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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아래로 빨리 내려 보내야 하고...
이어서 내륙으로 몰아내야 한다. 3000년 전 위치로...
발해, 최초의 중원침공 | 당을 정벌하라 무왕 대무예
https://www.youtube.com/watch?v=A1suPuH_qNs
이 영상은 한민족 최초의 해외원정 을 감행한 발해의 역사에 대해 설명합니다. 당나라 를 공격한 발해의 대담성과 그로 인해 발해가 어떻게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최전성기와 그 배경, 당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역사적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합니다. 발해의 멸망과 그 이후의 역사적 맥락도 함께 다루어, 현재의 시각 에서도 그 역사적 중요성을 되새기게 합니다.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이 깊으며,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핵심 용어
- 발해: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로서, 대조영이 세운 국가입니다. 백두산 부근에 위치하였으며,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영역을 가졌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아 강력한 ...
1. 서론 ⚔️ 발해의 대담한 해외 원정
- 732년, 발해는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등주를 기습 공격했던 최초의 한민족 해외 원정 국가로 기록된다 .
- 발해는 당시 가장 광대한 용토를 확보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당나라에 맞서 전쟁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
- 이 해외 원정을 지휘한 무왕은 현대에 비유하면 한국이 미국을 선제 공격하여 승리한 것과 같은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
- 발해의 대담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잔존 세력과 대립하게 되어 고구려 유목민들과 말갈족의 저항이 이어졌다 .
2. 🏰 발해의 건국과 대무왕의 전쟁적 결단
- 발해는 698년에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로, 최초에는 작은 국가였으나, 다양한 동맹을 통해 점차 넓은 용토를 갖게 되었다 .
- 대조영은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치욕을 느끼고, 통일신라와도 화친을 맺어 조심스러운 외교 전략을 펼쳤다 .
- 대무왕은 흑수 말갈과의 전투를 통해 당나라와 대립하면서도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통해 외교적 관계를 확대하려 했다 .
- 결과적으로 대무왕은 흑수 말갈족을 전멸시키며 발해의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지만, 737년에 세상을 떠나며 그 성과를 직접 다스리지 못했다 .
2.1. 발해의 건국과 대조영의 동맹 전략
- 698년, 고구려 멸망 30년 후 대조영이 고구려 유목민 및 말갈족과 연합하여 대진국을 건국하고, 이후 이를 발해로 변경했다 .
- 대조영은 발해 건국 초기 작은 국가였지만, 동맹 국가를 물색하였고,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돌골족과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
- 당나라의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돌골족은 발해와 동맹을 응하고, 이에 따라 발해는 강력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
- 발해의 성장과 함께 당시 동아시아의 고구려 계승자로서의 인식이 퍼지며, 다양한 유목민들이 발해로 모여들어 내부 체계를 강화하게 된다 .
2.2. ️ 발해의 외교와 전쟁 준비
- 당나라는 발해의 왕자를 볼모로 잡아 대조영을 발해 군왕으로 책봉하여 발해의 충성심을 확인했지만, 이는 대조영에게 치욕을 안겼다 .
- 통일신라 역시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했으며, 대조영은 신라와의 화친을 맺고 오급 대아찬으로서의 자리를 얻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의 굴욕을 경험했다 .
- 발해의 무왕은 당을 견제하기 위해 돌골 족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공격 준비를 시작했고 , 이를 위해 주변 세력과의 외교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 흑수 말갈은 발해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당나라와의 동맹을 통해 발해의 공격을 견제하려 했지만, 무왕은 이를 방어의 계기로 삼아 반응을 보였다 .
2.3. ️ 발해의 대당 전투와 동맹 체결
-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형의 명령으로 흑수 말갈을 공격하려 했으나, 당나라의 군사력 부족을 우려하며 이를 반대했고, 결국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했다 .
- 무왕은 동생 대문예와 당나라와의 사이가 더욱 악화되자, 727년에 일본과 국교를 체결하고 동맹을 강화하려 했다 .
- 730년, 발해는 거란족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했으며, 732년에는 국방의 요지인 등주를 선제 공격하여 점령에 성공했다 .
-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발해를 정복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으나, 추운 겨울 날씨로 인해 신라 군대가 작전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시 전투를 포기하게 되었다 .
2.4. ️ 발해의 전쟁과 화해
- 대무예는 당나라가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만든 군대의 사령관이며, 그의 공격에 맞서 무왕은 자객단을 보내지만 암살에 실패한다 .
- 전쟁 상황이 변하자 무왕은 736년에 당나라와의 화친을 요청하고, 당나라 역시 발해의 포로를 풀어주며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
- 무왕은 발해의 이익을 중요시하며,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발해의 힘을 과시하고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
2.5. 무왕의 업적과 발해의 발전
- 무왕은 흑수 말갈족을 전멸시키고 북만주를 정복하여 발해의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왕이다 .
- 무왕은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지 못한 채 737년에 세상을 떠났고 .
- 그의 아들 대무가 즉위하면서 발해의 제3대 왕 문항이 된다 .
3. 🏰 발해의 문치주의와 통치 체계
- 문항은 아버지 무왕과 반대로 문치주의를 도입해 약 57년 동안 통치하며, 발해의 역사에서 장수왕 다음으로 오랜 재위 기간을 기록했다 .
- 문항은 영토를 다섯 개로 나누고, 당나라의 정치 제도인 3성 6부를 수용하여 발해에 맞게 변형하여 운영하였다 .
- 외교에서도 평화주의를 실현하며 당나라와 유학생, 사신을 빈번히 교류하여 관계를 개선하였고, 당나라는 문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
- 문항의 퇴위 이후 발해는 왕위 계승의 혼란으로 국력이 약해지며, 25년간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
4. 📜 발해의 전성기와 쇠퇴 과정
- 발해는 당나라에 의해 해동 성국으로 불리며, 선왕 시기의 정치적 안정과 다방면의 발전을 보여준다 .
- 발해의 11대 왕 대진은 내부 행정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 교류를 지속하였으나, 왕권의 약화 및 귀족들 간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국가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
- 발해의 쇠퇴는 여러 소수 민족들의 이탈로 이어지며, 대진의 무능력으로 왕권이 더욱 약화되어 갈수록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된다 .
- 916년에 발해가 멸망하기 10년 전, 거란족의 요나라 건국으로 동의 평화가 깨지며 발해의 불안감이 고조된다 .
5. 결론 🏯 발해의 멸망 원인과 과정
- 발해는 거란족과의 전투에서 요동 지역에서의 영토 회복을 위해 약 10년간 전쟁을 치렀으나 결국 요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
- 요나라의 전술은 발해의 수도를 향한 대규모 기습작전으로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발해는 926년 수도가 빠르게 함락되었다 .
- 발해 멸망 원인으로는 요나라의 침략 외에도 백두산 화산 폭발설이 제기되며, 화산재가 당시 발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
- 발해는 요나라에 의해 빠른 시간 안에 멸망했으나, 여전히 남아 있는 발해 지역의 지방들은 살아남아 고구려와의 투쟁을 이어갔다는 점이 강조된다 .
6. 결론 🏰 발해 부흥 운동과 역사적 맥락
- 발해 멸망 이후, 지방 세력들이 힘을 합쳐 부흥 운동을 전개하며 여러 작은 국가가 세워졌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
- 1116년 고영창이 대발해를 세우면서 발해의 위상이 다시 한번 드러났으나, 건국 5개월 만에 멸망하였다 .
- 발해의 위대함은 200년 동안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이는 발해가 모두가 탐낼 만큼 강력한 국가였음을 암시한다 .
- 한국은 고구려와 발해가 우리의 역사임을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은 이를 반박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
- 발해의 독특한 문화인 온돌 유적은 발해가 한국 민족의 역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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