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미래’] 시간·공간·지식의 혁명이 한국을 뒤흔든다
시간, IT의 초스피드 발전이 ‘부의 원천’…
여러 분야서 시간 못 좇아가는 지체 현상도
공간, 사이버 공간 외에 아리랑 2호 활동,
우주인 선발 등 활동 범위가 우주까지 확대돼
지식, 심층 기반의 핵심… 하루가 다르게 거대하고 복잡해지는 지식 체계를 주목해야
오늘날 지구상에는 세 가지의 주된 ‘부(富) 창출 시스템’이 존재한다. 방글라데시의 농부와 우리나라의 자동차 조립라인 근로자, 그리고 미국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삶을 비교해 보라. 그들은 각각 농업, 산업, 정보라는 부 창출 시스템 안에서 경제 활동을 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농부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논에 나가서 일하지만, 조립라인 근로자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집에서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일하거나 하루 종일 휴식하던 중에 떠오른 영감으로 프로그램 디자인을 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세 가지 방식의 부 창출 시스템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저서 '부의 미래'.
한국의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최근 인기를 끈 저서 ‘부의 미래’에서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부의 혁명’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혁명적 변화가 돈 버는 방식을 바꿀 것이라고 주장한다.
돈 버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귀가 번뜩 뜨이겠지만 돈이 생기는 심층기반이 달라질 것이라는 주장을 들으면 아무리 유명한 미래학자의 열변이라도 그 의미가 알쏭달쏭해진다. 지금 이 순간 시간혁명, 공간혁명, 지식혁명이 빠르게 진행되며, 그에 따라 부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과연 토플러가 역설하는 시·공·지(時·空·知) 혁명의 실체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혁명은 우리들이 먹고 사는 방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줄까.
시간혁명
인류 최초로 들에 씨앗을 뿌린 자는 가을에 추수할 것을 기다리면서 미래에 대한 시간 개념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1만여 년에 걸친 농경사회를 벗어나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시간을 세밀하게 관리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밭을 갈던 농부들은 출근 시간이 명확히 정해진 공장에 배치되었다.
자본가는 노동 시간의 빈틈을 줄이기 위하여 컨베이어 벨트를 고안했고, 작업 속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부의 원천이 되었다.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에서 하루 종일, 아니 일 년 열두 달 똑같은 일을 단순히 반복하는 채플린은 화장실에 갈 때조차도 타임 카드에 구멍을 뚫어야 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도 관리되었던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의해 그의 작업 속도가 결정되었으며, 이런 노동자의 생산성은 시간당 얼마만큼의 가치를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혁명이 시작되면서 돈 버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채플린과 달리 자기가 원하는 ‘개인화된 시간’에 일할 수 있는 자율성이 주어졌다. 같은 시간 동안에 일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사이에 3000배에 이르는 노동생산성과 봉급의 차이가 생겨나기도 한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정보의 가치가 증가하여, 5분 후의 일기를 정확히 예측하는 정보를 파는 기업이 생겨나서 빗방울을 맞으면서 야외공연이나 옥외파티를 철수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벌기도 한다.
시간 조정, 특히 시간의 동조화(同調化)는 한 나라의 경제발전을 좌우하기도 한다. 동조화의 중요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자는 독자들에게 잠시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다. 쿵쿵 뛰는 박동은 신체 어느 부위에서 명령을 내리기에 실수 없이 줄기차게 뛰고 있는가? 박동을 지시하는 부위는 없고, 단지 수많은 심장세포들이 방출하는 전기 신호를 함께 동조화하기 때문에 심장이 뛴다. 그렇다면 조물주는 왜 중앙에 명령기관을 두는 대신에 수많은 세포들이 동조화하는 방식을 택했을까? 스스로 동조화하는 탈(脫) 집중화 방식이 생명체의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란다.
생명체와 달리 사회는 복잡 다원화되면서 부문별한 기능 분화는 더 고도로 진행되었지만 부문 간 시간 동조화에는 실패했다. IT분야의 분쟁에 법원판결이 내려질 때는 이미 기술발달이 한창 진행된 후여서, 판결의 의미가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업은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나 정부나 학교, 법·제도 등은 절름거리며 한참 뒤져서 따라간다. 사회는 정보사회로 바뀌었는데 우리나라의 교육은 아직도 대량생산 산업사회에 맞는 주입식 교육에 머물고 있다. 토플러는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수백 명의 학생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똑같은 기능을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시간의 비동조화는 자원을 낭비한다.
군사학에서 사용되는 ‘현저한 뒤짐(Reverse Salience)’이란 개념도 동조화의 중요성을 잘 알려준다. 전쟁터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지역은 전선이 전진하지 못하고 뒤지게 된다. 뒤진 전선에는 엄청난 화력과 병력이 동원되어 집중 포화를 퍼붓는다. 기술발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관련 기술이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분야의 기술이 다른 분야보다 현저하게 뒤지게 마련이다. 수소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 연료 전지 기술이 다른 연관 기술보다 현저히 뒤진 것이 그 예이다. 이런 분야에는 많은 연구비와 우수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하되어 기술 발전에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기술 동조화가 큰 돈을 만든다.
시간혁명 중 실시간 혁명(real time revolution)은 비즈니스의 경영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컴퓨터 자판을 누르면 필요한 정보가 고위직 관리자의 화면에 즉각적으로 뜨게 되어, 기업 내의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축소되고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조직의 허리가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받을 수 있는 SPOT (Smart Personal Objects Technology)가 생겨났다. 교통정보를 받아 길 안내를 하는 휴대전화도 보편화되었다. 시간을 다투는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날로 높아지면서 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공간혁명
시간혁명과 맞물리면서 공간혁명은 공간인식과 공간압축이라는 두 차원에서 진행되어 왔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이후 우주 먼 곳에 대한 인식의 지평은 공간적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허블 망원경이나 전파 망원경은 은하의 끝에서 전해지는 성운의 모습을 포착하면서 공간인식혁명이 진행된다. 한편 교통과 운송에서 비약적인 기술발전은 공간을 비약적으로 압축해왔다. 80일 만에 세계를 한 바퀴 도는 일이 경이롭게 받아들여지던 때가 불과 100여년 전인데 아리랑 2호는 685㎞ 상공에서 100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씩, 하루에 지구를 14바퀴 반이나 돈다.
자본주의는 공간에 대한 세밀한 통제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수퍼마켓에 들어서서 계산대를 빠져 나오기까지 더 많은 선반 사이를 통과하도록 만든 설계도는 1917년 미국에서 특허를 받았다. 그 이후, 선반 높이에 따라 어떤 상품을 진열해야 하는지도 연구하면서 공간효율화에 박차를 가했다. FTA는 경제 활동에서 국가라는 공간적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부의 창출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본과 노동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이 방문한 곳을 지도 위에 표시해 보자. 여기에 전자적으로 움직인 공간, 즉 수신한 이메일의 발신지, 온라인으로 방문한 사이트의 서버가 위치한 도시를 더하여 표시해 보면 자신이 지구 상에서 움직이고 접촉한 공간적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도를 기업의 종업원 모두의 업무활동에 적용한다면, 기업의 활동 범위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활동 범위를 10년 전의 것과 비교한다면, 개인이나 기업의 공간 범위는 폭발적으로 넓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구를 벗어난 우주로 향한 공간혁명도 새로운 부의 근원을 마련하고 있다. 유료 우주여행 상품이 생겼으며, 미항공우주국(NASA)은 앞으로 우주여행사업이 항공산업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자신 있는 시장 전망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거부들을 상대로 여행비용을 100만달러로 낮추면 2030년에는 350억달러의 수익을 낼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위성을 이용한 위치확인시스템(GPS)은 이미 소포의 전달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하여 소비자에게 소포의 위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GPS는 어린이 유괴 방지를 위해 사용되거나, 부근에 위치한 자동차 정비소를 알려주는 등 적용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세계적인 검색업체 구글이 제공하는 ‘구글어스’는 서울의 도로와 건물뿐만 아니라 지구의 어느 구석도 위성 사진으로 찍어 무료로 제공하면서 광고 수입을 올리고 있다.
공간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상공간의 확대이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에 생겨난 어느 마을에서 살기 위해 신용카드로 사이버 머니를 산다. 3차원 가상공간에서만 존재하는 땅이나 건물을 분양 받은 후 자신의 얼굴과 옷 등의 아이콘을 구입하여 마을에 정착한다. 사이버 커뮤니티에 이사 온 이웃집 사람과 사귀고, 자신의 전문지식을 살려 변호사 상담이나 꽃 배달 가게 등을 개업하여 돈을 벌기도 한다. 이 마을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이버 주민끼리 온라인에서 사이버 섹스를 즐기거나 결혼서약을 하고는 가상 신혼여행을 떠난다. 사이버 커뮤니티에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이 생겨났으니, 확장된 공간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시간·공간혁명은 따로따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공의 압축’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다. 축지법처럼 공간이 압축되면 공간 이동에 걸리는 시간도 함께 압축되어 분·초의 단축이 경쟁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시·공의 압축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했던 경계들을 함께 무너뜨린다. 시·공에서 경계가 무너지는 예를 생각해보자.
10년 전에 비하면 요즘 화장실에는 야한 낙서가 별로 없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터넷 기술 발달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만족시키는 데 존재했던 시간과 공간의 벽을 인터넷이 허물었기 때문이다. 주로 밤 시간대 또는 으슥한 곳에서 성적 자극에 접하던 사람이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상의 성적 자극에 노출될 수 있는데, 굳이 화장실에 앉아서까지 낙서로 성욕을 표출할 동기가 줄어든 것이다.
지식혁명
부가 창출되는 심층기반 중 가장 핵심은 의문의 여지 없이 지식혁명이다. 시·공혁명은 단지 지식혁명의 결과 또는 지식혁명이 적용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전통적인 통계 지표들은 아직 지적재산권으로부터 발생하는 부가가치나 수익을 체계적으로 집계하지 못해 지적재산권 수익의 규모를 국가별로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이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하는 휴대전화 매출액의 5%가 미국의 퀄컴이라는 회사의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원천기술 특허사용료로 지불된다는 점, 마이크로소프트사가 IBM에 연간 2000만달러 이상의 특허료를 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적재산권이 만드는 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개인이나 대학이 보유한 특허를 사들인 다음, 기술을 필요로 하는 회사에 대여하는 중개회사가 생겨나서 큰 수익을 내기도 한다. 토플러의 주장대로 부를 창출하는 지식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지식이라는 자산은 일반적인 자산과 매우 다른 특징이 있다. 상품은 소비하면 없어지지만 지식은 소비해도 남아 있다. 또 자동차를 구입하기 전에 시승을 해 보아도 차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토플러의 예에서처럼 노스롭사가 경쟁사인 록히드의 비밀 데이터를 사는 경우는 사뭇 다르다. 지식이나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려면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용을 아는 순간 비밀 데이터의 가치는 손상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과학자가 지식을 공개하는 순간, 다른 과학자가 자신의 영감을 덧붙여 더 가치 있는 지식으로 바꾸어 줄 수도 있다. 한 상품에 다른 상품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는 어려워도, 지식에 새 지식을 더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기는 무척 쉽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지식혁명은 가속화(加速化)하는 성격이 있다.
지식혁명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혁명의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지식은 상호작용하면서 거대하고 복잡한 지식체계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식은 점차로 학문의 경계를 넘는 지식이다. 즉 사람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전통적 학문의 경계를 무시하면서 지식이 발생한다. 물리학과 사회학이 만나고, 생물학과 공학이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는 것이다. 둘째, 지식의 빠른 변화는 지식의 절반이 쓸모 없게 되는 ‘지식 반감기’를 단축한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산업사회에 기반을 둔 지식 생산체계에 커다란 도전을 던진다.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시·공·지(時·空·知) 혁명은 한국에도 도전과 기회를 던지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IT와 역동성을 자랑하는 한국은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앞장서 올라타고 있을지 모른다. 과연 토플러가 역설한 시·공·지혁명이 한국에 어떤 미래를 열어갈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학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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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로 본 아시아정보 혁명으로 아시아가 ‘부의 세계’ 를 주도 중국을 중심으로 일본ㆍ한국 가세… 한국은 첨단기술산업과 서비스업 발전 시켜야 ‘역사는 되풀이된다(History repeats itself).’ 2003년 중국이 우리나라의 제1대 수출대상국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각 언론이 사상 처음이라면서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하지만 당시 필자는 100여년 만에 처음이라는 생각이어서 ‘사상(史上)’이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한 190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의 제1대 무역대상국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 이상 중국과의 무역이 대부분이었다가 1900년대 들어 일본과 미국이 잠시 자리를 대신한 셈이다.
토플러 박사는 ‘부의 미래’에서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제2의 물결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아시아가 정보혁명이라 불리는 제3의 물결에서 주도권을 다시 쥐게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 또한 반복되는 역사의 한 흐름이다. 마지막 제10부 ‘지각변동’에서 주도권을 쥘 나라로 중국을 가장 먼저 꼽았고 일본과 한국, 유럽,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아시아를 3개국이나 포함시킨 가운데 특히 “중국은 세계 무대 위로 솟아올랐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말했다.
부가 이처럼 수백 년 만에 다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격변기에 한국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는 곧 최근 저성장 기미를 보이고 있는 우리 경제가 다시 한 번 도약하는 길과 그를 통해 떠오르는 아시아의 중심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변방으로 밀리지 않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 산업의 구조 및 내수, 수출 같은 거시적 포트폴리오와 우리나라를 대표할 산업이나 상품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하는 미시적 포트폴리오에 관한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에 대한 우리 경제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의 위기 가능성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토플러는 중국이 제2의 물결과 제3의 물결이 혼재하는 과정에서 수억 명에 달하는 가난한 농민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노동자가 들고 일어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부패한 중국 정부가 현명한 전략만 가지고는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토플러의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1960년 농ㆍ임ㆍ어업 36.8%, 제조업 13.8%, 서비스업 43.2%였던 것이 2005년에는 농ㆍ임ㆍ어업 3.3%, 제조업 28.4%, 서비스업 56.3%로 큰 변화를 보였다. 특기할 것은 제조업의 비중이 1988년 30.8%로 최고조에 달한 이후 최근에도 26~28%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조업 비중의 추세만 본다면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미국보다 일본 또는 독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제조업 비중이 1960~70년대 20%대에서 2005년에는 12%로 빠르게 축소됐다. 반면 일본의 제조업 비중은 1990년대 24%대에서 2005년 21.0%를, 독일의 제조업 비중은 1991년 30.6%에서 2005년 25.8%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서비스업 비중은 2005년 56.3%에 불과해 미국(78.7%), 일본(72.0%), 독일(69.3%)에 비해 크게 낮은 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대외의존도(수출입액/명목GDP)는 2005년 현재 69.3%로 70%에 육박하고 있다. 대만(110.0%)에 비해서는 낮지만 중국(63.8%)이나 독일(62.8%)보다는 약간 높고, 미국(21.1%)과 일본(24.3%)·영국(38.9%) 등에 비해서는 크게 높은 상황이다.
결국 우리나라 산업의 구조는 제조업과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수출의 대부분이 제조업, 그 중에서도 반도체·승용차·철강·휴대폰·선박과 같은 일부 품목(2005년 전체 수출의 40.7%)에 집중돼 있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들 5대 수출품목 정도면 어느 한 품목이 부진해지더라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더라도 5대 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 정보통신(IT)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웃돌고 있다는 점은 세계 IT산업의 동향에 따라 우리 경제가 송두리째 휘둘릴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아울러 휴대폰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대다수 품목이 한국을 대표하는 고급 브랜드라고 하기는 어렵고, 반도체와 철강·선박의 경우 최종 소비제품이 아니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토플러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지나치게 높은 대외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적 접근과 중장기적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잘 나가고 있는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과 장점을 유지하는 동시에 첨단기술산업에 집중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성장성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서비스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이뤄질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적 지원과 규제 완화가 선행돼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미 FTA, 자유무역특구 등에서 실질적인 진전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
토플러는 특히 서비스업이 뒤질 경우 결국 제조업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비스업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대외의존도를 낮춰 중국이나 북한으로부터 야기될 위기에도 대비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아울러 미국과 중국으로 치우치고 있는 해외직접투자는 유럽과 베트남·인도·캄보디아 등으로도 눈을 돌려야 한다. 수출의 품목 및 지역 다변화뿐 아니라 투자 역시 업종 및 지역 다변화를 해놓아야 위기 발생 시 손실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적으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토플러는 “미래의 혁명적인 부는 ‘시간·공간·지식’이 구성하는 ‘심층기반(deep fundamentals)’에 달려 있다”면서 “이들 3대 요소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 지속적인 성장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일본과 같은 장기침체에 빠져들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기술 변화에 비해 사회 및 제도 변화가 뒤지면서 발목을 잡고 있다”면서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 사회와 제도를 바꾸는 데 주력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교육시스템 개혁이 절실하다”고 충고했다. 한국에서 기술 변화를 일궈냈던 인재들이 이제는 사회와 제도를 바꾸는 창의적 인재로 탈바꿈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몇 년 전 필자는 토플러 박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유연성(flexibility)과 개방성(openness)’이었다. 유연성과 개방성으로 무장한, 그래서 열린 마음을 가진 창의적 인재들이 요소요소에서 사회와 제도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최근 들어 우리 경제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 전망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반면 토플러는 역동적인 한국의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다. 한국의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면서도 그것은 한국이 앞장설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기러기 가족’을 감수하면서도 자식의 교육을 위하는 한국의 미래는 당연히 밝다는 것이다.
토플러가 ‘부의 미래’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미국의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비관론자는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말이 가장 잘 적용될 나라가 한국이 아닐까. 되풀이되는 경제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철저한 분석과 그에 따른 노력과 낙관적 사고가 더해질 때이다.
최성환 대한생명 경제연구소 상무 sungchoi@korea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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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혁명’ 꾀하는 기업들
엘빈 토플러가 ‘미래쇼크’(1970)란 책을 내놓았을 때 그는 41살이었다. 미래쇼크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미래학이란 학문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 77살에 그가 다시 책을 냈다. 이번엔 ‘부의 미래’다. 미래쇼크 이후 여러 책을 썼지만 토플러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지식’이다.
지식이 미래의 힘과 부의 원천이란 입장은 수십 년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책에선 지식이 약간 진화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과 대중지혜(Wisdom of Crowds), UCC(User Created Contents·사용자 제작 콘텐츠) 같은 여러 사람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놓은 지식의 덩어리를 강조했다.
한국을 늘 주시하고 있다는 토플러다. 그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에선 그가 꿈꾸는 미래를 이미 실현해 놓은 기업이 있다. NHN의 지식인 서비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카페,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모두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다. 미국에도 싸이월드와 비슷한 개념의 마이스페이스닷컴, UCC 동영상 사이트인 유투브가 인기다. 그러나 UCC의 원조는 한국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UCC가 ‘User Created Contents’가 아니라 ‘User Copyed Contents’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투브를 구글이 인수하자 그 동안 구경만 하던 저작권자들이 헛기침을 시작했다. 뉴스코퍼레이션과 NBC 유니버설, 바이어콤 등 거대 미디어 그룹이 유튜브를 상대로 거액을 내놓으라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외신이 나왔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KBS, MBC, SBS가 지난 11월 대형포털과 국내 최대 동영상 UCC 사이트인 판도라 등 64개 동영상 UCC업체에 저작권 침해를 경고하는 공문을 보냈다. 동영상 UCC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UCC의 대부분이 저작권이란 족쇄를 차고 있다. 판도라 김경익 사장은 “저작권 문제에 늘 신경을 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피해가기 어렵다”며 “소규모 동영상 사이트인 경우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벤처 기업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 모델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즈메이커 최정회(31) 사장은 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졸업반이다. 최 사장은 9년 전에도 4학년 졸업반이었다. 휴학 기간을 빼도 5년간 4학년 등록금을 냈다. 올해 졸업을 할 수 있을지는 며칠 후 결정이 난다. 그는 졸업장을 받는 시기를 뒤로 미루는 대신 네티즌의 집단 지성을 이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다.
현재 회사 대표 상품은 ‘심심이’란 인공지능 채팅 프로그램이다. 회사가 2003년 처음 심심이를 내놓았을 때 심심이는 메신저를 통해 컴퓨터와 대화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예를 들어 메신저에서 심심이를 불러 ‘노무현’이라고 채팅창에 적어 넣으면 심심이는 ‘소신있게 살아온 천연기념물적 정치인’부터 욕설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심심이에게 말을 가르친 것은 사용자다. 심심이는 여자는 이모, 남자는 삼촌이라고 불렀다. 심심이가 하는 말은 사실은 삼촌과 이모가 입력해 놓은 것이다. 수많은 삼촌과 이모가 심심이를 가르쳤다. 기본적으로 심심이는 수많은 네티즌이 입력해 놓은 것을 그대로 말한다. 말하자면 심심이는 한국 네티즌의 생각을 말한다. 사용자들이 만든 인공지능, 집단지성의 결정체다. 수십만 명의 생각을 담은 150만개에 달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즈메이커에 쌓여 있다.
심심이는 네티즌의 자발적 집단 창작품으로 저작권 문제가 없다. 문제는 채팅 프로그램으로는 심심이가 돈을 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심심이가 휴대전화로 거주지를 바꾼 다음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내고 이른바 문자(SMS·단문메시지)로 심심이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한번 문자로 이야기하면 백원짜리 동전 한두 개를 통신사가 거둬 간다. 혹은 한 달에 3000원을 내고 쓸 수도 있다.
이 돈을 통신사가 모아 자기들이 30%를 가지고 나머지를 프로그램을 개발한 이즈메이커와 통신사에 서비스를 하는 업체가 절반씩 나눠 가진다. 2006년 초 한 달 동안 이즈메이커로 들어온 돈은 4000만원이었다. 그러나 11월엔 1억5000만원이 들어왔다. 이즈메이커는 직원이 10명밖에 안 되는 미니 벤처기업이다. 1억5000만원은 큰돈이다. 최 사장은 “지난 몇 년간 수입이 거의 없었다”며 “사업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따뜻한 겨울을 맞았다”고 말했다.
물론 심심이로 벌어들이는 돈은 적다면 적다. 그러나 내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할 사람이 없는 드문 경우다. 얼마 전 이즈메이커는 집단지성을 이용하는 좀더 유용한 서비스도 내놓았다. 지난 10월 시작한 ‘지식맨’(www.jisikman.com)이 그것이다. 갑자기 뭔가 정보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광화문 근처를 걷다가 가까운 극장에서 몇 시부터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지 알고 싶은 경우가 있다. 이럴 때 휴대폰을 꺼내 ‘별 9999’를 눌러 지식맨에 문자를 보내면 150초 안에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김치 부침개 한 장에 칼로리가 얼마죠? ‘우박은 춤춘다’라는 노래의 작곡자는 누구죠?”
지식맨에 사람들이 물어본 질문이다. 답변을 하는 것은 네티즌이다. 현재는 약 3300명이 지식맨에 가입해 질문이 들어오면 낚아채 답변을 한다. 대답을 하면 싸이월드에서 현금처럼 쓰는 도토리(현금 100원에 해당) 하나와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받는다. 11월엔 만 명이 건당 200원을 내고 지식맨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갔다. 네티즌이 한 대답은 5만개가 쌓였다. 앞으로 이것이 중요한 자산으로 변한다.
동영상 쪽에서도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 집단지식의 덩어리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하는 업체들이 생겼다. 태그스토리(tagstory.com)는 PCC 동영상 사이트, 혹은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동영상 사이트라 불린다. PCC는 일반 유저라기보다는 전문가(프로페셔널)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산한 지식과 정보다.
태그스토리는 조선일보, 스포츠조선, 노컷뉴스, 고뉴스 등에서 일한 기자들이 만든 동영상을 위주로 운영한다. 뉴스 현장이나 명사들에게 접근할 기회가 많은 기자들이 직접 찍은 동영상이다. 덕분에 성장세도 빠르다. 지난 청룡영화상 시상식 때는 프로추어들이 만든 동영상을 보려는 사람이 몰려 하루 50만플레이를 기록했다.
엘빈 토플러가 예전부터 이야기 해 온 프로슈머(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 개념에 제일 잘 어울리는 사이트는 디시인사이드(dcinside.com)다. 디시 김유식 사장은 “네티즌이 움직일 수 있는 운동장, 놀이터를 만들자 자체적으로 집단지식을 생산하고, 집단행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기존 미디어에서 공급해 오는 것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던 사람이 디시인사이드에 모여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즐기고 널리 퍼뜨린다. 강아지가 대나무를 기어오르는 사진을 누군가 만들고 사람들이 보고 즐긴 다음 그 사진을 다른 곳을 퍼 나르는 식이다.
또 익명의 집단지성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전통 미디어를 탄 후 세상이 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황우석 교수 사태 때 익명으로 디시에 올린 과학도들의 글이 사태를 해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디시에 오른 글이 신문 방송을 타고 황 박사가 실제로 줄기세포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김유식 사장은 이런 현상을 “놀이터를 만들었는데 권력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이런 권력을 이제 본격적으로 돈으로 바꿀 생각이다. 디시는 IC코퍼레이션이란 코스닥 등록업체를 인수해 우회상장을 했다. 집단이 만들어 낸 지식을 본격적으로 부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백강녕 조선일보 인터넷뉴스부 기자 young100@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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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로 본 한국
사이버 혈연ㆍ프로슈머 … 한국은 ‘신 유목민시대’
디지털 아줌마 등 사이버 공간 장악이 부를 창출…
이민ㆍ유학ㆍ이직 급증으로 이동 활발
변화 속도에 뒤진 학교ㆍ정당ㆍ노조의 경쟁력은 세계 최저… 실력 없는 교수는 퇴출 LG전자가 1년 전 출시해 지금까지 700만대 가량의 판매 기록을 세운 초콜릿폰은 ‘똑똑한 소비자’가 참여해 만들어낸 대박 제품이다. LG전자는 상품 기획 단계에서 대학생 등 소비자로 구성된 ‘싸이언 프로슈머(prosumer)’ 그룹을 구성, 8000여건에 이르는 아이디어를 제공받았다. 복잡한 기능을 없애고 검은색 막대기처럼 깔끔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이 휴대폰은 프로슈머 마케팅의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비와 생산의 영역이 합해지는 프로슈머의 세상은 한국에서도 이젠 낯선 게 아니다. 프로슈머란 생산자인 프로듀서(producer)와 소비자인 컨슈머(consumer)를 합한 신조어로,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처음 제시한 컨셉트다. 토플러는 최근 저서 ‘부의 미래’에서도 스스로 생산해서 스스로 소비하는 프로슈머의 등장을 ‘부의 혁명’의 중요한 현상으로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프로슈머 경제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백만장자가 수두룩하게 나타날 것이며, 프로슈머는 앞으로 다가올 경제의 이름 없는 영웅”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에는 생산영역을 넘보는 똑똑한 소비자가 넘쳐난다. 한국은 이제 국민 대다수가 인터넷에 접속하는 ‘접속사회’로 진입했다. 지난 11월 기준 만 10~65세 인구의 67.4%인 2473만명이 인터넷 사용인구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코리안클릭과 RI코리아 설문조사 결과) 1999년 오픈한 싸이월드의 회원은 국민 4명 중 1명꼴이다. 전통적인 가족관계가 허물어지고 가상공간에 접속해 ‘사이버 혈연관계’를 맺는 거대한 네트워크 공동체가 지배하는 사회가 돼 버렸다.
프랑스 사회학자 마페졸리의 지적처럼, 생활공간이 ‘관계론적 개념’으로 재편되면서 가족ㆍ친척과 같은 고착적 특성과는 무관한 일ㆍ취향ㆍ사건 등을 중심으로 뭉쳤다 흩어지는 ‘새로운 부족(部族)의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런 네트워크 공동체에서는 나에게 맞는 것, 새로운 것, 싼 것, 편한 것을 찾아다니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똑똑한 소비자가 생산자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이들이 생산의 영역을 침범해 프로슈머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 아줌마’의 힘은 프로슈머의 전형을 보여준다. ‘디지털 아줌마’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왕래하며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소비ㆍ생산ㆍ확산시키는 기혼 여성을 뜻하는 개념이다. 한국 소비자 중 가장 힘센 사람이 이들 디지털 아줌마이고, 여성의 경제ㆍ사회 활동 증가와 함께 이들의 힘은 폭발적으로 커질 전망이다. 지난 1년간 한국 전업주부의 인터넷 사용비율은 37.3%에서 49.4%로 증가해 가장 증가 속도가 빠른 집단으로 떠올랐다. 현재 국내에 개설된 2000만개의 블로그 중 아줌마 블로그가 10%인 200만개 정도이다.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이들 ‘디지털 아줌마’는 네트워킹 마케팅 등을 통해 소비자에서 판매자ㆍ생산자로 변신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정보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맞춤정보와 결합한 네트워킹의 위력은 ‘혁명적인 부’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30억원을 벌어 부자의 반열에 올라선 생명보험 설계사 오준자(56)씨의 경우 의사ㆍ변호사ㆍ회계사 등 전문직 자영업자 고객 1500명을 확보하고 있다.
1996년 보험설계사를 시작한 이후 2005년까지 850억원의 계약고를 올렸다. 3년 전부터 연봉 10억원을 받는 오씨는 고객에게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고 직접 만나 다양한 투자정보를 준다. 단순한 보험 소개가 아니라 개인별로 성향을 파악해 부동산ㆍ주식ㆍ펀드 등 맞춤형 재테크 컨설팅을 하는 식이다. 자신도 주말이면 최고의 재테크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강연을 듣는다.
오씨의 예는 우리 사회 ‘부의 미래’는 맞춤생산과 맞춤소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전망을 말해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회는 끝나가고 있다. 예컨대 여행의 경우 이제까지는 여행사가 여행 프로그램을 짜서 관광객을 모집했지만 앞으로는 동호인이 모여 자신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짜서 여행사를 구할 것이다. 서울 강남 사교육시장에서는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하는 일대일 학습 매니저가 이미 뜨고 있다. 창조적ㆍ개성적인 인재를 원하는 정보혁명시대에 ‘판박이’ 공교육은 그 바닥을 급속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맞춤생산ㆍ맞춤소비를 집약하는 키워드는 이른바 ‘DIY(Do It Yourself)’다.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DIY라는 화두는 앞으로 한국의 경제ㆍ사회 생활의 전 측면을 지배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 사회와 경제를 전망할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네트워크화된 디지털 개인’의 대두다. 한국인은 이미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시ㆍ공간을 뛰어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사용률을 보이는 인터넷과 휴대폰을 비롯해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되다시피한 온갖 디지털 전자장비와 함께 한국인은 24시간 내내 전 지구적 네트워크에 ‘꽂혀(plugged in)’ 산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실시간 데이터를 접하며 물리적ㆍ공간적 제약을 뛰어넘는다. 지구촌 어디에서든, 가상공간 어디에서든 원하는 것을 찾고 얻으려는 노력을 한다.
이러한 신(新)한국인의 대두는 한국에 ‘신유목사회(neo-nomad society)’를 몰고 올 전망이다.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한국은 신유목주의의 실험실”이라고 찬탄한 바 있다.
사이버공간을 개척하면서 열린 새로운 부의 지평은 이미 한국인에게 익숙한 것이다. 토플러는 “부가 창출되는 장소, 장소를 선택하는 기준, 장소들을 함께 연결시키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며 “부는 공간의 재창조를 통해서 급속히 증가할 것이며, 이것이 부의 재편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우리는 네이버ㆍ다음ㆍ싸이월드와 같은 기업이 어떻게 부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가를 목격하고 있다. 닷컴 열풍의 종언과 함께 더 이상 그런 신화는 등장하지 않을 것으로 예단한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 온라인 교육 분야에서 약진하는 메가스터디 같은 기업의 사례는 얼마든지 공간의 재창조를 통해서 부의 생성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 대치동 학원 강사들이 모여 자본금 3억원으로 출발한 메가스터디는 매출액 700억원(2006년), 주가 10만원(액면가 500원 기준)을 돌파하며 한국의 사교육시장을 뒤흔들어놓았다. 입시, 영어, 성인 교육 등 무궁무진한 비즈니스 영역과 주체들이 메가스터디의 뒤를 이어 온라인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는’ 유비쿼터스 환경은 공간의 재창조가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며 대단히 역동적인 모멘텀을 제공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사이버공간에서 유목을 체험한 한국인은 오프라인 공간도 끊임없이 개척ㆍ확장하고 있다. 2006년 사상 최대의 수주액을 올린 해외건설(160억달러)에서 보듯 한국 기업은 계속 밖으로 나가며 살 길을 찾을 것이다. 이젠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중견ㆍ중소기업도 많아졌다. ‘미샤’ 등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로 알려진 에이블씨엔씨(ABLEC&C)의 경우 대만ㆍ홍콩ㆍ멕시코 등 세계 9개국에 28개의 매장을 두고 있다. 2006년 최고의 재테크상품 가운데 하나는 해외 펀드이며, 2007년 한 해 동안도 아시아를 비롯한 성장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펀드가 가장 수익률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개인도 물 밀듯이 해외로 나가고 있다. 더 나은 교육과 직장을 위해, 은퇴이민지를 찾아 해외를 오가는 한국인은 앞으로도 급증할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학교와 동남아 각국의 은퇴이민지에 대한 정보를 옆 동네 얘기하듯 파악하는 한국인은 낯선 게 아니다. 최근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유학ㆍ연수 목적의 1인당 출국경비는 2000년 3769달러에서 2005년에는 7740달러로 두 배 이상 늘었다. 2002년 1만명 시대를 연 조기유학생(초ㆍ중ㆍ고교생) 수는 3년 만에 2만명 시대를 돌파했다.(2005년 2만400명)
국경을 무너뜨리는 대규모 교육 탈출은 당연히 역(逆) 흐름도 낳는다. 1세대 조기유학생은 벌써 국내의 취업시장으로 물 밀듯 들어오고 있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신입사원 채용에서 학부 유학파 비율이 최고 20%에 육박할 정도다. LG전자의 경우 2006년 1700명의 신입사원 중 약 9%가 학부 유학파였다. 국경 없는 글로벌 경쟁에 진작 내몰려온 대기업들로서는 맞춤형 인재의 돌파구가 열리는 셈이다. 토플러가 말했듯 한국 공교육의 문제가 오히려 경쟁력 강화의 돌파구를 제시한 것이다.
신유목사회를 규정짓는 이동성과 속도는 한국 사회의 더욱 강한 특징이 될 것이다.
“이직은 곧 능력”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요즘 젊은 직장인은 비전이 없다 싶으면 즉각적으로 회사를 옮긴다. 불과 10년 전 IMF사태 이후 불어닥친 혁명적인 변화다. 2000년 50곳에 불과하던 헤드헌팅업체는 지금 500곳이 넘어 시장이 10배 이상 커졌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 측은 “이직을 위해 등록한 직장인은 2003년 3만5000명에서 현재 15만2000명으로 3년 사이 4배 넘게 급증했다”고 밝혔다.
토플러가 강조했듯 변화의 속도는 곳곳에서 지체와 충돌을 만들어낸다. 정부ㆍ학교ㆍ정당 등 기존 조직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요즘 추락하는 한국의 노조 조직률(노조 가입이 가능한 근로자 중 실제로 노조에 가입한 비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2005년 말 노조 조직률은 10.3%로, 1989년 19.8%를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이는 대만(37.0%), 영국(26.2%), 일본(18.7%), 미국(12.5%) 등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다.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의 시대가 달려오는 만큼 정착 직장을 기반으로 하는 노조는 기반이 사라질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정규직 근로자의 몫에서 시간제 또는 계절 노동자의 몫으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창의적 분야에서 일하는 소수의 전문가 집단만이 회사의 정규직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네트워크화된 디지털 개인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속도를 좇아가지 못하는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다. 미래 예측의 단골 메뉴인 ‘정당 소멸론’에서 보듯 대의제를 바탕으로 하는 정당은 신유목 민주주의 시대에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은 이미 네트워크화된 개인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위력을 경험했다. 2002년 대선 당시의 ‘촛불시위’처럼 각종 이슈별로 흩어지고 모이는 개인이 날로 실물 정치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동원된 군중’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개인’이다. 네티즌의 위력을 보여준 2000년의 ‘노컷(no cut)’ 운동은 ‘두발제한반대 서명운동’ 홈페이지 운영진이던 한 청소년이 올린 글이 삽시간에 인터넷상에 번지면서 현실적인 이슈로 변한 경우다. 이 운동은 5개월 만에 청소년뿐 아니라 학부모, 교사를 포함해 10만명이 넘는 온라인 서명을 받아냈다.
온라인상에서 넘쳐나는 일상적 이슈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 대의제 정당은 이를 따라잡기 벅차다. 틀에 박힌 정리된 결론을 기다려야 하는 단상의 정치보다 길거리에서 이뤄지는 감성적인 일상 정치의 위력이 2007년 대선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떨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와 일상이 융합하는 것처럼 일과 놀이 또한 경계가 없어지면서 급격히 융합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 ‘힘든 노동’과 ‘즐거운 여가’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이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은 ‘즐거운 노동’이 아니면 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직업 선택의 제일 첫 기준이 ‘내 취미와 맞느냐’ ‘재미있느냐’가 되고 있다. 여가도 놀이에 기술이 첨가되면서 고도로 전문화ㆍ세분화하고 있다. 토플러는 현대적 오락의 대부분이 복잡한 과학기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스카이다이빙ㆍ스쿠버다이빙ㆍ카레이싱ㆍ컴퓨터 게임 등은 전문성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놀이다. 프로게이머처럼 놀이 자체가 ‘돈벌이’가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변화의 속도, 그리고 거기에 적응하느냐 못하느냐는 속도의 격차는 미래의 부를 낳는 원천이 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토플러는 “치열해지는 경쟁이 혁신을 낳고 각각의 혁신이 타이밍 조건을 변화시켜 재동시화(再同時化)를 요구하기 때문에 동시화 산업은 갈수록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동시화 산업이 제공하게 될 기회는 두 갈래로 전개될 것이다. 하나는 변화의 속도에 발을 맞출 수 없는 조직과 개인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사업 영역의 확장을 들 수 있다. 변화에 뒤진 조직과 개인을 상대로 한 컨설팅 수요의 증가다. 최근 베스트셀러 상위를 차지하는 성공학을 비롯한 실용서 시장의 약진도 이 같은 미래의 추세를 반영하는 징후라고 보면 된다.
새로운 지식의 업데이트와 지식 오염 우려까지 낳는 쓰레기 지식의 폐기 역시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육체노동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새 지식을 축적하고 쓸데없는 지식을 버리는 작업을 누가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경쟁력과 부의 원천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근래에는 재충전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다양한 학습 기회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수도권의 어느 대학을 가더라도 경영자 재훈련을 위한 단기 과정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만만치 않은 학비 때문에 아직은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 같은 프로그램이 휠씬 넓은 계층으로 확산될 것으로 본다. 거꾸로 종신 재직의 안정성을 누리던 교수 사회에는 이미 변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닥치고 있다. ‘쓸모없는 지식의 모음집’만 되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되면서 ‘교수=철밥통’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최근 교수신문에 따르면 연세대 등 4년제 사립대 10곳의 2006년 교 수 승진 탈락률은 34.9%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교수 2, 3명 중 1명꼴로 승진에서 ‘고배’를 마시는 셈이다.
20세기의 코드였던 대중(mass)이 IT의 발달과 함께 조각나기 시작한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는 미디어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있다. 대중이 분중화(demassification)하면서 채널 선택권이 다양해지는 등 과점 구도의 미디어가 경쟁구조로 다원화하기 시작했다. 방송은 심지어 협송(narrow-castion)을 지나 개개인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즐기는 점송(point-castion)으로까지 발전했다.
서비스 개시 4개월 만에 가입자 10만명을 돌파한 하나TV의 사례는 개인 미디어 소비 시대가 왔음을 알려준다. 2006년 세계를 뜨겁게 달군 UCC(User Created Contents)는 개인 미디어의 위력이 상당 기간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언론학자 니그로폰테는 ‘디지털 되기(Being Digital)’라는 저서에서 미래의 TV는 선거 개표방송과 스포츠 중계를 제외하고는 시청자가 편리한 시간에 프로그램을 선택, 시청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변화는 시작됐고, 이 경우 방송국 자체가 거대한 프로그램 데이터베이스가 될 수밖에 없다.
개인 미디어의 발전은 우리 사회의 가족 해체를 더 가속화할 전망이다. 아파트 거실에서 TV를 함께 보는 한국의 가족상은 곧 사라지고 각각의 공간에 틀어박혀 뭔가를 들여다보는 파편화된 가족만 남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역설적으로 ‘차가운 디지털 시대’를 극복하는 감성과 감정을 파는 서비스ㆍ제품이 급격히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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