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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면서 일하기/ARTreet, 루미이즈

친일파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기괴한 성욕으로 세상을 놀래킨 백남준의 결혼생활

by 리치캣 202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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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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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발견법과 창의적 시도의 중요성 (337-350)

    책 『삶은 공학』에서는 발견법(Discovery Method)을 강조한다. 

이 책의 내용이 나의 습관과 비슷하다.  그래도...이 책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백남준과 나와의 공통점은.... "재미" 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재밌으면 한다, 재미없으면 안한다. 가 원칙인데....ㅎㅎㅎ

친일파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기괴한 성욕으로 세상을 놀래킨 백남준의 결혼생활

 


📌 친일파 금수저 백남준의 '기괴한 성욕'으로 세상을 놀래킨 결혼생활의 진실은?

백남준은 14년간 자신을 쫓아다닌 쿠보타 시게코와 결혼했지만, 이는 그녀의 자궁암 수술을 위한 의료보험 때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예술적 뮤즈 샬롯 만과 첫사랑 이경희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목차
1. 백남준의 배경과 초기 반항 (1-13)
1.1. 친일파 아버지와 가문의 배경
1.2. 아버지와의 갈등과 사상적 영향
2. 예술적 각성과 해외 유학 시기 (14-43)
2.1. 중학교 진학과 음악적 탐구
2.2. 홍콩 유학 및 6.25 전쟁 경험
2.3. 일본 대학 진학과 독일 유학 결정
3. 존 케이지와의 만남과 플럭서스 예술의 시작 (44-61)
3.1. 존 케이지의 충격과 초기 퍼포먼스
3.2. 존 케이지를 위한 예찬 퍼포먼스
3.3. 플럭서스 예술의 정의
4. 기괴한 사랑과 예술적 파트너십 (62-119)
4.1. 쿠보타 시게코의 짝사랑과 만남
4.2. 샬롯 만과의 예술적 결합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4.3. 샬롯과 백남준의 관계에 대한 단서들
5. 쿠보타의 예술적 동참과 결혼 (120-156)
5.1. 쿠보타의 질투와 예술적 투쟁
5.2. 결혼과 백남준의 조국에 대한 갈망
6. 조국에 대한 갈망과 비디오 아트의 시작 (157-178)
6.1. 조국에 대한 생각과 비디오 아트의 태동
6.2. 부처 전시와 공학적 발상
7.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다다익선 구상 (179-214)
7.1. '굿모닝 미스터 오웰' 대규모 프로젝트
7.2. 다다익선 구상 및 설치
8. 삼성과의 협력과 첫사랑의 추억 (215-243)
8.1.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과 삼성의 지원
8.2. 한국에서의 첫사랑 이경희와의 재회
9. 뇌졸중 발병과 기괴한 재활 치료 (244-271)
9.1. 뇌졸중 발병과 전성기의 끝
9.2. 성적 충동을 활용한 재활 치료와 기록
10. 백악관 사건과 쿠보타의 헌신 (272-293)
10.1. 백악관 바지 흘러내림 사건과 논란
10.2. 쿠보타의 헌신과 말년의 태도
11. 마지막 만찬과 예술적인 장례식 (294-303)
11.1. 마지막 순간과 장례식 퍼포먼스
11.2. 넥타이 자르기 퍼포먼스의 전개
12. 사후 논란과 작품 가격의 저평가 (304-347)
12.1. 동해 표기 논란과 아버지의 친일 행적 수면 위
10.2. 작품 가치 제고 시도와 최고가 기록
13. 발견법과 창의적 시도의 중요성 (337-350)


백남준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기괴한 성욕과 예술적 반항'의 여정을 따라가 보세요. 친일파 금수저 배경에서 벗어나 존 케이지와 샬롯 만 등과의 충격적인 만남을 통해 플럭서스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단순한 전기적 사실 나열을 넘어, 예술적 변수를 포용하고 공학적 발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 그의 실험 정신을 통해, 불확실한 세상에서 창의적 시도를 통해 해답을 찾는 실용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1. 백남준의 배경과 초기 반항 (1-13)


1.1. 친일파 아버지와 가문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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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은 악명 높은 친일파였으며, 김구와 임시정부의 숙청 대상이자 친일인사 명단 초안에 이름이 오를 정도였다.

    그의 고향집인 창신동 집은 약 3,300명에 달하는 하인을 두었으며, 차 수리 공장도 운영했다.

    백남준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백남준이 가업을 물려받기를 바랐다.


1.2. 아버지와의 갈등과 사상적 영향

    백남준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피아노 연주를 더 좋아했다.

    아버지는 사내자식이 여자들이나 하는 피아노를 친다며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백남준은 별장 앞마당에 건반을 그려놓고 땅을 두드리며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구석에 틀어박혀 책 읽기에 몰두했으며,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사회주의 시선으로 본 아버지의 자본은 거짓과 가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고 느꼈다.

    이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깊은 혐오가 시작되었으며, 백남준은 자신의 집을 "부패한 가문"이라고 회상하며 괴로워했다.


2. 예술적 각성과 해외 유학 시기 (14-43)


2.1. 중학교 진학과 음악적 탐구

    1945년 중학교에 진학한 후 아버지의 간섭이 줄어들자 백남준은 예술성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에 본격적으로 심취했으며, 이때 깊이 빠진 음악가는 아놀드 쉔베르크로, 그는 음악의 틀 자체를 완전히 깨버린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기존 주류사회에 반항하는 그의 행위 음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백남준은 음악 선생님들을 만나고, 마르크스 사상을 추앙하는 좌파 성향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가족들과 점차 멀어졌다.


2.2. 홍콩 유학 및 6.25 전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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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후반기, 아버지는 문제아인 아들을 가만둘 수 없어 강제로 홍콩으로 끌고 갔다.

    당시 여권 번호는 발급 순서대로 정해졌는데, 백남준 부친의 번호가 6번, 백남준의 번호가 7번이었다는 추측이 있으며, 이는 당시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다음 순서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는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화폐 무기 거래까지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렸다.

    홀로 타지 생활을 지속하던 중 집안 행사 때문에 잠시 귀국했을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식구 대부분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지만, 백남준은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한 청년답게 북한군에 대한 적대감이 적어 서울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북한군이 집에 쳐들어와 기르던 개를 잡아먹는 행패를 부리자, 본인이 생각한 유토피아와 달랐던 북한군에 깊이 실망했다.

    결국 그는 망명자처럼 부산으로 내려갔고, 7월에 밀항하여 일본으로 넘어가 대학에 진학했다.


2.3. 일본 대학 진학과 독일 유학 결정

    두뇌가 명석했던 백남준은 도쿄대학교 상과에 들어갈 실력이 충분했으나, 아버지를 속이고 예술 대학을 선택했다.

    그는 훗날 이때를 부자지간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도쿄대 졸업 후 예술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파리 유학을 시도했으나, 아버지가 파리는 퇴폐적이라며 결사 반대하자 독일 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혐오했지만, 그 집안 덕분에 다양한 국가에서 부유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그는 인생을 바꿀 두 번째 스승을 만나게 된다.


3. 존 케이지와의 만남과 플럭서스 예술의 시작 (44-61)


3.1. 존 케이지의 충격과 초기 퍼포먼스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여름 학교에서 존 케이지의 연주를 들은 백남준은 마치 돌을 씹은 것처럼 엄청난 충격과 전유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존 케이지는 당시 4분 33초 연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전설적인 현대음악의 거장이었다.

    그의 악보에는 음표 대신 '타셋(Tacet)'이라는 악상이 적혀 있었으며, 케이지는 관객들의 기침소리, 웅성거림, 빗소리, 침묵 또한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행위 음악에 영감을 받은 백남준은 '머리를 위한 선'이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이 퍼포먼스는 잉크와 토마토 주스가 든 통에 머리를 담갔다 뺀 후, 머리카락을 붓처럼 사용해 긴 종이에 선을 긋는 예술이었다.

    당시 서독 언론은 이 기이한 행위예술을 보고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며 기겁했다.

    하지만 그의 비상식적인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2. 존 케이지를 위한 예찬 퍼포먼스

    1960년, 그는 독일 쾰른의 스튜디오에서 '존 케이지를 위한 예찬'이라는 제목으로 연주를 진행했다.

    케이지의 신작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연주하다가 돌연 연주를 중단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준비된 부서진 피아노를 마구 휘둘렀다.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긴 쇠젓가락을 든 채 객석으로 뛰어내려가 관람객이던 케이지의 셔츠와 넥타이를 자르고, 곁에 있던 사람의 머리에 샴푸를 뿌려 거품을 냈다.

    관객들은 봉변을 당할까 겁에 질려 퇴장했고, 백남준은 소리를 지르며 공연장을 떠났다.

    소란해진 공연장이 조용해진 후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술집에서 전화로 공연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는 이 모든 순간들의 변수가 예술이자 음악이라고 믿었다.


3.3. 플럭서스 예술의 정의

    관람객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하거나 박수를 터뜨리게 하는 이러한 행위예술 퍼포먼스를 플럭서스(Fluxus)라고 한다.

    플럭서스는 의학 용어로 내장의 배설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전통에서 자유로우며, 자신만의 세계를 막힘없이 표현하는 예술을 뜻하기도 한다.


4. 기괴한 사랑과 예술적 파트너십 (62-119)


4.1. 쿠보타 시게코의 짝사랑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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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충격적인 예술 행보뿐 아니라 사랑도 거침없고 기괴한 방식으로 취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행위예술가 쿠보타 시게코는 백남준에게 첫눈에 반해 14년 넘게 그를 쫓아다녔다.

    쿠보타는 요미우리 신문에서 백남준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살짝 치켜든 눈매와 날카로운 인상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했으며, 기사를 방벽에 붙여놓고 매일 사진을 들여다봤다.

    1964년, 쿠보타는 도쿄의 한 골목에서 열린 백남준의 공연 기회를 잡아 무대 뒤편에서 차 한잔을 청했다.

    뒷정리 후 차를 마시러 온 백남준의 실물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었으며, 백남준은 그녀의 기존 작품이 창의적이고 독특하다며 칭찬했다.

    그의 다정한 말에 쿠보타의 사랑은 더 뜨겁게 타올랐고, 그녀는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무대를 옮길 때 쿠보타도 그를 따라 미국으로 향했으나, 백남준에게 쿠보타는 그저 같은 예술을 하는 동료에 불과했다.


4.2. 샬롯 만과의 예술적 결합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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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에게는 이미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예술적 파트너가 있었는데, 바로 미국의 첼리스트 샬롯 만이었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간 이유 역시 샬롯의 제안으로 음악극 오리지널을 뉴욕에서 공연하기 위해서였다.

    공연을 함께하며 두 사람은 엄청난 속도로 이끌렸고, 샬롯은 이미 남편이 있었음에도 백남준과 엄청난 케미를 보였다.

    당시 백남준은 음악에 '성(性)'이라는 주제를 결합하는 데 목말라 있었다.

    백남준이 성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수행할 파트너에게 원하는 조건은 세 가지였다: 최고의 미인, 최고의 지성, 고전 음악 연주자였으며, 성을 완벽히 표현하기 위해 옷을 다 벗을 수 있는 과감성도 필요했다.

    샬롯은 백남준의 완벽한 뮤즈였으며, 백남준은 "그녀를 알게 되고 첼로 연주를 알았을 때, 드디어 세계 최초로 성과 음악을 결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샬롯은 백남준과 작업하며 때로는 찬물을 뒤집어쓰고, 레슬링 복장을 한 채 물통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상의를 다 벗어던지기도 했다.

    1967년 2월, 백남준은 뉴욕에서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발표했다.

    이 파격적인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전시 포스터에 "음악에서 성을 제거하는 건 도리어 음악의 진지함을 해치는 것"이라고 적었다.

    주최 측은 경찰이 음란 공연으로 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200명만 엄선해 초대했고, 일반인은 입장이 금지되었다.

    공연 순서는 1막: 전자 비키니 입기, 2막: 상의 벗기, 3막: 하의 벗기, 4막: 완전 누드로 연주하기 순이었다.

    2막에서 샬롯이 가슴을 드러내자 사복 경찰 3명이 무대로 뛰어올라 그녀의 상반신을 코트로 덮고 경찰서로 끌고 갔다.

    작곡자이자 제작자인 백남준은 양복 차림으로 점잖게 앉아 있어 바로 풀려났지만, 샬롯은 외설 혐의로 재판에 부쳐졌다.

    뉴욕 예술계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 확보를 위해 백남준을 지지했고, 뉴욕 주지사는 이 해프닝이 외설이 아닌 예술이라는 백남준의 말을 받아들여 샬롯에게 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재판은 백남준의 승리로 끝났고, 샬롯은 이 분야의 아이콘이 되어 행위예술의 잔다르크로 불리게 되었다.


4.3. 샬롯과 백남준의 관계에 대한 단서들

    두 사람의 기이하고 파격적인 예술적 관계 때문에 세간에서는 연인이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받았다.

    샬롯은 "백남준이 나를 샬롯 대하지 않고 작품으로 대한다면"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

    백남준은 샬롯이 죽은 후 한 외국 기자가 연애 감정이 있었느냐고 묻자, "주차장에서 한번 있었던 것 같다"고 은밀하게 답했다.

    백남준의 개인 소장품 경매에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사진들 속에 백남준이 직접 필사한 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먼 후일'이었다.

    이 시들은 샬롯에 대한 백남준의 이성적인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소장품으로 해석된다.


5. 쿠보타의 예술적 동참과 결혼 (120-156)


5.1. 쿠보타의 질투와 예술적 투쟁

    사랑과 우정을 넘나드는 예술 활동 속에서 백남준을 짝사랑하던 쿠보타는 미친 듯이 애가 탔고, 샬롯이 나오는 공연에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히 드러냈다.

    백남준을 따라 무턱대고 미국에 온 쿠보타는 비싼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으나, 샬롯 때문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발맞추는 것을 택했다.

    1965년, 백남준이 기획한 플럭서스 공연에서 쿠보타는 '버자이너 페인팅'을 직접 공연했다.

    그녀는 흰 종이 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사타구니에 붓을 꽂아 쪼그려 앉아 걸어 다니며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 공연으로 단숨에 전위 예술가로 이름을 떨쳤다.

    온몸을 바쳐 예술혼을 불태웠음에도 백남준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불안했던 쿠보타는 초강수를 두었는데, 당시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백남준의 친구이자 유대인 부잣집 도련님인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백남준에게 전하며 질투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무심했고, 오랜 시간 괴로워하던 쿠보타는 어쩔 수 없이 데이비드와 결혼했으나, 사랑 없는 결혼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유대인이었던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인과 일본인을 비난하며 화살을 쿠보타에게 돌렸고, 갈등 끝에 쿠보타는 이혼을 결심하여 다시 백남준 곁에 동료로 남게 되었다.


5.2. 결혼과 백남준의 조국에 대한 갈망

    시간이 흐르자 쿠보타는 뛰어나고 재능 있는 예술가인 백남준의 이세(異姓)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6개월간 동료라는 명분으로 곁을 맴돌며 잠자리를 가졌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홀로 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간 쿠보타는 자궁암 진단을 받았고, 임신은커녕 자궁을 드러내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가난한 일본인 작가인 그녀가 미국의 고액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조용히 귀국할 짐을 싸던 그녀에게 백남준이 조심스레 다가와 "우리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했다.

    백남준은 방송국에서 들었던 보험이 있으니 자신과 결혼하여 아내 자격으로 수술받을 것을 제안했다.

    쿠보타는 이를 사랑이 아닌 연민이라 생각하고 제안을 뿌리쳤으며,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백남준은 "괜찮아, 난 아이 가질 생각이 없어.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골치만 나쁘지"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쿠보타의 마음을 위로했다.

    결국 1977년 3월 21일, 백남준과 쿠보타는 뉴욕 시청에서 결혼 서약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

    단지 동정심이라 생각했던 백남준의 마음은 훗날 그가 남긴 편지에서 드러났다.

    결혼 후에도 쿠보타의 불임 진단과 의료보험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으며 예의를 지켰다.

    해외에서 명성을 쌓은 백남준에게는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한 가지 결핍이 있었다.


6. 조국에 대한 갈망과 비디오 아트의 시작 (157-178)


6.1. 조국에 대한 생각과 비디오 아트의 태동

    백남준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는 그저 조국을 그리워만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조국을 알려야 한다"는 반법(反法)을 남겼다.

    그는 비디오 아트의 세계적인 대가로 찬사를 받으며 고향 땅을 밟았다.

    그가 비디오 아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한창 전위 예술에 취해 있을 시기였다.

    수년간 해온 행위 음악은 종료하는 순간 휘발되기 때문에 기록할 방법이 필요했고, 백남준은 그 모든 시간을 비디오로 기록하기로 했다.

    당시 비디오 아트라는 개념조차 명확히 정립되어 있지 않아 그는 맨땅에 헤딩하기를 반복했다.

    그가 비디오 아트로 세간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은 1974년 '부처' 전시 이후부터였다.


6.2. 부처 전시와 공학적 발상

    자신의 전시회에 휑한 빈 공간을 참을 수 없었던 백남준은 그 공간에 부처님을 모셔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전시 시간을 맞춰 부처님 조각상, TV 모니터, CCTV 카메라만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는 CCTV로 찍히는 자신을 TV로 바라보는 부처의 모습이었다.

    종교적 구도자이자 동양적 지혜의 상징인 부처가 현대 기술의 산물인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예술, 철학과 공학을 연결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책 『삶은 공학』에서 저자는 공학을 한다는 것은 인류의 창의성을 최고조로 활용하는 것이며, 그 결과물은 인류의 독창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공학과 가장 극단에서 있어 보이는 예술 분야에서도 공학을 이용한다면 신선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를 때려 부수기로 유명해 동양의 테러리스트라는 평을 받았던 백남준은 이 시기 이후로 비디오 아트의 대가로 거듭났다.


7.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다다익선 구상 (179-214)


7.1. '굿모닝 미스터 오웰' 대규모 프로젝트

    백남준은 1982년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 전시를 통해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4년, 그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엄청난 대규모 작품을 기획했다.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은 텔레비전으로 위성 방송을 내보냈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책 『1984』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었다.

    방송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자음 인사가 반복되는 형태였으며, 오웰이 미디어가 인간을 감시한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백남준은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가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보며 절반만 맞았다고 반박했다.

    이 이슈는 세 개의 방송사가 협력하여 서울, 뉴욕, 파리, 베를린 등에서 생중계되었고, 당대 손꼽히는 열 명의 예술가가 참여하여 음악, 미술 퍼포먼스, 패션쇼, 코미디를 선보였다.

    이 방송은 2,500만 명가량이 시청했으며, 미국에서는 평균 시청률의 두 배가 넘는 7% 시청률을 기록했다.

    전 세계의 이목은 백남준과 그해 나라였던 대한민국에 집중되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쇼'는 방송 중 신호 누락이나 나라마다 다른 영상 방영 등 수많은 오류가 있었으나, 이는 백남준이 의도했던 생방송 효과이자 '모든 변수는 예술'이라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었다.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았던 백남준은 이 쇼를 통해 한국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34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고, 온 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7.2. 다다익선 구상 및 설치

    1984년 당시 과천에 짓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 홀에 들어갈 작품을 의뢰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매스미디어의 원리를 담은 '다다익선'을 구상했다.

    다다익선 구상도에서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크기에 따라 하나하나 따로 표시하고, 눕혀진 것과 세워진 것을 다르게 그렸다.

    다다익선에 설치된 비디오의 개수는 모두 1,003개인데, 백남준은 비디오 개수조차도 우연이 아닌 설정을 했다.

    숫자의 의미는 대한민국이 시작된 10월 3일 개천절에 차용했으며, 13개의 모니터 속에는 경복궁, 부채춤, 고려 청자 등 한국적인 풍경과 퍼포먼스 사진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비디오 탑의 맨 꼭대기에는 빨간 전구가 다보탑의 보주를 상징하듯 빛을 냈다.

    그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와 소통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며, 프랑스 개선문,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등 서양의 상징물과 뮤즈였던 샬롯의 연주 모습까지 영상으로 삽입하여 동양과 서양, 예술과 과학 기술의 조화를 표현했다.

    다다익선은 작품성과 규모뿐 아니라 작품에 필요한 금액까지 천문학적이라고 평가받았다.

    작품의 기단부 지름은 11m, 높이는 18.5m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며, 총 1,013대의 작품용 모니터와 100대의 예비용 모니터가 사용되었다.


8. 삼성과의 협력과 첫사랑의 추억 (215-243)


8.1.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과 삼성의 지원

    백남준은 50억에 가까운 모니터들을 수집하기 위해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의 지원을 받았다.

    이건희는 리움미술관 주선으로 백남준과 처음 대면했으며, 백남준은 일평생 늘어난 흰 셔츠에 멜빵, 중국제 찍찍이 신발을 신고 헐렁하게 등장했다.

    백남준은 이 회장과 인사 후 화장실에 다녀온 뒤 갑자기 화려한 넥타이를 메고 돌아와 "우리나라 경제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라 넥타이를 매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그러면 모두 넥타이를 풀자"고 응수하며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건희 회장은 백남준이 타국에서 혼자 힘으로 고생해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린 분이라 존경한다며, 앞으로 작품 제작에 필요한 TV를 삼성이 지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대화를 계기로 백남준은 작품에 사용하던 일본 소니 대신 삼성전자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은 외국에 살며 그 나라보다 우수해져 조국을 빛내는 것이 애국이라는 백남준의 속뜻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미국 방문자 자격으로는 한계를 느껴 시민권을 획득해 미국인이 되었지만, 백남준은 "마음은 서울에 있다"며 아내 쿠보타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용하지도 못할 대한민국 여권을 늘 소지하며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8.2. 한국에서의 첫사랑 이경희와의 재회

    한국에 남겨둔 첫사랑의 추억도 그리움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유치원 시절 결혼을 약속한 첫사랑 이경희 여사가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와 백남준의 어머니가 친해져 이경희 씨가 종종 백남준의 집에 놀러 오곤 했다.

    백남준은 이경희 씨가 놀러 오면 피구 놀이를 멈추고 방에 들어가 동화책을 펼쳐 읽으며 소심하게 애정을 드러냈다.

    후에 각자 다른 초등학교에 진학하며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이경희의 존재감은 꽤 오랜 시간 백남준의 가슴 한구석에 남았다.

    그는 훗날 뇌졸중 투병 생활 중에도 이경희를 생각하며 그녀에게 드로잉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플레이보이 잡지 출신 중 제일 비싼 모델을 고용해 직접 찍은 나체 사진과 함께 어릴 적 기억에 대한 짧은 글이 남겨져 있었다.

    정성이 가득한 우편에 대해 이경희에게 묻자, 그녀는 "그건 사랑한다는 고백"이라며 수줍게 대답했다.

    쿠보타는 이 씨를 '이경희 공주'라 부르며 경계했고, 한국에서 저녁 식사 중 이경희가 백남준에게 생선 살을 발라주는 모습을 보고 폭발하기도 했다.

    이때도 백남준은 쿠보타에게 혼자 가라고 고함을 치며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훗날 쿠보타가 백남준 간병을 도맡았을 때 그가 한국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로 추측된다.


9. 뇌졸중 발병과 기괴한 재활 치료 (244-271)


9.1. 뇌졸중 발병과 전성기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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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1980년대 세계적인 찬사와 조국에서의 인정을 받으며 인생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 4월, 저녁 식사 도중 백남준은 갑자기 재채기를 멈추지 못하고 정신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이 일은 그가 한국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호암상을 수상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지 겨우 2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당시 그는 독일 유력 경제지에서 세계 미술가 랭킹 7위에 오를 정도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걱정 마, 오늘이 부활절이야. 나는 절대 죽지 않아"라며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건넸다.

    비극적이게도 병원에서 그는 왼쪽 몸을 쓸 수 없다는 뇌졸중 진단을 받았다.

    온몸이 휠체어에 묶이고 창문이 하나뿐인 답답한 병실에 갇히자, 백남준은 병이 막히는 커녕 악화될 것이라며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측근들은 결국 4층에 위치한 3면이 창문인 병실로 그를 옮겼다.


9.2. 성적 충동을 활용한 재활 치료와 기록

    병실이 바뀌자 담당 의사도 바뀌었고, 새로운 독일인 담당 의사는 성적 충동을 활용한 재활 치료라는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 방법은 환자의 재활 의지를 북돋기 위해 남성 환자에게는 젊고 발랄한 여성 의료진을, 여성 환자에게는 성적 매력이 있는 남성 의료진을 보내는 심리학을 물리 치료에 응용한 것이었다.

    빨간 립스틱과 빨간 타이즈를 입은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간호사 두 명이 치료에 동참했으며, 의료진은 백남준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거나 그에게 키스하기도 했다.

    아내 쿠보타는 재활 치료의 모든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했는데, 이는 고된 투병 과정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함이었다.

    영상에는 간호사와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들이 담겼으며, 쿠보타는 그들이 백남준을 갓난아이처럼 다뤘다고 묘사했다.

    쿠보타는 인터뷰에서 "아내로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는 좋아했고 활력을 얻었던 것 같다"며 당시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투병 과정을 작품화한 이 영상은 2000년 3월 뉴욕의 랜스 펑 갤러리에서 전시되기도 했으나, 백남준 본인은 무력하고 퉁퉁 부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다며 작품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열과 성을 다해 치료받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휠체어와 지팡이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10. 백악관 사건과 쿠보타의 헌신 (272-293)


10.1. 백악관 바지 흘러내림 사건과 논란

    백남준의 불편한 거동으로 인해 미국과 한국 전역을 뒤집을 희대의 하의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당시 미국 수도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기념 연회장에 초대되었고,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석했다.

    경의를 표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클린턴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백남준이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며 조카 켄을 불렀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멜빵 바지가 흘러내리면서 하반신 알몸과 성기가 드러났다.

    바로 뒤에 있던 조카 켄이 서둘러 바지를 치켜 올렸다.

    당시 자리에 있던 김대중 대통령은 후에 이 사건을 흥미로운 일화로 회상하며, 클린턴 대통령이 매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이 백남준의 병중 실수인지, 당시 인턴과의 성추문으로 떠들썩했던 클린턴을 조롱한 것인지에 대한 추측으로 떠들썩했다.

    백남준은 "내 바지가 흘러내렸고 그게 전부"라고 해명했으며, 실제로 클린턴을 조롱할 의도는 없었지만, 사건의 화제성에 대해 "이게 바로 백남준이야"라고 말했다.

    언론의 과민 반응은 의도치 않게 백남준 식 퍼포먼스가 되었다.


10.2. 쿠보타의 헌신과 말년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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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보타는 바지 허리춤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백남준을 10년 동안 물심양면으로 간호했다.

    그는 병을 앓고 있음에도 죽기 전까지 10년간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보였으며, 뉴욕 거리를 휠체어를 타고 활보하며 "나는 행복해"를 연발하기도 했다.


11. 마지막 만찬과 예술적인 장례식 (294-303)


11.1. 마지막 순간과 장례식 퍼포먼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쿠보타가 차려준 장어덮밥을 한 그릇 맛있게 비우고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백남준은 평소 즐겨 입던 한국식 녹청색 마구잡이 리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비디오 아트의 대가이자 세기의 행위예술가였던 백남준의 장례식은 평범하지 않았다.

    장례식에 참가한 400여 명은 미리 준비된 과일을 이용해 서로의 넥타이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1960년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 그의 공연을 본뜬 퍼포먼스였다.


11.2. 넥타이 자르기 퍼포먼스의 전개

    백남준의 측근들은 문상객들에게 가위를 나눠주며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자르게 했고, 비틀즈 멤버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가 쿠보타의 넥타이를 자르며 장내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 반가량 고인의 시신 위에는 잘린 넥타이 길이 수북하게 쌓였다.

    이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준 최후의 공연이자 예술이었다.

    그가 죽은 뒤 뉴욕타임스는 그를 추모하며 "인류 최초의 화가와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디오 아트의 창조자는 누구인지 확실하다: 백남준, 그야말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이자 조지 워싱턴"이라고 남겼다.


12. 사후 논란과 작품 가격의 저평가 (304-347)


12.1. 동해 표기 논란과 아버지의 친일 행적 수면 위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보통 죽은 뒤 더 높은 평가를 받지만, 백남준은 사후 더 많은 불미스러운 논란과 저평가에 시달렸다.

    백남준이 죽은 뒤, 그의 작품이 동해를 일본어로 표기했다는 이유로 논란에 휘말렸다.

    논란이 된 작품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1988년작 '고지도 2'로, 백남준이 독일 행일 미술가 요제프 보이스와의 관계를 드로잉으로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시민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일본해라고 명시된 작품을 사용한다면 동해가 바른 표기라는 주장을 외국인들에게 할 수 없게 된다며 거칠게 항의했고,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까지 수면 위로 올랐다.

    당일 오후 미술관 측은 백남준의 작품을 전시관에서 철거했다.

    백남준의 조카 백남건 시는 백남준이 다른 작품에서는 '일본해' 표시를 지우고 '동해'로 고쳐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작품에 고의성이 없다고 해명했으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백남준 작가의 명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작품 가격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고수한 비디오 아트가 설치 공간 충족, 지속적인 건전지 교체 등 보존 작업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의 설치 작품인 '다다익선'은 기기 노후화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원이 꺼져 있으며, 이로 인해 그의 경매 최고가는 동시대 활동한 앤디 워홀과 비교했을 때 1/30 수준이라고 한다.


10.2. 작품 가치 제고 시도와 최고가 기록

    이러한 저평가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 백남준의 이름을 드높이고 작품성을 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온라인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올라온 백남준의 작품 '문학은 책이 아니다'(1988년작 비디오 설치 작품)는 30년 전통 화랑인 갤러리 신라에서 온라인 중국 거래 사이트에 출품되었으며, 판매 희망 가격은 9억 원이었다.

    갤러리 관계자는 이 출품이 갤러리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며, 이는 백남준 작가가 생전에 고수했던 실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전했다.

    심박한 작품 거래로 작가를 더 널리 알리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현재까지 구매자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예술가는 예술가를 알아본다고, 5월 28일 홍콩 경매에 나온 백남준의 '수사슴'이 한 예술가에 의해 약 6억 6천만 원에 낙찰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작품 중 경매 최고가이다.

    훗날 이 예술가의 정체가 빅뱅의 태양으로 드러났고, TV 프로그램에 작품이 노출되며 백남준의 예술이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작품 '수사슴'은 높이 1m 남짓한 사슴 모형에 네 개의 TV 모니터를 단 작품으로, 하늘로 솟은 빨간 전구로 표현된 뿔과 꼬리는 백남준 특유의 성적 유머를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그는 과학 기술의 산물인 비디오와 어울리지 않는 수사슴을 이어 붙여 획기적인 공학 작품을 만들어냈으며, 진지한 예술보다는 유쾌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13. 발견법과 창의적 시도의 중요성 (337-350)

    책 『삶은 공학』에서는 발견법(Discovery Method)을 강조한다.

    발견법이란 원리를 알지 못해도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경험적으로 정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수학과 과학 없이도 중세시대 대성당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발견법 때문이었다.

    이 단어는 부정확한 방법이지만 문제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한 지름길을 뜻하며, 과학적 원리를 알지 못하고도 새로운 발견을 하는 공학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무엇이 발견될지, 변수가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에서 창의적인 시도를 하는 것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말한다.

    세계의 발명품 대부분이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책 『삶은 공학』은 불확실함 투성이인 현실을 살아가는 효율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공학 교수가 쉽게 쓴 이 책을 읽다 보면 시행착오에서 배우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공학자 사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변화하는 세상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오늘 함께 읽은 책은 『삶은 공학』이며 저자는 빌 해맥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lUn7dm89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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