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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기/경영학과 군사학

심리 공략의 기술 : 요약내용. 참고할 부분이 많은 책

by 리치캣 202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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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기술은 여제 무측천의 성공 전략을 수록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측천을 사람의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고 표현하며 어떻게 그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알고 있던 무측천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다.

사철 지음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 20076/ 513/ 24,500

 

저자 사철

중국의 역사 연구가.

 

역자 이은영

영남대학교 한문교육학과를 마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베이징 우전대학 및 천진 사범대에서 수학했으며, LG 및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다. 현재 주중국 한국대사관 통번역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경영우화, 무측천등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무측천(則天)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서기 624년에 태어나서 705년까지 82년의 생을 살았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미모로 인해 14살 때 당태종 이세민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총애를 잃게 되자 태자 이치(고종)를 유혹하여 그의 후궁이 된다. 당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42녀는 모두 무측천의 소생이었는데, 그녀는 첫 아들을 낳자 황후를 모략하여 폐위되도록 하고 황후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사에 관여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 나갔는데,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측천의 네 아들 중 큰아들 이홍과 둘째 아들 이현은 모두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모후의 잔혹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정치관을 달리했다. 그래서 큰아들은 독살하고, 둘째 아들은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이후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로 책봉되고 고종 사후에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역시 55일 만에 폐위시키고 만다. 그리고 넷째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키나 별전에 기거하게 하며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측천은 이렇게 정사를 주무르다가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당을 주(나라, 690~707)로 바꾸어 15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고종의 황후시절부터 정사에 관여했으니 실질적으로는 50여 년을 정치가로 살아간 셈이다.

 

무측천은 그녀가 행한 냉혹한 처사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치적에 있어서 만큼은 당 태종 이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황제였다. 그녀는 당 왕조를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국가로, 또한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무측천이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고 명군의 치적을 남기게 된 데는 그녀만이 지닌 탁월한 심리공략술이 기반이 되었다. 무측천은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치인술(治人術)을 개발해 냈는데, 그것은 이른바 권력과 세상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게 하는 심리공략 전술로, 상대의 내면까지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권력의 힘을 숨긴 채 시운(時運)을 빌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녀의 심리공략술을 살펴보고 그것이 조화된 그녀만의 리더십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사실 오랫동안 무측천의 업적은 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왔다. 특히 중국의 사가들에게 요녀’, ‘악녀로 수용되면서 제대로 된 관심과 연구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다만 그녀가 여자였다는 점이 두드러진 점일 뿐이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늘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오늘의 시대에 무측천의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현대사회에서 거칠고 냉혹한 여자로 평가받는 여성 리더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단력과 용기,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십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차례

머리말 : 무측천, 심리공략의 달인이었다

심리전의 여왕 무측천에게서 배우는 인간 심리 경영

 

1부 심리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1.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2.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의 중용을 지키다

3.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다

4.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 처리하다

5.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6.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7.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8. 여성 정치가로서 위대한 선구자였다

9.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10. 역대 제왕의 교훈을 평생의 싱크탱크로 삼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공략의 기술

1.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2.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3.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4. 심리 공략의 필승지책 : 상대의 치부는 덮어주되 비겁함을 공격한다.

5.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6. 심리 공략의 치인술 : 사람은 사람으로 다스리다

7. 심리 공략의 연환술 : 때로는 권력을 대담하게 내려놓아라

8.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9. 심리 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10.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 연표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모색 / 20076/ 513/ 24,500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무측천은 14세 때 당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서충용이라는 후궁에게 황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궁녀들은 대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매끼 들여오는 음식도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궁정 암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 무측천은 환관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로써 대하고 뇌물을 주어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즉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서로 반목하는지와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를 통해 앞날의 정황을 준비했다.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무측천에게 궁녀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정무를 처리하고 퇴조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었으며, 항상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 보면 심신이 지치고 팔다리가 퉁퉁 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했다. 이미 황제의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군 태종과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성공이란 매력, 능력, 지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은 기회를 가져오고, 능력은 남과 다른 비범함을 발휘하며, 지력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측천은 이 세 가지를 가장 적절하게 융합하여 최대 효과를 발휘할 줄 알았다. 상원 원년 12, 무측천은 황후의 신분으로 당 고종에게 치국에 필요한 12조를 건의했다. 건언 12(建言 十二事)라고 불리는 이 제안서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열두 가지의 건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 고종은 부황의 국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 피해와 동방과의 전쟁 그리고 황실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소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무측천은 이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농업과 양잠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할 것,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 표준으로 삼을 것 등의 산업 진흥 정책이 담겨 있었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당은 경제를 회복했으며 향후 무측천의 통치 기간에는 100% 국력이 증가하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2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점은 신진 관료 세력들의 이익을 주청한 내용이다. 무측천은 관리의 봉록을 인상할 것과 더불어 직위가 낮아도 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한 신진 관료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측천의 건언 12사는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정책개선의 의지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대거 등장한 신흥 관료 계층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천하를 얻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이씨 왕실과 관료 귀족 계층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손발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측천은 인재 활용에 있어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용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경업의 난(684)을 계기로 시행한 것으로, 기존의 관료 제도를 향해 무측천이 던진 단죄의 칼날이었다. 서경업의 난은 무측천이 중종 이철을 폐하고 예종 이단을 세웠으나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위시한 원로중신 세력이 폐위된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서경업의 난은 3개월 만에 패하였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

 

무측천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후 탐관오리를 비롯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동궤를 설치했다. 동궤는 동()으로 만든 상자에 익명의 투서를 하도록 만든 것인데, 그 내부는 네 개의 칸이 있어 투서 내용을 달리했다. 동쪽은 연은이라 하여, 황실의 업적이나 공덕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임관이나 승진을 청하는 상소를 위한 공간이었고, 서쪽은 신원이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투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소간은 정책적 건의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마지막 북쪽 칸인 통현은 천재지변이나 군사기밀 관련 내용을 투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동궤에 투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무측천의 밀고제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민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관료 집단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당 고조와 당 태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에 약간의 억압을 가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도교와 불교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무측천은 성력 원년(689) 정월, 금승도전방제(禁僧道殿謗制)를 반포하고, 불교와 도교는 선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라 볼 수 있으니 승려와 도사가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면 칙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무측천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고승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고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도교의 발전도 함께 도모했다. 이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측천은 종교를 정권의 유용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그 둘을 상호 견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였다.

 

위정자가 개혁에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치국의 도를 깨닫고 안정적으로 시정을 펼쳐야 한다. 688, 무측천은 명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는 무측천이 최초의 여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고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명당에서 정사를 펼치는 것을 큰 공으로 여겼다. 그러나 명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명당에서 정사를 베푼 왕은 3명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무측천은 고종 시절부터 명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관이나 학사들이 명당건축이 백성을 혹사시키고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사치행각이라며 은근히 비판했다. 이에 무측천은 명당이 선조와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곳이니, 재해와 화란을 막고 나라를 성하게 하는 일라며 명당의 기능을 과장했다. 그리고 명당을 완공시키자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대사면을 명하고 백성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화려하고 웅대한 명당의 모습은 당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명당을 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몰려든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예관과 학사들의 비방은 사방에 가득한 칭송에 묻혀 사라졌다. 무측천은 명당을 통해 일련의 유신(維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영창 원년 정월, 명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정사를 펼치면서 백관들을 훈계하는 9개항을 반포했다. 그 요지를 요약해보면 군신들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며, 제업(帝業)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사확을 주충효태황, 어머니 양씨를 충효태후 등의 존호로 추서함으로써 무씨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개원재초칙(改元載初敕)이라는 개혁조항을 반포했는데, 그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예악과 문서를 교정하고, 신조한자를 제정하고 역법을 개정하는 것 등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황제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무측천은 황위에 등극한 후, 수나라 때의 감찰(監察) 제도를 부활시켰다. 중앙의 최고 감찰 기관을 어사대로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각 주현의 군정, 민정,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서성(정무집행기관)의 회의, 문무백관의 연회 및 제사를 진행할 때에도 감찰을 시행하도록 했으니, 감찰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감찰관은 황제의 눈과 귀와 같은 존재로, 그 권한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감찰관의 특권에 대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억울하게 탄핵된 관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즉 감찰관의 선발부터 신중을 기했으며, 감찰어사들이 올린 탄핵과 상소는 자신이 직접 분석하고 감별하였다.

 

감찰제도의 부활은 국가 기관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기여했다. 무측천은 감찰을 통해 여러 주현들을 통합함으로써 주현을 거의 1/2이나 줄이고 대규모 감원을 이행했다. 인재의 유용성을 중시한 무측천은 이러한 감원정책을 두고,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무측천은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관리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 등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하지만 고위 대신들과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관을 차려 입지 않으면 내치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등,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감찰을 통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은 부패한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는 것과 더불어 일반 지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농민의 납세부담을 줄이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로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감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무측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은 오직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로써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무측천이 실시한 일련의 변화란 그녀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하자 당의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합당한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무씨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이씨에서 주나라의 무씨로 종실의 위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국호를 주()로 세운 것도 고대 왕조의 치세를 재현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고대 중국의 치세란 ()’()’의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무씨의 주() 왕조를 세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이미 고종 시대부터 준비되어온 일이었다. 낙양은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이미 수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낙양과 장안을 왕래하며 정사를 펼쳤는데 고종이 낙양에서 머문 기간만 10여 년에 달했다. 무측천은 그 기간 동안 낙양에 세력을 형성하고 고종이 죽자 낙양을 더욱 육성시켰다. 그래서 무주 왕조 건국이 가시권에 이르렀을 때 낙양은 이미 새로운 왕조의 정치, 문화,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무측천이 사직을 신도로 옮긴 것도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직은 본래 제왕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상징이 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무측천은 신도에 무씨 태묘(太廟) 7개를 세우고, 삼십만 군대를 상주케 하여 무씨 왕실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켰다.

 

자고로 예를 즐기는 것은 모든 제왕의 공통점이었다. 무측천은 유가의 예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여러 가지 예의 법식과 의식들을 통해 민심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유신론자였던 무측천은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결정짓는 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 신의 힘을 빌려서 주 왕조 설립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민심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존호이다. 무측천은 고종을 도와 정무를 살피던 시기에 이미 천후라는 별칭을 사용해왔으며,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황제임을 뜻하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존호를 개칭했다. 이렇듯 무측천은 무주 왕조를 건국하기까지 매사를 심사숙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서 사직을 바꾸고 세력을 형성하여 새 왕조를 세웠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성공의 문을 관통할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는 얼마나 기회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낼 줄만 알았지, 자신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무측천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도사가 자신의 관상을 보고 귀인중의 귀인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과 지혜를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감지함으로써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으며, 특히 주위의 모든 권력을 방패막이이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측천의 정치적인 영민함은 일차적으로 그녀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무씨 집안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 관직에 진출했으나, 명문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 대에 이르면서 무씨 집안은 가문 부흥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본래 목재상이었던 무사확은 수양제의 대형 토목 공사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재력을 무기로 권세가들과 쉽게 교분을 쌓았다. 산서 지역의 세력가로 후에 당을 건국한 태조 이연(李淵)과의 친분도 이때 맺은 것이다. 무사확은 이연이 군사를 일으킬 때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 후 군수관(軍需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간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장안의 신흥 귀족으로 부상했다.

무사확은 전처 상리씨와의 사이에 원경, 원상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전처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연이 수나라의 재상이던 양달의 노처녀 딸을 그와 맺어 주었다. 양씨는 무사확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았으며, 그중 둘째가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무측천이 아직 어렸을 때 부친 무사확이 사망했고, 이후 두 이복 오빠는 양씨 모녀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무측천이 14살 되던 정관 15, 조정에서 각 지방의 재주 있는 미녀들을 입궁시키게 했다. 그러나 딸의 입궁을 원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 중에 실제로 은총을 입는 궁녀는 극소수인 데다 황제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때부터 천대와 멸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 역시 딸들이 궁녀로 간택되는 걸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큰딸과 막내딸은 하급관리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무측천은 한사코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리고 황제를 뵐 수 있는 건 행운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국 무측천의 빼어난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당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무측천은 정관 1514살의 나이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눈에 띄는 기회를 얻어냈다. 당 태종은 명마(名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서역에서 조공으로 바쳐온 말을 길들이는 과정을 직접 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총이란 이름의 야생마가 길길이 날뛰며 조련사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사자총은 비록 성질은 난폭하지만 튼튼하고 위엄이 가득한 명마였다.

 

태종은 사자총이 눈에 들었으나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점에 고심했다. 그래서 하루는 문무 대신들을 향해 누가 저 말을 길들일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궁녀들 속에 있던 무측천이 돌연 태종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태종이 웃으며 순한 말도 타기 어려운 어린 계집이 어찌 야생마를 조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무측천은 자신이 말을 다루어볼 터이니 철채찍과 철퇴, 비수를 달라고 하였다. 태종이 의아해하며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무측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선 철채찍의 맛을 보여주고,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철퇴로 머리를 칠 것이며,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버리려고 합니다.” 태종과 주위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입을 연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방법은 좀 지나치구나. 하지만 네 생각만은 참으로 용맹스럽다.” 이때 무측천은 태종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이 시선이 향후 그녀가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당태종(재위 629~649)은 말년에 병석에 있으면서 심약한 태자를 염려했다. 그래서 재상을 불러 태자를 부탁하고 유조를 받아 적게 했다. 그는 우선 왕조의 앞날에 위협이 될 모든 화근을 일소하기 위해 반정을 모의할 가능성이 있는 신하들을 먼 지방의 관리로 보내게 했다. 그런데 유조를 내리는 동안 문득 한 해 전에 도사 이순풍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순풍은 삼십 년 후에 여자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각별히 총애한 서충용을 제외한 모든 비빈들을 비구니가 되게 하라고 명했다. 이 유조에 따라, 정관 23(649) 526, 천하의 명군 태종이 붕어하자 무측천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태종의 별묘(別廟)가 있는 감업사의 비구니로 가게 되었다.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중 태자 이치(고종)는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소양이나 인품 그리고 향후 제위자리를 놓고 벌어질 골육상잔을 염려한 태종의 고려에 의해 태자에 봉해졌다. 당시 18세였던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잃자 태자 이치를 겨냥했고,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감업사의 비구니가 된 무측천을 다시 찾았고, 결국 후궁의 첩지를 내려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측천은 재입궁하자, 곧 황후 쪽 환관과 시녀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왕황후는 성품이 차갑고 거만했으며, 그의 모친 유씨는 딸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였기에 황후궁에 충심을 다하는 시종들이 많지 않았다.

 

사실 무측천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데는 왕황후의 힘이 컸다. 왕황후가 무측천의 입궁을 도운 것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측천은 왕황후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는 한편, 황후와 소숙비 두 사람 중 누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될 존재인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素節)의 생모라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황후는 후사가 없었기에 양자 충()을 들여놓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태자 책립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다. 이때 무측천도 임신 중이었으나 아직 두 사람에게는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황후와 소숙비는 음으로 양으로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고, 서로 비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종은 두 사람이 태자 책립 문제로 못살게 구는 일이 잦아지자 그들의 처소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무측천은 서로 비방하는 두 사람과 달리 항상 온유하고 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무측천이 고종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휘 3(652), 무측천은 남아를 순산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 태어나면서 무측천의 품계는 비빈 중 가장 높은 소의(2)에 책립되었다. 하지만 황후나 소숙비로서는 태자 책립문제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의 태자 책립을 눈물로써 간청했고 결국 고종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소식을 들은 무측천은 이 일을 곧바로 황후에게 고했다. 황후의 모친 유씨는 자신의 아들 유석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고 유석은 대신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튿날 조정 대신들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진왕 충을 태자로 옹립할 것을 주청하는 가운데, 원로대신 장손무기는 다섯 번째 황자의 탄생을 진심으로 감축드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측천의 아들 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홍은 무측천이 입궁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태어났으므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임신한 것이었다. , 선제의 궁녀와 몰래 사통하여 임신시킨 고종을 조롱한 것이었다. 이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고종은 황후의 양자 을 태자로 책립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태자 책립을 두고 벌어진 싸움은 황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후는 이 일에 직접적인 공을 세운 무측천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하사받은 금전과 예물을 모두 황후궁의 환관과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더욱 정보를 열심히 제공했고 결국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황후와 그녀의 모친 위국부인이 황제형상의 나무인형을 만들어 황제가 죽기를 기도드린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이 사실을 즉시 고종에게 상주했다.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황후를 불러 문책하려 했다. 무측천은 이러한 황제를 말리며 황후궁에 친히 가셔서 증거를 잡은 후 문책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고종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왕황후의 처소로 향했다. 사실 왕황후는 고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혹시 자신을 폐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딸을 보다 못한 유씨는 승려에게 의논했고 승려는 침을 꽂은 나무 인형을 주며 백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이라 하였다. 고종이 황후의 침실에 들렀을 때 황후는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옆에는 침을 꽂은 나무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무측천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왕황후는 폐위되고 별궁에 유폐된다.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무측천은 지위와 세력,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숙비와 황후를 제거한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외로움을 느낀 고종은 무측천의 언니 한국부인과 그 딸 위국부인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총애했다. 황후의 자리를 앞에 둔 상황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측천은 한국부인과 위국부인을 차례로 독살시키고 그 누명을 두 이복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에게 뒤집어씌워 유배되도록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심약한 고종이 냉궁에 유폐되어 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안쓰럽게 여겨 구해주려 하자, 언제 처지가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 사람의 수족을 절단하게 하고 술독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측천은 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무측천은 정사에 관여하며 계속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 고종은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 42녀가 무측천의 소생이었으며, 그중 첫째인 이홍은 겨우 4살의 나이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모후와 부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이홍은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언행이 바르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니, 요산옥채500권은 그의 주도로 편찬된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태자를 신뢰하여 여러 차례 국사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이홍의 시정 방침은 모후 무측천과 크게 달라 자주 부딪힘이 생겼다. 또한 그는 종실에 대한 모후의 잔혹함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병석에 누운 고종은 이홍에게 양위할 뜻을 비쳤는데, 이홍은 갑자기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24살이었던 이홍의 죽음은 일대 미스터리였는데 무측천이 독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하튼 이홍의 죽음은 고종에게 큰 슬픔이었으며 아까운 인재의 손실이었다.

 

이홍이 죽자, 고종은 둘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한다(675). 당시 22살이었던 이현은 형 이홍과 마찬가지로 반듯한 외모와 바른 언행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갖춰 탄복하지 않은 대신들이 없었다. 고종의 신임과 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혈기 넘치는 청년 이현은 모든 것을 모후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측천과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측천은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태자가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을 제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영휘 원년(680), 무측천은 이현을 모반죄로 고발했다. 고종은 어사대부로 하여금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동궁의 마구간에서 갑옷 수백 개가 발견되었다. 고종은 딱히 할 말이 없는 와중에서도 이현을 변호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측천이 완강하게 태자의 처벌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폐위시키고 만다.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무측천은 은신술에 능했다. 그녀는 뒤에서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 후에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곤 했다. 고종은 죽기 직전 태자 이철(李哲, 무측천의 셋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대신 무측천에게 섭정을 허락하는 유조를 내렸다. 이철은 맏아들 이홍처럼 높은 인덕을 쌓지도 못했고, 둘째 이현처럼 주위에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음을 고려한 유언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철의 즉위식을 일주일간 미룬 후 거행했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도록 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는 순종적이었다.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다름없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했고 매일 퇴조 시간이면 어김없이 태후를 배알하여 하루의 정무를 보고했다. 그러다 보니 전날 조정에서 논의된 모든 정무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결정되는 진풍경이 반복되었다.

 

중종은 제위에 오른 지 5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자 모종의 결단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자신의 장인 위효정을 시중으로 승진시키고 유모의 아들에게도 5품 관직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자 재상 배염이 나서며 위효정이 시중에 봉해질 만큼 공이 크지 않기에 이러한 승진은 민심을 잃을 수 있다고 간언했다. 갓 제위에 오른 신참 황제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 중종은 배염의 청구를 묵살했다. 그럼에도 배염이 끝까지 반대하자 짐은 위현정에게 천하를 내줄 수도 있는데 그깟 시중 자리를 갖고 무얼 그러시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배염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나 무측천에게 이 일을 소상히 적어 올렸다. 무측천은 그날 저녁 배염을 불러 조서를 적게 하고 금위군을 대기시켰다.

 

중종은 막상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모후 무측천이 어찌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중종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문안을 드리면서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무측천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중종이 안심하고 어전에 나와 막 전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그곳에 모후 무측천이 앉아 있었다. 중종이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무측천은 지난밤 배염이 작성한 조서를 낭독하도록 했다.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에 봉하고 궁중에 유폐시키도록 하라!” 중종은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 폐위하려 하느냐고 모후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 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겠소?” 하고 되물었다. 문무백관은 엎드려 조서를 받들고 있고, 근위병은 궁정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모후는 용상에 앉아 있으니 중종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은 즉위 55일 만에 제위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무측천은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으나, 모든 정무는 무측천이 단독으로 처리했고 예종은 별전에 기거하면서 정무에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측천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자신의 혈족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과정은 단지 사사로운 감정이나 눈앞의 욕망 때문에 이행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측천이 황후 자리나 탐냈다면 그녀가 가진 권력은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다만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실현하자 위국애민의 치적으로 백성들의 추앙과 지지를 받는 성공한 정치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무측천이 제위에 오른 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 인사정책이었다. 그녀는 인재 선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과거제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당의 과거 제도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삼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측천은 친히 낙양궁에 나가 과거 시험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천자가 검시관으로 직접 시험을 관장한 예는 없었다. 이후 후대인들은 천자가 관장한 과거를 전시(殿試)’라 불렀다. 재초 원년(690) 2, 무측천은 몇 날 며칠 동안 직접 심사를 했다. 시험은 경서에 대해 해박한 정도와 국책에 대한 견해, 개인적인 품행과 외모, 자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관리 선발 형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기계적으로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무측천은 최초로 자천 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 관직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연은이라는 동으로 만든 함에 자신의 천거의사를 적어 넣도록 하는 제도였다. 당 태종도 모수자천(毛遂自薦)제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재상 위정이 남을 아는 것은 지()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명()인데, 타인을 알기 어렵고, 자신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고 반대하자 간언을 귀담아 듣던 태종은 곧바로 계획을 취소했다. 명군으로 이름난 당 태종마저도 시행을 망설이고 포기한 제도를 무측천은 과감히 시행했다. 무측천은 또한 과거 시험에 무과(武科)’를 도입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무과는 활쏘기, 말타기, 언어, 행동거지 등 모두 일곱 과목을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는 제도로 합격자는 곧바로 병부에 예속되었다.

 

무측천 시대의 과거제의 발전은 중소 지주계층의 지식인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재를 폭넓게 기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무측천은 발굴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에도 탁월했는데, 무측천의 인재등용 정책에 큰 역할을 한 밀고(密告)’제도는 무측천의 인재풀 가운데 한 유형이었다. 무측천은 밀고 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처벌권을 혹리(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라는 11명의 관리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빈천한 관리 출신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원망이 많았고, 자신을 깔보는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컸다. 말하자면 무측천이 저열한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기용한 것은 그들의 교활함을 빌려 탐관오리나 부패관료층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상대를 겨냥하는 일이 많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폐단이 생겨나자 강직하고 공정한 판관들을 기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혹리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가차 없이 내쳤다.

 

성공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용인술에 능해야 한다. 용인술이란 결점이 있더라도 특별한 장점을 지닌 자가 있다면 중용하는 대범함을 말한다. 옛말에 금은 순금이 없고,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곧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때 유방은 소인배 출신으로 그가 기용한 자들은 대부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장점과 특기를 발휘해 뭉쳐진 전체는 무소불위의 괴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즉 유방의 용인술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보다는 한 가지 특기를 가진 전문가를 기용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자는 재주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용인술의 핵심은 그런 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되, 구속할 줄 아는 데 있다.

 

심리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무측천은 자애로운 궁궐의 안주인이기보다는 냉혹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했으며, 구중궁궐에 가만히 앉아서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하고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이룩했다. 당시 이민족의 잦은 침략은 국가의 통치 기반과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문제였다. 당나라는 변방의 이민족들과 계속해서 전쟁과 화친을 반복해왔는데, 무측천은 이들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반격하도록 하여 변방민족들을 당에 복속시켰다. 그리고 기미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들의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통치 계층이 직접 자민족을 다스리게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적대적이었던 대신들은 이러한 무측천의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분산시켜 각 주현으로 보내 경작과 직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풍속을 한화시키는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말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동화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다민족의 융합은 경제 발전이라는 기초하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야지 정치권력이 개입되면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는 고려에서였다. 무측천은 이민족에게 자치권을 주되 부락의 추장은 조정의 직접 통치를 받게 했다. 또한 토착민들을 예법으로 교화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를 통제했다.

 

무측천은 외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면서, 내적으로는 백성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중 균전제(均田制)를 예로 들면, 당시에는 국가가 장악한 토지를 가구당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수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정 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측천이 즉위했을 당시의 농촌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농민이 실제로 균전을 받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의 토지는 크게 황제의 소유지, 귀족 관료의 소유지, 일반 지주의 소유지, 그리고 소량의 농민 소유지로 나누어졌다. 전자의 세 부류가 가진 토지는 균전제의 분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국가 소유의 황무지나 군대의 둔전만이 균전제의 토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에 한해 영업전과 구분전의 매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이는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호족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잠식해가다 보니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허다했다.

 

무측천은 균전제의 와해를 막기 위해 영업전과 구분전에 대한 모든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한 자는 엄중 처벌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망간 농민들을 환향시켰는데, 이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무측천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그들을 호적에 복속시키고 경작할 땅을 주는 대신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일부지방에서는 인구수에 비해 경작지가 너무 적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래서 무측천은 인구수와 경작지를 고려하여 이주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주한 농민에게는 부역을 감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떠나고 황무지가 늘어나는 지역의 관리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명하고, 감찰관을 수시로 주현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균전제는 저절로 그 공정성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법치 실현에도 업적을 남겼다. 무측천은 과거의 법이 유독 가혹한 처벌이 많고 복잡한 법률 조항으로 인한 형벌남용으로 소송사건이 많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번 죄인은 끝까지 죄인으로 남게 됨을 지적하고 법률을 실정에 맞게 새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편찬된 법률이 모두 12502조로 구성된 영휘율(永徽律)이다. 무릇 법률을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법률 조문보다도 법을 시행하는 과정이다. 영휘율은 법이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고, 처벌의 경중이 적절하고, 엄격함과 관대함이 모두 그 도를 넘지 않아서 수천 년이 지나도록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사사로운 일도 법에 따라 이행했는데, 이는 법치를 통해 명문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합법적인 강령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무측천은 나라의 법도와 기강, 상벌 제도와 함께 민생에 큰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실사구시의 위정 자세는 오늘의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자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책봉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당시 조정은 두 이복오빠의 아들들인 무승사, 무삼사를 위시한 무씨 일족과 재상 적인걸을 앞세운 친당 세력 그리고 장혁지, 장창종 등 무측천이 총애하는 남창 세력 등의 세 파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장창종과 장혁지 형제는 음률에 재주가 있는 미소년들로 딸인 태평공주가 천거하자 이들을 곁에 두고 오랫동안 총애했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장씨 형제는 오만방자함이 지나치도록 권세를 펼치고 있었다. 한편 이복오빠의 아들인 무승사는 무측천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이지만 무측천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측천은 제위에 오르면서 넷째 아들 예종(이단)을 황제에서 폐위시켰지만 그를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사(皇嗣)라 칭했다. 이는 언제든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씨 왕조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만큼 무씨가 제위를 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조카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자니 그들이 아들만큼 자신을 섬기지는 않을 터였다. 무측천은 당조의 명신이었던 재상 적인걸에게 태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적인걸은 친자를 후계자로 세워야만 종묘에 모셔지고 제왕의 모친으로 받들어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적인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여릉왕 이철(폐위된 중종)의 복위를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무씨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이씨의 당 왕조를 다시 복권하고자 했다.

 

장안 4(704), 무측천은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고, 종실과 재상들의 접근을 막은 채 장창종 형제로 하여금 수발을 들게 했다. 황제의 죽음이 임박하자 이씨 당 왕조의 복권을 계획한 일부 조정대신들이 정변을 모의했다. 장간지와 언범을 필두로 한 조정의 신하와 병사들은 태자 이철에게 자신들의 정변계획을 알렸다. 이철이 망설임 끝에 윤허를 내리자 상왕 이단, 태평공주 등의 이씨 종친들이 지지를 가세했다. 병사를 이끈 장간지는 곧 무측천의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장씨 형제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무측천의 처소를 포위한 후, 무측천에게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모반을 꾀하여 태자의 명을 받들어 참수했노라고 말했다.

 

이철이 들어오니, 무측천은 비통하고 분노한 감정을 억누르며 동궁으로 돌아가라 했다. 이에 장수 한 명이 나서며 양위를 종용했다. 무측천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누워버렸으나 며칠 후 장간지 등이 다시 한 번 무측천에게 양위를 독촉하자 마침내 대권을 놓았다. 이후 무측천은 열 달 정도를 더 살았다. 이 마지막 열 달이 무측천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던 것 같다. 중종이 다시 복위함으로써 이씨 조정의 당이 복귀되고 무측천은 상양궁에 갇히게 되었는데, 사서에 의하면 태후는 꾸미기를 좋아해 손자를 본 뒤에도 전혀 노쇠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상양궁에 연금된 후부터는 머리를 빗지 않고 꾸미지 않으니 그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기 며칠 전, 무측천은 중종, 상황, 태평공주와 조카 무삼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조를 남겼다. 우선 자신의 칭호를 황제가 아닌 황후로 부르도록 하고, 건릉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황후와 소숙비의 가문의 자손들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무씨 인척의 지위를 높여달라고 명했다. 이 유지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중종이 복위함으로써 무씨 조정이 사라졌으니 무측천이 세운 대주(大周)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황제 칭호를 거두고 황후로 칭하라는 것은 이씨 왕조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였다. 만약 황제의 칭호를 유지한다면, 이씨 왕조의 종실들이 무씨 집안을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고종이 묻힌 건릉에 함께 묻힘으로써 주나라의 황제에서 다시 당 고종의 황후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왕황후와 소숙비 가문의 자손들을 복권시키고 외척 무삼사와 원노기 등의 작위를 높이도록 한 것도 자신의 사후에 있을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무측천은 이처럼 마지막까지 탁월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그리고 신용 원년(705)1126일 새벽, 무측천은 상양궁 선거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무측천은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의 이름으로 건릉에 묻혔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비문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무측천은 무에서 유로,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끊임없는 협상과 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 그녀의 배후는 미약한 반면 그녀의 적들은 든든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무측천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손에 넣은 후에는 황제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경제 문화적인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 당나라가 300여 년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는 기초를 다졌으니, 이른바 ()’ 자 비()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대답이라 할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기술은 여제 무측천의 성공 전략을 수록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측천을 사람의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고 표현하며 어떻게 그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알고 있던 무측천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다.

사철 지음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 20076/ 513/ 24,500

 

저자 사철

중국의 역사 연구가.

 

역자 이은영

영남대학교 한문교육학과를 마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베이징 우전대학 및 천진 사범대에서 수학했으며, LG 및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다. 현재 주중국 한국대사관 통번역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경영우화, 무측천등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무측천(則天)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서기 624년에 태어나서 705년까지 82년의 생을 살았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미모로 인해 14살 때 당태종 이세민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총애를 잃게 되자 태자 이치(고종)를 유혹하여 그의 후궁이 된다. 당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42녀는 모두 무측천의 소생이었는데, 그녀는 첫 아들을 낳자 황후를 모략하여 폐위되도록 하고 황후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사에 관여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 나갔는데,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측천의 네 아들 중 큰아들 이홍과 둘째 아들 이현은 모두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모후의 잔혹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정치관을 달리했다. 그래서 큰아들은 독살하고, 둘째 아들은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이후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로 책봉되고 고종 사후에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역시 55일 만에 폐위시키고 만다. 그리고 넷째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키나 별전에 기거하게 하며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측천은 이렇게 정사를 주무르다가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당을 주(나라, 690~707)로 바꾸어 15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고종의 황후시절부터 정사에 관여했으니 실질적으로는 50여 년을 정치가로 살아간 셈이다.

 

무측천은 그녀가 행한 냉혹한 처사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치적에 있어서 만큼은 당 태종 이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황제였다. 그녀는 당 왕조를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국가로, 또한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무측천이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고 명군의 치적을 남기게 된 데는 그녀만이 지닌 탁월한 심리공략술이 기반이 되었다. 무측천은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치인술(治人術)을 개발해 냈는데, 그것은 이른바 권력과 세상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게 하는 심리공략 전술로, 상대의 내면까지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권력의 힘을 숨긴 채 시운(時運)을 빌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녀의 심리공략술을 살펴보고 그것이 조화된 그녀만의 리더십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사실 오랫동안 무측천의 업적은 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왔다. 특히 중국의 사가들에게 요녀’, ‘악녀로 수용되면서 제대로 된 관심과 연구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다만 그녀가 여자였다는 점이 두드러진 점일 뿐이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늘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오늘의 시대에 무측천의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현대사회에서 거칠고 냉혹한 여자로 평가받는 여성 리더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단력과 용기,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십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차례

머리말 : 무측천, 심리공략의 달인이었다

심리전의 여왕 무측천에게서 배우는 인간 심리 경영

 

1부 심리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1.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2.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의 중용을 지키다

3.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다

4.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 처리하다

5.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6.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7.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8. 여성 정치가로서 위대한 선구자였다

9.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10. 역대 제왕의 교훈을 평생의 싱크탱크로 삼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공략의 기술

1.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2.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3.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4. 심리 공략의 필승지책 : 상대의 치부는 덮어주되 비겁함을 공격한다.

5.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6. 심리 공략의 치인술 : 사람은 사람으로 다스리다

7. 심리 공략의 연환술 : 때로는 권력을 대담하게 내려놓아라

8.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9. 심리 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10.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 연표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모색 / 20076/ 513/ 24,500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무측천은 14세 때 당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서충용이라는 후궁에게 황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궁녀들은 대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매끼 들여오는 음식도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궁정 암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 무측천은 환관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로써 대하고 뇌물을 주어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즉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서로 반목하는지와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를 통해 앞날의 정황을 준비했다.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무측천에게 궁녀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정무를 처리하고 퇴조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었으며, 항상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 보면 심신이 지치고 팔다리가 퉁퉁 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했다. 이미 황제의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군 태종과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성공이란 매력, 능력, 지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은 기회를 가져오고, 능력은 남과 다른 비범함을 발휘하며, 지력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측천은 이 세 가지를 가장 적절하게 융합하여 최대 효과를 발휘할 줄 알았다. 상원 원년 12, 무측천은 황후의 신분으로 당 고종에게 치국에 필요한 12조를 건의했다. 건언 12(建言 十二事)라고 불리는 이 제안서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열두 가지의 건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 고종은 부황의 국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 피해와 동방과의 전쟁 그리고 황실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소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무측천은 이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농업과 양잠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할 것,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 표준으로 삼을 것 등의 산업 진흥 정책이 담겨 있었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당은 경제를 회복했으며 향후 무측천의 통치 기간에는 100% 국력이 증가하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2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점은 신진 관료 세력들의 이익을 주청한 내용이다. 무측천은 관리의 봉록을 인상할 것과 더불어 직위가 낮아도 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한 신진 관료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측천의 건언 12사는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정책개선의 의지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대거 등장한 신흥 관료 계층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천하를 얻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이씨 왕실과 관료 귀족 계층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손발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측천은 인재 활용에 있어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용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경업의 난(684)을 계기로 시행한 것으로, 기존의 관료 제도를 향해 무측천이 던진 단죄의 칼날이었다. 서경업의 난은 무측천이 중종 이철을 폐하고 예종 이단을 세웠으나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위시한 원로중신 세력이 폐위된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서경업의 난은 3개월 만에 패하였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

 

무측천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후 탐관오리를 비롯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동궤를 설치했다. 동궤는 동()으로 만든 상자에 익명의 투서를 하도록 만든 것인데, 그 내부는 네 개의 칸이 있어 투서 내용을 달리했다. 동쪽은 연은이라 하여, 황실의 업적이나 공덕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임관이나 승진을 청하는 상소를 위한 공간이었고, 서쪽은 신원이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투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소간은 정책적 건의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마지막 북쪽 칸인 통현은 천재지변이나 군사기밀 관련 내용을 투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동궤에 투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무측천의 밀고제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민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관료 집단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당 고조와 당 태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에 약간의 억압을 가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도교와 불교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무측천은 성력 원년(689) 정월, 금승도전방제(禁僧道殿謗制)를 반포하고, 불교와 도교는 선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라 볼 수 있으니 승려와 도사가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면 칙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무측천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고승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고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도교의 발전도 함께 도모했다. 이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측천은 종교를 정권의 유용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그 둘을 상호 견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였다.

 

위정자가 개혁에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치국의 도를 깨닫고 안정적으로 시정을 펼쳐야 한다. 688, 무측천은 명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는 무측천이 최초의 여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고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명당에서 정사를 펼치는 것을 큰 공으로 여겼다. 그러나 명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명당에서 정사를 베푼 왕은 3명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무측천은 고종 시절부터 명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관이나 학사들이 명당건축이 백성을 혹사시키고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사치행각이라며 은근히 비판했다. 이에 무측천은 명당이 선조와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곳이니, 재해와 화란을 막고 나라를 성하게 하는 일라며 명당의 기능을 과장했다. 그리고 명당을 완공시키자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대사면을 명하고 백성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화려하고 웅대한 명당의 모습은 당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명당을 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몰려든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예관과 학사들의 비방은 사방에 가득한 칭송에 묻혀 사라졌다. 무측천은 명당을 통해 일련의 유신(維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영창 원년 정월, 명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정사를 펼치면서 백관들을 훈계하는 9개항을 반포했다. 그 요지를 요약해보면 군신들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며, 제업(帝業)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사확을 주충효태황, 어머니 양씨를 충효태후 등의 존호로 추서함으로써 무씨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개원재초칙(改元載初敕)이라는 개혁조항을 반포했는데, 그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예악과 문서를 교정하고, 신조한자를 제정하고 역법을 개정하는 것 등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황제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무측천은 황위에 등극한 후, 수나라 때의 감찰(監察) 제도를 부활시켰다. 중앙의 최고 감찰 기관을 어사대로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각 주현의 군정, 민정,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서성(정무집행기관)의 회의, 문무백관의 연회 및 제사를 진행할 때에도 감찰을 시행하도록 했으니, 감찰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감찰관은 황제의 눈과 귀와 같은 존재로, 그 권한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감찰관의 특권에 대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억울하게 탄핵된 관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즉 감찰관의 선발부터 신중을 기했으며, 감찰어사들이 올린 탄핵과 상소는 자신이 직접 분석하고 감별하였다.

 

감찰제도의 부활은 국가 기관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기여했다. 무측천은 감찰을 통해 여러 주현들을 통합함으로써 주현을 거의 1/2이나 줄이고 대규모 감원을 이행했다. 인재의 유용성을 중시한 무측천은 이러한 감원정책을 두고,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무측천은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관리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 등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하지만 고위 대신들과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관을 차려 입지 않으면 내치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등,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감찰을 통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은 부패한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는 것과 더불어 일반 지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농민의 납세부담을 줄이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로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감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무측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은 오직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로써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무측천이 실시한 일련의 변화란 그녀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하자 당의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합당한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무씨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이씨에서 주나라의 무씨로 종실의 위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국호를 주()로 세운 것도 고대 왕조의 치세를 재현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고대 중국의 치세란 ()’()’의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무씨의 주() 왕조를 세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이미 고종 시대부터 준비되어온 일이었다. 낙양은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이미 수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낙양과 장안을 왕래하며 정사를 펼쳤는데 고종이 낙양에서 머문 기간만 10여 년에 달했다. 무측천은 그 기간 동안 낙양에 세력을 형성하고 고종이 죽자 낙양을 더욱 육성시켰다. 그래서 무주 왕조 건국이 가시권에 이르렀을 때 낙양은 이미 새로운 왕조의 정치, 문화,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무측천이 사직을 신도로 옮긴 것도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직은 본래 제왕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상징이 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무측천은 신도에 무씨 태묘(太廟) 7개를 세우고, 삼십만 군대를 상주케 하여 무씨 왕실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켰다.

 

자고로 예를 즐기는 것은 모든 제왕의 공통점이었다. 무측천은 유가의 예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여러 가지 예의 법식과 의식들을 통해 민심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유신론자였던 무측천은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결정짓는 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 신의 힘을 빌려서 주 왕조 설립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민심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존호이다. 무측천은 고종을 도와 정무를 살피던 시기에 이미 천후라는 별칭을 사용해왔으며,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황제임을 뜻하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존호를 개칭했다. 이렇듯 무측천은 무주 왕조를 건국하기까지 매사를 심사숙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서 사직을 바꾸고 세력을 형성하여 새 왕조를 세웠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성공의 문을 관통할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는 얼마나 기회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낼 줄만 알았지, 자신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무측천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도사가 자신의 관상을 보고 귀인중의 귀인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과 지혜를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감지함으로써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으며, 특히 주위의 모든 권력을 방패막이이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측천의 정치적인 영민함은 일차적으로 그녀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무씨 집안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 관직에 진출했으나, 명문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 대에 이르면서 무씨 집안은 가문 부흥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본래 목재상이었던 무사확은 수양제의 대형 토목 공사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재력을 무기로 권세가들과 쉽게 교분을 쌓았다. 산서 지역의 세력가로 후에 당을 건국한 태조 이연(李淵)과의 친분도 이때 맺은 것이다. 무사확은 이연이 군사를 일으킬 때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 후 군수관(軍需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간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장안의 신흥 귀족으로 부상했다.

무사확은 전처 상리씨와의 사이에 원경, 원상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전처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연이 수나라의 재상이던 양달의 노처녀 딸을 그와 맺어 주었다. 양씨는 무사확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았으며, 그중 둘째가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무측천이 아직 어렸을 때 부친 무사확이 사망했고, 이후 두 이복 오빠는 양씨 모녀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무측천이 14살 되던 정관 15, 조정에서 각 지방의 재주 있는 미녀들을 입궁시키게 했다. 그러나 딸의 입궁을 원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 중에 실제로 은총을 입는 궁녀는 극소수인 데다 황제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때부터 천대와 멸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 역시 딸들이 궁녀로 간택되는 걸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큰딸과 막내딸은 하급관리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무측천은 한사코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리고 황제를 뵐 수 있는 건 행운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국 무측천의 빼어난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당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무측천은 정관 1514살의 나이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눈에 띄는 기회를 얻어냈다. 당 태종은 명마(名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서역에서 조공으로 바쳐온 말을 길들이는 과정을 직접 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총이란 이름의 야생마가 길길이 날뛰며 조련사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사자총은 비록 성질은 난폭하지만 튼튼하고 위엄이 가득한 명마였다.

 

태종은 사자총이 눈에 들었으나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점에 고심했다. 그래서 하루는 문무 대신들을 향해 누가 저 말을 길들일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궁녀들 속에 있던 무측천이 돌연 태종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태종이 웃으며 순한 말도 타기 어려운 어린 계집이 어찌 야생마를 조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무측천은 자신이 말을 다루어볼 터이니 철채찍과 철퇴, 비수를 달라고 하였다. 태종이 의아해하며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무측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선 철채찍의 맛을 보여주고,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철퇴로 머리를 칠 것이며,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버리려고 합니다.” 태종과 주위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입을 연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방법은 좀 지나치구나. 하지만 네 생각만은 참으로 용맹스럽다.” 이때 무측천은 태종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이 시선이 향후 그녀가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당태종(재위 629~649)은 말년에 병석에 있으면서 심약한 태자를 염려했다. 그래서 재상을 불러 태자를 부탁하고 유조를 받아 적게 했다. 그는 우선 왕조의 앞날에 위협이 될 모든 화근을 일소하기 위해 반정을 모의할 가능성이 있는 신하들을 먼 지방의 관리로 보내게 했다. 그런데 유조를 내리는 동안 문득 한 해 전에 도사 이순풍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순풍은 삼십 년 후에 여자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각별히 총애한 서충용을 제외한 모든 비빈들을 비구니가 되게 하라고 명했다. 이 유조에 따라, 정관 23(649) 526, 천하의 명군 태종이 붕어하자 무측천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태종의 별묘(別廟)가 있는 감업사의 비구니로 가게 되었다.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중 태자 이치(고종)는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소양이나 인품 그리고 향후 제위자리를 놓고 벌어질 골육상잔을 염려한 태종의 고려에 의해 태자에 봉해졌다. 당시 18세였던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잃자 태자 이치를 겨냥했고,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감업사의 비구니가 된 무측천을 다시 찾았고, 결국 후궁의 첩지를 내려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측천은 재입궁하자, 곧 황후 쪽 환관과 시녀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왕황후는 성품이 차갑고 거만했으며, 그의 모친 유씨는 딸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였기에 황후궁에 충심을 다하는 시종들이 많지 않았다.

 

사실 무측천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데는 왕황후의 힘이 컸다. 왕황후가 무측천의 입궁을 도운 것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측천은 왕황후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는 한편, 황후와 소숙비 두 사람 중 누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될 존재인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素節)의 생모라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황후는 후사가 없었기에 양자 충()을 들여놓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태자 책립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다. 이때 무측천도 임신 중이었으나 아직 두 사람에게는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황후와 소숙비는 음으로 양으로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고, 서로 비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종은 두 사람이 태자 책립 문제로 못살게 구는 일이 잦아지자 그들의 처소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무측천은 서로 비방하는 두 사람과 달리 항상 온유하고 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무측천이 고종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휘 3(652), 무측천은 남아를 순산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 태어나면서 무측천의 품계는 비빈 중 가장 높은 소의(2)에 책립되었다. 하지만 황후나 소숙비로서는 태자 책립문제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의 태자 책립을 눈물로써 간청했고 결국 고종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소식을 들은 무측천은 이 일을 곧바로 황후에게 고했다. 황후의 모친 유씨는 자신의 아들 유석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고 유석은 대신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튿날 조정 대신들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진왕 충을 태자로 옹립할 것을 주청하는 가운데, 원로대신 장손무기는 다섯 번째 황자의 탄생을 진심으로 감축드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측천의 아들 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홍은 무측천이 입궁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태어났으므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임신한 것이었다. , 선제의 궁녀와 몰래 사통하여 임신시킨 고종을 조롱한 것이었다. 이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고종은 황후의 양자 을 태자로 책립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태자 책립을 두고 벌어진 싸움은 황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후는 이 일에 직접적인 공을 세운 무측천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하사받은 금전과 예물을 모두 황후궁의 환관과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더욱 정보를 열심히 제공했고 결국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황후와 그녀의 모친 위국부인이 황제형상의 나무인형을 만들어 황제가 죽기를 기도드린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이 사실을 즉시 고종에게 상주했다.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황후를 불러 문책하려 했다. 무측천은 이러한 황제를 말리며 황후궁에 친히 가셔서 증거를 잡은 후 문책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고종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왕황후의 처소로 향했다. 사실 왕황후는 고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혹시 자신을 폐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딸을 보다 못한 유씨는 승려에게 의논했고 승려는 침을 꽂은 나무 인형을 주며 백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이라 하였다. 고종이 황후의 침실에 들렀을 때 황후는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옆에는 침을 꽂은 나무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무측천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왕황후는 폐위되고 별궁에 유폐된다.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무측천은 지위와 세력,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숙비와 황후를 제거한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외로움을 느낀 고종은 무측천의 언니 한국부인과 그 딸 위국부인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총애했다. 황후의 자리를 앞에 둔 상황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측천은 한국부인과 위국부인을 차례로 독살시키고 그 누명을 두 이복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에게 뒤집어씌워 유배되도록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심약한 고종이 냉궁에 유폐되어 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안쓰럽게 여겨 구해주려 하자, 언제 처지가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 사람의 수족을 절단하게 하고 술독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측천은 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무측천은 정사에 관여하며 계속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 고종은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 42녀가 무측천의 소생이었으며, 그중 첫째인 이홍은 겨우 4살의 나이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모후와 부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이홍은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언행이 바르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니, 요산옥채500권은 그의 주도로 편찬된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태자를 신뢰하여 여러 차례 국사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이홍의 시정 방침은 모후 무측천과 크게 달라 자주 부딪힘이 생겼다. 또한 그는 종실에 대한 모후의 잔혹함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병석에 누운 고종은 이홍에게 양위할 뜻을 비쳤는데, 이홍은 갑자기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24살이었던 이홍의 죽음은 일대 미스터리였는데 무측천이 독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하튼 이홍의 죽음은 고종에게 큰 슬픔이었으며 아까운 인재의 손실이었다.

 

이홍이 죽자, 고종은 둘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한다(675). 당시 22살이었던 이현은 형 이홍과 마찬가지로 반듯한 외모와 바른 언행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갖춰 탄복하지 않은 대신들이 없었다. 고종의 신임과 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혈기 넘치는 청년 이현은 모든 것을 모후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측천과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측천은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태자가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을 제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영휘 원년(680), 무측천은 이현을 모반죄로 고발했다. 고종은 어사대부로 하여금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동궁의 마구간에서 갑옷 수백 개가 발견되었다. 고종은 딱히 할 말이 없는 와중에서도 이현을 변호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측천이 완강하게 태자의 처벌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폐위시키고 만다.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무측천은 은신술에 능했다. 그녀는 뒤에서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 후에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곤 했다. 고종은 죽기 직전 태자 이철(李哲, 무측천의 셋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대신 무측천에게 섭정을 허락하는 유조를 내렸다. 이철은 맏아들 이홍처럼 높은 인덕을 쌓지도 못했고, 둘째 이현처럼 주위에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음을 고려한 유언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철의 즉위식을 일주일간 미룬 후 거행했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도록 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는 순종적이었다.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다름없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했고 매일 퇴조 시간이면 어김없이 태후를 배알하여 하루의 정무를 보고했다. 그러다 보니 전날 조정에서 논의된 모든 정무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결정되는 진풍경이 반복되었다.

 

중종은 제위에 오른 지 5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자 모종의 결단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자신의 장인 위효정을 시중으로 승진시키고 유모의 아들에게도 5품 관직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자 재상 배염이 나서며 위효정이 시중에 봉해질 만큼 공이 크지 않기에 이러한 승진은 민심을 잃을 수 있다고 간언했다. 갓 제위에 오른 신참 황제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 중종은 배염의 청구를 묵살했다. 그럼에도 배염이 끝까지 반대하자 짐은 위현정에게 천하를 내줄 수도 있는데 그깟 시중 자리를 갖고 무얼 그러시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배염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나 무측천에게 이 일을 소상히 적어 올렸다. 무측천은 그날 저녁 배염을 불러 조서를 적게 하고 금위군을 대기시켰다.

 

중종은 막상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모후 무측천이 어찌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중종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문안을 드리면서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무측천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중종이 안심하고 어전에 나와 막 전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그곳에 모후 무측천이 앉아 있었다. 중종이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무측천은 지난밤 배염이 작성한 조서를 낭독하도록 했다.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에 봉하고 궁중에 유폐시키도록 하라!” 중종은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 폐위하려 하느냐고 모후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 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겠소?” 하고 되물었다. 문무백관은 엎드려 조서를 받들고 있고, 근위병은 궁정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모후는 용상에 앉아 있으니 중종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은 즉위 55일 만에 제위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무측천은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으나, 모든 정무는 무측천이 단독으로 처리했고 예종은 별전에 기거하면서 정무에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측천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자신의 혈족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과정은 단지 사사로운 감정이나 눈앞의 욕망 때문에 이행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측천이 황후 자리나 탐냈다면 그녀가 가진 권력은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다만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실현하자 위국애민의 치적으로 백성들의 추앙과 지지를 받는 성공한 정치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무측천이 제위에 오른 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 인사정책이었다. 그녀는 인재 선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과거제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당의 과거 제도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삼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측천은 친히 낙양궁에 나가 과거 시험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천자가 검시관으로 직접 시험을 관장한 예는 없었다. 이후 후대인들은 천자가 관장한 과거를 전시(殿試)’라 불렀다. 재초 원년(690) 2, 무측천은 몇 날 며칠 동안 직접 심사를 했다. 시험은 경서에 대해 해박한 정도와 국책에 대한 견해, 개인적인 품행과 외모, 자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관리 선발 형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기계적으로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무측천은 최초로 자천 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 관직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연은이라는 동으로 만든 함에 자신의 천거의사를 적어 넣도록 하는 제도였다. 당 태종도 모수자천(毛遂自薦)제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재상 위정이 남을 아는 것은 지()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명()인데, 타인을 알기 어렵고, 자신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고 반대하자 간언을 귀담아 듣던 태종은 곧바로 계획을 취소했다. 명군으로 이름난 당 태종마저도 시행을 망설이고 포기한 제도를 무측천은 과감히 시행했다. 무측천은 또한 과거 시험에 무과(武科)’를 도입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무과는 활쏘기, 말타기, 언어, 행동거지 등 모두 일곱 과목을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는 제도로 합격자는 곧바로 병부에 예속되었다.

 

무측천 시대의 과거제의 발전은 중소 지주계층의 지식인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재를 폭넓게 기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무측천은 발굴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에도 탁월했는데, 무측천의 인재등용 정책에 큰 역할을 한 밀고(密告)’제도는 무측천의 인재풀 가운데 한 유형이었다. 무측천은 밀고 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처벌권을 혹리(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라는 11명의 관리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빈천한 관리 출신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원망이 많았고, 자신을 깔보는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컸다. 말하자면 무측천이 저열한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기용한 것은 그들의 교활함을 빌려 탐관오리나 부패관료층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상대를 겨냥하는 일이 많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폐단이 생겨나자 강직하고 공정한 판관들을 기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혹리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가차 없이 내쳤다.

 

성공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용인술에 능해야 한다. 용인술이란 결점이 있더라도 특별한 장점을 지닌 자가 있다면 중용하는 대범함을 말한다. 옛말에 금은 순금이 없고,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곧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때 유방은 소인배 출신으로 그가 기용한 자들은 대부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장점과 특기를 발휘해 뭉쳐진 전체는 무소불위의 괴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즉 유방의 용인술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보다는 한 가지 특기를 가진 전문가를 기용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자는 재주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용인술의 핵심은 그런 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되, 구속할 줄 아는 데 있다.

 

심리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무측천은 자애로운 궁궐의 안주인이기보다는 냉혹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했으며, 구중궁궐에 가만히 앉아서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하고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이룩했다. 당시 이민족의 잦은 침략은 국가의 통치 기반과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문제였다. 당나라는 변방의 이민족들과 계속해서 전쟁과 화친을 반복해왔는데, 무측천은 이들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반격하도록 하여 변방민족들을 당에 복속시켰다. 그리고 기미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들의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통치 계층이 직접 자민족을 다스리게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적대적이었던 대신들은 이러한 무측천의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분산시켜 각 주현으로 보내 경작과 직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풍속을 한화시키는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말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동화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다민족의 융합은 경제 발전이라는 기초하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야지 정치권력이 개입되면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는 고려에서였다. 무측천은 이민족에게 자치권을 주되 부락의 추장은 조정의 직접 통치를 받게 했다. 또한 토착민들을 예법으로 교화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를 통제했다.

 

무측천은 외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면서, 내적으로는 백성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중 균전제(均田制)를 예로 들면, 당시에는 국가가 장악한 토지를 가구당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수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정 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측천이 즉위했을 당시의 농촌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농민이 실제로 균전을 받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의 토지는 크게 황제의 소유지, 귀족 관료의 소유지, 일반 지주의 소유지, 그리고 소량의 농민 소유지로 나누어졌다. 전자의 세 부류가 가진 토지는 균전제의 분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국가 소유의 황무지나 군대의 둔전만이 균전제의 토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에 한해 영업전과 구분전의 매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이는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호족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잠식해가다 보니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허다했다.

 

무측천은 균전제의 와해를 막기 위해 영업전과 구분전에 대한 모든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한 자는 엄중 처벌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망간 농민들을 환향시켰는데, 이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무측천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그들을 호적에 복속시키고 경작할 땅을 주는 대신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일부지방에서는 인구수에 비해 경작지가 너무 적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래서 무측천은 인구수와 경작지를 고려하여 이주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주한 농민에게는 부역을 감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떠나고 황무지가 늘어나는 지역의 관리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명하고, 감찰관을 수시로 주현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균전제는 저절로 그 공정성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법치 실현에도 업적을 남겼다. 무측천은 과거의 법이 유독 가혹한 처벌이 많고 복잡한 법률 조항으로 인한 형벌남용으로 소송사건이 많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번 죄인은 끝까지 죄인으로 남게 됨을 지적하고 법률을 실정에 맞게 새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편찬된 법률이 모두 12502조로 구성된 영휘율(永徽律)이다. 무릇 법률을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법률 조문보다도 법을 시행하는 과정이다. 영휘율은 법이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고, 처벌의 경중이 적절하고, 엄격함과 관대함이 모두 그 도를 넘지 않아서 수천 년이 지나도록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사사로운 일도 법에 따라 이행했는데, 이는 법치를 통해 명문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합법적인 강령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무측천은 나라의 법도와 기강, 상벌 제도와 함께 민생에 큰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실사구시의 위정 자세는 오늘의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자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책봉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당시 조정은 두 이복오빠의 아들들인 무승사, 무삼사를 위시한 무씨 일족과 재상 적인걸을 앞세운 친당 세력 그리고 장혁지, 장창종 등 무측천이 총애하는 남창 세력 등의 세 파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장창종과 장혁지 형제는 음률에 재주가 있는 미소년들로 딸인 태평공주가 천거하자 이들을 곁에 두고 오랫동안 총애했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장씨 형제는 오만방자함이 지나치도록 권세를 펼치고 있었다. 한편 이복오빠의 아들인 무승사는 무측천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이지만 무측천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측천은 제위에 오르면서 넷째 아들 예종(이단)을 황제에서 폐위시켰지만 그를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사(皇嗣)라 칭했다. 이는 언제든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씨 왕조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만큼 무씨가 제위를 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조카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자니 그들이 아들만큼 자신을 섬기지는 않을 터였다. 무측천은 당조의 명신이었던 재상 적인걸에게 태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적인걸은 친자를 후계자로 세워야만 종묘에 모셔지고 제왕의 모친으로 받들어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적인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여릉왕 이철(폐위된 중종)의 복위를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무씨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이씨의 당 왕조를 다시 복권하고자 했다.

 

장안 4(704), 무측천은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고, 종실과 재상들의 접근을 막은 채 장창종 형제로 하여금 수발을 들게 했다. 황제의 죽음이 임박하자 이씨 당 왕조의 복권을 계획한 일부 조정대신들이 정변을 모의했다. 장간지와 언범을 필두로 한 조정의 신하와 병사들은 태자 이철에게 자신들의 정변계획을 알렸다. 이철이 망설임 끝에 윤허를 내리자 상왕 이단, 태평공주 등의 이씨 종친들이 지지를 가세했다. 병사를 이끈 장간지는 곧 무측천의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장씨 형제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무측천의 처소를 포위한 후, 무측천에게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모반을 꾀하여 태자의 명을 받들어 참수했노라고 말했다.

 

이철이 들어오니, 무측천은 비통하고 분노한 감정을 억누르며 동궁으로 돌아가라 했다. 이에 장수 한 명이 나서며 양위를 종용했다. 무측천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누워버렸으나 며칠 후 장간지 등이 다시 한 번 무측천에게 양위를 독촉하자 마침내 대권을 놓았다. 이후 무측천은 열 달 정도를 더 살았다. 이 마지막 열 달이 무측천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던 것 같다. 중종이 다시 복위함으로써 이씨 조정의 당이 복귀되고 무측천은 상양궁에 갇히게 되었는데, 사서에 의하면 태후는 꾸미기를 좋아해 손자를 본 뒤에도 전혀 노쇠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상양궁에 연금된 후부터는 머리를 빗지 않고 꾸미지 않으니 그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기 며칠 전, 무측천은 중종, 상황, 태평공주와 조카 무삼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조를 남겼다. 우선 자신의 칭호를 황제가 아닌 황후로 부르도록 하고, 건릉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황후와 소숙비의 가문의 자손들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무씨 인척의 지위를 높여달라고 명했다. 이 유지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중종이 복위함으로써 무씨 조정이 사라졌으니 무측천이 세운 대주(大周)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황제 칭호를 거두고 황후로 칭하라는 것은 이씨 왕조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였다. 만약 황제의 칭호를 유지한다면, 이씨 왕조의 종실들이 무씨 집안을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고종이 묻힌 건릉에 함께 묻힘으로써 주나라의 황제에서 다시 당 고종의 황후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왕황후와 소숙비 가문의 자손들을 복권시키고 외척 무삼사와 원노기 등의 작위를 높이도록 한 것도 자신의 사후에 있을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무측천은 이처럼 마지막까지 탁월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그리고 신용 원년(705)1126일 새벽, 무측천은 상양궁 선거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무측천은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의 이름으로 건릉에 묻혔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비문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무측천은 무에서 유로,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끊임없는 협상과 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 그녀의 배후는 미약한 반면 그녀의 적들은 든든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무측천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손에 넣은 후에는 황제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경제 문화적인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 당나라가 300여 년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는 기초를 다졌으니, 이른바 ()’ 자 비()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대답이라 할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기술은 여제 무측천의 성공 전략을 수록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측천을 사람의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고 표현하며 어떻게 그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알고 있던 무측천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다.

사철 지음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 20076/ 513/ 24,500

 

저자 사철

중국의 역사 연구가.

 

역자 이은영

영남대학교 한문교육학과를 마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베이징 우전대학 및 천진 사범대에서 수학했으며, LG 및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다. 현재 주중국 한국대사관 통번역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경영우화, 무측천등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무측천(則天)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서기 624년에 태어나서 705년까지 82년의 생을 살았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미모로 인해 14살 때 당태종 이세민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총애를 잃게 되자 태자 이치(고종)를 유혹하여 그의 후궁이 된다. 당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42녀는 모두 무측천의 소생이었는데, 그녀는 첫 아들을 낳자 황후를 모략하여 폐위되도록 하고 황후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사에 관여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 나갔는데,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측천의 네 아들 중 큰아들 이홍과 둘째 아들 이현은 모두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모후의 잔혹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정치관을 달리했다. 그래서 큰아들은 독살하고, 둘째 아들은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이후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로 책봉되고 고종 사후에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역시 55일 만에 폐위시키고 만다. 그리고 넷째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키나 별전에 기거하게 하며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측천은 이렇게 정사를 주무르다가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당을 주(나라, 690~707)로 바꾸어 15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고종의 황후시절부터 정사에 관여했으니 실질적으로는 50여 년을 정치가로 살아간 셈이다.

 

무측천은 그녀가 행한 냉혹한 처사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치적에 있어서 만큼은 당 태종 이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황제였다. 그녀는 당 왕조를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국가로, 또한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무측천이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고 명군의 치적을 남기게 된 데는 그녀만이 지닌 탁월한 심리공략술이 기반이 되었다. 무측천은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치인술(治人術)을 개발해 냈는데, 그것은 이른바 권력과 세상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게 하는 심리공략 전술로, 상대의 내면까지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권력의 힘을 숨긴 채 시운(時運)을 빌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녀의 심리공략술을 살펴보고 그것이 조화된 그녀만의 리더십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사실 오랫동안 무측천의 업적은 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왔다. 특히 중국의 사가들에게 요녀’, ‘악녀로 수용되면서 제대로 된 관심과 연구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다만 그녀가 여자였다는 점이 두드러진 점일 뿐이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늘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오늘의 시대에 무측천의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현대사회에서 거칠고 냉혹한 여자로 평가받는 여성 리더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단력과 용기,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십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차례

머리말 : 무측천, 심리공략의 달인이었다

심리전의 여왕 무측천에게서 배우는 인간 심리 경영

 

1부 심리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1.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2.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의 중용을 지키다

3.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다

4.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 처리하다

5.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6.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7.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8. 여성 정치가로서 위대한 선구자였다

9.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10. 역대 제왕의 교훈을 평생의 싱크탱크로 삼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공략의 기술

1.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2.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3.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4. 심리 공략의 필승지책 : 상대의 치부는 덮어주되 비겁함을 공격한다.

5.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6. 심리 공략의 치인술 : 사람은 사람으로 다스리다

7. 심리 공략의 연환술 : 때로는 권력을 대담하게 내려놓아라

8.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9. 심리 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10.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 연표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모색 / 20076/ 513/ 24,500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무측천은 14세 때 당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서충용이라는 후궁에게 황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궁녀들은 대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매끼 들여오는 음식도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궁정 암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 무측천은 환관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로써 대하고 뇌물을 주어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즉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서로 반목하는지와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를 통해 앞날의 정황을 준비했다.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무측천에게 궁녀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정무를 처리하고 퇴조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었으며, 항상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 보면 심신이 지치고 팔다리가 퉁퉁 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했다. 이미 황제의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군 태종과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성공이란 매력, 능력, 지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은 기회를 가져오고, 능력은 남과 다른 비범함을 발휘하며, 지력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측천은 이 세 가지를 가장 적절하게 융합하여 최대 효과를 발휘할 줄 알았다. 상원 원년 12, 무측천은 황후의 신분으로 당 고종에게 치국에 필요한 12조를 건의했다. 건언 12(建言 十二事)라고 불리는 이 제안서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열두 가지의 건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 고종은 부황의 국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 피해와 동방과의 전쟁 그리고 황실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소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무측천은 이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농업과 양잠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할 것,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 표준으로 삼을 것 등의 산업 진흥 정책이 담겨 있었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당은 경제를 회복했으며 향후 무측천의 통치 기간에는 100% 국력이 증가하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2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점은 신진 관료 세력들의 이익을 주청한 내용이다. 무측천은 관리의 봉록을 인상할 것과 더불어 직위가 낮아도 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한 신진 관료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측천의 건언 12사는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정책개선의 의지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대거 등장한 신흥 관료 계층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천하를 얻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이씨 왕실과 관료 귀족 계층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손발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측천은 인재 활용에 있어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용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경업의 난(684)을 계기로 시행한 것으로, 기존의 관료 제도를 향해 무측천이 던진 단죄의 칼날이었다. 서경업의 난은 무측천이 중종 이철을 폐하고 예종 이단을 세웠으나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위시한 원로중신 세력이 폐위된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서경업의 난은 3개월 만에 패하였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

 

무측천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후 탐관오리를 비롯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동궤를 설치했다. 동궤는 동()으로 만든 상자에 익명의 투서를 하도록 만든 것인데, 그 내부는 네 개의 칸이 있어 투서 내용을 달리했다. 동쪽은 연은이라 하여, 황실의 업적이나 공덕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임관이나 승진을 청하는 상소를 위한 공간이었고, 서쪽은 신원이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투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소간은 정책적 건의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마지막 북쪽 칸인 통현은 천재지변이나 군사기밀 관련 내용을 투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동궤에 투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무측천의 밀고제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민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관료 집단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당 고조와 당 태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에 약간의 억압을 가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도교와 불교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무측천은 성력 원년(689) 정월, 금승도전방제(禁僧道殿謗制)를 반포하고, 불교와 도교는 선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라 볼 수 있으니 승려와 도사가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면 칙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무측천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고승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고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도교의 발전도 함께 도모했다. 이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측천은 종교를 정권의 유용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그 둘을 상호 견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였다.

 

위정자가 개혁에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치국의 도를 깨닫고 안정적으로 시정을 펼쳐야 한다. 688, 무측천은 명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는 무측천이 최초의 여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고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명당에서 정사를 펼치는 것을 큰 공으로 여겼다. 그러나 명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명당에서 정사를 베푼 왕은 3명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무측천은 고종 시절부터 명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관이나 학사들이 명당건축이 백성을 혹사시키고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사치행각이라며 은근히 비판했다. 이에 무측천은 명당이 선조와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곳이니, 재해와 화란을 막고 나라를 성하게 하는 일라며 명당의 기능을 과장했다. 그리고 명당을 완공시키자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대사면을 명하고 백성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화려하고 웅대한 명당의 모습은 당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명당을 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몰려든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예관과 학사들의 비방은 사방에 가득한 칭송에 묻혀 사라졌다. 무측천은 명당을 통해 일련의 유신(維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영창 원년 정월, 명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정사를 펼치면서 백관들을 훈계하는 9개항을 반포했다. 그 요지를 요약해보면 군신들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며, 제업(帝業)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사확을 주충효태황, 어머니 양씨를 충효태후 등의 존호로 추서함으로써 무씨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개원재초칙(改元載初敕)이라는 개혁조항을 반포했는데, 그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예악과 문서를 교정하고, 신조한자를 제정하고 역법을 개정하는 것 등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황제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무측천은 황위에 등극한 후, 수나라 때의 감찰(監察) 제도를 부활시켰다. 중앙의 최고 감찰 기관을 어사대로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각 주현의 군정, 민정,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서성(정무집행기관)의 회의, 문무백관의 연회 및 제사를 진행할 때에도 감찰을 시행하도록 했으니, 감찰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감찰관은 황제의 눈과 귀와 같은 존재로, 그 권한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감찰관의 특권에 대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억울하게 탄핵된 관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즉 감찰관의 선발부터 신중을 기했으며, 감찰어사들이 올린 탄핵과 상소는 자신이 직접 분석하고 감별하였다.

 

감찰제도의 부활은 국가 기관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기여했다. 무측천은 감찰을 통해 여러 주현들을 통합함으로써 주현을 거의 1/2이나 줄이고 대규모 감원을 이행했다. 인재의 유용성을 중시한 무측천은 이러한 감원정책을 두고,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무측천은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관리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 등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하지만 고위 대신들과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관을 차려 입지 않으면 내치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등,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감찰을 통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은 부패한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는 것과 더불어 일반 지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농민의 납세부담을 줄이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로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감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무측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은 오직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로써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무측천이 실시한 일련의 변화란 그녀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하자 당의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합당한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무씨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이씨에서 주나라의 무씨로 종실의 위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국호를 주()로 세운 것도 고대 왕조의 치세를 재현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고대 중국의 치세란 ()’()’의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무씨의 주() 왕조를 세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이미 고종 시대부터 준비되어온 일이었다. 낙양은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이미 수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낙양과 장안을 왕래하며 정사를 펼쳤는데 고종이 낙양에서 머문 기간만 10여 년에 달했다. 무측천은 그 기간 동안 낙양에 세력을 형성하고 고종이 죽자 낙양을 더욱 육성시켰다. 그래서 무주 왕조 건국이 가시권에 이르렀을 때 낙양은 이미 새로운 왕조의 정치, 문화,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무측천이 사직을 신도로 옮긴 것도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직은 본래 제왕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상징이 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무측천은 신도에 무씨 태묘(太廟) 7개를 세우고, 삼십만 군대를 상주케 하여 무씨 왕실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켰다.

 

자고로 예를 즐기는 것은 모든 제왕의 공통점이었다. 무측천은 유가의 예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여러 가지 예의 법식과 의식들을 통해 민심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유신론자였던 무측천은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결정짓는 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 신의 힘을 빌려서 주 왕조 설립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민심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존호이다. 무측천은 고종을 도와 정무를 살피던 시기에 이미 천후라는 별칭을 사용해왔으며,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황제임을 뜻하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존호를 개칭했다. 이렇듯 무측천은 무주 왕조를 건국하기까지 매사를 심사숙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서 사직을 바꾸고 세력을 형성하여 새 왕조를 세웠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성공의 문을 관통할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는 얼마나 기회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낼 줄만 알았지, 자신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무측천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도사가 자신의 관상을 보고 귀인중의 귀인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과 지혜를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감지함으로써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으며, 특히 주위의 모든 권력을 방패막이이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측천의 정치적인 영민함은 일차적으로 그녀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무씨 집안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 관직에 진출했으나, 명문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 대에 이르면서 무씨 집안은 가문 부흥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본래 목재상이었던 무사확은 수양제의 대형 토목 공사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재력을 무기로 권세가들과 쉽게 교분을 쌓았다. 산서 지역의 세력가로 후에 당을 건국한 태조 이연(李淵)과의 친분도 이때 맺은 것이다. 무사확은 이연이 군사를 일으킬 때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 후 군수관(軍需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간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장안의 신흥 귀족으로 부상했다.

무사확은 전처 상리씨와의 사이에 원경, 원상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전처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연이 수나라의 재상이던 양달의 노처녀 딸을 그와 맺어 주었다. 양씨는 무사확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았으며, 그중 둘째가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무측천이 아직 어렸을 때 부친 무사확이 사망했고, 이후 두 이복 오빠는 양씨 모녀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무측천이 14살 되던 정관 15, 조정에서 각 지방의 재주 있는 미녀들을 입궁시키게 했다. 그러나 딸의 입궁을 원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 중에 실제로 은총을 입는 궁녀는 극소수인 데다 황제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때부터 천대와 멸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 역시 딸들이 궁녀로 간택되는 걸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큰딸과 막내딸은 하급관리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무측천은 한사코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리고 황제를 뵐 수 있는 건 행운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국 무측천의 빼어난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당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무측천은 정관 1514살의 나이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눈에 띄는 기회를 얻어냈다. 당 태종은 명마(名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서역에서 조공으로 바쳐온 말을 길들이는 과정을 직접 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총이란 이름의 야생마가 길길이 날뛰며 조련사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사자총은 비록 성질은 난폭하지만 튼튼하고 위엄이 가득한 명마였다.

 

태종은 사자총이 눈에 들었으나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점에 고심했다. 그래서 하루는 문무 대신들을 향해 누가 저 말을 길들일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궁녀들 속에 있던 무측천이 돌연 태종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태종이 웃으며 순한 말도 타기 어려운 어린 계집이 어찌 야생마를 조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무측천은 자신이 말을 다루어볼 터이니 철채찍과 철퇴, 비수를 달라고 하였다. 태종이 의아해하며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무측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선 철채찍의 맛을 보여주고,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철퇴로 머리를 칠 것이며,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버리려고 합니다.” 태종과 주위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입을 연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방법은 좀 지나치구나. 하지만 네 생각만은 참으로 용맹스럽다.” 이때 무측천은 태종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이 시선이 향후 그녀가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당태종(재위 629~649)은 말년에 병석에 있으면서 심약한 태자를 염려했다. 그래서 재상을 불러 태자를 부탁하고 유조를 받아 적게 했다. 그는 우선 왕조의 앞날에 위협이 될 모든 화근을 일소하기 위해 반정을 모의할 가능성이 있는 신하들을 먼 지방의 관리로 보내게 했다. 그런데 유조를 내리는 동안 문득 한 해 전에 도사 이순풍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순풍은 삼십 년 후에 여자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각별히 총애한 서충용을 제외한 모든 비빈들을 비구니가 되게 하라고 명했다. 이 유조에 따라, 정관 23(649) 526, 천하의 명군 태종이 붕어하자 무측천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태종의 별묘(別廟)가 있는 감업사의 비구니로 가게 되었다.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중 태자 이치(고종)는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소양이나 인품 그리고 향후 제위자리를 놓고 벌어질 골육상잔을 염려한 태종의 고려에 의해 태자에 봉해졌다. 당시 18세였던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잃자 태자 이치를 겨냥했고,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감업사의 비구니가 된 무측천을 다시 찾았고, 결국 후궁의 첩지를 내려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측천은 재입궁하자, 곧 황후 쪽 환관과 시녀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왕황후는 성품이 차갑고 거만했으며, 그의 모친 유씨는 딸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였기에 황후궁에 충심을 다하는 시종들이 많지 않았다.

 

사실 무측천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데는 왕황후의 힘이 컸다. 왕황후가 무측천의 입궁을 도운 것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측천은 왕황후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는 한편, 황후와 소숙비 두 사람 중 누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될 존재인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素節)의 생모라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황후는 후사가 없었기에 양자 충()을 들여놓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태자 책립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다. 이때 무측천도 임신 중이었으나 아직 두 사람에게는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황후와 소숙비는 음으로 양으로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고, 서로 비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종은 두 사람이 태자 책립 문제로 못살게 구는 일이 잦아지자 그들의 처소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무측천은 서로 비방하는 두 사람과 달리 항상 온유하고 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무측천이 고종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휘 3(652), 무측천은 남아를 순산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 태어나면서 무측천의 품계는 비빈 중 가장 높은 소의(2)에 책립되었다. 하지만 황후나 소숙비로서는 태자 책립문제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의 태자 책립을 눈물로써 간청했고 결국 고종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소식을 들은 무측천은 이 일을 곧바로 황후에게 고했다. 황후의 모친 유씨는 자신의 아들 유석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고 유석은 대신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튿날 조정 대신들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진왕 충을 태자로 옹립할 것을 주청하는 가운데, 원로대신 장손무기는 다섯 번째 황자의 탄생을 진심으로 감축드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측천의 아들 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홍은 무측천이 입궁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태어났으므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임신한 것이었다. , 선제의 궁녀와 몰래 사통하여 임신시킨 고종을 조롱한 것이었다. 이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고종은 황후의 양자 을 태자로 책립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태자 책립을 두고 벌어진 싸움은 황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후는 이 일에 직접적인 공을 세운 무측천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하사받은 금전과 예물을 모두 황후궁의 환관과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더욱 정보를 열심히 제공했고 결국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황후와 그녀의 모친 위국부인이 황제형상의 나무인형을 만들어 황제가 죽기를 기도드린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이 사실을 즉시 고종에게 상주했다.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황후를 불러 문책하려 했다. 무측천은 이러한 황제를 말리며 황후궁에 친히 가셔서 증거를 잡은 후 문책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고종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왕황후의 처소로 향했다. 사실 왕황후는 고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혹시 자신을 폐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딸을 보다 못한 유씨는 승려에게 의논했고 승려는 침을 꽂은 나무 인형을 주며 백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이라 하였다. 고종이 황후의 침실에 들렀을 때 황후는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옆에는 침을 꽂은 나무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무측천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왕황후는 폐위되고 별궁에 유폐된다.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무측천은 지위와 세력,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숙비와 황후를 제거한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외로움을 느낀 고종은 무측천의 언니 한국부인과 그 딸 위국부인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총애했다. 황후의 자리를 앞에 둔 상황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측천은 한국부인과 위국부인을 차례로 독살시키고 그 누명을 두 이복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에게 뒤집어씌워 유배되도록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심약한 고종이 냉궁에 유폐되어 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안쓰럽게 여겨 구해주려 하자, 언제 처지가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 사람의 수족을 절단하게 하고 술독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측천은 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무측천은 정사에 관여하며 계속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 고종은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 42녀가 무측천의 소생이었으며, 그중 첫째인 이홍은 겨우 4살의 나이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모후와 부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이홍은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언행이 바르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니, 요산옥채500권은 그의 주도로 편찬된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태자를 신뢰하여 여러 차례 국사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이홍의 시정 방침은 모후 무측천과 크게 달라 자주 부딪힘이 생겼다. 또한 그는 종실에 대한 모후의 잔혹함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병석에 누운 고종은 이홍에게 양위할 뜻을 비쳤는데, 이홍은 갑자기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24살이었던 이홍의 죽음은 일대 미스터리였는데 무측천이 독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하튼 이홍의 죽음은 고종에게 큰 슬픔이었으며 아까운 인재의 손실이었다.

 

이홍이 죽자, 고종은 둘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한다(675). 당시 22살이었던 이현은 형 이홍과 마찬가지로 반듯한 외모와 바른 언행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갖춰 탄복하지 않은 대신들이 없었다. 고종의 신임과 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혈기 넘치는 청년 이현은 모든 것을 모후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측천과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측천은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태자가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을 제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영휘 원년(680), 무측천은 이현을 모반죄로 고발했다. 고종은 어사대부로 하여금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동궁의 마구간에서 갑옷 수백 개가 발견되었다. 고종은 딱히 할 말이 없는 와중에서도 이현을 변호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측천이 완강하게 태자의 처벌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폐위시키고 만다.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무측천은 은신술에 능했다. 그녀는 뒤에서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 후에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곤 했다. 고종은 죽기 직전 태자 이철(李哲, 무측천의 셋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대신 무측천에게 섭정을 허락하는 유조를 내렸다. 이철은 맏아들 이홍처럼 높은 인덕을 쌓지도 못했고, 둘째 이현처럼 주위에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음을 고려한 유언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철의 즉위식을 일주일간 미룬 후 거행했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도록 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는 순종적이었다.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다름없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했고 매일 퇴조 시간이면 어김없이 태후를 배알하여 하루의 정무를 보고했다. 그러다 보니 전날 조정에서 논의된 모든 정무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결정되는 진풍경이 반복되었다.

 

중종은 제위에 오른 지 5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자 모종의 결단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자신의 장인 위효정을 시중으로 승진시키고 유모의 아들에게도 5품 관직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자 재상 배염이 나서며 위효정이 시중에 봉해질 만큼 공이 크지 않기에 이러한 승진은 민심을 잃을 수 있다고 간언했다. 갓 제위에 오른 신참 황제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 중종은 배염의 청구를 묵살했다. 그럼에도 배염이 끝까지 반대하자 짐은 위현정에게 천하를 내줄 수도 있는데 그깟 시중 자리를 갖고 무얼 그러시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배염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나 무측천에게 이 일을 소상히 적어 올렸다. 무측천은 그날 저녁 배염을 불러 조서를 적게 하고 금위군을 대기시켰다.

 

중종은 막상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모후 무측천이 어찌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중종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문안을 드리면서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무측천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중종이 안심하고 어전에 나와 막 전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그곳에 모후 무측천이 앉아 있었다. 중종이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무측천은 지난밤 배염이 작성한 조서를 낭독하도록 했다.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에 봉하고 궁중에 유폐시키도록 하라!” 중종은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 폐위하려 하느냐고 모후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 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겠소?” 하고 되물었다. 문무백관은 엎드려 조서를 받들고 있고, 근위병은 궁정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모후는 용상에 앉아 있으니 중종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은 즉위 55일 만에 제위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무측천은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으나, 모든 정무는 무측천이 단독으로 처리했고 예종은 별전에 기거하면서 정무에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측천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자신의 혈족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과정은 단지 사사로운 감정이나 눈앞의 욕망 때문에 이행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측천이 황후 자리나 탐냈다면 그녀가 가진 권력은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다만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실현하자 위국애민의 치적으로 백성들의 추앙과 지지를 받는 성공한 정치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무측천이 제위에 오른 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 인사정책이었다. 그녀는 인재 선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과거제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당의 과거 제도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삼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측천은 친히 낙양궁에 나가 과거 시험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천자가 검시관으로 직접 시험을 관장한 예는 없었다. 이후 후대인들은 천자가 관장한 과거를 전시(殿試)’라 불렀다. 재초 원년(690) 2, 무측천은 몇 날 며칠 동안 직접 심사를 했다. 시험은 경서에 대해 해박한 정도와 국책에 대한 견해, 개인적인 품행과 외모, 자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관리 선발 형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기계적으로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무측천은 최초로 자천 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 관직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연은이라는 동으로 만든 함에 자신의 천거의사를 적어 넣도록 하는 제도였다. 당 태종도 모수자천(毛遂自薦)제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재상 위정이 남을 아는 것은 지()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명()인데, 타인을 알기 어렵고, 자신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고 반대하자 간언을 귀담아 듣던 태종은 곧바로 계획을 취소했다. 명군으로 이름난 당 태종마저도 시행을 망설이고 포기한 제도를 무측천은 과감히 시행했다. 무측천은 또한 과거 시험에 무과(武科)’를 도입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무과는 활쏘기, 말타기, 언어, 행동거지 등 모두 일곱 과목을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는 제도로 합격자는 곧바로 병부에 예속되었다.

 

무측천 시대의 과거제의 발전은 중소 지주계층의 지식인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재를 폭넓게 기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무측천은 발굴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에도 탁월했는데, 무측천의 인재등용 정책에 큰 역할을 한 밀고(密告)’제도는 무측천의 인재풀 가운데 한 유형이었다. 무측천은 밀고 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처벌권을 혹리(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라는 11명의 관리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빈천한 관리 출신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원망이 많았고, 자신을 깔보는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컸다. 말하자면 무측천이 저열한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기용한 것은 그들의 교활함을 빌려 탐관오리나 부패관료층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상대를 겨냥하는 일이 많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폐단이 생겨나자 강직하고 공정한 판관들을 기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혹리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가차 없이 내쳤다.

 

성공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용인술에 능해야 한다. 용인술이란 결점이 있더라도 특별한 장점을 지닌 자가 있다면 중용하는 대범함을 말한다. 옛말에 금은 순금이 없고,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곧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때 유방은 소인배 출신으로 그가 기용한 자들은 대부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장점과 특기를 발휘해 뭉쳐진 전체는 무소불위의 괴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즉 유방의 용인술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보다는 한 가지 특기를 가진 전문가를 기용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자는 재주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용인술의 핵심은 그런 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되, 구속할 줄 아는 데 있다.

 

심리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무측천은 자애로운 궁궐의 안주인이기보다는 냉혹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했으며, 구중궁궐에 가만히 앉아서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하고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이룩했다. 당시 이민족의 잦은 침략은 국가의 통치 기반과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문제였다. 당나라는 변방의 이민족들과 계속해서 전쟁과 화친을 반복해왔는데, 무측천은 이들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반격하도록 하여 변방민족들을 당에 복속시켰다. 그리고 기미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들의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통치 계층이 직접 자민족을 다스리게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적대적이었던 대신들은 이러한 무측천의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분산시켜 각 주현으로 보내 경작과 직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풍속을 한화시키는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말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동화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다민족의 융합은 경제 발전이라는 기초하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야지 정치권력이 개입되면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는 고려에서였다. 무측천은 이민족에게 자치권을 주되 부락의 추장은 조정의 직접 통치를 받게 했다. 또한 토착민들을 예법으로 교화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를 통제했다.

 

무측천은 외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면서, 내적으로는 백성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중 균전제(均田制)를 예로 들면, 당시에는 국가가 장악한 토지를 가구당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수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정 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측천이 즉위했을 당시의 농촌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농민이 실제로 균전을 받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의 토지는 크게 황제의 소유지, 귀족 관료의 소유지, 일반 지주의 소유지, 그리고 소량의 농민 소유지로 나누어졌다. 전자의 세 부류가 가진 토지는 균전제의 분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국가 소유의 황무지나 군대의 둔전만이 균전제의 토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에 한해 영업전과 구분전의 매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이는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호족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잠식해가다 보니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허다했다.

 

무측천은 균전제의 와해를 막기 위해 영업전과 구분전에 대한 모든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한 자는 엄중 처벌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망간 농민들을 환향시켰는데, 이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무측천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그들을 호적에 복속시키고 경작할 땅을 주는 대신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일부지방에서는 인구수에 비해 경작지가 너무 적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래서 무측천은 인구수와 경작지를 고려하여 이주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주한 농민에게는 부역을 감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떠나고 황무지가 늘어나는 지역의 관리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명하고, 감찰관을 수시로 주현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균전제는 저절로 그 공정성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법치 실현에도 업적을 남겼다. 무측천은 과거의 법이 유독 가혹한 처벌이 많고 복잡한 법률 조항으로 인한 형벌남용으로 소송사건이 많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번 죄인은 끝까지 죄인으로 남게 됨을 지적하고 법률을 실정에 맞게 새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편찬된 법률이 모두 12502조로 구성된 영휘율(永徽律)이다. 무릇 법률을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법률 조문보다도 법을 시행하는 과정이다. 영휘율은 법이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고, 처벌의 경중이 적절하고, 엄격함과 관대함이 모두 그 도를 넘지 않아서 수천 년이 지나도록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사사로운 일도 법에 따라 이행했는데, 이는 법치를 통해 명문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합법적인 강령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무측천은 나라의 법도와 기강, 상벌 제도와 함께 민생에 큰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실사구시의 위정 자세는 오늘의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자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책봉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당시 조정은 두 이복오빠의 아들들인 무승사, 무삼사를 위시한 무씨 일족과 재상 적인걸을 앞세운 친당 세력 그리고 장혁지, 장창종 등 무측천이 총애하는 남창 세력 등의 세 파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장창종과 장혁지 형제는 음률에 재주가 있는 미소년들로 딸인 태평공주가 천거하자 이들을 곁에 두고 오랫동안 총애했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장씨 형제는 오만방자함이 지나치도록 권세를 펼치고 있었다. 한편 이복오빠의 아들인 무승사는 무측천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이지만 무측천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측천은 제위에 오르면서 넷째 아들 예종(이단)을 황제에서 폐위시켰지만 그를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사(皇嗣)라 칭했다. 이는 언제든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씨 왕조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만큼 무씨가 제위를 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조카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자니 그들이 아들만큼 자신을 섬기지는 않을 터였다. 무측천은 당조의 명신이었던 재상 적인걸에게 태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적인걸은 친자를 후계자로 세워야만 종묘에 모셔지고 제왕의 모친으로 받들어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적인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여릉왕 이철(폐위된 중종)의 복위를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무씨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이씨의 당 왕조를 다시 복권하고자 했다.

 

장안 4(704), 무측천은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고, 종실과 재상들의 접근을 막은 채 장창종 형제로 하여금 수발을 들게 했다. 황제의 죽음이 임박하자 이씨 당 왕조의 복권을 계획한 일부 조정대신들이 정변을 모의했다. 장간지와 언범을 필두로 한 조정의 신하와 병사들은 태자 이철에게 자신들의 정변계획을 알렸다. 이철이 망설임 끝에 윤허를 내리자 상왕 이단, 태평공주 등의 이씨 종친들이 지지를 가세했다. 병사를 이끈 장간지는 곧 무측천의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장씨 형제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무측천의 처소를 포위한 후, 무측천에게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모반을 꾀하여 태자의 명을 받들어 참수했노라고 말했다.

 

이철이 들어오니, 무측천은 비통하고 분노한 감정을 억누르며 동궁으로 돌아가라 했다. 이에 장수 한 명이 나서며 양위를 종용했다. 무측천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누워버렸으나 며칠 후 장간지 등이 다시 한 번 무측천에게 양위를 독촉하자 마침내 대권을 놓았다. 이후 무측천은 열 달 정도를 더 살았다. 이 마지막 열 달이 무측천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던 것 같다. 중종이 다시 복위함으로써 이씨 조정의 당이 복귀되고 무측천은 상양궁에 갇히게 되었는데, 사서에 의하면 태후는 꾸미기를 좋아해 손자를 본 뒤에도 전혀 노쇠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상양궁에 연금된 후부터는 머리를 빗지 않고 꾸미지 않으니 그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기 며칠 전, 무측천은 중종, 상황, 태평공주와 조카 무삼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조를 남겼다. 우선 자신의 칭호를 황제가 아닌 황후로 부르도록 하고, 건릉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황후와 소숙비의 가문의 자손들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무씨 인척의 지위를 높여달라고 명했다. 이 유지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중종이 복위함으로써 무씨 조정이 사라졌으니 무측천이 세운 대주(大周)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황제 칭호를 거두고 황후로 칭하라는 것은 이씨 왕조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였다. 만약 황제의 칭호를 유지한다면, 이씨 왕조의 종실들이 무씨 집안을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고종이 묻힌 건릉에 함께 묻힘으로써 주나라의 황제에서 다시 당 고종의 황후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왕황후와 소숙비 가문의 자손들을 복권시키고 외척 무삼사와 원노기 등의 작위를 높이도록 한 것도 자신의 사후에 있을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무측천은 이처럼 마지막까지 탁월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그리고 신용 원년(705)1126일 새벽, 무측천은 상양궁 선거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무측천은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의 이름으로 건릉에 묻혔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비문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무측천은 무에서 유로,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끊임없는 협상과 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 그녀의 배후는 미약한 반면 그녀의 적들은 든든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무측천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손에 넣은 후에는 황제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경제 문화적인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 당나라가 300여 년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는 기초를 다졌으니, 이른바 ()’ 자 비()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대답이라 할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기술은 여제 무측천의 성공 전략을 수록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측천을 사람의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고 표현하며 어떻게 그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알고 있던 무측천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다.

사철 지음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 20076/ 513/ 24,500

 

저자 사철

중국의 역사 연구가.

 

역자 이은영

영남대학교 한문교육학과를 마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베이징 우전대학 및 천진 사범대에서 수학했으며, LG 및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다. 현재 주중국 한국대사관 통번역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경영우화, 무측천등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무측천(則天)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서기 624년에 태어나서 705년까지 82년의 생을 살았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미모로 인해 14살 때 당태종 이세민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총애를 잃게 되자 태자 이치(고종)를 유혹하여 그의 후궁이 된다. 당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42녀는 모두 무측천의 소생이었는데, 그녀는 첫 아들을 낳자 황후를 모략하여 폐위되도록 하고 황후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사에 관여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 나갔는데,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측천의 네 아들 중 큰아들 이홍과 둘째 아들 이현은 모두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모후의 잔혹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정치관을 달리했다. 그래서 큰아들은 독살하고, 둘째 아들은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이후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로 책봉되고 고종 사후에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역시 55일 만에 폐위시키고 만다. 그리고 넷째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키나 별전에 기거하게 하며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측천은 이렇게 정사를 주무르다가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당을 주(나라, 690~707)로 바꾸어 15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고종의 황후시절부터 정사에 관여했으니 실질적으로는 50여 년을 정치가로 살아간 셈이다.

 

무측천은 그녀가 행한 냉혹한 처사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치적에 있어서 만큼은 당 태종 이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황제였다. 그녀는 당 왕조를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국가로, 또한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무측천이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고 명군의 치적을 남기게 된 데는 그녀만이 지닌 탁월한 심리공략술이 기반이 되었다. 무측천은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치인술(治人術)을 개발해 냈는데, 그것은 이른바 권력과 세상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게 하는 심리공략 전술로, 상대의 내면까지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권력의 힘을 숨긴 채 시운(時運)을 빌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녀의 심리공략술을 살펴보고 그것이 조화된 그녀만의 리더십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사실 오랫동안 무측천의 업적은 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왔다. 특히 중국의 사가들에게 요녀’, ‘악녀로 수용되면서 제대로 된 관심과 연구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다만 그녀가 여자였다는 점이 두드러진 점일 뿐이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늘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오늘의 시대에 무측천의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현대사회에서 거칠고 냉혹한 여자로 평가받는 여성 리더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단력과 용기,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십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차례

머리말 : 무측천, 심리공략의 달인이었다

심리전의 여왕 무측천에게서 배우는 인간 심리 경영

 

1부 심리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1.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2.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의 중용을 지키다

3.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다

4.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 처리하다

5.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6.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7.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8. 여성 정치가로서 위대한 선구자였다

9.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10. 역대 제왕의 교훈을 평생의 싱크탱크로 삼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공략의 기술

1.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2.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3.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4. 심리 공략의 필승지책 : 상대의 치부는 덮어주되 비겁함을 공격한다.

5.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6. 심리 공략의 치인술 : 사람은 사람으로 다스리다

7. 심리 공략의 연환술 : 때로는 권력을 대담하게 내려놓아라

8.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9. 심리 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10.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 연표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모색 / 20076/ 513/ 24,500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무측천은 14세 때 당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서충용이라는 후궁에게 황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궁녀들은 대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매끼 들여오는 음식도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궁정 암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 무측천은 환관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로써 대하고 뇌물을 주어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즉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서로 반목하는지와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를 통해 앞날의 정황을 준비했다.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무측천에게 궁녀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정무를 처리하고 퇴조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었으며, 항상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 보면 심신이 지치고 팔다리가 퉁퉁 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했다. 이미 황제의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군 태종과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성공이란 매력, 능력, 지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은 기회를 가져오고, 능력은 남과 다른 비범함을 발휘하며, 지력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측천은 이 세 가지를 가장 적절하게 융합하여 최대 효과를 발휘할 줄 알았다. 상원 원년 12, 무측천은 황후의 신분으로 당 고종에게 치국에 필요한 12조를 건의했다. 건언 12(建言 十二事)라고 불리는 이 제안서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열두 가지의 건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 고종은 부황의 국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 피해와 동방과의 전쟁 그리고 황실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소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무측천은 이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농업과 양잠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할 것,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 표준으로 삼을 것 등의 산업 진흥 정책이 담겨 있었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당은 경제를 회복했으며 향후 무측천의 통치 기간에는 100% 국력이 증가하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2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점은 신진 관료 세력들의 이익을 주청한 내용이다. 무측천은 관리의 봉록을 인상할 것과 더불어 직위가 낮아도 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한 신진 관료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측천의 건언 12사는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정책개선의 의지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대거 등장한 신흥 관료 계층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천하를 얻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이씨 왕실과 관료 귀족 계층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손발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측천은 인재 활용에 있어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용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경업의 난(684)을 계기로 시행한 것으로, 기존의 관료 제도를 향해 무측천이 던진 단죄의 칼날이었다. 서경업의 난은 무측천이 중종 이철을 폐하고 예종 이단을 세웠으나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위시한 원로중신 세력이 폐위된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서경업의 난은 3개월 만에 패하였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

 

무측천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후 탐관오리를 비롯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동궤를 설치했다. 동궤는 동()으로 만든 상자에 익명의 투서를 하도록 만든 것인데, 그 내부는 네 개의 칸이 있어 투서 내용을 달리했다. 동쪽은 연은이라 하여, 황실의 업적이나 공덕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임관이나 승진을 청하는 상소를 위한 공간이었고, 서쪽은 신원이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투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소간은 정책적 건의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마지막 북쪽 칸인 통현은 천재지변이나 군사기밀 관련 내용을 투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동궤에 투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무측천의 밀고제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민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관료 집단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당 고조와 당 태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에 약간의 억압을 가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도교와 불교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무측천은 성력 원년(689) 정월, 금승도전방제(禁僧道殿謗制)를 반포하고, 불교와 도교는 선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라 볼 수 있으니 승려와 도사가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면 칙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무측천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고승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고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도교의 발전도 함께 도모했다. 이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측천은 종교를 정권의 유용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그 둘을 상호 견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였다.

 

위정자가 개혁에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치국의 도를 깨닫고 안정적으로 시정을 펼쳐야 한다. 688, 무측천은 명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는 무측천이 최초의 여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고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명당에서 정사를 펼치는 것을 큰 공으로 여겼다. 그러나 명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명당에서 정사를 베푼 왕은 3명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무측천은 고종 시절부터 명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관이나 학사들이 명당건축이 백성을 혹사시키고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사치행각이라며 은근히 비판했다. 이에 무측천은 명당이 선조와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곳이니, 재해와 화란을 막고 나라를 성하게 하는 일라며 명당의 기능을 과장했다. 그리고 명당을 완공시키자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대사면을 명하고 백성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화려하고 웅대한 명당의 모습은 당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명당을 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몰려든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예관과 학사들의 비방은 사방에 가득한 칭송에 묻혀 사라졌다. 무측천은 명당을 통해 일련의 유신(維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영창 원년 정월, 명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정사를 펼치면서 백관들을 훈계하는 9개항을 반포했다. 그 요지를 요약해보면 군신들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며, 제업(帝業)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사확을 주충효태황, 어머니 양씨를 충효태후 등의 존호로 추서함으로써 무씨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개원재초칙(改元載初敕)이라는 개혁조항을 반포했는데, 그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예악과 문서를 교정하고, 신조한자를 제정하고 역법을 개정하는 것 등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황제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무측천은 황위에 등극한 후, 수나라 때의 감찰(監察) 제도를 부활시켰다. 중앙의 최고 감찰 기관을 어사대로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각 주현의 군정, 민정,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서성(정무집행기관)의 회의, 문무백관의 연회 및 제사를 진행할 때에도 감찰을 시행하도록 했으니, 감찰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감찰관은 황제의 눈과 귀와 같은 존재로, 그 권한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감찰관의 특권에 대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억울하게 탄핵된 관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즉 감찰관의 선발부터 신중을 기했으며, 감찰어사들이 올린 탄핵과 상소는 자신이 직접 분석하고 감별하였다.

 

감찰제도의 부활은 국가 기관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기여했다. 무측천은 감찰을 통해 여러 주현들을 통합함으로써 주현을 거의 1/2이나 줄이고 대규모 감원을 이행했다. 인재의 유용성을 중시한 무측천은 이러한 감원정책을 두고,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무측천은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관리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 등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하지만 고위 대신들과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관을 차려 입지 않으면 내치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등,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감찰을 통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은 부패한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는 것과 더불어 일반 지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농민의 납세부담을 줄이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로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감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무측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은 오직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로써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무측천이 실시한 일련의 변화란 그녀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하자 당의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합당한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무씨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이씨에서 주나라의 무씨로 종실의 위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국호를 주()로 세운 것도 고대 왕조의 치세를 재현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고대 중국의 치세란 ()’()’의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무씨의 주() 왕조를 세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이미 고종 시대부터 준비되어온 일이었다. 낙양은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이미 수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낙양과 장안을 왕래하며 정사를 펼쳤는데 고종이 낙양에서 머문 기간만 10여 년에 달했다. 무측천은 그 기간 동안 낙양에 세력을 형성하고 고종이 죽자 낙양을 더욱 육성시켰다. 그래서 무주 왕조 건국이 가시권에 이르렀을 때 낙양은 이미 새로운 왕조의 정치, 문화,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무측천이 사직을 신도로 옮긴 것도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직은 본래 제왕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상징이 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무측천은 신도에 무씨 태묘(太廟) 7개를 세우고, 삼십만 군대를 상주케 하여 무씨 왕실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켰다.

 

자고로 예를 즐기는 것은 모든 제왕의 공통점이었다. 무측천은 유가의 예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여러 가지 예의 법식과 의식들을 통해 민심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유신론자였던 무측천은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결정짓는 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 신의 힘을 빌려서 주 왕조 설립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민심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존호이다. 무측천은 고종을 도와 정무를 살피던 시기에 이미 천후라는 별칭을 사용해왔으며,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황제임을 뜻하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존호를 개칭했다. 이렇듯 무측천은 무주 왕조를 건국하기까지 매사를 심사숙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서 사직을 바꾸고 세력을 형성하여 새 왕조를 세웠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성공의 문을 관통할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는 얼마나 기회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낼 줄만 알았지, 자신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무측천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도사가 자신의 관상을 보고 귀인중의 귀인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과 지혜를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감지함으로써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으며, 특히 주위의 모든 권력을 방패막이이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측천의 정치적인 영민함은 일차적으로 그녀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무씨 집안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 관직에 진출했으나, 명문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 대에 이르면서 무씨 집안은 가문 부흥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본래 목재상이었던 무사확은 수양제의 대형 토목 공사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재력을 무기로 권세가들과 쉽게 교분을 쌓았다. 산서 지역의 세력가로 후에 당을 건국한 태조 이연(李淵)과의 친분도 이때 맺은 것이다. 무사확은 이연이 군사를 일으킬 때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 후 군수관(軍需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간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장안의 신흥 귀족으로 부상했다.

무사확은 전처 상리씨와의 사이에 원경, 원상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전처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연이 수나라의 재상이던 양달의 노처녀 딸을 그와 맺어 주었다. 양씨는 무사확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았으며, 그중 둘째가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무측천이 아직 어렸을 때 부친 무사확이 사망했고, 이후 두 이복 오빠는 양씨 모녀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무측천이 14살 되던 정관 15, 조정에서 각 지방의 재주 있는 미녀들을 입궁시키게 했다. 그러나 딸의 입궁을 원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 중에 실제로 은총을 입는 궁녀는 극소수인 데다 황제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때부터 천대와 멸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 역시 딸들이 궁녀로 간택되는 걸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큰딸과 막내딸은 하급관리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무측천은 한사코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리고 황제를 뵐 수 있는 건 행운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국 무측천의 빼어난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당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무측천은 정관 1514살의 나이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눈에 띄는 기회를 얻어냈다. 당 태종은 명마(名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서역에서 조공으로 바쳐온 말을 길들이는 과정을 직접 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총이란 이름의 야생마가 길길이 날뛰며 조련사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사자총은 비록 성질은 난폭하지만 튼튼하고 위엄이 가득한 명마였다.

 

태종은 사자총이 눈에 들었으나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점에 고심했다. 그래서 하루는 문무 대신들을 향해 누가 저 말을 길들일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궁녀들 속에 있던 무측천이 돌연 태종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태종이 웃으며 순한 말도 타기 어려운 어린 계집이 어찌 야생마를 조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무측천은 자신이 말을 다루어볼 터이니 철채찍과 철퇴, 비수를 달라고 하였다. 태종이 의아해하며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무측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선 철채찍의 맛을 보여주고,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철퇴로 머리를 칠 것이며,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버리려고 합니다.” 태종과 주위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입을 연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방법은 좀 지나치구나. 하지만 네 생각만은 참으로 용맹스럽다.” 이때 무측천은 태종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이 시선이 향후 그녀가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당태종(재위 629~649)은 말년에 병석에 있으면서 심약한 태자를 염려했다. 그래서 재상을 불러 태자를 부탁하고 유조를 받아 적게 했다. 그는 우선 왕조의 앞날에 위협이 될 모든 화근을 일소하기 위해 반정을 모의할 가능성이 있는 신하들을 먼 지방의 관리로 보내게 했다. 그런데 유조를 내리는 동안 문득 한 해 전에 도사 이순풍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순풍은 삼십 년 후에 여자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각별히 총애한 서충용을 제외한 모든 비빈들을 비구니가 되게 하라고 명했다. 이 유조에 따라, 정관 23(649) 526, 천하의 명군 태종이 붕어하자 무측천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태종의 별묘(別廟)가 있는 감업사의 비구니로 가게 되었다.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중 태자 이치(고종)는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소양이나 인품 그리고 향후 제위자리를 놓고 벌어질 골육상잔을 염려한 태종의 고려에 의해 태자에 봉해졌다. 당시 18세였던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잃자 태자 이치를 겨냥했고,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감업사의 비구니가 된 무측천을 다시 찾았고, 결국 후궁의 첩지를 내려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측천은 재입궁하자, 곧 황후 쪽 환관과 시녀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왕황후는 성품이 차갑고 거만했으며, 그의 모친 유씨는 딸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였기에 황후궁에 충심을 다하는 시종들이 많지 않았다.

 

사실 무측천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데는 왕황후의 힘이 컸다. 왕황후가 무측천의 입궁을 도운 것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측천은 왕황후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는 한편, 황후와 소숙비 두 사람 중 누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될 존재인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素節)의 생모라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황후는 후사가 없었기에 양자 충()을 들여놓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태자 책립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다. 이때 무측천도 임신 중이었으나 아직 두 사람에게는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황후와 소숙비는 음으로 양으로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고, 서로 비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종은 두 사람이 태자 책립 문제로 못살게 구는 일이 잦아지자 그들의 처소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무측천은 서로 비방하는 두 사람과 달리 항상 온유하고 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무측천이 고종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휘 3(652), 무측천은 남아를 순산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 태어나면서 무측천의 품계는 비빈 중 가장 높은 소의(2)에 책립되었다. 하지만 황후나 소숙비로서는 태자 책립문제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의 태자 책립을 눈물로써 간청했고 결국 고종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소식을 들은 무측천은 이 일을 곧바로 황후에게 고했다. 황후의 모친 유씨는 자신의 아들 유석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고 유석은 대신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튿날 조정 대신들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진왕 충을 태자로 옹립할 것을 주청하는 가운데, 원로대신 장손무기는 다섯 번째 황자의 탄생을 진심으로 감축드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측천의 아들 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홍은 무측천이 입궁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태어났으므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임신한 것이었다. , 선제의 궁녀와 몰래 사통하여 임신시킨 고종을 조롱한 것이었다. 이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고종은 황후의 양자 을 태자로 책립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태자 책립을 두고 벌어진 싸움은 황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후는 이 일에 직접적인 공을 세운 무측천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하사받은 금전과 예물을 모두 황후궁의 환관과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더욱 정보를 열심히 제공했고 결국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황후와 그녀의 모친 위국부인이 황제형상의 나무인형을 만들어 황제가 죽기를 기도드린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이 사실을 즉시 고종에게 상주했다.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황후를 불러 문책하려 했다. 무측천은 이러한 황제를 말리며 황후궁에 친히 가셔서 증거를 잡은 후 문책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고종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왕황후의 처소로 향했다. 사실 왕황후는 고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혹시 자신을 폐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딸을 보다 못한 유씨는 승려에게 의논했고 승려는 침을 꽂은 나무 인형을 주며 백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이라 하였다. 고종이 황후의 침실에 들렀을 때 황후는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옆에는 침을 꽂은 나무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무측천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왕황후는 폐위되고 별궁에 유폐된다.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무측천은 지위와 세력,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숙비와 황후를 제거한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외로움을 느낀 고종은 무측천의 언니 한국부인과 그 딸 위국부인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총애했다. 황후의 자리를 앞에 둔 상황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측천은 한국부인과 위국부인을 차례로 독살시키고 그 누명을 두 이복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에게 뒤집어씌워 유배되도록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심약한 고종이 냉궁에 유폐되어 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안쓰럽게 여겨 구해주려 하자, 언제 처지가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 사람의 수족을 절단하게 하고 술독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측천은 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무측천은 정사에 관여하며 계속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 고종은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 42녀가 무측천의 소생이었으며, 그중 첫째인 이홍은 겨우 4살의 나이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모후와 부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이홍은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언행이 바르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니, 요산옥채500권은 그의 주도로 편찬된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태자를 신뢰하여 여러 차례 국사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이홍의 시정 방침은 모후 무측천과 크게 달라 자주 부딪힘이 생겼다. 또한 그는 종실에 대한 모후의 잔혹함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병석에 누운 고종은 이홍에게 양위할 뜻을 비쳤는데, 이홍은 갑자기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24살이었던 이홍의 죽음은 일대 미스터리였는데 무측천이 독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하튼 이홍의 죽음은 고종에게 큰 슬픔이었으며 아까운 인재의 손실이었다.

 

이홍이 죽자, 고종은 둘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한다(675). 당시 22살이었던 이현은 형 이홍과 마찬가지로 반듯한 외모와 바른 언행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갖춰 탄복하지 않은 대신들이 없었다. 고종의 신임과 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혈기 넘치는 청년 이현은 모든 것을 모후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측천과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측천은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태자가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을 제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영휘 원년(680), 무측천은 이현을 모반죄로 고발했다. 고종은 어사대부로 하여금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동궁의 마구간에서 갑옷 수백 개가 발견되었다. 고종은 딱히 할 말이 없는 와중에서도 이현을 변호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측천이 완강하게 태자의 처벌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폐위시키고 만다.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무측천은 은신술에 능했다. 그녀는 뒤에서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 후에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곤 했다. 고종은 죽기 직전 태자 이철(李哲, 무측천의 셋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대신 무측천에게 섭정을 허락하는 유조를 내렸다. 이철은 맏아들 이홍처럼 높은 인덕을 쌓지도 못했고, 둘째 이현처럼 주위에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음을 고려한 유언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철의 즉위식을 일주일간 미룬 후 거행했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도록 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는 순종적이었다.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다름없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했고 매일 퇴조 시간이면 어김없이 태후를 배알하여 하루의 정무를 보고했다. 그러다 보니 전날 조정에서 논의된 모든 정무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결정되는 진풍경이 반복되었다.

 

중종은 제위에 오른 지 5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자 모종의 결단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자신의 장인 위효정을 시중으로 승진시키고 유모의 아들에게도 5품 관직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자 재상 배염이 나서며 위효정이 시중에 봉해질 만큼 공이 크지 않기에 이러한 승진은 민심을 잃을 수 있다고 간언했다. 갓 제위에 오른 신참 황제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 중종은 배염의 청구를 묵살했다. 그럼에도 배염이 끝까지 반대하자 짐은 위현정에게 천하를 내줄 수도 있는데 그깟 시중 자리를 갖고 무얼 그러시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배염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나 무측천에게 이 일을 소상히 적어 올렸다. 무측천은 그날 저녁 배염을 불러 조서를 적게 하고 금위군을 대기시켰다.

 

중종은 막상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모후 무측천이 어찌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중종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문안을 드리면서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무측천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중종이 안심하고 어전에 나와 막 전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그곳에 모후 무측천이 앉아 있었다. 중종이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무측천은 지난밤 배염이 작성한 조서를 낭독하도록 했다.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에 봉하고 궁중에 유폐시키도록 하라!” 중종은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 폐위하려 하느냐고 모후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 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겠소?” 하고 되물었다. 문무백관은 엎드려 조서를 받들고 있고, 근위병은 궁정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모후는 용상에 앉아 있으니 중종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은 즉위 55일 만에 제위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무측천은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으나, 모든 정무는 무측천이 단독으로 처리했고 예종은 별전에 기거하면서 정무에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측천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자신의 혈족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과정은 단지 사사로운 감정이나 눈앞의 욕망 때문에 이행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측천이 황후 자리나 탐냈다면 그녀가 가진 권력은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다만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실현하자 위국애민의 치적으로 백성들의 추앙과 지지를 받는 성공한 정치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무측천이 제위에 오른 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 인사정책이었다. 그녀는 인재 선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과거제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당의 과거 제도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삼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측천은 친히 낙양궁에 나가 과거 시험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천자가 검시관으로 직접 시험을 관장한 예는 없었다. 이후 후대인들은 천자가 관장한 과거를 전시(殿試)’라 불렀다. 재초 원년(690) 2, 무측천은 몇 날 며칠 동안 직접 심사를 했다. 시험은 경서에 대해 해박한 정도와 국책에 대한 견해, 개인적인 품행과 외모, 자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관리 선발 형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기계적으로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무측천은 최초로 자천 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 관직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연은이라는 동으로 만든 함에 자신의 천거의사를 적어 넣도록 하는 제도였다. 당 태종도 모수자천(毛遂自薦)제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재상 위정이 남을 아는 것은 지()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명()인데, 타인을 알기 어렵고, 자신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고 반대하자 간언을 귀담아 듣던 태종은 곧바로 계획을 취소했다. 명군으로 이름난 당 태종마저도 시행을 망설이고 포기한 제도를 무측천은 과감히 시행했다. 무측천은 또한 과거 시험에 무과(武科)’를 도입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무과는 활쏘기, 말타기, 언어, 행동거지 등 모두 일곱 과목을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는 제도로 합격자는 곧바로 병부에 예속되었다.

 

무측천 시대의 과거제의 발전은 중소 지주계층의 지식인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재를 폭넓게 기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무측천은 발굴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에도 탁월했는데, 무측천의 인재등용 정책에 큰 역할을 한 밀고(密告)’제도는 무측천의 인재풀 가운데 한 유형이었다. 무측천은 밀고 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처벌권을 혹리(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라는 11명의 관리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빈천한 관리 출신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원망이 많았고, 자신을 깔보는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컸다. 말하자면 무측천이 저열한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기용한 것은 그들의 교활함을 빌려 탐관오리나 부패관료층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상대를 겨냥하는 일이 많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폐단이 생겨나자 강직하고 공정한 판관들을 기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혹리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가차 없이 내쳤다.

 

성공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용인술에 능해야 한다. 용인술이란 결점이 있더라도 특별한 장점을 지닌 자가 있다면 중용하는 대범함을 말한다. 옛말에 금은 순금이 없고,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곧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때 유방은 소인배 출신으로 그가 기용한 자들은 대부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장점과 특기를 발휘해 뭉쳐진 전체는 무소불위의 괴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즉 유방의 용인술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보다는 한 가지 특기를 가진 전문가를 기용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자는 재주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용인술의 핵심은 그런 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되, 구속할 줄 아는 데 있다.

 

심리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무측천은 자애로운 궁궐의 안주인이기보다는 냉혹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했으며, 구중궁궐에 가만히 앉아서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하고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이룩했다. 당시 이민족의 잦은 침략은 국가의 통치 기반과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문제였다. 당나라는 변방의 이민족들과 계속해서 전쟁과 화친을 반복해왔는데, 무측천은 이들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반격하도록 하여 변방민족들을 당에 복속시켰다. 그리고 기미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들의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통치 계층이 직접 자민족을 다스리게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적대적이었던 대신들은 이러한 무측천의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분산시켜 각 주현으로 보내 경작과 직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풍속을 한화시키는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말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동화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다민족의 융합은 경제 발전이라는 기초하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야지 정치권력이 개입되면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는 고려에서였다. 무측천은 이민족에게 자치권을 주되 부락의 추장은 조정의 직접 통치를 받게 했다. 또한 토착민들을 예법으로 교화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를 통제했다.

 

무측천은 외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면서, 내적으로는 백성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중 균전제(均田制)를 예로 들면, 당시에는 국가가 장악한 토지를 가구당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수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정 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측천이 즉위했을 당시의 농촌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농민이 실제로 균전을 받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의 토지는 크게 황제의 소유지, 귀족 관료의 소유지, 일반 지주의 소유지, 그리고 소량의 농민 소유지로 나누어졌다. 전자의 세 부류가 가진 토지는 균전제의 분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국가 소유의 황무지나 군대의 둔전만이 균전제의 토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에 한해 영업전과 구분전의 매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이는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호족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잠식해가다 보니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허다했다.

 

무측천은 균전제의 와해를 막기 위해 영업전과 구분전에 대한 모든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한 자는 엄중 처벌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망간 농민들을 환향시켰는데, 이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무측천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그들을 호적에 복속시키고 경작할 땅을 주는 대신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일부지방에서는 인구수에 비해 경작지가 너무 적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래서 무측천은 인구수와 경작지를 고려하여 이주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주한 농민에게는 부역을 감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떠나고 황무지가 늘어나는 지역의 관리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명하고, 감찰관을 수시로 주현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균전제는 저절로 그 공정성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법치 실현에도 업적을 남겼다. 무측천은 과거의 법이 유독 가혹한 처벌이 많고 복잡한 법률 조항으로 인한 형벌남용으로 소송사건이 많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번 죄인은 끝까지 죄인으로 남게 됨을 지적하고 법률을 실정에 맞게 새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편찬된 법률이 모두 12502조로 구성된 영휘율(永徽律)이다. 무릇 법률을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법률 조문보다도 법을 시행하는 과정이다. 영휘율은 법이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고, 처벌의 경중이 적절하고, 엄격함과 관대함이 모두 그 도를 넘지 않아서 수천 년이 지나도록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사사로운 일도 법에 따라 이행했는데, 이는 법치를 통해 명문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합법적인 강령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무측천은 나라의 법도와 기강, 상벌 제도와 함께 민생에 큰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실사구시의 위정 자세는 오늘의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자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책봉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당시 조정은 두 이복오빠의 아들들인 무승사, 무삼사를 위시한 무씨 일족과 재상 적인걸을 앞세운 친당 세력 그리고 장혁지, 장창종 등 무측천이 총애하는 남창 세력 등의 세 파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장창종과 장혁지 형제는 음률에 재주가 있는 미소년들로 딸인 태평공주가 천거하자 이들을 곁에 두고 오랫동안 총애했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장씨 형제는 오만방자함이 지나치도록 권세를 펼치고 있었다. 한편 이복오빠의 아들인 무승사는 무측천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이지만 무측천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측천은 제위에 오르면서 넷째 아들 예종(이단)을 황제에서 폐위시켰지만 그를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사(皇嗣)라 칭했다. 이는 언제든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씨 왕조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만큼 무씨가 제위를 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조카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자니 그들이 아들만큼 자신을 섬기지는 않을 터였다. 무측천은 당조의 명신이었던 재상 적인걸에게 태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적인걸은 친자를 후계자로 세워야만 종묘에 모셔지고 제왕의 모친으로 받들어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적인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여릉왕 이철(폐위된 중종)의 복위를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무씨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이씨의 당 왕조를 다시 복권하고자 했다.

 

장안 4(704), 무측천은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고, 종실과 재상들의 접근을 막은 채 장창종 형제로 하여금 수발을 들게 했다. 황제의 죽음이 임박하자 이씨 당 왕조의 복권을 계획한 일부 조정대신들이 정변을 모의했다. 장간지와 언범을 필두로 한 조정의 신하와 병사들은 태자 이철에게 자신들의 정변계획을 알렸다. 이철이 망설임 끝에 윤허를 내리자 상왕 이단, 태평공주 등의 이씨 종친들이 지지를 가세했다. 병사를 이끈 장간지는 곧 무측천의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장씨 형제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무측천의 처소를 포위한 후, 무측천에게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모반을 꾀하여 태자의 명을 받들어 참수했노라고 말했다.

 

이철이 들어오니, 무측천은 비통하고 분노한 감정을 억누르며 동궁으로 돌아가라 했다. 이에 장수 한 명이 나서며 양위를 종용했다. 무측천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누워버렸으나 며칠 후 장간지 등이 다시 한 번 무측천에게 양위를 독촉하자 마침내 대권을 놓았다. 이후 무측천은 열 달 정도를 더 살았다. 이 마지막 열 달이 무측천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던 것 같다. 중종이 다시 복위함으로써 이씨 조정의 당이 복귀되고 무측천은 상양궁에 갇히게 되었는데, 사서에 의하면 태후는 꾸미기를 좋아해 손자를 본 뒤에도 전혀 노쇠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상양궁에 연금된 후부터는 머리를 빗지 않고 꾸미지 않으니 그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기 며칠 전, 무측천은 중종, 상황, 태평공주와 조카 무삼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조를 남겼다. 우선 자신의 칭호를 황제가 아닌 황후로 부르도록 하고, 건릉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황후와 소숙비의 가문의 자손들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무씨 인척의 지위를 높여달라고 명했다. 이 유지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중종이 복위함으로써 무씨 조정이 사라졌으니 무측천이 세운 대주(大周)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황제 칭호를 거두고 황후로 칭하라는 것은 이씨 왕조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였다. 만약 황제의 칭호를 유지한다면, 이씨 왕조의 종실들이 무씨 집안을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고종이 묻힌 건릉에 함께 묻힘으로써 주나라의 황제에서 다시 당 고종의 황후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왕황후와 소숙비 가문의 자손들을 복권시키고 외척 무삼사와 원노기 등의 작위를 높이도록 한 것도 자신의 사후에 있을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무측천은 이처럼 마지막까지 탁월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그리고 신용 원년(705)1126일 새벽, 무측천은 상양궁 선거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무측천은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의 이름으로 건릉에 묻혔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비문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무측천은 무에서 유로,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끊임없는 협상과 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 그녀의 배후는 미약한 반면 그녀의 적들은 든든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무측천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손에 넣은 후에는 황제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경제 문화적인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 당나라가 300여 년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는 기초를 다졌으니, 이른바 ()’ 자 비()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대답이라 할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기술은 여제 무측천의 성공 전략을 수록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측천을 사람의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고 표현하며 어떻게 그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알고 있던 무측천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다.

사철 지음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 20076/ 513/ 24,500

 

저자 사철

중국의 역사 연구가.

 

역자 이은영

영남대학교 한문교육학과를 마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베이징 우전대학 및 천진 사범대에서 수학했으며, LG 및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다. 현재 주중국 한국대사관 통번역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경영우화, 무측천등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무측천(則天)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서기 624년에 태어나서 705년까지 82년의 생을 살았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미모로 인해 14살 때 당태종 이세민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총애를 잃게 되자 태자 이치(고종)를 유혹하여 그의 후궁이 된다. 당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42녀는 모두 무측천의 소생이었는데, 그녀는 첫 아들을 낳자 황후를 모략하여 폐위되도록 하고 황후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사에 관여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 나갔는데,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측천의 네 아들 중 큰아들 이홍과 둘째 아들 이현은 모두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모후의 잔혹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정치관을 달리했다. 그래서 큰아들은 독살하고, 둘째 아들은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이후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로 책봉되고 고종 사후에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역시 55일 만에 폐위시키고 만다. 그리고 넷째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키나 별전에 기거하게 하며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측천은 이렇게 정사를 주무르다가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당을 주(나라, 690~707)로 바꾸어 15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고종의 황후시절부터 정사에 관여했으니 실질적으로는 50여 년을 정치가로 살아간 셈이다.

 

무측천은 그녀가 행한 냉혹한 처사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치적에 있어서 만큼은 당 태종 이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황제였다. 그녀는 당 왕조를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국가로, 또한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무측천이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고 명군의 치적을 남기게 된 데는 그녀만이 지닌 탁월한 심리공략술이 기반이 되었다. 무측천은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치인술(治人術)을 개발해 냈는데, 그것은 이른바 권력과 세상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게 하는 심리공략 전술로, 상대의 내면까지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권력의 힘을 숨긴 채 시운(時運)을 빌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녀의 심리공략술을 살펴보고 그것이 조화된 그녀만의 리더십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사실 오랫동안 무측천의 업적은 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왔다. 특히 중국의 사가들에게 요녀’, ‘악녀로 수용되면서 제대로 된 관심과 연구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다만 그녀가 여자였다는 점이 두드러진 점일 뿐이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늘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오늘의 시대에 무측천의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현대사회에서 거칠고 냉혹한 여자로 평가받는 여성 리더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단력과 용기,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십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차례

머리말 : 무측천, 심리공략의 달인이었다

심리전의 여왕 무측천에게서 배우는 인간 심리 경영

 

1부 심리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1.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2.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의 중용을 지키다

3.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다

4.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 처리하다

5.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6.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7.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8. 여성 정치가로서 위대한 선구자였다

9.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10. 역대 제왕의 교훈을 평생의 싱크탱크로 삼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공략의 기술

1.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2.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3.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4. 심리 공략의 필승지책 : 상대의 치부는 덮어주되 비겁함을 공격한다.

5.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6. 심리 공략의 치인술 : 사람은 사람으로 다스리다

7. 심리 공략의 연환술 : 때로는 권력을 대담하게 내려놓아라

8.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9. 심리 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10.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 연표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모색 / 20076/ 513/ 24,500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무측천은 14세 때 당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서충용이라는 후궁에게 황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궁녀들은 대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매끼 들여오는 음식도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궁정 암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 무측천은 환관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로써 대하고 뇌물을 주어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즉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서로 반목하는지와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를 통해 앞날의 정황을 준비했다.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무측천에게 궁녀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정무를 처리하고 퇴조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었으며, 항상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 보면 심신이 지치고 팔다리가 퉁퉁 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했다. 이미 황제의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군 태종과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성공이란 매력, 능력, 지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은 기회를 가져오고, 능력은 남과 다른 비범함을 발휘하며, 지력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측천은 이 세 가지를 가장 적절하게 융합하여 최대 효과를 발휘할 줄 알았다. 상원 원년 12, 무측천은 황후의 신분으로 당 고종에게 치국에 필요한 12조를 건의했다. 건언 12(建言 十二事)라고 불리는 이 제안서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열두 가지의 건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 고종은 부황의 국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 피해와 동방과의 전쟁 그리고 황실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소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무측천은 이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농업과 양잠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할 것,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 표준으로 삼을 것 등의 산업 진흥 정책이 담겨 있었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당은 경제를 회복했으며 향후 무측천의 통치 기간에는 100% 국력이 증가하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2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점은 신진 관료 세력들의 이익을 주청한 내용이다. 무측천은 관리의 봉록을 인상할 것과 더불어 직위가 낮아도 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한 신진 관료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측천의 건언 12사는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정책개선의 의지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대거 등장한 신흥 관료 계층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천하를 얻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이씨 왕실과 관료 귀족 계층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손발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측천은 인재 활용에 있어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용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경업의 난(684)을 계기로 시행한 것으로, 기존의 관료 제도를 향해 무측천이 던진 단죄의 칼날이었다. 서경업의 난은 무측천이 중종 이철을 폐하고 예종 이단을 세웠으나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위시한 원로중신 세력이 폐위된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서경업의 난은 3개월 만에 패하였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

 

무측천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후 탐관오리를 비롯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동궤를 설치했다. 동궤는 동()으로 만든 상자에 익명의 투서를 하도록 만든 것인데, 그 내부는 네 개의 칸이 있어 투서 내용을 달리했다. 동쪽은 연은이라 하여, 황실의 업적이나 공덕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임관이나 승진을 청하는 상소를 위한 공간이었고, 서쪽은 신원이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투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소간은 정책적 건의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마지막 북쪽 칸인 통현은 천재지변이나 군사기밀 관련 내용을 투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동궤에 투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무측천의 밀고제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민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관료 집단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당 고조와 당 태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에 약간의 억압을 가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도교와 불교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무측천은 성력 원년(689) 정월, 금승도전방제(禁僧道殿謗制)를 반포하고, 불교와 도교는 선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라 볼 수 있으니 승려와 도사가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면 칙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무측천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고승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고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도교의 발전도 함께 도모했다. 이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측천은 종교를 정권의 유용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그 둘을 상호 견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였다.

 

위정자가 개혁에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치국의 도를 깨닫고 안정적으로 시정을 펼쳐야 한다. 688, 무측천은 명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는 무측천이 최초의 여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고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명당에서 정사를 펼치는 것을 큰 공으로 여겼다. 그러나 명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명당에서 정사를 베푼 왕은 3명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무측천은 고종 시절부터 명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관이나 학사들이 명당건축이 백성을 혹사시키고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사치행각이라며 은근히 비판했다. 이에 무측천은 명당이 선조와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곳이니, 재해와 화란을 막고 나라를 성하게 하는 일라며 명당의 기능을 과장했다. 그리고 명당을 완공시키자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대사면을 명하고 백성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화려하고 웅대한 명당의 모습은 당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명당을 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몰려든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예관과 학사들의 비방은 사방에 가득한 칭송에 묻혀 사라졌다. 무측천은 명당을 통해 일련의 유신(維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영창 원년 정월, 명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정사를 펼치면서 백관들을 훈계하는 9개항을 반포했다. 그 요지를 요약해보면 군신들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며, 제업(帝業)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사확을 주충효태황, 어머니 양씨를 충효태후 등의 존호로 추서함으로써 무씨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개원재초칙(改元載初敕)이라는 개혁조항을 반포했는데, 그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예악과 문서를 교정하고, 신조한자를 제정하고 역법을 개정하는 것 등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황제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무측천은 황위에 등극한 후, 수나라 때의 감찰(監察) 제도를 부활시켰다. 중앙의 최고 감찰 기관을 어사대로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각 주현의 군정, 민정,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서성(정무집행기관)의 회의, 문무백관의 연회 및 제사를 진행할 때에도 감찰을 시행하도록 했으니, 감찰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감찰관은 황제의 눈과 귀와 같은 존재로, 그 권한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감찰관의 특권에 대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억울하게 탄핵된 관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즉 감찰관의 선발부터 신중을 기했으며, 감찰어사들이 올린 탄핵과 상소는 자신이 직접 분석하고 감별하였다.

 

감찰제도의 부활은 국가 기관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기여했다. 무측천은 감찰을 통해 여러 주현들을 통합함으로써 주현을 거의 1/2이나 줄이고 대규모 감원을 이행했다. 인재의 유용성을 중시한 무측천은 이러한 감원정책을 두고,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무측천은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관리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 등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하지만 고위 대신들과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관을 차려 입지 않으면 내치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등,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감찰을 통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은 부패한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는 것과 더불어 일반 지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농민의 납세부담을 줄이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로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감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무측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은 오직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로써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무측천이 실시한 일련의 변화란 그녀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하자 당의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합당한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무씨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이씨에서 주나라의 무씨로 종실의 위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국호를 주()로 세운 것도 고대 왕조의 치세를 재현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고대 중국의 치세란 ()’()’의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무씨의 주() 왕조를 세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이미 고종 시대부터 준비되어온 일이었다. 낙양은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이미 수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낙양과 장안을 왕래하며 정사를 펼쳤는데 고종이 낙양에서 머문 기간만 10여 년에 달했다. 무측천은 그 기간 동안 낙양에 세력을 형성하고 고종이 죽자 낙양을 더욱 육성시켰다. 그래서 무주 왕조 건국이 가시권에 이르렀을 때 낙양은 이미 새로운 왕조의 정치, 문화,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무측천이 사직을 신도로 옮긴 것도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직은 본래 제왕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상징이 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무측천은 신도에 무씨 태묘(太廟) 7개를 세우고, 삼십만 군대를 상주케 하여 무씨 왕실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켰다.

 

자고로 예를 즐기는 것은 모든 제왕의 공통점이었다. 무측천은 유가의 예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여러 가지 예의 법식과 의식들을 통해 민심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유신론자였던 무측천은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결정짓는 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 신의 힘을 빌려서 주 왕조 설립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민심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존호이다. 무측천은 고종을 도와 정무를 살피던 시기에 이미 천후라는 별칭을 사용해왔으며,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황제임을 뜻하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존호를 개칭했다. 이렇듯 무측천은 무주 왕조를 건국하기까지 매사를 심사숙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서 사직을 바꾸고 세력을 형성하여 새 왕조를 세웠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성공의 문을 관통할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는 얼마나 기회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낼 줄만 알았지, 자신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무측천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도사가 자신의 관상을 보고 귀인중의 귀인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과 지혜를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감지함으로써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으며, 특히 주위의 모든 권력을 방패막이이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측천의 정치적인 영민함은 일차적으로 그녀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무씨 집안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 관직에 진출했으나, 명문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 대에 이르면서 무씨 집안은 가문 부흥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본래 목재상이었던 무사확은 수양제의 대형 토목 공사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재력을 무기로 권세가들과 쉽게 교분을 쌓았다. 산서 지역의 세력가로 후에 당을 건국한 태조 이연(李淵)과의 친분도 이때 맺은 것이다. 무사확은 이연이 군사를 일으킬 때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 후 군수관(軍需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간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장안의 신흥 귀족으로 부상했다.

무사확은 전처 상리씨와의 사이에 원경, 원상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전처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연이 수나라의 재상이던 양달의 노처녀 딸을 그와 맺어 주었다. 양씨는 무사확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았으며, 그중 둘째가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무측천이 아직 어렸을 때 부친 무사확이 사망했고, 이후 두 이복 오빠는 양씨 모녀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무측천이 14살 되던 정관 15, 조정에서 각 지방의 재주 있는 미녀들을 입궁시키게 했다. 그러나 딸의 입궁을 원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 중에 실제로 은총을 입는 궁녀는 극소수인 데다 황제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때부터 천대와 멸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 역시 딸들이 궁녀로 간택되는 걸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큰딸과 막내딸은 하급관리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무측천은 한사코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리고 황제를 뵐 수 있는 건 행운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국 무측천의 빼어난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당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무측천은 정관 1514살의 나이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눈에 띄는 기회를 얻어냈다. 당 태종은 명마(名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서역에서 조공으로 바쳐온 말을 길들이는 과정을 직접 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총이란 이름의 야생마가 길길이 날뛰며 조련사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사자총은 비록 성질은 난폭하지만 튼튼하고 위엄이 가득한 명마였다.

 

태종은 사자총이 눈에 들었으나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점에 고심했다. 그래서 하루는 문무 대신들을 향해 누가 저 말을 길들일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궁녀들 속에 있던 무측천이 돌연 태종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태종이 웃으며 순한 말도 타기 어려운 어린 계집이 어찌 야생마를 조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무측천은 자신이 말을 다루어볼 터이니 철채찍과 철퇴, 비수를 달라고 하였다. 태종이 의아해하며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무측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선 철채찍의 맛을 보여주고,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철퇴로 머리를 칠 것이며,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버리려고 합니다.” 태종과 주위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입을 연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방법은 좀 지나치구나. 하지만 네 생각만은 참으로 용맹스럽다.” 이때 무측천은 태종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이 시선이 향후 그녀가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당태종(재위 629~649)은 말년에 병석에 있으면서 심약한 태자를 염려했다. 그래서 재상을 불러 태자를 부탁하고 유조를 받아 적게 했다. 그는 우선 왕조의 앞날에 위협이 될 모든 화근을 일소하기 위해 반정을 모의할 가능성이 있는 신하들을 먼 지방의 관리로 보내게 했다. 그런데 유조를 내리는 동안 문득 한 해 전에 도사 이순풍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순풍은 삼십 년 후에 여자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각별히 총애한 서충용을 제외한 모든 비빈들을 비구니가 되게 하라고 명했다. 이 유조에 따라, 정관 23(649) 526, 천하의 명군 태종이 붕어하자 무측천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태종의 별묘(別廟)가 있는 감업사의 비구니로 가게 되었다.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중 태자 이치(고종)는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소양이나 인품 그리고 향후 제위자리를 놓고 벌어질 골육상잔을 염려한 태종의 고려에 의해 태자에 봉해졌다. 당시 18세였던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잃자 태자 이치를 겨냥했고,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감업사의 비구니가 된 무측천을 다시 찾았고, 결국 후궁의 첩지를 내려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측천은 재입궁하자, 곧 황후 쪽 환관과 시녀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왕황후는 성품이 차갑고 거만했으며, 그의 모친 유씨는 딸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였기에 황후궁에 충심을 다하는 시종들이 많지 않았다.

 

사실 무측천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데는 왕황후의 힘이 컸다. 왕황후가 무측천의 입궁을 도운 것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측천은 왕황후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는 한편, 황후와 소숙비 두 사람 중 누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될 존재인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素節)의 생모라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황후는 후사가 없었기에 양자 충()을 들여놓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태자 책립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다. 이때 무측천도 임신 중이었으나 아직 두 사람에게는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황후와 소숙비는 음으로 양으로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고, 서로 비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종은 두 사람이 태자 책립 문제로 못살게 구는 일이 잦아지자 그들의 처소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무측천은 서로 비방하는 두 사람과 달리 항상 온유하고 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무측천이 고종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휘 3(652), 무측천은 남아를 순산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 태어나면서 무측천의 품계는 비빈 중 가장 높은 소의(2)에 책립되었다. 하지만 황후나 소숙비로서는 태자 책립문제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의 태자 책립을 눈물로써 간청했고 결국 고종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소식을 들은 무측천은 이 일을 곧바로 황후에게 고했다. 황후의 모친 유씨는 자신의 아들 유석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고 유석은 대신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튿날 조정 대신들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진왕 충을 태자로 옹립할 것을 주청하는 가운데, 원로대신 장손무기는 다섯 번째 황자의 탄생을 진심으로 감축드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측천의 아들 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홍은 무측천이 입궁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태어났으므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임신한 것이었다. , 선제의 궁녀와 몰래 사통하여 임신시킨 고종을 조롱한 것이었다. 이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고종은 황후의 양자 을 태자로 책립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태자 책립을 두고 벌어진 싸움은 황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후는 이 일에 직접적인 공을 세운 무측천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하사받은 금전과 예물을 모두 황후궁의 환관과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더욱 정보를 열심히 제공했고 결국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황후와 그녀의 모친 위국부인이 황제형상의 나무인형을 만들어 황제가 죽기를 기도드린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이 사실을 즉시 고종에게 상주했다.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황후를 불러 문책하려 했다. 무측천은 이러한 황제를 말리며 황후궁에 친히 가셔서 증거를 잡은 후 문책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고종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왕황후의 처소로 향했다. 사실 왕황후는 고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혹시 자신을 폐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딸을 보다 못한 유씨는 승려에게 의논했고 승려는 침을 꽂은 나무 인형을 주며 백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이라 하였다. 고종이 황후의 침실에 들렀을 때 황후는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옆에는 침을 꽂은 나무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무측천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왕황후는 폐위되고 별궁에 유폐된다.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무측천은 지위와 세력,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숙비와 황후를 제거한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외로움을 느낀 고종은 무측천의 언니 한국부인과 그 딸 위국부인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총애했다. 황후의 자리를 앞에 둔 상황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측천은 한국부인과 위국부인을 차례로 독살시키고 그 누명을 두 이복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에게 뒤집어씌워 유배되도록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심약한 고종이 냉궁에 유폐되어 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안쓰럽게 여겨 구해주려 하자, 언제 처지가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 사람의 수족을 절단하게 하고 술독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측천은 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무측천은 정사에 관여하며 계속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 고종은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 42녀가 무측천의 소생이었으며, 그중 첫째인 이홍은 겨우 4살의 나이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모후와 부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이홍은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언행이 바르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니, 요산옥채500권은 그의 주도로 편찬된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태자를 신뢰하여 여러 차례 국사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이홍의 시정 방침은 모후 무측천과 크게 달라 자주 부딪힘이 생겼다. 또한 그는 종실에 대한 모후의 잔혹함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병석에 누운 고종은 이홍에게 양위할 뜻을 비쳤는데, 이홍은 갑자기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24살이었던 이홍의 죽음은 일대 미스터리였는데 무측천이 독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하튼 이홍의 죽음은 고종에게 큰 슬픔이었으며 아까운 인재의 손실이었다.

 

이홍이 죽자, 고종은 둘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한다(675). 당시 22살이었던 이현은 형 이홍과 마찬가지로 반듯한 외모와 바른 언행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갖춰 탄복하지 않은 대신들이 없었다. 고종의 신임과 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혈기 넘치는 청년 이현은 모든 것을 모후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측천과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측천은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태자가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을 제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영휘 원년(680), 무측천은 이현을 모반죄로 고발했다. 고종은 어사대부로 하여금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동궁의 마구간에서 갑옷 수백 개가 발견되었다. 고종은 딱히 할 말이 없는 와중에서도 이현을 변호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측천이 완강하게 태자의 처벌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폐위시키고 만다.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무측천은 은신술에 능했다. 그녀는 뒤에서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 후에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곤 했다. 고종은 죽기 직전 태자 이철(李哲, 무측천의 셋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대신 무측천에게 섭정을 허락하는 유조를 내렸다. 이철은 맏아들 이홍처럼 높은 인덕을 쌓지도 못했고, 둘째 이현처럼 주위에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음을 고려한 유언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철의 즉위식을 일주일간 미룬 후 거행했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도록 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는 순종적이었다.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다름없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했고 매일 퇴조 시간이면 어김없이 태후를 배알하여 하루의 정무를 보고했다. 그러다 보니 전날 조정에서 논의된 모든 정무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결정되는 진풍경이 반복되었다.

 

중종은 제위에 오른 지 5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자 모종의 결단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자신의 장인 위효정을 시중으로 승진시키고 유모의 아들에게도 5품 관직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자 재상 배염이 나서며 위효정이 시중에 봉해질 만큼 공이 크지 않기에 이러한 승진은 민심을 잃을 수 있다고 간언했다. 갓 제위에 오른 신참 황제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 중종은 배염의 청구를 묵살했다. 그럼에도 배염이 끝까지 반대하자 짐은 위현정에게 천하를 내줄 수도 있는데 그깟 시중 자리를 갖고 무얼 그러시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배염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나 무측천에게 이 일을 소상히 적어 올렸다. 무측천은 그날 저녁 배염을 불러 조서를 적게 하고 금위군을 대기시켰다.

 

중종은 막상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모후 무측천이 어찌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중종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문안을 드리면서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무측천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중종이 안심하고 어전에 나와 막 전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그곳에 모후 무측천이 앉아 있었다. 중종이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무측천은 지난밤 배염이 작성한 조서를 낭독하도록 했다.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에 봉하고 궁중에 유폐시키도록 하라!” 중종은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 폐위하려 하느냐고 모후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 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겠소?” 하고 되물었다. 문무백관은 엎드려 조서를 받들고 있고, 근위병은 궁정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모후는 용상에 앉아 있으니 중종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은 즉위 55일 만에 제위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무측천은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으나, 모든 정무는 무측천이 단독으로 처리했고 예종은 별전에 기거하면서 정무에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측천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자신의 혈족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과정은 단지 사사로운 감정이나 눈앞의 욕망 때문에 이행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측천이 황후 자리나 탐냈다면 그녀가 가진 권력은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다만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실현하자 위국애민의 치적으로 백성들의 추앙과 지지를 받는 성공한 정치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무측천이 제위에 오른 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 인사정책이었다. 그녀는 인재 선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과거제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당의 과거 제도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삼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측천은 친히 낙양궁에 나가 과거 시험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천자가 검시관으로 직접 시험을 관장한 예는 없었다. 이후 후대인들은 천자가 관장한 과거를 전시(殿試)’라 불렀다. 재초 원년(690) 2, 무측천은 몇 날 며칠 동안 직접 심사를 했다. 시험은 경서에 대해 해박한 정도와 국책에 대한 견해, 개인적인 품행과 외모, 자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관리 선발 형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기계적으로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무측천은 최초로 자천 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 관직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연은이라는 동으로 만든 함에 자신의 천거의사를 적어 넣도록 하는 제도였다. 당 태종도 모수자천(毛遂自薦)제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재상 위정이 남을 아는 것은 지()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명()인데, 타인을 알기 어렵고, 자신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고 반대하자 간언을 귀담아 듣던 태종은 곧바로 계획을 취소했다. 명군으로 이름난 당 태종마저도 시행을 망설이고 포기한 제도를 무측천은 과감히 시행했다. 무측천은 또한 과거 시험에 무과(武科)’를 도입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무과는 활쏘기, 말타기, 언어, 행동거지 등 모두 일곱 과목을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는 제도로 합격자는 곧바로 병부에 예속되었다.

 

무측천 시대의 과거제의 발전은 중소 지주계층의 지식인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재를 폭넓게 기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무측천은 발굴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에도 탁월했는데, 무측천의 인재등용 정책에 큰 역할을 한 밀고(密告)’제도는 무측천의 인재풀 가운데 한 유형이었다. 무측천은 밀고 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처벌권을 혹리(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라는 11명의 관리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빈천한 관리 출신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원망이 많았고, 자신을 깔보는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컸다. 말하자면 무측천이 저열한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기용한 것은 그들의 교활함을 빌려 탐관오리나 부패관료층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상대를 겨냥하는 일이 많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폐단이 생겨나자 강직하고 공정한 판관들을 기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혹리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가차 없이 내쳤다.

 

성공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용인술에 능해야 한다. 용인술이란 결점이 있더라도 특별한 장점을 지닌 자가 있다면 중용하는 대범함을 말한다. 옛말에 금은 순금이 없고,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곧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때 유방은 소인배 출신으로 그가 기용한 자들은 대부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장점과 특기를 발휘해 뭉쳐진 전체는 무소불위의 괴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즉 유방의 용인술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보다는 한 가지 특기를 가진 전문가를 기용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자는 재주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용인술의 핵심은 그런 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되, 구속할 줄 아는 데 있다.

 

심리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무측천은 자애로운 궁궐의 안주인이기보다는 냉혹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했으며, 구중궁궐에 가만히 앉아서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하고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이룩했다. 당시 이민족의 잦은 침략은 국가의 통치 기반과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문제였다. 당나라는 변방의 이민족들과 계속해서 전쟁과 화친을 반복해왔는데, 무측천은 이들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반격하도록 하여 변방민족들을 당에 복속시켰다. 그리고 기미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들의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통치 계층이 직접 자민족을 다스리게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적대적이었던 대신들은 이러한 무측천의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분산시켜 각 주현으로 보내 경작과 직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풍속을 한화시키는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말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동화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다민족의 융합은 경제 발전이라는 기초하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야지 정치권력이 개입되면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는 고려에서였다. 무측천은 이민족에게 자치권을 주되 부락의 추장은 조정의 직접 통치를 받게 했다. 또한 토착민들을 예법으로 교화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를 통제했다.

 

무측천은 외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면서, 내적으로는 백성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중 균전제(均田制)를 예로 들면, 당시에는 국가가 장악한 토지를 가구당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수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정 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측천이 즉위했을 당시의 농촌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농민이 실제로 균전을 받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의 토지는 크게 황제의 소유지, 귀족 관료의 소유지, 일반 지주의 소유지, 그리고 소량의 농민 소유지로 나누어졌다. 전자의 세 부류가 가진 토지는 균전제의 분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국가 소유의 황무지나 군대의 둔전만이 균전제의 토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에 한해 영업전과 구분전의 매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이는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호족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잠식해가다 보니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허다했다.

 

무측천은 균전제의 와해를 막기 위해 영업전과 구분전에 대한 모든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한 자는 엄중 처벌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망간 농민들을 환향시켰는데, 이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무측천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그들을 호적에 복속시키고 경작할 땅을 주는 대신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일부지방에서는 인구수에 비해 경작지가 너무 적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래서 무측천은 인구수와 경작지를 고려하여 이주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주한 농민에게는 부역을 감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떠나고 황무지가 늘어나는 지역의 관리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명하고, 감찰관을 수시로 주현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균전제는 저절로 그 공정성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법치 실현에도 업적을 남겼다. 무측천은 과거의 법이 유독 가혹한 처벌이 많고 복잡한 법률 조항으로 인한 형벌남용으로 소송사건이 많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번 죄인은 끝까지 죄인으로 남게 됨을 지적하고 법률을 실정에 맞게 새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편찬된 법률이 모두 12502조로 구성된 영휘율(永徽律)이다. 무릇 법률을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법률 조문보다도 법을 시행하는 과정이다. 영휘율은 법이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고, 처벌의 경중이 적절하고, 엄격함과 관대함이 모두 그 도를 넘지 않아서 수천 년이 지나도록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사사로운 일도 법에 따라 이행했는데, 이는 법치를 통해 명문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합법적인 강령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무측천은 나라의 법도와 기강, 상벌 제도와 함께 민생에 큰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실사구시의 위정 자세는 오늘의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자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책봉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당시 조정은 두 이복오빠의 아들들인 무승사, 무삼사를 위시한 무씨 일족과 재상 적인걸을 앞세운 친당 세력 그리고 장혁지, 장창종 등 무측천이 총애하는 남창 세력 등의 세 파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장창종과 장혁지 형제는 음률에 재주가 있는 미소년들로 딸인 태평공주가 천거하자 이들을 곁에 두고 오랫동안 총애했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장씨 형제는 오만방자함이 지나치도록 권세를 펼치고 있었다. 한편 이복오빠의 아들인 무승사는 무측천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이지만 무측천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측천은 제위에 오르면서 넷째 아들 예종(이단)을 황제에서 폐위시켰지만 그를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사(皇嗣)라 칭했다. 이는 언제든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씨 왕조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만큼 무씨가 제위를 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조카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자니 그들이 아들만큼 자신을 섬기지는 않을 터였다. 무측천은 당조의 명신이었던 재상 적인걸에게 태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적인걸은 친자를 후계자로 세워야만 종묘에 모셔지고 제왕의 모친으로 받들어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적인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여릉왕 이철(폐위된 중종)의 복위를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무씨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이씨의 당 왕조를 다시 복권하고자 했다.

 

장안 4(704), 무측천은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고, 종실과 재상들의 접근을 막은 채 장창종 형제로 하여금 수발을 들게 했다. 황제의 죽음이 임박하자 이씨 당 왕조의 복권을 계획한 일부 조정대신들이 정변을 모의했다. 장간지와 언범을 필두로 한 조정의 신하와 병사들은 태자 이철에게 자신들의 정변계획을 알렸다. 이철이 망설임 끝에 윤허를 내리자 상왕 이단, 태평공주 등의 이씨 종친들이 지지를 가세했다. 병사를 이끈 장간지는 곧 무측천의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장씨 형제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무측천의 처소를 포위한 후, 무측천에게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모반을 꾀하여 태자의 명을 받들어 참수했노라고 말했다.

 

이철이 들어오니, 무측천은 비통하고 분노한 감정을 억누르며 동궁으로 돌아가라 했다. 이에 장수 한 명이 나서며 양위를 종용했다. 무측천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누워버렸으나 며칠 후 장간지 등이 다시 한 번 무측천에게 양위를 독촉하자 마침내 대권을 놓았다. 이후 무측천은 열 달 정도를 더 살았다. 이 마지막 열 달이 무측천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던 것 같다. 중종이 다시 복위함으로써 이씨 조정의 당이 복귀되고 무측천은 상양궁에 갇히게 되었는데, 사서에 의하면 태후는 꾸미기를 좋아해 손자를 본 뒤에도 전혀 노쇠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상양궁에 연금된 후부터는 머리를 빗지 않고 꾸미지 않으니 그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기 며칠 전, 무측천은 중종, 상황, 태평공주와 조카 무삼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조를 남겼다. 우선 자신의 칭호를 황제가 아닌 황후로 부르도록 하고, 건릉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황후와 소숙비의 가문의 자손들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무씨 인척의 지위를 높여달라고 명했다. 이 유지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중종이 복위함으로써 무씨 조정이 사라졌으니 무측천이 세운 대주(大周)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황제 칭호를 거두고 황후로 칭하라는 것은 이씨 왕조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였다. 만약 황제의 칭호를 유지한다면, 이씨 왕조의 종실들이 무씨 집안을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고종이 묻힌 건릉에 함께 묻힘으로써 주나라의 황제에서 다시 당 고종의 황후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왕황후와 소숙비 가문의 자손들을 복권시키고 외척 무삼사와 원노기 등의 작위를 높이도록 한 것도 자신의 사후에 있을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무측천은 이처럼 마지막까지 탁월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그리고 신용 원년(705)1126일 새벽, 무측천은 상양궁 선거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무측천은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의 이름으로 건릉에 묻혔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비문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무측천은 무에서 유로,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끊임없는 협상과 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 그녀의 배후는 미약한 반면 그녀의 적들은 든든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무측천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손에 넣은 후에는 황제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경제 문화적인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 당나라가 300여 년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는 기초를 다졌으니, 이른바 ()’ 자 비()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대답이라 할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기술은 여제 무측천의 성공 전략을 수록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측천을 사람의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고 표현하며 어떻게 그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알고 있던 무측천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다.

사철 지음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 20076/ 513/ 24,500

 

저자 사철

중국의 역사 연구가.

 

역자 이은영

영남대학교 한문교육학과를 마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베이징 우전대학 및 천진 사범대에서 수학했으며, LG 및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다. 현재 주중국 한국대사관 통번역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경영우화, 무측천등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무측천(則天)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서기 624년에 태어나서 705년까지 82년의 생을 살았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미모로 인해 14살 때 당태종 이세민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총애를 잃게 되자 태자 이치(고종)를 유혹하여 그의 후궁이 된다. 당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42녀는 모두 무측천의 소생이었는데, 그녀는 첫 아들을 낳자 황후를 모략하여 폐위되도록 하고 황후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사에 관여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 나갔는데,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측천의 네 아들 중 큰아들 이홍과 둘째 아들 이현은 모두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모후의 잔혹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정치관을 달리했다. 그래서 큰아들은 독살하고, 둘째 아들은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이후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로 책봉되고 고종 사후에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역시 55일 만에 폐위시키고 만다. 그리고 넷째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키나 별전에 기거하게 하며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측천은 이렇게 정사를 주무르다가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당을 주(나라, 690~707)로 바꾸어 15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고종의 황후시절부터 정사에 관여했으니 실질적으로는 50여 년을 정치가로 살아간 셈이다.

 

무측천은 그녀가 행한 냉혹한 처사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치적에 있어서 만큼은 당 태종 이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황제였다. 그녀는 당 왕조를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국가로, 또한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무측천이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고 명군의 치적을 남기게 된 데는 그녀만이 지닌 탁월한 심리공략술이 기반이 되었다. 무측천은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치인술(治人術)을 개발해 냈는데, 그것은 이른바 권력과 세상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게 하는 심리공략 전술로, 상대의 내면까지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권력의 힘을 숨긴 채 시운(時運)을 빌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녀의 심리공략술을 살펴보고 그것이 조화된 그녀만의 리더십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사실 오랫동안 무측천의 업적은 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왔다. 특히 중국의 사가들에게 요녀’, ‘악녀로 수용되면서 제대로 된 관심과 연구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다만 그녀가 여자였다는 점이 두드러진 점일 뿐이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늘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오늘의 시대에 무측천의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현대사회에서 거칠고 냉혹한 여자로 평가받는 여성 리더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단력과 용기,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십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차례

머리말 : 무측천, 심리공략의 달인이었다

심리전의 여왕 무측천에게서 배우는 인간 심리 경영

 

1부 심리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1.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2.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의 중용을 지키다

3.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다

4.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 처리하다

5.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6.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7.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8. 여성 정치가로서 위대한 선구자였다

9.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10. 역대 제왕의 교훈을 평생의 싱크탱크로 삼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공략의 기술

1.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2.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3.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4. 심리 공략의 필승지책 : 상대의 치부는 덮어주되 비겁함을 공격한다.

5.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6. 심리 공략의 치인술 : 사람은 사람으로 다스리다

7. 심리 공략의 연환술 : 때로는 권력을 대담하게 내려놓아라

8.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9. 심리 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10.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 연표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모색 / 20076/ 513/ 24,500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무측천은 14세 때 당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서충용이라는 후궁에게 황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궁녀들은 대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매끼 들여오는 음식도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궁정 암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 무측천은 환관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로써 대하고 뇌물을 주어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즉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서로 반목하는지와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를 통해 앞날의 정황을 준비했다.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무측천에게 궁녀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정무를 처리하고 퇴조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었으며, 항상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 보면 심신이 지치고 팔다리가 퉁퉁 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했다. 이미 황제의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군 태종과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성공이란 매력, 능력, 지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은 기회를 가져오고, 능력은 남과 다른 비범함을 발휘하며, 지력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측천은 이 세 가지를 가장 적절하게 융합하여 최대 효과를 발휘할 줄 알았다. 상원 원년 12, 무측천은 황후의 신분으로 당 고종에게 치국에 필요한 12조를 건의했다. 건언 12(建言 十二事)라고 불리는 이 제안서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열두 가지의 건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 고종은 부황의 국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 피해와 동방과의 전쟁 그리고 황실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소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무측천은 이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농업과 양잠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할 것,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 표준으로 삼을 것 등의 산업 진흥 정책이 담겨 있었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당은 경제를 회복했으며 향후 무측천의 통치 기간에는 100% 국력이 증가하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2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점은 신진 관료 세력들의 이익을 주청한 내용이다. 무측천은 관리의 봉록을 인상할 것과 더불어 직위가 낮아도 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한 신진 관료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측천의 건언 12사는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정책개선의 의지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대거 등장한 신흥 관료 계층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천하를 얻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이씨 왕실과 관료 귀족 계층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손발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측천은 인재 활용에 있어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용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경업의 난(684)을 계기로 시행한 것으로, 기존의 관료 제도를 향해 무측천이 던진 단죄의 칼날이었다. 서경업의 난은 무측천이 중종 이철을 폐하고 예종 이단을 세웠으나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위시한 원로중신 세력이 폐위된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서경업의 난은 3개월 만에 패하였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

 

무측천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후 탐관오리를 비롯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동궤를 설치했다. 동궤는 동()으로 만든 상자에 익명의 투서를 하도록 만든 것인데, 그 내부는 네 개의 칸이 있어 투서 내용을 달리했다. 동쪽은 연은이라 하여, 황실의 업적이나 공덕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임관이나 승진을 청하는 상소를 위한 공간이었고, 서쪽은 신원이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투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소간은 정책적 건의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마지막 북쪽 칸인 통현은 천재지변이나 군사기밀 관련 내용을 투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동궤에 투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무측천의 밀고제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민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관료 집단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당 고조와 당 태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에 약간의 억압을 가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도교와 불교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무측천은 성력 원년(689) 정월, 금승도전방제(禁僧道殿謗制)를 반포하고, 불교와 도교는 선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라 볼 수 있으니 승려와 도사가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면 칙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무측천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고승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고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도교의 발전도 함께 도모했다. 이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측천은 종교를 정권의 유용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그 둘을 상호 견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였다.

 

위정자가 개혁에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치국의 도를 깨닫고 안정적으로 시정을 펼쳐야 한다. 688, 무측천은 명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는 무측천이 최초의 여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고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명당에서 정사를 펼치는 것을 큰 공으로 여겼다. 그러나 명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명당에서 정사를 베푼 왕은 3명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무측천은 고종 시절부터 명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관이나 학사들이 명당건축이 백성을 혹사시키고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사치행각이라며 은근히 비판했다. 이에 무측천은 명당이 선조와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곳이니, 재해와 화란을 막고 나라를 성하게 하는 일라며 명당의 기능을 과장했다. 그리고 명당을 완공시키자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대사면을 명하고 백성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화려하고 웅대한 명당의 모습은 당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명당을 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몰려든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예관과 학사들의 비방은 사방에 가득한 칭송에 묻혀 사라졌다. 무측천은 명당을 통해 일련의 유신(維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영창 원년 정월, 명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정사를 펼치면서 백관들을 훈계하는 9개항을 반포했다. 그 요지를 요약해보면 군신들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며, 제업(帝業)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사확을 주충효태황, 어머니 양씨를 충효태후 등의 존호로 추서함으로써 무씨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개원재초칙(改元載初敕)이라는 개혁조항을 반포했는데, 그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예악과 문서를 교정하고, 신조한자를 제정하고 역법을 개정하는 것 등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황제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무측천은 황위에 등극한 후, 수나라 때의 감찰(監察) 제도를 부활시켰다. 중앙의 최고 감찰 기관을 어사대로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각 주현의 군정, 민정,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서성(정무집행기관)의 회의, 문무백관의 연회 및 제사를 진행할 때에도 감찰을 시행하도록 했으니, 감찰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감찰관은 황제의 눈과 귀와 같은 존재로, 그 권한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감찰관의 특권에 대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억울하게 탄핵된 관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즉 감찰관의 선발부터 신중을 기했으며, 감찰어사들이 올린 탄핵과 상소는 자신이 직접 분석하고 감별하였다.

 

감찰제도의 부활은 국가 기관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기여했다. 무측천은 감찰을 통해 여러 주현들을 통합함으로써 주현을 거의 1/2이나 줄이고 대규모 감원을 이행했다. 인재의 유용성을 중시한 무측천은 이러한 감원정책을 두고,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무측천은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관리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 등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하지만 고위 대신들과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관을 차려 입지 않으면 내치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등,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감찰을 통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은 부패한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는 것과 더불어 일반 지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농민의 납세부담을 줄이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로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감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무측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은 오직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로써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무측천이 실시한 일련의 변화란 그녀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하자 당의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합당한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무씨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이씨에서 주나라의 무씨로 종실의 위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국호를 주()로 세운 것도 고대 왕조의 치세를 재현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고대 중국의 치세란 ()’()’의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무씨의 주() 왕조를 세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이미 고종 시대부터 준비되어온 일이었다. 낙양은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이미 수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낙양과 장안을 왕래하며 정사를 펼쳤는데 고종이 낙양에서 머문 기간만 10여 년에 달했다. 무측천은 그 기간 동안 낙양에 세력을 형성하고 고종이 죽자 낙양을 더욱 육성시켰다. 그래서 무주 왕조 건국이 가시권에 이르렀을 때 낙양은 이미 새로운 왕조의 정치, 문화,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무측천이 사직을 신도로 옮긴 것도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직은 본래 제왕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상징이 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무측천은 신도에 무씨 태묘(太廟) 7개를 세우고, 삼십만 군대를 상주케 하여 무씨 왕실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켰다.

 

자고로 예를 즐기는 것은 모든 제왕의 공통점이었다. 무측천은 유가의 예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여러 가지 예의 법식과 의식들을 통해 민심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유신론자였던 무측천은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결정짓는 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 신의 힘을 빌려서 주 왕조 설립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민심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존호이다. 무측천은 고종을 도와 정무를 살피던 시기에 이미 천후라는 별칭을 사용해왔으며,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황제임을 뜻하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존호를 개칭했다. 이렇듯 무측천은 무주 왕조를 건국하기까지 매사를 심사숙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서 사직을 바꾸고 세력을 형성하여 새 왕조를 세웠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성공의 문을 관통할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는 얼마나 기회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낼 줄만 알았지, 자신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무측천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도사가 자신의 관상을 보고 귀인중의 귀인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과 지혜를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감지함으로써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으며, 특히 주위의 모든 권력을 방패막이이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측천의 정치적인 영민함은 일차적으로 그녀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무씨 집안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 관직에 진출했으나, 명문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 대에 이르면서 무씨 집안은 가문 부흥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본래 목재상이었던 무사확은 수양제의 대형 토목 공사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재력을 무기로 권세가들과 쉽게 교분을 쌓았다. 산서 지역의 세력가로 후에 당을 건국한 태조 이연(李淵)과의 친분도 이때 맺은 것이다. 무사확은 이연이 군사를 일으킬 때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 후 군수관(軍需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간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장안의 신흥 귀족으로 부상했다.

무사확은 전처 상리씨와의 사이에 원경, 원상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전처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연이 수나라의 재상이던 양달의 노처녀 딸을 그와 맺어 주었다. 양씨는 무사확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았으며, 그중 둘째가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무측천이 아직 어렸을 때 부친 무사확이 사망했고, 이후 두 이복 오빠는 양씨 모녀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무측천이 14살 되던 정관 15, 조정에서 각 지방의 재주 있는 미녀들을 입궁시키게 했다. 그러나 딸의 입궁을 원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 중에 실제로 은총을 입는 궁녀는 극소수인 데다 황제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때부터 천대와 멸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 역시 딸들이 궁녀로 간택되는 걸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큰딸과 막내딸은 하급관리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무측천은 한사코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리고 황제를 뵐 수 있는 건 행운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국 무측천의 빼어난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당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무측천은 정관 1514살의 나이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눈에 띄는 기회를 얻어냈다. 당 태종은 명마(名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서역에서 조공으로 바쳐온 말을 길들이는 과정을 직접 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총이란 이름의 야생마가 길길이 날뛰며 조련사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사자총은 비록 성질은 난폭하지만 튼튼하고 위엄이 가득한 명마였다.

 

태종은 사자총이 눈에 들었으나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점에 고심했다. 그래서 하루는 문무 대신들을 향해 누가 저 말을 길들일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궁녀들 속에 있던 무측천이 돌연 태종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태종이 웃으며 순한 말도 타기 어려운 어린 계집이 어찌 야생마를 조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무측천은 자신이 말을 다루어볼 터이니 철채찍과 철퇴, 비수를 달라고 하였다. 태종이 의아해하며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무측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선 철채찍의 맛을 보여주고,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철퇴로 머리를 칠 것이며,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버리려고 합니다.” 태종과 주위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입을 연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방법은 좀 지나치구나. 하지만 네 생각만은 참으로 용맹스럽다.” 이때 무측천은 태종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이 시선이 향후 그녀가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당태종(재위 629~649)은 말년에 병석에 있으면서 심약한 태자를 염려했다. 그래서 재상을 불러 태자를 부탁하고 유조를 받아 적게 했다. 그는 우선 왕조의 앞날에 위협이 될 모든 화근을 일소하기 위해 반정을 모의할 가능성이 있는 신하들을 먼 지방의 관리로 보내게 했다. 그런데 유조를 내리는 동안 문득 한 해 전에 도사 이순풍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순풍은 삼십 년 후에 여자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각별히 총애한 서충용을 제외한 모든 비빈들을 비구니가 되게 하라고 명했다. 이 유조에 따라, 정관 23(649) 526, 천하의 명군 태종이 붕어하자 무측천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태종의 별묘(別廟)가 있는 감업사의 비구니로 가게 되었다.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중 태자 이치(고종)는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소양이나 인품 그리고 향후 제위자리를 놓고 벌어질 골육상잔을 염려한 태종의 고려에 의해 태자에 봉해졌다. 당시 18세였던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잃자 태자 이치를 겨냥했고,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감업사의 비구니가 된 무측천을 다시 찾았고, 결국 후궁의 첩지를 내려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측천은 재입궁하자, 곧 황후 쪽 환관과 시녀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왕황후는 성품이 차갑고 거만했으며, 그의 모친 유씨는 딸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였기에 황후궁에 충심을 다하는 시종들이 많지 않았다.

 

사실 무측천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데는 왕황후의 힘이 컸다. 왕황후가 무측천의 입궁을 도운 것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측천은 왕황후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는 한편, 황후와 소숙비 두 사람 중 누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될 존재인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素節)의 생모라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황후는 후사가 없었기에 양자 충()을 들여놓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태자 책립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다. 이때 무측천도 임신 중이었으나 아직 두 사람에게는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황후와 소숙비는 음으로 양으로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고, 서로 비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종은 두 사람이 태자 책립 문제로 못살게 구는 일이 잦아지자 그들의 처소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무측천은 서로 비방하는 두 사람과 달리 항상 온유하고 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무측천이 고종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휘 3(652), 무측천은 남아를 순산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 태어나면서 무측천의 품계는 비빈 중 가장 높은 소의(2)에 책립되었다. 하지만 황후나 소숙비로서는 태자 책립문제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소숙비는 옹왕 소절의 태자 책립을 눈물로써 간청했고 결국 고종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소식을 들은 무측천은 이 일을 곧바로 황후에게 고했다. 황후의 모친 유씨는 자신의 아들 유석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고 유석은 대신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튿날 조정 대신들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진왕 충을 태자로 옹립할 것을 주청하는 가운데, 원로대신 장손무기는 다섯 번째 황자의 탄생을 진심으로 감축드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측천의 아들 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홍은 무측천이 입궁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태어났으므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임신한 것이었다. , 선제의 궁녀와 몰래 사통하여 임신시킨 고종을 조롱한 것이었다. 이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고종은 황후의 양자 을 태자로 책립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태자 책립을 두고 벌어진 싸움은 황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후는 이 일에 직접적인 공을 세운 무측천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하사받은 금전과 예물을 모두 황후궁의 환관과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더욱 정보를 열심히 제공했고 결국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황후와 그녀의 모친 위국부인이 황제형상의 나무인형을 만들어 황제가 죽기를 기도드린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이 사실을 즉시 고종에게 상주했다.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황후를 불러 문책하려 했다. 무측천은 이러한 황제를 말리며 황후궁에 친히 가셔서 증거를 잡은 후 문책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고종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왕황후의 처소로 향했다. 사실 왕황후는 고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혹시 자신을 폐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딸을 보다 못한 유씨는 승려에게 의논했고 승려는 침을 꽂은 나무 인형을 주며 백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이라 하였다. 고종이 황후의 침실에 들렀을 때 황후는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옆에는 침을 꽂은 나무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무측천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왕황후는 폐위되고 별궁에 유폐된다.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무측천은 지위와 세력,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숙비와 황후를 제거한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외로움을 느낀 고종은 무측천의 언니 한국부인과 그 딸 위국부인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총애했다. 황후의 자리를 앞에 둔 상황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측천은 한국부인과 위국부인을 차례로 독살시키고 그 누명을 두 이복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에게 뒤집어씌워 유배되도록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심약한 고종이 냉궁에 유폐되어 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안쓰럽게 여겨 구해주려 하자, 언제 처지가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 사람의 수족을 절단하게 하고 술독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측천은 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무측천은 정사에 관여하며 계속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정적이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 고종은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 42녀가 무측천의 소생이었으며, 그중 첫째인 이홍은 겨우 4살의 나이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모후와 부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이홍은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언행이 바르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니, 요산옥채500권은 그의 주도로 편찬된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태자를 신뢰하여 여러 차례 국사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이홍의 시정 방침은 모후 무측천과 크게 달라 자주 부딪힘이 생겼다. 또한 그는 종실에 대한 모후의 잔혹함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병석에 누운 고종은 이홍에게 양위할 뜻을 비쳤는데, 이홍은 갑자기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24살이었던 이홍의 죽음은 일대 미스터리였는데 무측천이 독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하튼 이홍의 죽음은 고종에게 큰 슬픔이었으며 아까운 인재의 손실이었다.

 

이홍이 죽자, 고종은 둘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한다(675). 당시 22살이었던 이현은 형 이홍과 마찬가지로 반듯한 외모와 바른 언행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갖춰 탄복하지 않은 대신들이 없었다. 고종의 신임과 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혈기 넘치는 청년 이현은 모든 것을 모후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측천과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측천은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태자가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을 제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영휘 원년(680), 무측천은 이현을 모반죄로 고발했다. 고종은 어사대부로 하여금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동궁의 마구간에서 갑옷 수백 개가 발견되었다. 고종은 딱히 할 말이 없는 와중에서도 이현을 변호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측천이 완강하게 태자의 처벌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폐위시키고 만다.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무측천은 은신술에 능했다. 그녀는 뒤에서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 후에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곤 했다. 고종은 죽기 직전 태자 이철(李哲, 무측천의 셋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대신 무측천에게 섭정을 허락하는 유조를 내렸다. 이철은 맏아들 이홍처럼 높은 인덕을 쌓지도 못했고, 둘째 이현처럼 주위에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음을 고려한 유언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철의 즉위식을 일주일간 미룬 후 거행했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도록 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는 순종적이었다.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다름없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했고 매일 퇴조 시간이면 어김없이 태후를 배알하여 하루의 정무를 보고했다. 그러다 보니 전날 조정에서 논의된 모든 정무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결정되는 진풍경이 반복되었다.

 

중종은 제위에 오른 지 5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자 모종의 결단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자신의 장인 위효정을 시중으로 승진시키고 유모의 아들에게도 5품 관직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자 재상 배염이 나서며 위효정이 시중에 봉해질 만큼 공이 크지 않기에 이러한 승진은 민심을 잃을 수 있다고 간언했다. 갓 제위에 오른 신참 황제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 중종은 배염의 청구를 묵살했다. 그럼에도 배염이 끝까지 반대하자 짐은 위현정에게 천하를 내줄 수도 있는데 그깟 시중 자리를 갖고 무얼 그러시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배염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나 무측천에게 이 일을 소상히 적어 올렸다. 무측천은 그날 저녁 배염을 불러 조서를 적게 하고 금위군을 대기시켰다.

 

중종은 막상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모후 무측천이 어찌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중종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문안을 드리면서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무측천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중종이 안심하고 어전에 나와 막 전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그곳에 모후 무측천이 앉아 있었다. 중종이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무측천은 지난밤 배염이 작성한 조서를 낭독하도록 했다.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에 봉하고 궁중에 유폐시키도록 하라!” 중종은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 폐위하려 하느냐고 모후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 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겠소?” 하고 되물었다. 문무백관은 엎드려 조서를 받들고 있고, 근위병은 궁정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모후는 용상에 앉아 있으니 중종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은 즉위 55일 만에 제위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무측천은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으나, 모든 정무는 무측천이 단독으로 처리했고 예종은 별전에 기거하면서 정무에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측천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자신의 혈족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과정은 단지 사사로운 감정이나 눈앞의 욕망 때문에 이행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측천이 황후 자리나 탐냈다면 그녀가 가진 권력은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권력 장악은 고대 정치가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다만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실현하자 위국애민의 치적으로 백성들의 추앙과 지지를 받는 성공한 정치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무측천이 제위에 오른 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 인사정책이었다. 그녀는 인재 선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과거제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당의 과거 제도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삼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측천은 친히 낙양궁에 나가 과거 시험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천자가 검시관으로 직접 시험을 관장한 예는 없었다. 이후 후대인들은 천자가 관장한 과거를 전시(殿試)’라 불렀다. 재초 원년(690) 2, 무측천은 몇 날 며칠 동안 직접 심사를 했다. 시험은 경서에 대해 해박한 정도와 국책에 대한 견해, 개인적인 품행과 외모, 자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관리 선발 형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기계적으로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무측천은 최초로 자천 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 관직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연은이라는 동으로 만든 함에 자신의 천거의사를 적어 넣도록 하는 제도였다. 당 태종도 모수자천(毛遂自薦)제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재상 위정이 남을 아는 것은 지()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명()인데, 타인을 알기 어렵고, 자신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고 반대하자 간언을 귀담아 듣던 태종은 곧바로 계획을 취소했다. 명군으로 이름난 당 태종마저도 시행을 망설이고 포기한 제도를 무측천은 과감히 시행했다. 무측천은 또한 과거 시험에 무과(武科)’를 도입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무과는 활쏘기, 말타기, 언어, 행동거지 등 모두 일곱 과목을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는 제도로 합격자는 곧바로 병부에 예속되었다.

 

무측천 시대의 과거제의 발전은 중소 지주계층의 지식인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재를 폭넓게 기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무측천은 발굴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에도 탁월했는데, 무측천의 인재등용 정책에 큰 역할을 한 밀고(密告)’제도는 무측천의 인재풀 가운데 한 유형이었다. 무측천은 밀고 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처벌권을 혹리(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라는 11명의 관리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빈천한 관리 출신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원망이 많았고, 자신을 깔보는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컸다. 말하자면 무측천이 저열한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기용한 것은 그들의 교활함을 빌려 탐관오리나 부패관료층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상대를 겨냥하는 일이 많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폐단이 생겨나자 강직하고 공정한 판관들을 기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혹리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가차 없이 내쳤다.

 

성공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용인술에 능해야 한다. 용인술이란 결점이 있더라도 특별한 장점을 지닌 자가 있다면 중용하는 대범함을 말한다. 옛말에 금은 순금이 없고,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곧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때 유방은 소인배 출신으로 그가 기용한 자들은 대부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장점과 특기를 발휘해 뭉쳐진 전체는 무소불위의 괴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즉 유방의 용인술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보다는 한 가지 특기를 가진 전문가를 기용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자는 재주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용인술의 핵심은 그런 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되, 구속할 줄 아는 데 있다.

 

심리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무측천은 자애로운 궁궐의 안주인이기보다는 냉혹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했으며, 구중궁궐에 가만히 앉아서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하고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이룩했다. 당시 이민족의 잦은 침략은 국가의 통치 기반과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문제였다. 당나라는 변방의 이민족들과 계속해서 전쟁과 화친을 반복해왔는데, 무측천은 이들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반격하도록 하여 변방민족들을 당에 복속시켰다. 그리고 기미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들의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통치 계층이 직접 자민족을 다스리게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적대적이었던 대신들은 이러한 무측천의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분산시켜 각 주현으로 보내 경작과 직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풍속을 한화시키는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말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동화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다민족의 융합은 경제 발전이라는 기초하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야지 정치권력이 개입되면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는 고려에서였다. 무측천은 이민족에게 자치권을 주되 부락의 추장은 조정의 직접 통치를 받게 했다. 또한 토착민들을 예법으로 교화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를 통제했다.

 

무측천은 외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면서, 내적으로는 백성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중 균전제(均田制)를 예로 들면, 당시에는 국가가 장악한 토지를 가구당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수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정 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측천이 즉위했을 당시의 농촌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농민이 실제로 균전을 받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의 토지는 크게 황제의 소유지, 귀족 관료의 소유지, 일반 지주의 소유지, 그리고 소량의 농민 소유지로 나누어졌다. 전자의 세 부류가 가진 토지는 균전제의 분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국가 소유의 황무지나 군대의 둔전만이 균전제의 토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에 한해 영업전과 구분전의 매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이는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호족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잠식해가다 보니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허다했다.

 

무측천은 균전제의 와해를 막기 위해 영업전과 구분전에 대한 모든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한 자는 엄중 처벌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망간 농민들을 환향시켰는데, 이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무측천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그들을 호적에 복속시키고 경작할 땅을 주는 대신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일부지방에서는 인구수에 비해 경작지가 너무 적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래서 무측천은 인구수와 경작지를 고려하여 이주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주한 농민에게는 부역을 감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떠나고 황무지가 늘어나는 지역의 관리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명하고, 감찰관을 수시로 주현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균전제는 저절로 그 공정성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법치 실현에도 업적을 남겼다. 무측천은 과거의 법이 유독 가혹한 처벌이 많고 복잡한 법률 조항으로 인한 형벌남용으로 소송사건이 많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번 죄인은 끝까지 죄인으로 남게 됨을 지적하고 법률을 실정에 맞게 새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편찬된 법률이 모두 12502조로 구성된 영휘율(永徽律)이다. 무릇 법률을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법률 조문보다도 법을 시행하는 과정이다. 영휘율은 법이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고, 처벌의 경중이 적절하고, 엄격함과 관대함이 모두 그 도를 넘지 않아서 수천 년이 지나도록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사사로운 일도 법에 따라 이행했는데, 이는 법치를 통해 명문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합법적인 강령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무측천은 나라의 법도와 기강, 상벌 제도와 함께 민생에 큰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실사구시의 위정 자세는 오늘의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자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책봉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당시 조정은 두 이복오빠의 아들들인 무승사, 무삼사를 위시한 무씨 일족과 재상 적인걸을 앞세운 친당 세력 그리고 장혁지, 장창종 등 무측천이 총애하는 남창 세력 등의 세 파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장창종과 장혁지 형제는 음률에 재주가 있는 미소년들로 딸인 태평공주가 천거하자 이들을 곁에 두고 오랫동안 총애했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장씨 형제는 오만방자함이 지나치도록 권세를 펼치고 있었다. 한편 이복오빠의 아들인 무승사는 무측천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이지만 무측천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측천은 제위에 오르면서 넷째 아들 예종(이단)을 황제에서 폐위시켰지만 그를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사(皇嗣)라 칭했다. 이는 언제든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씨 왕조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만큼 무씨가 제위를 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조카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자니 그들이 아들만큼 자신을 섬기지는 않을 터였다. 무측천은 당조의 명신이었던 재상 적인걸에게 태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적인걸은 친자를 후계자로 세워야만 종묘에 모셔지고 제왕의 모친으로 받들어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적인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여릉왕 이철(폐위된 중종)의 복위를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무씨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이씨의 당 왕조를 다시 복권하고자 했다.

 

장안 4(704), 무측천은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고, 종실과 재상들의 접근을 막은 채 장창종 형제로 하여금 수발을 들게 했다. 황제의 죽음이 임박하자 이씨 당 왕조의 복권을 계획한 일부 조정대신들이 정변을 모의했다. 장간지와 언범을 필두로 한 조정의 신하와 병사들은 태자 이철에게 자신들의 정변계획을 알렸다. 이철이 망설임 끝에 윤허를 내리자 상왕 이단, 태평공주 등의 이씨 종친들이 지지를 가세했다. 병사를 이끈 장간지는 곧 무측천의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장씨 형제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무측천의 처소를 포위한 후, 무측천에게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모반을 꾀하여 태자의 명을 받들어 참수했노라고 말했다.

 

이철이 들어오니, 무측천은 비통하고 분노한 감정을 억누르며 동궁으로 돌아가라 했다. 이에 장수 한 명이 나서며 양위를 종용했다. 무측천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누워버렸으나 며칠 후 장간지 등이 다시 한 번 무측천에게 양위를 독촉하자 마침내 대권을 놓았다. 이후 무측천은 열 달 정도를 더 살았다. 이 마지막 열 달이 무측천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던 것 같다. 중종이 다시 복위함으로써 이씨 조정의 당이 복귀되고 무측천은 상양궁에 갇히게 되었는데, 사서에 의하면 태후는 꾸미기를 좋아해 손자를 본 뒤에도 전혀 노쇠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상양궁에 연금된 후부터는 머리를 빗지 않고 꾸미지 않으니 그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기 며칠 전, 무측천은 중종, 상황, 태평공주와 조카 무삼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조를 남겼다. 우선 자신의 칭호를 황제가 아닌 황후로 부르도록 하고, 건릉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황후와 소숙비의 가문의 자손들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무씨 인척의 지위를 높여달라고 명했다. 이 유지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중종이 복위함으로써 무씨 조정이 사라졌으니 무측천이 세운 대주(大周)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황제 칭호를 거두고 황후로 칭하라는 것은 이씨 왕조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였다. 만약 황제의 칭호를 유지한다면, 이씨 왕조의 종실들이 무씨 집안을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고종이 묻힌 건릉에 함께 묻힘으로써 주나라의 황제에서 다시 당 고종의 황후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왕황후와 소숙비 가문의 자손들을 복권시키고 외척 무삼사와 원노기 등의 작위를 높이도록 한 것도 자신의 사후에 있을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무측천은 이처럼 마지막까지 탁월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그리고 신용 원년(705)1126일 새벽, 무측천은 상양궁 선거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무측천은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의 이름으로 건릉에 묻혔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비문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무측천은 무에서 유로,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끊임없는 협상과 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 그녀의 배후는 미약한 반면 그녀의 적들은 든든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무측천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손에 넣은 후에는 황제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경제 문화적인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 당나라가 300여 년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는 기초를 다졌으니, 이른바 ()’ 자 비()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대답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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