응 (1943년)

  1. 방콕 폭격 피해: 태국이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한 후 지속적으로 공습을 받았으며, 1943년 12월 23일 저녁 폭격기 30대가 방콕 번화가를 폭격하여 가옥 10여 채가 전소되고 11명이 사망했습니다.

  2. 위로금 전달 제안: 당시 방콕 주제 독일 공사, 태국 주둔군 사령관(나카무라 아게토), 일본 대사(츠보카미 테이지) 셋이서 피해 가옥에 위로금을 전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3. 대본영과 남방군 지휘부의 답변: 연락 결과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습니다.

    1. "위로금 따위 낼 필요 없다."

    2. "태국은 동맹국이잖아."

    3. "동맹국이 폭격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향후 빈번하게 당할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괜히 쓸데없는 전례를 만들지 마라."

  4. 일본 지휘부의 인식: 답변을 들은 사령관은 방콕 실정을 모르는 지휘부에 분노했고, 개별적으로 방콕 시장을 찾아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 지휘부가 태국을 어떻게 여겼는지 보여줍니다.

 

10.2. 피분송크람 사임과 일본군 입지 약화 (1944년)

  1. 총리 사임 의사: 1944년 7월 말, 피분송크람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혔는데, 이는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작전에서 실패하여 전황이 악화되던 시기였습니다.

  2. 연합국 점령과 일본의 사과: 1944년 7월 30일, 남부 라넝 지역 일부가 연합국에게 점령당하자 일본이 태국에게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3. 내분 및 소문: 이 사과 사건은 태국군과 일본군이 방콕에서 교전 중이라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내분이 일어나 전투력이 약화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4. 민심 악화: 태국 내에서 이러한 소문이 퍼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며, 일본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면서 일본군의 입지도 불안정해졌습니다.

  5. 일본군의 퍼포먼스: 1944년 8월 29일, 피분송크람 총리의 사임에 항의하는 뜻으로 일본군 약 10여 명이 줄라롱콘 대학병원 내부를 총검을 들고 포복 전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6. 추가 행군: 다음 날인 8월 30일에도 일본군 약 200여 명이 주둔지 근처와 병원 내부를 행군했으나, 주권 국가인 태국에 일본은 직접적인 내정 간섭을 할 수 없었기에 고작 이 정도의 행동만 가능했습니다.

 

10.3. 종전 후 상호 배려와 관계 평가

  1. 일본의 폐전 선언 (1945년 8월 16일): 일본군 사령관 무라카토는 피분송크람 전 총리, 쿠 아파이 현 총리 등을 초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 독립 존중: "태국의 독립을 존중합니다."

    2. 우정 감사: "일본 태국 동맹의 우의를 다지며 여러분의 신뢰 두터운 도움을 받아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3. 미래 기원: 폐전의 책임을 지지만, 태국 국민들과의 변함없는 우정을 바라며 부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원했습니다.

  2. 작별 인사: 8월 18일, 쿠 아파이 총리는 무라카토 사령관 등 일본 측 인사를 초청하여 성별회를 열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3. 상호 배려: 양국 모두 체면을 존중하는 문화 때문에 마지막에는 서로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4. 불안했던 관계: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양국은 뒤에서는 서로 견제했으며 온갖 불화와 갈등의 씨앗이 내재된 불안한 관계였습니다.

  5. 반체제 활동 가능성: 이러한 불안한 관계 덕분에 자유태국 운동 세력 같은 반체제 세력들이 은근히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11. 전쟁 후 결과 및 회고

  1. 전쟁 배상금: 전쟁 후 태국은 차관까지 합쳐서 약 150억 엔 정도를 배상금으로 받았습니다.

  2. 가상 시나리오: 만약 전쟁이 더 길어져 불안한 동맹 관계가 이어졌다면, 빤 사건보다 더 심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여 양국 간 분열이 심화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남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4CRsR_jk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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